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영국+룩셈부르크
2003年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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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 네덜란드의 화가. 뛰어난 색조, 맑고 부드러운 빛과 색깔의 조화로 조용한 정취와 정밀감(靜密感) 넘치는 그림을 그렸다. 거의 소품들로 한 두 사람의 가정생활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1632년 10월 31일 네덜란드의 델프트에서 출생하였다.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평가도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19세기 중반에야 겨우 진가를 인정받았다.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1655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직업을 계승하였다.
화가로서는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두 사람 사이에 사제관계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653년 델프트의 화가조합에 등록되었고 같은 해에 카타리나 포르네스와 결혼하였다. 매우 둔필이었으며 현존하는 작품은 40점 정도이고 거의 소품들로서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가정생활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그 밖에 종교를 제재로 한 것도 있다. 불과 2점이지만 풍경화도 있으며, 《델프트풍경》(헤이그국립미술관 소장)은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은 색조(色調)가 아주 뛰어났으며 적·청·황 등의 정묘한 대비로 그린 실내정경은 마치 개인 날
북구의 새벽 대기(大氣)를 생각나게 한다. 맑고, 부드러운 빛과 색깔의 조화로 조용한 정취와
정밀감(靜密感)이 넘친다. 초기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뚜렷한 대비는 만년이 될수록
완화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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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의 화가 베르메르, 그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 얼마 전 국내에서 열려 미술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네덜란드 회화전과 ‘북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진주 귀고리 소녀>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베스트셀러 소설의 출간, 그리고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의 상영을 통해 대중에게 더욱
가까워진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 그러나 ‘수수께끼의 화가’, ‘신비의 화가’ 등으로 포장된 그의 비밀스런 이미지는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그렇다면, 소설이나 영화 속에 묘사된 화가의 모습은 과연 사실일까?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화가와 하녀 그리트의 관계를 무척
설득력 있게 묘사하였는데, 그들을 둘러싼 진실과 허구의 경계선은 어디쯤일까? 여러 사람들이 주장한 것처럼 베르메르는 정말 광학도구의 도움을 빌려
작업한 것일까? 왜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는 베르메르의 <레이스를 뜨는 여인>을 극찬했을까? 또 테러리스트들은 왜 항상 베르메르를
탐내는 것일까?
침묵의 삶을 예술의 알리바이로 삼았던 신비의 화가에 대한 완벽한
X-파일 이 책은 일상의 아름다움을 사랑한 빛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삶과 예술 세계에 대한 쉬우면서도 균형
잡힌 입문서이다. 저자가 추정한 베르메르의 전 작품 32점이 화가의 삶과 격동하는 네덜란드의 시대 상황, 그리고 델프트의 현장감 넘치는 사진
등과 함께 소개되어 있어 그의 예술 세계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베르메르의 카메라 옵스큐라 활용설을 반박하기 위해 저자가 직접
제작한 컴퓨터그래픽 영상을 비롯하여 그의 작품과 비교 가능한 동시대 화가들의 풍부한 도판 자료는, 다소 전문적인 미술사적 사안까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사후 200년간 잊혀진 존재였던 베르메르를 재발견한 미술비평가 토레-뷔르거를 재조명하였고, 네덜란드 미술계를
혼란에 빠뜨린 세기의 위작 사건을 심도 있게 파헤쳤으며, 진품으로 보기에 의심스러운 네 점의 작품을 철저히 분석하였다. 또한 테러리스트들이
베르메르의 작품을 인질 삼아 정치적인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했던 범죄 사건들의 전말을 밝혀낸다. 이 책을 통해 ‘어두운 골방에서 자신의
작품에만 몰두하는 고독한 천재’라는 비현실적인 화가상 대신, 시대의 변화에 민감히 반응하고 때로는 시행착오와 삶의 고단함도 맛봤던 보다 친근한
베르메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를 초월한 풍속화의 거장, 베르메르의 삶과 예술
세계 렘브란트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거장,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1632∼1675). 베르메르가 활동하였던 당시 네덜란드에서 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풍속화가 널리 유행하였다. 이런 흐름을 타고
베르메르도 역사화에서 풍속화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그는 주로 평범한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여 눈부신 고요와 정적을 화폭에 담아냈다. 우유를
