롤랑 바르트의 ‘가루비누와 합성세제’
(이 글은 광고에 대한 글이다. 광고는 하나의 기호로서 신화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내용이다.)
처음으로 개최된 세계 합성세제 총회(1954년 9월 파리에서 개최했다.)는 세계를 합성세제 오모(Omo)가 주는 행복감 속으로 빠져들게 해주었다. 합성세제는 인체에 무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광부를 규폐증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합성세제는 대량적으로 광고되어 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합성세제는 프랑스의 일상적인 생활에 속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분석이 자신을 널리 알리려 한다면 조금이라도 자신이라도 자신의 시선을 일상적인 영역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우리는 세정액(Javel)의 정신분석을 가루 비누(Lux, Persi)나 합성세제(Rai, Paic, Crio, Omo)의 정신분석과 대조해 볼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작업은 매우 유용할 것이다. 전자(세정액)와 후자(가루비누, 합성세제) 안에서 치료와 병(mal)의 관계, 혹은 세제와 더러움의 관계는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자벨(Javel)이라는 액체비누는 항상 상태의 불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며 용량도 세밀하게 측정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옷감 자체가 ‘불에 탄’ 것처럼 상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액체비누에 함축된 신화는 이렇게 비누 자체가 강렬하게 변화하여 더러움을 거칠게 잘 닦아낸다는 발상에 근거한다. 이 신화를 보충하는 것은, 화학적 성질을 지니며 무엇인가를 말끔하게 제거하는 것과 관련된다. 더러움을 완벽하게 박멸한다. 이에 반해 가루비누는 더러움을 격리시키는 요소이다. 가루비누의 이상적인 역할은 상황에 따른 불완전함으로 대상을 벗어나도록 해주는 것이다. 가루비누는 더러움을 ‘추방’하는 것이지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합성제 오모(Omo)와 관련된 모든 이미지 안에서 더러움을 교활하고 음흉하면서도 자그마하고 허약한 적이다. 그것은 오모가 위협하기만 해도 아름답고 순결한 속옷으로부터 부리나케 도망간다. 분명 염소와 암모니아는 일종의 불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 불은 구원적이지만 또한 맹목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가루비누는 선별적인 것이다. 가루비누는 전쟁이 아니라 경찰의 기능을 수행한다. 액체비누와 가루비누의 이러한 차이는 민속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화학적인 액체비누는 자신의 속옷을 두들겨 빠는 아낙의 몸짓을 대체한 것이다. 이에 반해 가루비누는 빨래감을 비탈진 빨래판에 대고 누르고, 굴려가면서 빨아대는 아낙의 몸짓을 대체한 것이다.
하지만 여러 종류들의 가루비누와 합성세제 안에서도 우리는 심리학적인 광고와 정신분석학적인 광고를 구분해야 한다.(물론 나는 정신분석학이라는 말을 어떤 특정 학파와 결부시켜 이해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페르실(Persil)의 하얀 가루비누는 결과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인기를 끌었다. 이 제품은 소비자들이 두 가지 제품 중 어떤 것이 더 하얗게 만들 수 있는가를 비교하도록 하면서 그들의 사회적인 위신과 허영심을 부추긴다. 이와 비슷하게 오모의 광고도 제품의 효과를(게다가 최상의 형태로서) 나타낸다. 하지만 이것은 무엇보다도 제품이 작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것은 소비자가 제품의 효과를 직접 체험하는 것처럼 만든다. 이것은 소비자들을 옷감이 더러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 끌어들이면서 공감하도록 만든다. 이제 오모의 소비자는 단지 효과를 얻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합성세제는 그것 자체로 기적을 부여받은 것이다.
합성세제 오모는 깊이와 거품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활용한다. 이 두 가지 속성은 모두 합성세제에 있어서 매우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광고는 오모가 때를 깊숙하게 뻬준다고 말한다. (영화관에서 막간에 상영하는 광고를 보라.) 그런데 이 말은 여태까지 일반적으로 생각되어 온 것과는 달리 옷감이 깊이를 지닌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옷감을 미화하며 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상은 옷감이 껴안고 어루만지고자 하는 인간읜은밀한 본능을 만족시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품의 경우를 보자, 일반적으로 거품은 사치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첫 번 째 단계에서 거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두 번 째 단계가 되면 사람들은 오모가 거의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풍부한 거품을 수월하게 만들기 때문에 오모 안에 강력한 씨앗이 들어있다고 가정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오모 안에는 건강하며 강력한 본질이 내재해있으며 원래부터 작은 부피의 매우 풍요로운 활력소가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최종적인 단계에서 소비자는 거품을 통해 기체적인 물질을 상상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거품은 곧 가벼우면서 동시에 수직적인 접촉 양식이 된다. 그리하여 소비자는 미각(거위의 간, 앙트메르(식사 끝에 나오는 디저트), 포도주)이라든가 의복(모슬란 천이나 엷은 망사)이라든가 비누(목욕하는 인기 배우)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한 느낌을 거품 안에서 추구한다. 심지어 거품은 어떤 정신성을 의미하는 기호가 될 수도 있다. 정신이 무로부터 유를 창조하며, 아주 작은 양의 원인으로부터 매우 폭 넓은 효과를 창조한다고 간주하는 한에서 말이다.(크림은 이와 완전히 다른 정신분석적인 의미를 갖는다. 크림은 무엇인가를 완화시키는 것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서 그것은 주름살이라든가 고통이라는 열기를 제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거품이 합성세제가 지닌 거친 기능을 감미로운 이미지로 위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합성세제는 기체처럼 가벼우면서도 깊이를 지니는 제품으로서, 옷감을 상하게 하지 않고도 옷감의 분자적인 질서를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합성세제가 주는 이러한 행복감 때문에 페르실과 오모를 포괄하는 또 하나의 수준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페르실과 오모 위에는 국가를 초월한, 영국과 네델란드의 합작회사 위니르베(Unilever)의 제품이 있다. 페르실과 오모는 이 수준에 비하면 동일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에서)
*이 글은 우리의 개념으로서의 수필이기보다는 에세이이다.
롤랑 바르트는 유명한 기호학자이다. 서양에서는 논문도 에세이 형식으로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