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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조집 [☆뼛속으로 내리는 눈☆]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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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으로 내리는 눈]
박헌오 시집 / 심지(2014.08.07)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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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으로 내리는 눈
박헌오
귀 환한 침목 위에 간이역 괘중시계
서지 않는 바쁜 초침 따라가는 분침 시침
둥근 뼈 이음새 없는 혼백의 질주다
열두 짐 쏟아놓은 황토빛 별자리
평행의 창밖으로 흐르는 삶의 여정
열차는 바람을 먹고 쉼 없이 달린다
이슬이거나, 서릿발로 만나는 객실 정경
어느 역에 내릴지 다른 별 낯선 이정표
축축한 외로움이 싫어 지워버린 간이역
침목으로 레일로 시간으로 공간으로
눈 내리는 당신의 무릎, 달리는 하얀 열차
설원의 뼈로 누워서 저 바람에 덮이리라
고매화枯梅花
박헌오
고목의 뜨거운 몸
젖몸살 앓고 있다
못내 옷고름 풀어
옹이 터진 꽃망울
순정이 익어가는 장독
매화 곱게 날린다
채색화
박헌오
출렁출렁 넘쳐오는
태양의 혈액이다
비어있는 핏줄마다
채우는 생명이다
무채색 가 마셔대며
칠해놓는 영롱한 색채
황홀한 춤판이 된
형형색색 채색화
지구의 등에 업혀
무지개 띠 두르고
가람의 골짜기마다
꽃 이랑을 일군다
대숲에서
박헌오
향교 골 뒷동산에
오죽烏竹의 늘 푸른 잎
비운 손 펄럭이는
무명의 선비 마음
꼿꼿이 가부좌 틀고
시조창을 읊는다
목어木魚의 지느러미
박헌오
하늘이 심해인 양 속세가 극락인 양
창자까지 내버리고 청정을 공양하며
억겁을 매달려 사는
땡추의 운명이다
환생을 꿈꾸다가 범종소리에 잠 깨고
욕망을 들썩이다 법고에 일어서면
운판이 떠가는 하늘 목 흔드는 목어
낯선 바람에 내맡긴 몸 아직 먼 비움의 무게
마른 등 부채살 펴듯 원점으로 가는 어도魚道
뱃속을 비워낸 환희 허기를 다 잊었다
시의 몰골
박헌오
붙박여 살다보면
더 오래 남을 허물
뼈를 휘어 짜 올린 시
한마당 널어놓다
욕정 다 날려 보내고
건져놓는 넋두리다
태반胎盤의 흙에 쌓인
모국어의 찬연한 빛
세월 끝 세상 끝가지
이어가는 겨레의 얼
한 줄의 시로 살아서
감겨가는 혼의 몰골
온정각
-금강산 기행 2
박헌오
남과 북 이산가족 손잡았던 푸른 집
북받치는 눈물로 얼싸안는 사진 몇 장
금강산 한가운데서
붕어처럼 입 맞춘다
조선의 자국마다 모두의 고향이다
절원을 불붙이는 뜨거워진 향불 위에
연꽃을 감싸고 앉은
묵원黙願을 듣는다
북측 새악씨 노래 줄에 사투리가 꽂힌다
옥수수 막걸리에 들쭉술 을 섞여 마시고
금강산 물맛도 달아
마시고 또 마신다
솔빛 타고 사랑 타고 미움도 섞어 타서
가슴 깊이 밀어넣는 속깊은 뜻 아느냐
미인 송송 허리를 안고
황진이 불러본다
온천수에 몸 담그고 알몸 되어 일어서니
기암 연봉도 알몸으로 팔 벌린다
칠천만 못난 몸들아
옷 다 벗고 일어서라
보길도를 읽다
박헌오
파도의 방향 따라 소년은 꿈꾸고
고산孤山의 노래 맞춰 만선의 웃음 뵈는
보길도 푸른 지붕의 섬 시를 읊는 묵객의 섬
뾰족 고개 휘파람 새 넘노는 해맞이 길
이슬 같은 입맞춤 뜨겁게 사는 세월
동백의 순정이 피어나 아픔 녹이는 해풍의 섬
긴 목을 내리 휘고 오르는 캄캄한 숲길
회양목 소사나무 붉은 종아리 잡고 올라
산상의 누룩바위에서 바닷바람 휘젖는다
인심도 향기로운 천 만집 보석누리
선현의 절절한 사랑 굽이굽이 매만지며
한반도 낙관 찍힌 자리 시 한 수를 얹는다
낙엽
박헌오
연연을 잘라내고
떠나야 할 계절인가
목 타는 노란 잎새
정 한 모금 그리워
허공을 물고 파득이다
체념하는 떨잎이다
꽃섬에서
박헌오
노래가 들려오는 바람의 섬이었다
벎은 날로 돌아와 고개 든 열기였다
바다가 꽃이 되는 신비
초록의 몽환이다
빛살의 옷을 잡고 꽃섬에 오르려니
바위는 바위끼리 알몸으로 철석이고
등대의 손짓 따라 부르다
혼절하는 바다의 합창
마침을 위하여
박헌오
밤에 지는 동백꽃
뱃전에 태우는 뜻
먼 항해 떠날 어부
집어등 달아매며
똑같이 이승을 살다
저 바다의 영혼 되자
폭풍우 몰아쳐도
정갈한 신앙으로
깊은 빛 꺼내놓고
기도를 올리다가
사랑의 세상 마치거든
별이 되어 여행 가자
고향집 열과裂果
박헌오
초가지붕 안방에도
별이 뜨는 고향 집
