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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66-71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24.9.1 주일낮
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입니다. 영생의 말씀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태풍 ‘산산’이 일본열도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붕이 날아가고 전봇대가 다 넘어질 정도의 강풍과 기록적인 폭우를 동반한 태풍입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태풍이 자전거를 탄 속도로 천천히 일본 땅을 쓸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일본 누리꾼들이 이런 댓글을 남겼습니다. ‘누군가가 원격조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럴 수가 있는가!’ 욥37:11,12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한 그는 구름에 습기를 실으시고 그의 번개로 구름을 흩어지게 하시느니라 12 그는 감싸고 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일본국민들이 우상과 악행을 버리고 구름도 바람도 다스리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 무릎 꿇는 것이 진정 살 길입니다. 저들도 긍휼히 여김 받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바람의 길만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길도 인도하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잠5:21)”할렐루야!
지난번에 유재석씨가 진행하는 ‘유퀴즈’ 프로에 배우 차승원씨가 출연했는데, 마음에 닿는 남는 말이 있었습니다. 차승원씨가 “실력이 부족하면 열정이라도 있어야 하고 열정이 부족하면 겸손이라도 해야 하고 겸손이 부족하면 눈치라도 있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연예계만 아니라 어디서든 통하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눈치 빠른 자가 아니라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 성경적입니다. 목사들은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설교에 은혜가 부족하다 싶으면 짤게라도 해야 된다. 아무리 은혜로운 설교라도 길게 하면 50점이고 짤게 하고도 은혜가 있어야 100점이라고 합니다. 저도 눈치가 영 없지는 않습니다만!
본문 66절에 보시면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실 때 내가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고 나를 먹어야 영생한다니까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말하기를(60절)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떠나간 것입니다. 이때 이들은 단지 눈치 빠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염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고 너희도 가려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라고 합니다. 절대 떠나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 그 목적이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따르다가도, 믿다가도 떠나갔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과 사정으로 예수님께 나왔을지라도 결국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구원받고 영생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이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습니다(벧전1:9).
오늘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따른 자보다 다른 이유로 따랐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먼저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26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인 후에 다시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진리와 영생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고 그야말로 먹고 마시기 위해 따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27절을 보시면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소위 말하는 형통한 삶을 위해, 재물의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오는 분들이 분명 있습니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복 받기 위해 '입춘대길 만사형통'이라고 대문 앞에 부적 붙여놓고 우상을 섬기면서 헛된 신에게 복을 비는 것보다는 당연히 낫다고 봅니다.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형통함이 축복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며, 보이는 육체가 사람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영혼이 있음을 알고, 영혼이 나의 본질임을 알고, 내 영혼을 위해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썩을 양식, 즉 이 땅의 것, 육신을 위한 것을 위해 일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을 양식, 즉 자기 영혼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라고 했습니다. 육신을 위하여 재물은 쌓아두었으나 영혼을 준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눅12:191입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라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 할렐루야!
우리가 이 땅의 것으로 만족하고 부러울 것 없이 사는 삶이 복의 전부는 아닙니다. 만일 그로 인해 자기 영혼을 돌아보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결국 주님 앞에 설 때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도리어 그 복이 영혼을 불행하게 만드는 도구로 전락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 땅에서의 삶이란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섬기는 기회이지 무병장수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성공의 기준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공부를 합니까. 왜 대학에 갑니까. 대학졸업장이 목적이 아니라 더 많이 배워서 보다 풍요롭고 이성적인 삶을 위함인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이 땅에서 축복받기 위해서만 아니라 구원받은 영혼이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영광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의 형통함이 신앙생활의 목적인 사람은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주님을 떠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왜 하는 일이 안 되냐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이것은 분명 목적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형통케 되면 그 형통함 때문에 하나님 섬기는 것이 뒷전이 되고 하나님을 떠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복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6장 2절을 보시면 또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나옵니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치료의 표적을 보기 위해 따르는 이들입니다. 이것 역시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께 나온 많은 사람들이 고통 중에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셨고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들이 치료받고 깨끗해지기를 주님은 누구보다 원하셨고 또 약속하셨습니다. 문둥병자의 손을 잡으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했습니다. 중풍병자를 향해서도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했습니다. 소경의 눈을 만지며 보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기까지 치료를 원하신 주님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주의 자녀 된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하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다만 이것 역시 주님을 따르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앞에 열 명의 문둥병자가 나왔을 때 주님은 제사장에게 가서 모세가 명한 대로 몸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가는 중에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그러자 아홉 사람은 다 집으로 돌아갔지만 한 사람은 주님께로 돌아와 사례하였다고 했습니다. 아홉 사람은 예수님께 나와 병 고침 받는 것이었기에 낫고 나서, 즉 목적을 이루었으니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지만 다시 주님을 찾아와 사례한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낫게 해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발견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저가 누구시기에 내 병을 낫게 하실 수 있는가. 저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 메시야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가, 하여 자신이 가진 질병으로 인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얻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또한 예수님을 따르던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14, 15절 말씀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고 메시야이심을 알고 따랐는데 이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들의 왕이 되어 주길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시켜 줄 이로 여겨 그들의 왕으로 세우려고 따른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해방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따랐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혼자 산으로 올라가셔서 조용히 기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그러한 이유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왔다고 했습니다. 내게 주신 자들을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하는 것이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죄를 대속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잘못된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68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나이다"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도 아니고 표적을 바라며 따른 것도 아니고 선생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말씀을 들었고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베드로의 이 고백 속에 우리 신앙의 기초가 담겨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하신 분으로, 그리고 영생의 말씀이 오직 예수님을 통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외에 다른 누구도 우리를 구원하고 영생을 주실 수 없으며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보내신 거룩한 자이시고 우리의 주가 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의 다른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마16:15,16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우리도 이 고백위에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능력들을 통해서 분명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잡지 못했을 때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하여 순종하니 그물에 고기가 가득 잡혔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고기를 보고 놀랐지만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도대체 저분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여 놀랐습니다. 단지 놀란 정도가 아니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라고 했습니다(눅5:8). 베드로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고 이처럼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보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이적에 더 관심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단순히 기적을 행하고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신 이심을 믿게 하고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한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고 신앙생활의 본질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는 문제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더 체험하게 되는 도구요 수단임을 잊지 말고 그것을 통해 더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고 영광 돌리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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