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시간을 빚다
“참 좋은 때네”
선배는 내가 티샷하는 모습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한마디 던진다. 그는 첫 홀 티샷을 마치고 걸어가면서 드라이버 거리가 일흔의 문턱을 넘더니 예전 같지 않다며 탄식이다. 그날따라 유난히 나이를 탓한다.
나이는 누구나 비켜 갈 수 없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붙잡으려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잠시 걸음을 멈춘다 해도 묵묵히 흘러간다. 젊음의 힘으로 아무리 완강하게 버틴다 한들 세월의 강을 거스를 수 없다. 결국, 나이는 누구든 막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다.
그는 일흔이라는 나이에 대한 서운함뿐만 아니다. 세상이 그 나이를 바라보는 시선도 못마땅해하는 것을 여러 홀 지나고 나서 알았다. 전반 홀이 끝나고 클럽하우스에서 쉬면서, 육십 대와 칠십 대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고 조용히 일러 준다. 육십 대까지는 아직 젊은 축에 든다고 여기나, 칠십 대에 들어서면 어느 순간‘늙은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 같았다.
“…인공지능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면 뒤 쳐진 늙은이 취급하잖아.”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나 또렷하게 들렸다. 그 만의 얘기가 아니다. 나 역시 서너 해가 지나면 일흔의 문턱에 들어선다. 우리는 보는 대로 믿는 게 아니라 믿는 대로 보는 것 같다. 그때가 오면‘시대 뒤에 쳐진 노인’으로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쯤 서 있을까.’ 변화의 물결을 헤쳐 나가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어도 점점 현실에서 뒤처지는 느낌이다.
불현듯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다. 그간 정작 내 삶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허망함이 파도처럼 밀려와서다. 부모님을 모시고 처자식과 먹고사느라 어쩔 수 없었다. 그린에서 먼저 퍼팅을 마치고, 그늘에서 기다리며 노송을 바라보았다. 굽은 가지마다 세월을 품은 늙은 소나무는 늙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늘이 되는 게 부러웠다. 세월의 풍상을 온몸으로 견뎌온 늙은이는 지혜를 품었다고 한들 누군가 쉬어갈 그늘이 될 수 있을지….
나이가 사람의 역량을 재는 잣대가 될 수 있을까. 실상 젊음은 인공지능처럼 빠른 능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살아온 시간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와 이해의 능력도 중요하다. 지난날 미쳐보지 못했던 것들이 나이 들어가면서 보이기 시작한다. 인공지능은 정보는 대신 할 수 있어도 경험은 대신할 수 없다.
일흔, 고희, 종심…. 요즘 물건을 사면서 양보다 질을 따진다. 삶도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 그래서 크로노스 시간에서 벗어나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아갈 때다. 다시 말해 삶 속에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질적인 시간을 보내야 한다. 젊을 때는 얼마나 오래 살까 하는 게 중요했다면, 노후에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중요하다. 일흔이라는 숫자에 매달리기보다 오늘 만나는 사람과의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걷다가 마주치는 풍경 하나에 마음을 기울여보며, 심연의 바다에 빠져서 하지 못한 이야기를 그림이나 사진에 담거나, 글 속에 남기면 어떨까. 시간의 양은 줄어들어도 시간의 질은 얼마든지 깊어질 수 있다.
“선배! 공을 멀리 보내는 것보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마지막 홀 티샷 후 파란 잔디를 선배와 나란히 걸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가 빙그레 웃는다. 그 웃음 끝에 그를 생각한다. 평소에 잘 느끼지 못했던 분명한 호감이 어려 있다.
잠시 걸음을 늦추고 자신을 바라본다. 인생은 나이와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멈추는 순간 끝나는 것인지 모른다. 앞으로의 날들은 지나온 세월을 등에 지고, 새로운 시간을 향해 다시 내딛는 시간이다. 마치 오래된 자동차의 타이어를 바꾸어 끼고 다시 달리듯…. 정해진 이정표 없이 길을 나서고, 지난날 소중했던 이를 되새기며 분주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쓰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시간의 의미를 찾아볼까 한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어김없이 저녁노을이 번진다. 예순의 굽잇길을 돌아 일흔의 문턱에 다다른듯하다. 자세히 바라보니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시간이다. 남겨진 날들, 필경 오래도록 은은한 빛을 머금는, 명품 시간을 빚고 싶다.
첫댓글 유병덕 수필 <일흔의 문턱에서>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