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위지) 동이전 한조 해석
<삼국지(三國志)> 권(卷) 제30 - 위서(魏書) 제30 - 동이전(東夷傳) - 한조(韓條)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000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은 토착 생활을 하고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면포를 만들었다. (나라마다) 각각 장수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성곽이 없었다. (마한의 여러 나라로는) 54국나라 이름 생략등 모두 50여 국이 있다.
큰 나라는 만 여 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총 10여 만 호이다. 진왕은 월지국을 통치한다. 신지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신운견지보 안사축지 분신리아불예 구사진지염'의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 그들의 관직에는 위솔선, 읍군, 귀의후, 중랑장, 도위, 백장이 있다.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준왕)은 그의 가까운 신하와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였다.
위략 :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조선)나라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한씨라는 성을 사칭하였다. 준은 해외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한은)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철마다 조알하였다. (후한의) 환제, 영제 말기에는 한과 예가 강성하여 (한의) 군, 현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건안 연간(196~220, 백제 초고왕 31~구수왕 7)에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 장창 등을 파견하여 한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과 예를 정벌하자, (한, 예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와 한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경초 연간(237~239, 백제 고이왕 4~6)에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혼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대방, 낙랑의)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의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를 더해 주고, 그다음 사람에게는 읍장(의 벼슬)을 주었다.
(한족의) 풍속은 의책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들도 (낙랑이나 대방)군에 가서 조알할 적에는 모두 의책을 빌려 입으며, (대방군에서 준) 자신의 인수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된다.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그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때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은 전사하였으나 두 군은 마침내 한을 멸하였다.
그 풍속은 기강이 흐려서, 여러 나라의 도읍에 비록 주수가 있어도 읍락에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무릎을 꿇고 절하는 예 또한 없다 거처는 초가에 토실을 만들어 사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과 같았으며, 그 문은 윗부분에 있다. 온 집안 식구가 그 속에 함께 살며, 장유와 남녀의 분별이 없다. 그들은 장례에는 관은 있으나 곽은 사용하지 않는다. 소나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소나 말은 모두 장례용으로 써 버린다.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하지만, 금, 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다. 머리칼을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는데 마치 날카로운 병기와 같다.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밭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 그 나라 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는 모두 등의 가죽을 뚫고, 큰 밧줄로 그곳에 한 발(자)쯤 되는 나무 막대를 매달고 온종일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는데, (이를)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하며, 또 이를 강건한 것으로 여긴다.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은 (중국의) 탁무와 흡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도 이렇게 한다.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이 있으니 그것을 소도라 한다.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다른 지역에서) 그 지역으로 도망 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아니하므로 도적질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사리를 안치한 불탑과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다르다.
그 나라 북방의 (중국)군에 가까운 여러 나라는 그런대로 약간의 예속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은 흡사 죄수와 노비가 모여 사는 곳과 같다. 별다른 보물은 나지 않고, 동물과 초목은 대략 중국과 동일하다. 큰 밤이 생산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다. 또 꼬리가 가느다란 닭이 나는데 그 꼬리의 길이는 모두 5자 남짓 된다. 그 고장 남자들은 간혹 문신을 한 사람도 있다.
또 주호가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대체로 키가 작고 말도 한(족)과 같지 않다. (그들은) 모두 선비족처럼 머리를 삭발하였으며, 옷은 오직 가죽으로 해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옷은 상의만 입고 하의는 없기 때문에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나라에서 물건을 사고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