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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5(주일) 느헤미야 13:15~23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신년감사주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한 일이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선한 일, 옳은 결단을 내린 순간이 잊혀지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 이후,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 공동체로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과정에서 느헤미야는 반복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31절) 이 기도는 단순히 개인의 축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헌신과 수고를 기억하시고 공동체에 복을 내리시기를 간구하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의 이 기도를 통해, 우리의 믿음의 결단과 헌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기억 속에 새겨질 수 있는지,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기억하시고 복을 주시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시는 복은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1. 주일(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때 받을 수 있습니다(15~22절).
느헤미야 13:15-22는 주일성수(안식일 준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이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백성들이 안식일에 장사하고 일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책망하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엄중히 명령합니다. 성벽 낙성식을 하고서 느헤미야가 바사에 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흔들렸습니다. 15절을 보니, 십일조 신앙이 무너진 것은 물론이고 유다 사람들이 안식일에 포도주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으며 포도주, 포도, 무화과, 여러 가지 짐을 예루살렘에 들여오는 것을 목격합니다. 16절에서는, 이방사람들 두로 사람들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며 안식일에 물고기와 온갖 물건을 가져와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 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17절에서,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라고 지도자들에게 불호령을 내립니다. 이 책망은 그들이 조상들의 죄를 반복해 짓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오고 있다는 책망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반드시 꾸짖어야 할 악입니다. 안식일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명입니다. 주님의 부활 이후 안식일은 주일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 준수가 신약의 주일성수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주일에 부활하셨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토요일 안식일 대신 주일에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주일예배(요 20:19,26)와 사도요한의 밧모섬 주일예배(계1:10)는 토요일 안식일 예배가 주일예배로 바뀐 것을 보여주는 실제증거입니다.
왜 주일을 성수해야 할까요?
1) 주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안식의 날로 정하셨습니다(출 20:8-11). 그러므로 주일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며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2) 주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할 날입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안식일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을 크게 책망했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며, 공동체에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올 수 있는 심각한 죄입니다.
3) 주일은 영적, 육적 회복의 날입니다. 주일은 일주일 일하고 쉬는 단순한 휴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적으로 새 힘을 얻는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세속적인 활동을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4) 주일성수는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는 중요한 토대입니다. 주일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개인의 신앙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영적 건강을 지키는 일입니다. 느헤미야는 안식일을 범하는 행동이 공동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했습니다.
이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 곧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이사야 56장 6-8절의 본문입니다.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주일을 지키는 성도들을 '여호와께 연합한 자들'(Who join themselves to the Lord),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To serve Him; To minister to Him),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To love the name of the Lord), '나의 종이 된 자들'(To be His servants),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자'들이라고 칭찬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주일성수를 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시기를
①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②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③그들의 예물을 기쁨으로 받을 것이며 ④이미 모여진 백성들 외에 더 많은 백성들을 모아 예수님께 속하게 할 것(교회의 부흥)이라고 했다.
특히 직분자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할 본을 보여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는 것을 보여야 할 직분자들이 세상과 어울려 하루를 보낸다면,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얼마나 큰 죄가 될까요? 또한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겠다고 주일에 교회 대신 학원을 보내며, "네가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야"하는 것만큼 기가 막힌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요? 그러면 자녀의 성적은 오를지 몰라도 자녀의 가치관은 변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가치관으로 내가 먼저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자녀를 교육해도 자녀는 망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적용) 나는 주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고 있습니까? 믿는 사람으로서 사람과 타협하면서 믿음의 본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불신결혼을 막을 때 받을 수 있습니다(23-27절).