지워도 피가 도는
어머니 꽃
오누이 꽃
개모과
섬돌에 앉은-
뻐꾹 뻐꾹
메아리 한 채
유물 목록 1
박헌오
한 여름 그늘막에
한 됫박의 시원함
한겨울 길목에
한 됫박의 따뜻함
오곡의 향기를 담아
머리 이고 가던 장날
목 메이는 빈 됫박
채우고 싶은 아픈 맛
불효 한 되 설움 한 되
까맣게 탄 가슴도 한 되
한 많은 모정의됫박에
뼈로 담겨 묻히리
바당귀 귀울음
박헌오
보릿대 꿰어 엮은 고향마당 여치집
미어질 듯 고운 여치 사로잡아 가둬놓고
그 밤내 울음소리 들으리
귀 기울인 하찮은 꿈
마음도 열지 않고 공연히 보낸 웃음
호기심으로 빼앗았다 팽개친 상사화
개구리 울음 넘치는 무논
귀 막아도 쟁쟁한 욕
마구 친 풀꽃 한 짐 마당귀에 부려놓고
떠난 세월 외양간을 멍하니 바라보면
내 몸이 촛불이 되어
다 타도록 울고 싶다
아비 유정
박헌오
가슴 어린 아이들
효심을 받아보니
내 줄 것 한 방울 없고
못난 눈물 숨어 닦네
홀연히 떠난 때에는
못 다준 정 어이할까
가던 길 홀로 돌아와
궁상맞게 울먹인다
찬지에 꽃잎 지듯
술잔에 지는 마음
호수에 잠긴 달같이
보이지 않는 길을 간다
다리 그늘에서
박헌오
동여맨 허리 풀며 강물은 돌아온다
땀 젖은 바람단이 차렸하고 줄을 설 때
무쇠솥 보리밥 사발
퍼 담아 나눠준다
한 여름 뜨건 호미 걸어놓는 백중날은
자가품 난 손목도 부처님이 잡아준다
온종일 막걸리 잔에
빠진 얼굴 마신다
허리 휜 버드나무 할딱대는 매미소리
벼슬보다, 돈보다, 너스레 객담보다
하루의 자유가 달다
푸성귀 베어 문다
바닷길
박헌오
파도 위에 하늘 살고
눈물 위에 영혼 산다
하늘 사랑 구름 되고
영혼 사랑 이슬 된다
목마른 하늘과 영혼
몸 적시는 빛과 어둠
온 길을 모르고
넘어지는 밀물소리
갈 길도 모르며
기어가는 썰물소리
선창에 갈매기 소리
뱃고동 끌고 간다
농촌풍경
박헌오
진한 땀의 소금기
수염 끝에 매달고
풀 베어 엮은 발로
동여맨 등허리
숨 골라 가꿔낸 곡식
가슴 톡톡 터진다
누대를 지어온 농사
낡아빠진 황룡 깃대
대물려온 가업에
이 빠진 농기구들
잡초만 무성한 휴경지
기운조차 말라간다
바리바리 싸 보낸 정
이민 떠나는 효자동이
까마귀 울어대는
노령의 한탄고개
머잖아 무너질 뼈대
고려장이 따로 없다
바다의 십자가
박헌오
물결은 까맣게 누워 하늘을 세우고
빛살은 하얗게 서서 바다를 뉘나니
창세기 십자가 위로
걸어가는 삶의 시간
빛을 따라 일어서고 물을 따라 눕는 생명
베풂 받아 이어가는 삶 파도의 하얀 손길
온유한 영혼의 땅에 세워놓는 사랑의 징표
눈감지 않는 새해는 갔다가 돌아오고
시들지 않는 달은 사위었다 불어나듯
주인은 영원하시니
십자를 긋는 파도
기러기 발
박헌오
가야금 열두 불에
기러기 앉아 운다
발목을 동여매고
머릿채를 휘어잡다
긴 물결 튕기는 날개
발 이야기 흘러간다
대전 구경九景
박헌오
1. 주산主山 게룡鷄龍의 품
봉황이 피치는 계룡산 동녘의 품
한밭의 빛 타래로 짜 올리는 오색 무늬
부채살 골골이 펴는
억만 송이 빛나라
양지녘 충혼마당 한민족의 갑동 되고
신도新都에 놓인 초석 세종천도 꽃피워
테극선太極扇 융성의 바람
겨레의 얼 드높인다
3. 구봉산 석양 밟기
공룡의 등을 타듯 오르내린 아홉 봉우리
돌틈마다 묵은 뿌리 소복이 새살 돋아
호젓이 석양을 밟는
시신詩心이 무르익다
돌이끼 고운 살에 두견화 애무하도
옻샘에서 솟아나는 순결한고백이여
산노을 은밀히 숨는
그 품속을 뉘 알까
6. 갑천의 융성
만 다발 실개천이 모여들어 이룬 갑천
아득한 석기시대 기름진 땅을 골라
한밭에 일으킨 융성
새 역사가 뜨거워라
뜸부기 놀던 자리 불야성을 이루고
별나라 가는 길로 부면에 다리 놓다
찬연한 문명의 갑문
격양가 드높아라
9. 계족산 옛 성
변방의 흙속에 뿌리지친 백제의 솔
천년 넘어 여울지며 아픈 세월 씻어내도
옹이진 망국의 여한 칼날처럼 품고 산다
봉화대 불씨 번져 붉게 물든 단풍아
끊이지 않는 청절의 맥 바위마다 기도 자국
옛 성의 돌 틈에 눈물 꽃 혼의 향기 생생하다
산신제 이어 섬기는 산마을 사람들
오름길에 봉황정 둘레 도는 맨발의 길
삼남의 길목 지키는 푸른 기운 찡찡하다
동산東山의 신선한 길 심신 절로 극락인 저
푸른 햇살 빛나는 호수 사계절 아련하여
억겁을 가꾼 절경에 가사 ․ 장삼 훌훌 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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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그 누구, 그 무엇, 그 어떤 삶과 이야기를 사랑하며
땀과 피와 혼백이 흐르는 생명을 부지하고
배고프던 날, 몹시 춥던 날, 외롭고 슬프던 날, 아프고 괴롭던 날, 절망과 무기력에 시들어가던 날들을 모아 추억의 제단에 차린다.
