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란(李豆蘭)은 초명(初名)이 두란첩목아(豆蘭帖木兒)이고, 여진(女眞)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불화(阿羅不花)의 아들로 선대의 관직을 이어 천호(千戶)가 되었다.
공민왕 때 이두란이 백호(百戶) 보개(甫介)를 보내 100호를 거느리고 귀순해 온 후 북청주(北靑州)에 살면서 우리 태조를 섬겨 그 휘하에 소속되었다. 우왕 때에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의 초적(草賊) 40여 기가 단주(端州)를 침략하자 이두란이 단주상만호(端州上萬戶) 육려(陸麗), 청주상만호(靑州上萬戶) 황희석(黃希碩) 등과 함께 서주(西州)와 위해양(衛海陽) 등지까지 추격해 괴수 6인의 목을 베니 나머지는 모두 달아났다. 호발도(胡拔都)가 단주로 침구해 오자 부만호(副萬戶) 금동불화(金同不花)가 내응하여 재물을 모두 썼던 까닭에 뒤에 거짓으로 잡힌 척 했는데 육려·황희석 등이 여러 번 싸웠지만 모두 패하였다. 당시 이두란은 모친상을 당하여 청주에 있었는데 태조가 사람을 시켜 부르며 말하기를, “나라의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그대는 상복을 입고 집에 있어서는 안 된다. 상복을 벗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였다. 이두란은 이에 상복을 벗고 절을 올리며 곡을 하면서 하늘에 고한 후에 활과 화살을 차고 행군을 따라갔다. 호발도와 길주평(吉州平)에서 만나 이두란이 선봉으로 먼저 맞싸우다가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태조가 얼마 후에 도착해 보니 호발도는 3중으로 된 두꺼운 갑옷에 붉은 털옷을 입고 검은 색 암말을 타고 진을 가로로 벌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심 태조를 우습게보고 그 사졸(士卒)들을 놔둔 채 칼을 뽑아들고 홀로 말을 달려 뛰쳐나왔다. 태조 역시 단기(單騎)로 칼을 뽑아 달려 나가서 칼을 휘두르며 맞받아쳤는데, 둘 다 급히 서로를 지나쳐 맞힐 수가 없었다. 호발도가 미처 말을 돌리지 못하는 사이 태조가 급히 말을 돌리며 활을 당겨 그의 등을 쏘았으나 갑옷이 두꺼워서 화살이 깊이 박히지 않았다. 또 즉각 그의 말을 쏘아 관통시키자 말이 거꾸러지면서 〈호발도가〉 떨어졌다. 태조가 다시 활을 쏘려고 하였으나 그 휘하가 대거 나와서 그를 구하였다. 아군도 달려오자 태조가 병사들을 출동시켜 크게 무찌르니, 호발도는 겨우 몸만 빠져 달아났다. 당시 판서(判書) 김세덕(金世德)의 처 윤씨(尹氏)가 여러 해 동안 과부로 있으면서 더러운 행실이 있었다. 그 모친이 윤씨를 전 홍주목사(洪州牧使) 서의(徐義)에게 개가시켰는데 겨우 며칠 만에 윤씨가 서의를 싫어하여 내쫓았다. 헌사(憲司)가 탄핵하고 군졸을 보내어 그 집을 지키게 하자 이인임 등이 윤씨에게서 후한 뇌물을 받고는 무마시키려고 하였고, 이두란이 여러 차례 변방에서 공을 세웠다고 말하며 윤씨를 그의 처로 삼게 했다.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제배되었다가 다시 태조를 따라 함주(咸州) 토아동(兎兒洞)에서 왜구를 크게 쳐부쉈으므로 선력좌명공신(宣力佐命功臣)의 호를 하사하고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하였다. 요동을 공격할 때에 태조를 따라 회군하였고, 얼마 후 상의동지밀직사사 회의도감사(商議同知密直司事 會議都監事)가 되었다. 창왕이 즉위하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고 공양왕이 즉위하면서 회군한 공을 기려 녹권과 토지를 하사받고 밀직사(密直使)로 승진했다. 또 장사길(張思吉)과 함께 서해도(西海道)에서 왜구를 격파했으므로 지문하부사 판도평의사사사(知門下府事 判都評議使司事)로 승진하여 함께 일을 보았다. 이 뒤부터는 본조[조선]의 기록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