따르거나 편지를 쓰는 여인의 단순한 일상 풍경을 그린 그의 작품들은 보는 이의 시선을 오랫동안 잡아끄는 미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와 표면에 작용하는 햇빛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치밀하고 완벽하게 묘사한 그의 표현 기법에서 비롯한 것이다. 빛과 그림자의 부드러운
조화, 알레고리를 배제한 간결한 공간, 현실에 머물러 있지 않은 듯한 등장인물의 고요한 정지 자세 등을 통해 그는 네덜란드 민중의 삶을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회화 예술로써 완벽하게 재현한 베르메르에 대해 앙드레 말로는 ‘회화 그 자체의 근본적 가치 때문에 그림을
그린 화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림을 통해 다양한 의미와 교훈적인 내용을 표현하려고 했던 다른 화가들에 비해 베르메르는 회화의 고유한 가치를
중시하였는데, 이는 현대 회화의 정신과 서로 통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뛰어난 풍속화가들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유독 베르메르의 그림들이
현대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베르메르는 델프트에서 태어나 평생 동안 그 도시에서 살았으며,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카타리나 볼네스와 결혼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는 기록, 일 년에 두세 점의 작품만을 제작했던 신중한 화가였다는 점,
만년에 프랑스의 침공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그림을 한 점도 팔 수 없어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11명의 자녀를 남겨둔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 정도만 밝혀져 있을 뿐이다.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19세기 중반 미술비평가 토레-뷔르거에 의해 재발견되어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미술계를 뒤흔든 세기의 위작 사건과 도난 사건 ‘작품의 희소성,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가려진 삶, 사후 200년이 지나서야 명성을 얻게 된 잊혀졌던 화가’와 같은 요란스런 수식어들은 베르메르의 명성을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여러 번의 위작 사건과 도난 사건 등 수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순간에 네덜란드 미술계를 큰
혼란에 빠뜨린 주인공은 ‘한스 반 메헤렌’이라는 네덜란드 화가였다. 그는 1945년 미술품 감정가들이 베르메르의 초기 작품으로 판정했던 그림들이
사실은 자신이 그린 위작이라고 선언하였는데, 당시 저명한 미술관들이 그 그림들을 앞다투어 고액으로 구입한 뒤 전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의
충격적인 증언으로 베르메르의 그림에 대한 진위 여부는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후 미술사가들의 철저한 연구 결과에 의해 지금
베르메르의 작품은 30~35점으로 알려져 있다.
책의 후반부에는 저널리스트 구치키 유리코가 자신의 저서인『도난당한
베르메르』(新潮選書)를 요약하고 있다. 여러 차례 있었던 베르메르 작품의 도난 사건을 흥미롭게 추적한 이 글은 마치 ‘그림 속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책 속의 책’의 역할을 하며 또 하나의 읽는 즐거움을 전해준다.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훔쳐간 <연애편지>와 <기타를
치는 여인>, <편지 쓰는 여인과 하녀>는 결국 되찾을 수 있었지만, <합주>는 1990년 보스턴에서 도난당한 이후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다.
과연 베르메르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해서 그림을
그렸을까 베르메르를 둘러싼 뿌리 깊은 오해 중 하나는 그가 카메라 옵스큐라(카메라의 전신, 한쪽 벽에 작은 구멍을
뚫어 반대쪽 벽에 허상을 비추는 작은 방)를 활용해서 사물이나 정경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고 하는 것이다. 베르메르의 카메라 옵스큐라 활용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미경을 개발하는 데 기여한 과학자 안토니 반 레벤후크의 영향으로 베르메르가 광학 기구를 사용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반 레벤후크가 베르메르의 유산 관리인으로 선임되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들이 가까운 사이로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근거는 찾아보기 힘들고,
베르메르의 자산 목록에도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또한 베르메르의 작품들은 깊이감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한 물체가
뚜렷하고 그 가까운 쪽은 약간 흐릿하게 보이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사용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보면 그림을
바라보는 눈의 초점이 일률적으로 분명하게 맞춰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저자 고바야시 요리코는 <우유를 따르는
여인>과 <연애편지>의 분석을 통해 베르메르가 광학 기구를 사용해서 투사된 이미지를 그대로 그렸다기보다는, 화면의 완결성을 위해
원근법을 왜곡하는 등 실제 정경을 그대로 그려내는 데 집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메르의 그림은 생생한 사실성을
불러일으킨다. 베르메르는 화가의 눈으로 사실성을 만들어냄으로써 현대인의 시각으로 봐도 어색하지 않은 영화의 영상 같은 화면을 구축한 것이다.
저자는 그가 발굴한 것이 카메라 옵스큐라의 화상이 아니라, 예술의 축복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특별한 ‘회화의 힘’이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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