천일의 기억, 만일의 감동, 영원히 남겨두고 싶은 이름과 시어와 환상과 정한들을 글로써 책갈피에 끼워둘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불운에 빠져도 불행으로 여기지 않고,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을 갖지 않으며, 절망의 나락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생존의 믿음, 속죄의 삶과 창조의 삶을 연결시켜 나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고, 섬겨야 할 사람들을 받들며, 내가 지고 가야 할 언어들을 가지런히 챙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길이다.
자유시를 쓰는 것이 더 좋겠다는 권고를 자르고 우리 민족의 전통을 살려나갈 수 있는 시조를 쓰기로 했다. 언젠가는 온 국민이 함께 시조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소망을 가지고 공직에만 전념해온 사십년을 지나 새로운 사명으로 시조를 짓고, 쓰고, 그리는 테 전념하려고 한다.
제대로 다듬어진 시 한 편 내놓기 어렵지만 그동안의 시작쪽지를 모아놓고 골라보니 뼛속으로 눈이 내리는 날처럼 춥지만 어둠속애 쌓인 눈을 뭉쳐서 시조집을 엮는다.
시를 쓰는 동안 외로움을 감내해준 아내와, 어쭙잖은 시조 창작을 크게 격려해주신 이광녕 박사님과. 나의 시어들에 다감한 정을 들여주신 문학관 가족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적으며, 앞으로 더 많이 기억해줄 작품을 쓰기 위해 정진하겠다는 다짐으로 숨김없이 부끄러운 고백의 시조집을 올린다.
2014. 7
대전문학관에서 박 헌 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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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오 時調集 [※뼛속으로 내리는 눈※]
[ 작품 해설 ] -
영육의 경계를 넘나드는 엄청난 시혼의 바다
이광녕(문학박사, 시조시인)
박헌오 시인의 글을 읽으면 영육의 경계를 넘나드는 엄청난 시혼詩魂의 바다에서 유영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느낌은 시인이 지나쳐온 삶의 경륜이 남달리 폭넓고 언어구사의 폭도 넓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농촌과 도시 체험을 두루 하였고, 일찍이 대전시 공무원으로서 문화체육국장을 거쳐 현재는 대전문학관 관장으로 봉직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큰 궤적軌跡의 단면이다. 마음이 두텁고 소박하며 인정 많은 박시인은 시조단에서 그 인품이나 작품으로도 존경 받는 작가이다. 그는 현재 대전 문학예술의 선봉자로 활약해 오고 있으며, 오랫동안 문화예술분야의 공무원과 문학관장으로 봉직해 왔기에 문학에 대한 식견이 남다르고 박식하며 깊이가 깊다. 이번의 시조집에는 이러한 그의 인생 체험이 곳곳에 잘 반영되어 있어 읽다 보면 감회가 남다르다.
하나의 시를 평가할 때 우리는 작가의 인생과 경륜을 떠올리며 그의 작품세계를 머릿속에 그려보게 된다. 박시인의 글을 읽으면 그리운 도시와 농촌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오버랩 되어 펼쳐지며, 오랫동안 다져온 그의 인생 정도正道의 여정이 하얗게 표백되어 물결치면서 원고지에 넘나든다. 시상의 폭이 넓은 그의 작품세계는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고 자연과 사물, 인정과 사랑, 초월과 달관, 영성과 지성이 올곧은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독특한 표현기법과 성실한 작법에 의하여 편편이 전개되고 있다.
1. 향토 사랑과 그리움의 에스프리
땅에는 가늠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과 생명이 숨 쉬고 있다. 이 땅의 유한한 생명들은 잠깐 동안 숨 쉬며 피었다가 종국에는 자신의 호흡을 태어난 땅에 맡기며 땅 속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땅은 유한한 인생의 활동 무대이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갈 회귀역이요 고향집이다. 누구나 인간은 태어난 땅, 고향의 정취를 잊지 못하며 자기도 모르게 귀소본능歸巢本能을 지니고 있다. 박시인의 작품 곳곳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토 사랑의 정신을 드러내고 있는데 「대전역 영시零時」는 그 중의 하나다.