23절에,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라고 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상대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만족시켜준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무런 신앙의 가책도 없이 불신 결혼을 해버립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까요? 24절에, “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라고 합니다. 아스돗 방언은 블레셋 언어입니다. 이방인 엄마도, 유모와 여종도 블레셋 말을 하니 아이들도 결국 유다 말을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심각한 일일까요? 그 이유는 유다 말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통로였기 때문입니다. 유다 말을 못하면 예배를 드릴 수도, 성경을 읽을 수도 없습니다. 유대 사회는 모계 사회이고 엄마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 때문에 아내가 중요하고 여자가 참 중요합니다. 유대인은 여자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치고 남자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몇 대 째 믿음을 지켜왔다고 해도, 불신 결혼으로 믿지 않는 배우자가 들어오면 한 가정의 믿음이 단번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유다 귀인들은 자녀를 불신 결혼시키고도 아무 관심이 없는데, 느헤미야는 그 심각성을 보고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래서 25절에서,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고 호통을 칩니다. 이 모습이 너무 교양이 없어 보이나요? 교양이 있건 없건 지금 불신 결혼을 막을 사람이 느헤미야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느헤미야는 최선을 다해 불신 결혼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책망하다라는 동사는 11절에서 십일조 문제로 민장을 꾸짖을 때와 17절에서 안식일을 지킨 유다 귀인들을 꾸짖을 때 사용한 것과 같은 동사로 이 불신결혼을 책망합니다. 그러니까 십일조, 안식일, 불신 결혼이 각각 사안은 달라고 영적으로는 다 똑 같은 종류의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26, 27절에 보니, 느헤미야는 가장 처참한 불신 결혼의 예로 솔로몬왕을 언급합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놀라운 지혜를 가진 솔로몬입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으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태어났어도 다잇의 아들들 중에서 왕위를 계승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맛본 사람입니다. 삼천개의 금언을 짓고 성전을 완성하고 일천번제를 드리고 그렇게 대단한 솔로몬이 하나님을 배반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일이 현실로 일어난 것은 불신여인, 이방 여인을 취한 죄 때문에 이스라엘과 왕궁에 우상이 들어왔고, 이방여인이 솔로몬을 범죄케 했다고 했습니다. 그 여인들은 각국의 공주들이지요. 세상적으로 최고의 학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들로 인해 솔로몬이 달라집니다. 솔로몬이 여자에게 미쳐서 여호와를 떠납니다. 하나님이 두 번이나 눈에 보이게 나타나셔서 진노하시고 갖은 말씀으로 돌이키라고 해도 솔로몬은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앞 산에 이방신을 위한 산당까지 지어서 여자들에게 바쳤습니다. 그런 삶의 결론으로 그 아들 여로보함 이후에 나라가 분열되고 후에는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 모든 원인이 이방 여인을 취한 솔로몬에게 있으니 불신 결혼이 죄 중에 죄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혹독한 징계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자손을 불신결혼하도록 내버려 둔 것입니다. 그것도 예루살렘 성벽 중수를 방해하고 느헤미야를 죽이려고 한 산발랏과 사돈을 맺습니다. 겉으로는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세상 성공의 가치관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 곧 자녀의 불신결혼을 조장하는 악임을 알아야 합니다. 적용) 신(信)결혼하셨나요? 불신(不信)결혼하셨나요? 불신결혼이 죄 중의 죄라는 것이 인정되십니까? 나의 자녀를 꼭 신(信) 결혼시키기로 결단하십니까?
남편의 외도와 다단계로 망하는 사건이 왔지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회개와 안식이 있음을 경험하고 이제는 아이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기 원한다는 한 성도님의 큐티인 묵상간증이에요.
4대째 모태신앙이었던 남편은 대학에 들어가며 교회를 떠나 저와 불신 결혼을 했어요. 저는 신혼 초에 남편을 따라 잠시 교회에 나가다 발길을 끊었지요. 그러다가 다단계에 빠져 시간과 물질을 허비하고서 힘든 마음에 남편과 다시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남편이 교회에서 같이 봉사하던 사람과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럼에도 남편은 오히려 다단계를 하면서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저를 책망하고 저주했어요. 저는 가슴이 아팠지만 믿음의 공동체에서 들은 말씀이 있기에 자상한 남편 뒤에 숨어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우습게 여긴 일이 하나님께 범죄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내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저희 가정을 기억해주시길 기도했고, 하나님은 남편이 가정과 공동체로 돌아오는 기적을 보여주셨어요. 이런 저희 부부의 허물과 죄로 큰 아들은 은둔형 외톨이가 되고, 작은 아들은 사고를 치는 비행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저희 부부가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니 견딜 힘이 생겨 아이들도 저희 부부를 조금씩 신뢰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두 아들 모두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있답니다. 휘몰아치는 사건에도 믿음의 공동체가 있어 제 인생 어느 때보다 진정한 안식이 있었음을 고백해요. 30절 말씀처럼 믿음의 부모의 반열을 끝까지 잘 세워서 아이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길 소원해요. 저의 적용은 큰아들에게 운동하라고 잔소리하는 대신 칼로리 낮은 식단을 차려주겠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두 아들에게 저의 신앙고백을 들려주겠습니다. 입니다.
불신 결혼은 축복의 통로를 막고 자손대대로 저주받게 하는 길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불신결혼이고 이방인과의 결혼이 수많은 이방 우상을 집으로 가져오게 합니다. 안믿는 사람은 공부가 우상이고, 명예가 우상이고, 외모가 우상이고, 학력이 우상이어서 다들 그 우상을 섬기기에 바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숨지기 직전에 이방 나라의 이름을 부르지도 말라. 섬기지도 말라, 절하지도 말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친근히 하라 하면서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다 이론적으로 교훈을 하는데, 딱 한가지 구체적으로 적용한 실례가 바로 불신결혼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골로새서에서도 총체적인 악이 불신결혼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사역도 바로 신결혼 사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배필을 구하기 위해 종인 엘리에셀을 보내면서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십일조 생활 잘하고 세상과 구별된 가치관으로 안식을 누리면, 믿음의 결혼이라는 복을 우리 가정에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요즘은 ‘스몰 웨딩’이라고 하여 주례 없이 하는 결혼이 또 유행을 한다고 합니다.
인간이 100% 죄인인데 인간의 인본주의적인 사랑고백으로 결혼을 하면 ‘언약의 중보자 되시는 하나님’이 그 가정에 중재자로 역할을 못하시게 됩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닌데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우리 부부와 가정의 중재자 역할을 해달라고 신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 결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예요.
신 결혼으로 우리의 가정이 중수가 되어가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 모든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시는 복을 받으려면, 주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불신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억해주시는 복을 받게 됩니다. 세상과 타협해서 얻을 수 있는 작은 유익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적용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