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 이라는 제목
먼저 작품 제목에 대해 생각해 보자. ‘九雲夢’ 이라는 한자 제목은 각각 아홉, 구름, 꿈을 뜻한다. 이 제목의 의미는 어찌 보면 쉽지만,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처리하고 말 것은 아니다.
물론 ‘九’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문이 제기될 것이 없다. 등장인물 성진(性眞)과 여덟 선녀, 혹은 양소유(楊少遊)와 여덟 여성을 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필 주인공의 수를 아홉으로 정한 이유는 유가(儒家)와 불가(佛家)에서 모두 ‘9’라는 숫자가 가득 찬 숫자로서, 완벽하고 충만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일 터이다.
문제는 ‘雲夢’이다.『구운몽』의 영어 제목이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잘 보여 준다.『구운몽』의 최초 외국어 번역은 제임스 게일(James Gale)에 의해 이루어졌다. 영역본『구운몽』의 제목은 ‘The Cloud Dream of the Nine'으로, 우리말로 직역하면 '9인의 구름 같은 꿈' 정도일 것이다.
훗날에 리차드 러트(Richard Rutt) 가 영역한 책의 제목은 이와 달리 ‘A Nine Cloud Dream'이다. 이 제목은『구운몽』의 ‘아홉’, ‘구름’, ‘꿈’이라는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지만, 관사로 미루어 볼 때 ‘아홉 개의 구름 같은 꿈’이라기보다는 ‘아홉 구름의 꿈’으로 옮기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이때 ‘구름’이란 성진과 여덟 선녀, 혹은 양소유와 여덟 여성, 곧 ‘덧없는 인간 존재’를 비유하는 말일 것이다. 의미상 튼 차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제목을 ‘九-雲夢’(아홉 사람의 구름 같은 꿈)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九雲-夢’(아홉 구름의 꿈)으로 볼 것이냐 하는 미묘한 문제가 놓여 있는 셈이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아홉 구름의 꿈’이라는 평이한 해석을 기본으로 삼아 그 밖의 의미를 덧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운몽’의 다른 해석 가능성을 좀 더 생각하며 제목의 의미를 보태 본다.
‘운몽’은 우선 중국의 5대 명산 중 남쪽을 대표하는 형산(衡山)에 있는 못 이름 ‘운몽택’(雲夢澤)을 가리킨다. 공교롭게도『구운몽』이 시작되는 공간은 형산의 연화봉(蓮花峰)이다. 또 ‘운몽택’ 주변의 누대(樓臺)로 생각되는 ‘운몽대’(雲夢臺)를 배경으로 하는 ‘운몽한정’(雲夢閑情)이라는 고사가 있다. 전국시대 초(楚)나라 양왕이 운몽대에서 노닐다가 유명한 문인 송옥(宋玉)에게 과거 초나라 회왕이 운몽대에서 바라보이는 고당관(高唐觀)에서 무산의 여신을 만나 잠자리를 함께했다는 고사를 듣는다는 내용이 송옥의「고당부」에 실려 전한다.
여기에서 유래하는 ‘운몽한정’이라는 말은 남녀의 사랑 혹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뜻한다.
‘운몽’은 본래 ‘운몽대’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남녀의 사랑까지 아우르는 의미로 확장된다. 이렇게 본다면 ‘구운몽’은 ‘아홉 사람의 사랑’이 되니, ‘아홉 사람의 구름 같은 꿈’이라는 제목도 썩 어울린다.
‘구운몽’은 단순한 글자로 이루어진 제목이지만 각각의 글자에 함유된 풍부한 의미와 그 조합으로 인해 여러 갈래로 멋지게 해석될 가능성을 지녔으니, 생각할수록 잘 지은 제목이다. 그런데 이 제목은 한국 고전소설사에서 매우 독특한 것이다.『구운몽』이전의 소설은 절대 다수가「주생전」이나「운영전」처럼 주인공 이름을 내세운 제목을 취하고 있다.
이 밖에는『금오신화』에 수록된「만복사저포기」,「이생규장전」,「남염부주지」,「용궁부연록」,『기재기이』(企齋奇異)에 수록된「하생기우전」,「최생우진기」처럼 전傳, 기記, 지志, 록錄이라는 한문, 산문 갈래를 표방하되 작품의 주인공, 공간, 서사 내용 등을 아울러 적은 예가 있다. 이들은 모두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전등신화』에 수록 작품의 제목으로부터 영향 받은 것들이다. 여기에 비추어 보면『구운몽』처럼 주인공이나 작품 공간을 내세우지 않은 세 글자 제목은 참으로 낯선 것이다.
한때 제목에 ‘꿈 몽(夢)’자가 들어간 작품을 통칭하는 ‘몽자류 소설’의 대표 작품으로『구운몽』을 꼽기도 했다. 여기에 착안하여 ‘몽’ 자가 들어 있는 중국의 문언소설(한문 문어체 소설) 제목을 일람해 보더라도 당나라 원진(元嗔)의「감몽기」, 당나라 심아지(沈亞之)의「이몽록」, 원나라 정희(鄭禧)의「춘몽록」등과 같이 기記나 록錄을 표방한 것이어서『구운몽』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김만중은 왜 이런 낯선 제목을 생각해 냈을까?『구운몽』이 일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대 혹은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재자가인소설(才子佳人小說)이나 통속소설 중에 세 글자 제목을 가진 작품이 많다.
『옥교리』나『오강설』같은 작품은『금병매』처럼 주인공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만든 작품이어서『구운몽』과 성격이 다르지만,『육포단』,『비화영』,『정몽탁』,『귀련몽』,『생화몽』,『최효몽』,『인아보』와 같은 작품은 작품 내용을 압축하거나 주요 모티프에서 따온 세 글자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구운몽’이라는 제목은 명대, 특히 명말청초 이래로 일대 유행한 통속소설의 제목에 착안하여 만든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의 걸작은 대개 자기 시대까지의 전통을 충분히 숙지한 가운데 자기 시대의 과제를 드러내며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 매김 되는 법이다. 『구운몽』역시 멀게는 당나라 이래의 전기소설로부터 가까이는 거의 동시대라 할 명말청초의 재자가인소설과 통속소설의 전통 위에 성립한 작품이다.
후자와의 관계는 그동안 별로 조명되지 않았지만, 우선 『구운몽』의 제목만 보더라도 명말청초 이래의 통속소설이 『구운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에 새삼 주목해야 한다.
출처; 정길수, 『구운몽 다시 읽기』, 돌베개, 2010.
첫댓글 벌써 시작하셨군요....미정님 짝짝
우와, 저 책은 직접 구입하신거에요? 혹시 다른 것도 다시 읽기 시리즈가 있나요?
돌베개, 라는 출판사가 되게 좋다고 들었어요~ㅎㅎ
고등학교 문학시간에 구운몽의 제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신 것이 기억나네요ㅎㅎ
와 부지런하시네요
'구운몽' 이라는 제목에도 이런 의미들이 있었네요- 새로 알고 가요!^^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 정보 읽었습니다.
잘 읽었어요.
저도 이런 꿈을 꾸고 싶어요. 부귀를 누리며 만족하는 생활을 꿈속에서 해보고 깨어나면 어떤 느낌일지 ㅋㅋㅋ 아 그저 성진이 부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