기다리는 구두코로 달려오는 기차야
꽃가마 홍등 켜고 상기되어 오는 신부
만 다발 팔도 사투리 여울져 맞이한다
잔별 세던 사람에게 음악 같은 기적소리
천길 사랑 은하수 밤을 다 적셔놓고
대합실 시계바늘 따라 눈빛 가득 몰려간다
마차 길에 신작로, 촛불자리 신기루-
감춰 둔 편지들을 손에 손에 쥐고 나와
축제의 꽃 강을 이루는 황홀한 도회都會여
층층이 쌓인 얘기 구구절절 깃발 달고
잠깬 추억 행간마다 들썩이는 만남의 꿈
손 모은 영시의 제단 하늘 문이 열린다
-「대전역 영시零時」부분
대전은 박시인의 텃밭이다. 일찍이 그 텃밭은 일구고 거름을 주고 정성을 들였을 터이다. 이 시조는 1,2부로 연이어진 전 8수 중의 제1부 4연으로서 ‘대전찬가大田讚歌’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이 시를 읽으면 텃밭인 대전에서 문학관장을 지내고 있는 토박이 시인을 연상케 한다. 대전을 근거지로 학문을 익히고 거기서 뼈가 굵은 박시인은 대전에 대한 애향 정신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대전은 나라의 중심지로서 사통팔달四通八達 교통의 요충지이다. 그러기에 팔도 사투리가 고루 교차하는 만남의 장이다. 시인은 이러한 만남의 광장에서 축제의 꽃물결이 이는 황홀한 정서를 맛보며 구구절절 깃발을 달고 하늘문이 열리는 광경을 목격하곤 한다.
작가는 왜 ‘영시零時’라는 시어를 사용했을까? 영시는 하루의 시작점이요, ‘출발지로서의 대전’에 그 상징성을 부여했으리라 본다. 이 밖에도 「대전구경大田九景」이란 시에서도 충청도 머슴 박시인의 대전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그냥 흘러보내기 쉬운 생활주변의 평범한 향토자원을 내세워 애정을 가지고 감정이입하여 풍부한 시상과 문장력으로 의미를 부여해 놓은 솜씨가 참으로 훌륭하다.
A
보릿대 꿰어 엮은 고향마당 여치집
미어질 듯 고운 여치 사로잡아 가둬놓고
그밤내 울음소리 들으려/귀 기울인 하찮은 꿈
마음도 열지 않고 공연히 보낸 웃음
호기심으로 빼앗았다 팽개친 상사화
개구리 울음 넘치는 무논/귀 막아도 쟁쟁한 욕
마구 친 풀꽃 한 짐 마당귀에 부려놓고
떠난 세월 외양간을 멍하니 바라보면
내 몸이 춧불이 되어/다 타도록 울고 싶다
-「마당귀 귀울음」전문
B
손 닿지 않는 길로/고향집 둥둥 떠올라//
다비식 준비하듯/마른나무 쌓아놓고//
삽짝에 동여맨 편지/한꺼번에 얹어놓다
꼬깃꼬깃한 소망쪾지/주렁주렁 매달고//
아마도 하늘에 있을/수신자를 찾아가라//
불 질러 달집 태우며/길운 비는 대보름
-「달집」전문
위의 시 A와 B를 읽으면 겉으로 보기엔 그저 덤덤하고 사나이다운 풍모로만 인식되어온 박시인이 어찌 이리도 여린 정서의 향수어린 글을 표현할 수 있나 하는 의아심을 가질 수 있다. 하나의 인생이 변화무쌍한 천지만물을 다 체험한다 해도 그 귀착점은 역시 그리움의 발원지인 모태母胎나 고향집이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박시인도 예외는 아니다.
위의 시 A와 B에서는 ‘보릿대’, ‘여치집’, ‘상사화’, ‘개구리’, ‘무논’, ‘외양간’ 같은 소재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주제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시A에서 ‘그 밤내 들으려던 울음소리’는 무엇을 뜻하는가? 작가는 ‘귀 기울인 하찮은 꿈’, ‘공연히 보낸 웃음’, ‘호기심으로 빼앗았다 팽개친 상사화’ 등으로 갈등 심리적 시상을 전개하면서, 떠난 세월 때문에 ‘촛불이 되어 다 타도록 울고 싶다’ 비화하였으니, 가히 사무친 그리움의 극단적 심리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얼마나 그리움에 사무쳤으면 소신공양燒身供養의 정서까지 이르렀을까? 아마도 ‘상사화’로 비유된 떠나간 임에 대한 그리움이 떨쳐버릴 수 없는 향수와 함께 절절히 넘쳤던 것이리라.
시 B「달집」도 꼬깃꼬깃 소망 쪽지 주렁주렁 매달고 달집을 태우는 고향 마을의 대보름 향수를 매우 실감 있게 형상화시켜 놓은 연시조이다.
이 밖에도 <낙과의 고향>부분에 펼쳐져 있는 「고향집 열과」, 소태나무와 꾀꼬리」,「대동 산마을」,「충청도 머슴」,「옹달샘」 등에도 구구절절 애향심과 향수가 넘쳐흐르고 있어 작가의 내면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원형복귀의식을 엿볼 수 있다.
2. 정감 어린 인정과 사랑, 그리고 효심
박시인의 캐릭터는 세미한 서양 찻잔이 아니고 무쇠솥에 보리밥 사발이다. 그는 텁텁한 막걸리표 시인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향토를 사랑하고 선비정신을 추구하지만, 그의 내면에 흐르는 커다란 물줄기는 어디까지나 푸근하고도 정겨운 인간미다. 그래서 그의 시는 꿋꿋하고 당찬 듯하지만 뜻밖에도 눈물이 많다.
