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병사’의 ‘살인적 침묵’을 아는가?
누가 저 관심병사를 만들었나? 관심병사를 만들어 놓고, 그들을 멀리서 방조한 모든 사람들(관심간부, 선임.후임병사)은 별개의 사회화 과정 속에서 숨쉬며 살아왔는가? 관심병사로 분류되는 기준과 그러한 인성검사는 과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가 있으며, 그러한 절차에 당당한 합리적 동의를 갖고 있는가?
관심병사는 군에서 발생된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그리고 전방초소에 근무하는 관심병사의 일탈행위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우리 사회의 총기난사 사건과 폭력문화로 인한 비극과 불행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병영생활의 일탈과 폭력은 그 뒤에 깊이 가려져 있는 군내무반 생활과 군대문화의 전반적인 구조에 말 못하는 어떤 문제가 숨겨져 있는지 알아야만 내부의 안보를 다질 수가 있다. 금번 ‘임병장 총기사건’은 ‘세월호’를 능가하는 한국사회에 뿌리내린 왜곡된 군사문화의 영향과 정신적 항폐화 결과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싸움이든 국가간 전쟁이든 적군은 결코 바깥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전쟁과 폭력은 결국 개인의 내면적 갈등과 싸움이 반영된 것일 뿐이다. "다른 사람과의 싸움이란, 단지 내면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오쇼)
인간의 공격성과 폭력은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방어적 도피와 탈출에서 기인한다. 방어는 공격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국가의 안보는 시작에서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진정한 국가안보의 출발은 삼팔선 저 쪽을 향한 몸부림이 아니라, 우리사회 안에서부터 먼저 상호관계에서 소통과 형제애를 확인해야만 한다.
이 번 임병장 총기난사 사건뿐만 아니라, 그동안 알게 모르게 똑같은 형태의 사건이 많이반복되어 왔음에도, 우리 군대와 사회는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청년들의 성장배경과 인성교육의 과정을 한 번 돌아보면, 학창시절에서부터 일찍이 그들은 ‘집단 괴롭힘’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경험을 한 번쯤 다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들이 초.중고를 거쳐 대학입학을 하자마자 젊은이들이 병영생활을 하게 된다. 거기 내무반 생활에서 그들은 또다시 관심병사라는 슬프고 가혹한 분류작업의 대상이 되어, 그 자존감의 파괴적 상처와 억압의 시간을 인내하면서 얼마나 불안했으며 한계에 부닥쳤을까?
관심병사는 병영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붙는 딱지다. 병영문화, 군사문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 사회의 기반은 무엇인가? 그 생태계의 뿌리를 한 번 직시해보자. 사회화 과정은 경쟁과 강요된 인내로부터 누가 더 잘 적응하고 살아남느냐 하는 것이다. 경쟁을 통하여 살아남는 것이 모든 가치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유일한 것이 되고 말았다. 경쟁은 전쟁의 다른 이름이다. 경쟁과 전쟁은 형태를 달리할 뿐, 똑같이 상대를 패배시키고 그의 패배에 기대어서 나의 승리를 가져오는 상호배타적 제로섬 게임이요 파괴적인 문화다. 이성과 도덕과 합리적인 사고는 열외로 하고, 전쟁을 대비한 병영문화는,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집단논리와 상명하달식 생활을 수용하고 충분히 훈련되어야만 한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관심병사, 사회 부적응자라는 딱지를 붙여 분류해버리면, 모든 책임은 면제되는가? 우리들 인성검사의 기준은 무엇인가, 한 번이라도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은 있는가? 인성검사에서 말하는 사회의 기반 자체는 절대 다수의 집단적 사고와 가치의 산물이지 않는가. 사회 다수가 곧 정상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 집단이념 자체는 과연 합리적이고 창의적이라는 근거는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앞에서 전쟁과 경쟁문화라는 배경 속에서 숨쉬고 살아가는 우리들 집단의식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인간은 그러한 집단의식이라는 최면 상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사회적 적응.부적응이라는 이중적이고 획일적인 잣대로 사람을 한 집단으로부터 갈라놓는 것은,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폭력이고, 미필적 살인의 씨앗이며, 집단 방조적 살인으로부터 공동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한 사람의 부적응자를 추출하여 관심병사로 분류하고 관리자를 두는 병영문화는, 눈에 보이는 폭력과 총기사건으로부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지극히 안일하고도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잠재된 폭탄과 같은 불건전하고, 비합리적이며, 불안의 근원적인 인간의 심리적 기반 위에 있는 병사는, 누구나 그 집단으로부터 따돌림이라는 절박한 고립을 피하기 위하여 누군가를 대신 따돌리는 쪽에 서려고 한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무지막지한 악순환의 고리며. 비굴한 행위인가. 전쟁의 상황에서만 전우가 있고, 평상시에는 전우도, 동료도, 선임도, 후임도 없이, 적은 삼팔선 멀리 있지 않고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다. 병영생활의 공동체는 한 치의 배려도 소통도 없는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관계망인가.
보라, 우리 모두 어느 쪽 입장에 서있거나 가리지 말고, 역지사지로 이 번 강원도 고성 전방초소에서 일어난 병사 총기난사 사건을 한 번 직시해보기로 하자.
그대가 만약 임병장 자리에 예수라면, 어떠했을까? 붓다와 소크라테스라면 어떠했을까? 우리는 똑같이 그들을 지금과 같이 관심병사로 분류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예수와 붓다, 소크라테스조차 인성검사에서 사회 부적응자(관심병사)로 낙인찍히고 말 것이다. 2500년 전 그 때도 마찬가지 예수를 집단적으로 따돌려 십자가에 매달았고, 소크라테스는 집단 부적응자로 선고받은 채 스스로 독약을 든 채 자결하고 말았다. 다만 임병장과의 차이는, 복수 대신에 자신을 해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집단의식의 무지와 슬픔을 온몸으로 고발한 것이 다를 뿐이다.
다시 한 번 엄숙하게 고하건 데, 첫째, 인간이 해서는 안 될 가장 무서운 죄악은 서로가 서로 를 고립시키는 행위며, ‘집단적 살인 방조행위’가 바로 ‘집단 괴롭힘’이라는 것을. 둘째,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오늘 ‘괴롭히는 자’는 내일 그대로 ‘괴롭힘을 당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셋째, 두려움은 숨겨진 분노이고, 분노는 드러난 두려움이라는 것을. 넷째, 임병장 총기난사 사건은, 또 하나의 세월호와 함께 우리 사회가 침몰시킨 무거운 ‘살인적 침묵’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