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봉래 정사에 계실 때에 하루는 저녁 공양을 아니 드시므로 시봉하던 김 남천·송 적벽이 그 연유를 여쭈었더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곳에 있으매 그대들의 힘을 입음이 크거늘 그대들이 오늘 밤에는 싸움을 하고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떠나갈 터이라 내 미리 밥을 먹지 아니하려 하노라.] 두 사람이 서로 사뢰기를 [저희 사이가 특별히 다정하온데 설령 어떠한 일로 마음이 좀 상한들 가는 일까지야 있겠나이까, 어서 공양에 응하소서.] 하더니, 몇 시간 뒤에 별안간 두 사람이 싸움을 하며 서로 분을 참지 못하여 짐을 챙기다가 남천은 대종사의 미리 경계하심이 생각되어 그대로 머물러 평생에 성훈을 지켰고, 적벽은 이튿날 아침에 떠나가니라.
☆ 어구 해석
공양 : 공경하는 마음과 정성스런 마음을 다하여 불ㆍ법ㆍ승 삼보나, 스승ㆍ조상ㆍ윗어른들에게 음식ㆍ재물ㆍ향화(香華)ㆍ등명(燈明) 등을 바치는 일. 싼스끄리뜨 푸자나(pujana)의 역어(譯語)로, 공시(供施)ㆍ공급(供給)이라고도 번역되며, 줄여서 공(供)이라고도 한다. 본래 공양은 신체적인 행위만을 지시했으나, 지금은 단순히 정신적인 것까지도 포함하여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침국ㆍ약ㆍ꽃ㆍ차ㆍ등(燈)ㆍ향 등의 재물뿐만 아니라 공경심과 신심, 수행까지도 공양의 대상이 된다. 현재 절에서는 공양이라는 말을 식사 일반의 경우에 대체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물건을 주로 바치는 것을 재시(財施)라 하고, 정신적인 공양을 법시(法施)라 한다. 각종 의식 행사를 거행한 후에 참석자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원래 인도의 브라만교에서 동물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던 공희(供犧)에 대하여, 살생(殺生)을 금하는 불교에서 행한 제의형식(祭儀形式)으로 몸에 기름을 바르고 향을 피우며, 꽃과 물 등을 바치고 등불을 켜던 원주민의 풍습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원불교에서도 일반적인 식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대중이 함께하는 식사를 대중공양이라 한다
김 남천 : 본명은 성규(星奎). 법호는 각산(角山). 1869년 전주에서 태어났으며, 집짓는 일(특히 목수일)에 능했고, 태을교(증산교의 일파) 도꾼이었다. 1919년(원기4) 10월 13일(음력 8월 20일) 친구 송찬오(송적벽의 본명)와 함께 같은 날에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제자가 되었다. 소태산이 변산 월명암을 의탁하여 지내는 것을 보고 송구히 여겨 홀로 된 딸 김혜월(金慧月), 외손녀 이청풍(李淸風)과 함께 실상초당에서 소태산을 시봉했다. 한편 둘째딸 김순풍(金順風)과 사위 박원석(朴元石)은 익산 총부기지 확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종질녀인 이청춘(李靑春)은 총부에 사재 70두락을 희사하여 총부유지 대책의 활로를 여는 등 일가가 모두 불법연구회 창립에 큰 역할을 담당하도록 했다.
송 적벽 : 본명은 찬오(贊五). 법호는 하산(夏山). 1974년 충청도에서 태어나 강일순(甑山姜一淳)을 믿고 따르게 되면서 전북 김제군 원평으로 옮겨와 엿방의 물주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태을교 도꾼들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도를 찾아 온 정산종사의 연원으로 1919년(원기4) 8월 20일(음) 소태산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그가 인도한 친우 김남천과 함께 소태산의 변산 시절 주석처인 석두암의 건축을 담당하여 1921년(원기6) 9월에 완공했다. 그는 석벽을 쌓고 벽을 바르는 토역(土役)을 담당하고 김남천은 목수일을 담당했다. 그는 증산계열의 신도들을 소태산의 문하로 많이 인도했다.
성훈 : 성인의 교훈을 말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