A
뿌리치지 않는데/망설임 감아놓고//
풀어주지 못한 연鳶줄/끊고 떠난 방패연//
사랑은 /되돌아오지 않는/후회의/강물이다
-「눈물은2」전문
B
동여맨 허리 풀며 강물은 돌아온다
땀 젖은 바람단이 차렷하고 줄을 설 때
무쇠 솥 보리밥 사발/퍼 담아 나눠 준다
한여름 뜨건 호미 걸어놓는 백중날은
자가품 난 손목도 부처님이 잡아준다
온종일 막걸리 잔에/빠진 얼굴 마신다
허리 휜 버드나무 할딱대는 매미소리
벼슬보다, 돈보다, 너스레 객담보다
하루의 자유가 달다/푸성귀 베어 문다
-「다리 그늘에서」전문
시 A는 사랑의 아픔을 적합한 비유기법에 의해 진솔하게 나타낸 단시조다. 사랑은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고 한다. 누군들 사랑의 아픔이 없으리요만 그 아픔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천차만별일 것이다. 이 시에 나오는 “풀어주지 못한 연鳶줄‘은 아마도 ’풀어주지 못한 연緣줄‘일 것이다. 끝내 인연으로 맺어지지 못하고 끊어져버린 연을 애달파하는 작가의 연민이 가슴속 깊이 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다.
시 B에는 한여름 다리밑 그늘에서 베푸는 푸근한 온정을 감각적 기법으로 실감 있게 시상을 전개시켜 나갔다. 작가의 스타일대로 무쇠솥 보리밥 사발에 탁배기 잔으로 푸성귀를 베어 물고 인정을 나누는 모습이 참으로 정겹다. 그래서 매미소리 할땍대는 그날도 “하루의 자유가 달다”하였으니, 인간미 넘치는 작가의 성향이 실감 있고도 짙게 잘 묘사되어 있어 작품의 미적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C
기도만 남은 아침 어디로 찾아갈까
바다 위 가신 자국 파도가 지웠는데
영롱한 묵주알 굴리며 파도 너머 계신데
물에 비친 무인도에 임의 모습 그려보며
뼈마디 쌓인 문턱 생일을 또 넘어서며
가슴에 불효자 문장紋章 혹독하게 찍는다
-「허망을 보며(파도일기 18)」전4수 중 3,4수
D
아들아 아주 작게라도 남을 위해 살아라
아버지 말씀 믿고 끝까지 따라가라
어미는 살아서도 행복했고, 죽어서도 평화롭다
생명과 영혼 다할 때까지 기도하리니
철부지 저희들을 당신 손에서 놓지 마소서
온종일 아희들 보는 햇살 되고 달 되리오
주님 말씀 잠시 잊고 잘못해도 버리지 말고
세상 모든 자녀들을 사랑하신 성모님
눈물은 영혼의 양식이오니 영생토록 주소서
-「온 세상은 어머니의 눈물」중,3) 소망의 눈물
시의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시심의 근간은 끈끈한 정과 사랑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눈물이 많고 풍수지탄風樹之嘆이 많다. 일찍이 조병화 시인은 “진정한 나의 고향은 어머니 하나뿐이었다”라고 술회한 바 있다. 박시인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모정의 눈물시리즈가 펼쳐지고 있어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의 노래가 그의 시적 정서의 주조를 이루고 있음이 역력하다.
시 C는 저 먼 세상 파도 너머 계신 부모님을 그리며 불효자의 한을 토로하고 있으며, 시 D는 살아생전 당부하신 어머니의 유언과 기도를 떠올리고 자식을 위해 하늘나라에 가서도 햇살 되고 달 되어 자식을 돌보리라는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되새기며 불효자로서의 눈물어린 회한을 잘 그려내고 있다.
인간이면 누구든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절절하다. 어머니에 대한 모정의 끈이 남다르고 불효자의 한이 많은 박시인에게 있어서는 어머니는 영적 고향이요, 눈물의 근원지이다. 시의 생명력이 독자들에게 공감성共感性을 얼마나 확보해 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면, 이러한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자식사랑, 그리고 그에 따른 진솔한 효심孝心은 모자간의 정적 인간미가 잘 드러난 실례로써,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는 동일시同一視,Identification로서의 감성적 가치가 매우 높다.
3. 선비정신과 지필묵향이 그윽함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해야 좋으냐고 질문했을 때, 공자께서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말씀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처신하라는 뜻이다. 어떤 이는 문인의 이름을 돈으로 산다. 그러기에 문인이 문인답지 못하고 돈에 휘말리고 정치에 휘말리기도 한다. 문인이 문인답기 위해서는 선비정신을 갖고 지필묵향紙筆墨香을 가까이 해야 된다.
시인의 시인다움은 그의 행적行跡과 문적文跡으로 드러난다. 필자가 본 박시인은 지극정성 어머니의 기도와 공무원생활로 반듯하게 다듬어진 정겨운 바탕에 뜻밖의 명구를 쏟아내는 멋진 시인이다. 그러기에 회사후소繪事後素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현대 선비상의 표본이라 할만하다.
A
정화수 둥지에/날개 펴는 고송일지孤松一支//
서리길 굽은 허리/청절을 지켜온 삶//
황토빛 고향의 길목/연화등蓮花燈들고 섰다
구만리 하늘 길에/후조의 금슬화음琴瑟和音//
묵향어린 기왓골/만고萬古의 선비도량//
백학이 여정을 접고/화엄경華嚴經을 외운다
-「가람의 고송」전문
B
백지는 무한한 텃밭/뜨거운 손 꿈 심는다//
정 갈아 고인 먹물/물들이는 고백의 골//
붓으로 경작하는 과원/떫은 열매 익어간다
한 생애 그 품안에/그리고 찢고 또 그리고//
몸 달아 거울 보면/외려 부끄런 먹의 농담//
백지가 좋았을 운명/붓놀림이 흔들린다
-「백지의 경작」전문
C
붙박여 살다보면/더 오래 남을 허물//
뼈를 휘어 짜 올린 시/한마당 넣어놓다//
욕정 다 날려 보내고/건져놓는 넋두리다
태반胎盤의 흙에 쌓인/모국어의 찬연한 빛//
세월 끝 세상 끝까지/이어가는 겨레의 얼//
한 줄의 시로 살아서/감겨가는 혼의 몰골
-「시의 몰골」전문
윗시 A에 나타난 ‘고송孤松’과 ‘백학白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깨끗한 정화수 둥지에 날개 펴고 청결을 지켜온 작가의 삶의 모습을 상징할 것이다. 이 시에는 묵향어린 기왓골, 만고의 선비도량에서 경문經文을 외우며 수행의 도를 닦고 있는 작가의 선비정신이 고매하게 드러나 있다.
시 B와 C에서는 시인으로서의 창작의 어려움과 그 결과물을 시적으로 잘 형상화시켜 놓았다. 시 B에서는 무한한 텃밭인 백지를 놓고 작시에 고민하는 시인의 모습이 역력하다.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되기에 붓으로 경작하는 과원, 즉 백지 공간에서 떫은 열매 익어간다고 했다. 참으로 신선한 비유다. 서정적 자아는 찢고 또 그려보지만 붓놀림이 흔들리고 외려 부끄러운 먹의 농담뿐이다. 시 C에서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하고 난 뒤, 작시의 어려움이 비유적으로 수준 높게 잘 표현되어 있다. 얼마나 힘들었기에 ‘뼈를 휘어 짜 올린 시’일까? 시인은 자신의 시를 “넋두리”이자 “혼의 몰골”이라고 비유하여 겸손함으로 표현하였지만, 그것은 ‘욕정 다 날려 보내고 건져놓은 넋두리’이자, 그래도 ‘세월 끝, 세상 끝까지 이어갈 겨레의 혼’이라고 위안한다.
윗시들에서는 시인의 성향性向과 작가로서의 겸손한 문적文跡이 잘 드러나 있다. 이와 같이 박시인은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낮추며, 선비정신과 작시정신에 투철한 시인다운 시인이다.
4. 자연, 사물과의 교감과 관조
시인은 사물에 이름표를 붙여주는 존재다. 잊혀져가는 고향마을의 사물에도 시인이 와서 이름표를 붙여줌으로써 그것들은 새로이 의미가 부여되고 생명력이 붙어 부활의 영광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박시인의 작품 전반을 둘러볼 때, 눈은 넓어 다양한 사물들과의 교감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영육의 경계를 넘나드는 엄청난 시혼의 바다’라고 일컬은 바 있다. 자연과 주변 사물과 보이지 않는 영적 대상들, 이 모두가 그의 눈에 들어오면 시가 되고 옥석玉石이 된다.
A
맑은 물 푸른 목소리/삼경에 듣는 노래//
치마폭 적시고/멈춰 선 산 그림자//
꽃 같은 나룻배 떠서/끄덕이는 고백이다
내 마음 빠뜨리고/웃고 있는 풀꽃들//
한세상 삼키고도/배부르지 않은 수평//
은하수 한없는 강줄기/떠가는 고요로다
-「호반에서 3」전문
B
둥근 돌 기침소리/꽃잠을 깨우는데//
수마水磨의 정진 끝에/만공滿空으로 익은 원석//
목마른 한 점의 묵원黙願/무극無極의 섬이 되다
거친 마음 보듬으며/다가서는 세상살이//
퍼낼수록 진한 정情/바칠수록 깊은 기도//
내 곁은 지키는 수석/마음의 샘물 긷다
-「수석」전문
시 A는 고요한 호반의 정경을 미끄러지듯 잔잔하게 잘 묘사해낸 솜씨가 범상치 않다. 1연에서 호반에 흐르는 목소리도 평강이 넘쳐흐르는 “푸른 목소리”라고 하며, 멈칫 선 산그림자도 ‘치마폭 적셨다’고 감각적으로 노래한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상당히 세련된 것으로서 호반의 환상적 정경에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빠진 시인은 “한 세상 삼키고도 배부르지 않은 수평” 위에 떠가는 고요 삼매경에 몰입되어 있다.
시 B는 수마水磨의 정진 끝에 만공의 원석으로 화한돌이 ‘무극의 섬’이 되었다는 점을 노래하고 있다. ‘무극無極의 섬’이란 무엇인가? 끝없이 단련되어 둥글둥글 둥글어진 무한 세계를 동경하는 작가의 이상 세계일 터이다. 그래서 수석壽石은 ‘목숨 수壽’자를 쓴다. 작가는 제2연에서 1연의 정기를 이어받아, 거친 세상살이를 수석의 둥근 혼을 반려로 삼아 늘 곁에 두고 닮아가면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작가와 사물과의 이심전심 교감交感이 없이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사물에 대한 깊은 관찰과 사유와 관조가 잘 드러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C
갯바람 등 떠밀어/오대양을 떠돌다가//
시들지 않는 몸으로/남으려는 욕망의 덫//
꿈꾸던 햇살에 누워/피어나는 하얀 꽃
한 알 생명 녹아들어/한 소절의 음악이 되고//
사랑하올 임의 강 속/굽이굽이 애무하다//
향 맑은 핏줄 가득히/유랑하는 소금 꽃
-「소금의 꿈」전문
D
진흙에 뿌리박고/탁류 위에 피는 백련//
백중날 대중 청법請法에/한 동이 피운 화설花說//
세파에 물들지 말고/속 뜻 펴라 이른다
온 세상 고운 색상/만년 닦아 희어지랴//
천자만홍千紫萬紅 견준들/백련만큼 고우랴//
오묘한 감로수 설법/날로 희게 환생하라
-「백련차설白蓮茶說」전문
시 C에는 소금이 갖는 의미와 그 속성이 의인화 기법에 의해 아주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시에서는 소금의 속성이, 비록 바닷길 오대양을 떠돌다가 마지막 종착지에 이르렀지만, 썩지 않고 시들지 않고 끝까지 남아 한 생명의 핏줄 속에 녹아들어 유랑하며 꿈꾸는 ‘하얀 꽃’으로 미화되어 있다.
시 D에는 백련白蓮의 속성을 들어 세파에 물든 인간의 모습을 정화淨化시키려는 작품 의도가 나타나 있다. “탁류 위에 피는 백련”, 그것은 서정적 자아가 지향해야 할 하나의 맑은 거울로서, 인간에게 세파에 물들지 말고 고운 색상 날로 닦아 희게 환생還生하라고 설법해 준다. 가히 의인화 기법에 의해 은근히 교훈적 의미까지 제시해주니, 감성이입의 표본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박시인은 소위 포시법捕詩法에 능하다. 시상을 찾는 심정으로 하나의 사물을 접하게 될 때에, 어린 아이가 가지 끝에 매달린 잠자리를 살금살금 다가가서 날개를 홱 낚아채듯 단번에 시상을 포착하여 작시作詩의 망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그의 시조는 D와 같이 현장감 있고 실삼실정의 정서가 넘쳐흐른다.
A
산 모퉁이 옛길로 요령소리 가는데
숨소리도 내지 않고 등짝에 업힌 채
녀석은 맨몸으로 누워 고갯마루 오르네
화톳불에 녹여도 등 시린 사시나문데
뗏장 한 겹 덮고도 입김을 내뿜으며
그 친구 세상 모르고 잠들어 오지 않네
허망하게 떠난 놈의 빈자리 슬픈 바다
평안히 웃는 영정 손 내밀지 않는 만남
향 한 줄 하늘거리며 얼굴 위로 날아가네
사시사철 꽃바람 그 길로 보내주마
발자국 없는 걸음 꽃잎을 놓으려마
묵언의 바람 노래에 박수를 보내주마
-「분향의 숨결(파도일기 10)」전문
B
들길을 건너서 산으로 가는 기폭
돛단배처럼 너울대며 흩뿌리는 찔레꽃
옛집의 대나무 꺾어/달아맨 시 한 소절
글썽이는 눈망울 워낭소리 들고 간다
왕골자리 펴 놓으면 해당화도 엎드린다
덧없는 여한을 말아/상여에 얹은 혼백
긴 행렬 춤을 추듯/환송의 찬가 부르듯
평생을 밟아온 땅 누워서 흘러간다
만삭의 뱃가죽같이 지어놓은 봉분 한 채
-「만사輓詞(파도일기14)」전문
시 A는 친구를 영원히 보내면서 영정 앞에서 무상감과 아픔의 심경을 구구절절 나타낸 연시조다. 허망하게 떠난 놈의 빈자리는 슬픈 바다와 같다. 영정은 평안히 웃고 있지만 그는 다시 손 내밀지 않는다. 다만 슬픔에 젖은 향불 한 줄기만이 줄을 긋듯이 휘어져 나붓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적 자아는 작별인사로 “~꽃잎을 놓으려마”{,“묵언의 바람 노래에 박수를 보내주마.” 라고 읊조리고 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슬픔을 맞아 박수를 보내다니 이러한 아이러니는 무엇인가? 이 글에 나타난 서정적 자아의 슬픔 심리는 소위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정서이다. 슬픔을 감추고 스스로 자위하려는 소월素月의 ‘진달래꽃’ 역설과 통하는 기법이다. 죽음은 환생의 첫 단계이기에 출발의 의미를 지녔으며, 이별은 이별이 아니고 만남을 위한 단계이기에 박수로 보내는 것이다.
시 B도 덧없는 인생을 뒤로 하고 만장기輓章旗를 나부끼며 북망산을 향해 가는 이의 마지막 모습을 잘 묘사해 놓았다. ‘찔레꽃’이나 ‘대나무’, ‘워낭소리’, ‘왕골자리’는 고인이 생전에 즐겼던 정물들이리라. 여기서도 서정적 자아는 만가輓歌를 ‘환송 찬송 부르듯’ 한다고 읊조렸다. 이러한 시상은 작가의 심성이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의 인과정신과 맞닿아, 그의 긍정적 인생관이 잘 나타난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
이 밖에도 이러한 정서는, 「신들의 울음」,「바닷길」등에도 나타나 있는데, 박시인은 심안心眼의 눈을 뜨고 영과 육의 경계를 넘나드는 폭넓은 시상의 세계를 여러 군데서 선보이고 있다. 아마도 그의 사전에는 영원한 이별은 없고 오직 현실을 초월한 깨달음의 심연, 거기서 퍼 올리는 생명력만이 존재할 것이다.
C
파도 위에 하늘 싣고/눈물 위에 영혼 산다//
하늘 사랑 구름 되고/영혼 사랑 이슬 된다//
목마른 하늘과 영혼/몸 적시는 빛과 어둠
온 길을 모르고/넘어지는 밀물소리//
갈 길도 모르며/기어가는 썰물소리//
선창에 갈매기 소리/뱃고동 끌고 간다
-「바닷길(파도일기 0)」전문
D
귀환한 침목 위 간이역 괘중시계
서지 않는 바쁜 초침 따라가는 분침 시침
둥근 뼈 이음새 없는 혼백의 질주다
열두 짐 쏟아놓은 황토빛 별자리
평행의 창밖으로 흐르는 삶의 여정
열차는 바람을 먹고 쉼 없이 달린다
이슬이거나, 서릿발로 만나는 객실 정경
어느 역에 내릴지 다른 별 낯선 이정표
축축한 외로움이 싫어 지워버린 간이역
침목으로 레일로 시간으로 공간으로
눈 내리는 당신의 무릎, 달리는 하얀 열차
설원의 뼈로 누워서 저 바람에 덜이리라
-「뼛속으로 내리는 눈」전문
시 C와 D는 소재에 대한 취재의 범위가 어떠한 지를 잘 알려주는 시들이다. 시 C가 ‘하늘과 바다’, ‘빛과 어둠’ ‘사랑과 영혼’을 넘나들며, ‘밀물과 썰물’이 출렁이는 바닷길에 떠 있는 갈매기처럼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냈다면, 시 D는 축소지향형의 취재로서 뼛속의 세계를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서지 않는 시간의 틈바구니 속에서 혼백魂魄은 질주하고 그것은 바람을 먹고 쉼없이 달린다.
작가는 이 시의 제목을 ‘뼛속으로 내리는 눈’이라 하였지만, 내용은 쉼 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뼛속 깊이 사무친 인생 역정歷程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정처 없이 바람타고 인생을 열차처럼 달리다 보면 만나게 되는 험난한 설한풍 때문에 고독에 젖은 축축한 간이역 따위는 돌아보지도 않고 아랑곳없이 달린다. 종착역에 도달하여 결국은 설원의 뼈로 누워서 그 바람의 품으로 돌아가리라는 작가의 시상은 상당히 상징적이다. 여기서 ‘바람’은 무엇인가? 한때의 조류나 풍조를 뜻하기도 하겠으나, 여기선 대자연의 지체인 서정적 자아가 자연自然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작가의 내면 심리를 드러낸 것이라고 봄이 옳을 것이다.
엄청난 에너지와 생명과 소망이 깃들어 있는 이 시혼의 바다에서 유용한 싯구 한 편을 건져 올리는 일은 오직 영적으로 눈을 뜬 시인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박시인은 사유의 깊이가 깊고 영성과 감성, 그리고 지성을 겸비한 작가이다. 그래서 그의 시조에는 에토스ethos적인 지성과 파토스pathos적인 감성이 조화를 이루면서 작품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
지금까지 박헌오 시인의 작품세계를 대표시조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번에 출간되는 시조집『뼛속으로 내리는 눈』은 시인의 농축된 체험이 무르녹아 있는 결정체요 생생한 울림소리이다. 그의 시들은 넓고 넓은 사유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시혼의 산물이며, 쓰라린 체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삶의 족적들이다.
인품이 돈후敦厚하여 정감이 가는 박시인은 그의 인격만큼 풍부한 체험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지니고 있는 바다 같은 시인이다. 남달리 체험을 통해 터득한 올곧은 영성과 지성을 갖추고 등대지기와 같이 인생의 좌표를 제시하고 있는 박시인의 구도자적인 삶의 태도에 찬사를 보내며, 이 한 권의 책이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서 우리 사회를 밝게 비춰주고, 메마른 가슴들을 촉촉이 적셔주는 맑은 샘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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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겨레의 시인 시조의 역사는 오래고 그 백두대간은 장엄하다. 박헌오 시인은 앞에 나서거나 크게 소리 내지 않으면서도 생각의 한 올 글자의 하나도 깎고 다듬는 시의 장인匠人이다. “백지는 무한한 텃밭/뜨거운 손 꿈 심는다”는「백지의 경작」초장에서 저 옛 선비들이 붓으로 시문을 경작하던 정신의 맑음과 가락의 농익음을 읽는다. 우리네 역사의 숨결과 산과 물, 꽃과 나무들이 껴안고 있는 속 깊은 말들을 잘도 꺼내어 시조의 물레에 자아내는 솜씨가 여간 익숙하지가 않다. 더욱 나와는 동향이어서 내가 눈이 어두워 미처 보지 못하고 알아내지 못한 글감들을 마치 저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를 빚듯 눈부신 빛깔로 시조의 옷을 입혀내고 있음에 못내 반갑고 기쁘다. 이 사회집이 시조의 탑에 얹히는 또 하나의 돌이 되리라.
- 이근배(시인. 대한민국예술원회원)
시인 박헌오는 시와 인간, 시와 삶이 일치를 이루는 보기 드문 시인이다. 그래서 인지 민족의 전통시가인 시조향식에 녹아 있는 그의 자연 사랑과 인간 사랑의 정신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특히 자연 사랑의 정신은 그의 고향 충청도에 대한 향토애와 토속미로, 그의 인간 사랑의 정신은 카톨리시즘과 결합된 연민과 긍휼함으로 구체화되므로 독창적인 문학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 두 줄기의 정신이 궁극적으로 신성성神聖性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한국 시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넓히고 있다.
- 손종호(시인, 충남대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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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오 시조시인∥
∙ 고향 당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으로 나와 줄곧 살았다. 공무원이 되어 주로 문화행정을 맡아왔으며, 퇴임 후 계속해서 초대 대전문학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교시절 돌샘문학동인회 회원이 되어 시를 습작했고 불혹의 나이에 시조창작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1987년 등단, 문단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동안『석등에 걸어둔 그리움의 염주 하나』『산이 물에게』『우리는 하얀 솔잎이 되어』『그 겨울 이야기』등의 시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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