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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천무비 스님 2006년 인터넷 예불문 강설에서 ~~~
저는 예불문 뜻을 조금 알기는 알지만 이번 기회에 더욱 학실히 하기위해서 한 번 더 공부하렵니다.
그리고 이 예불문에 계초심학인문, 발심장, 자경문을 일타스님과 무비스님의 肉聲해설을 곁들여
정리하는 것도 좋으리라 여겨집니다! (阿修羅 記)
7講
般若心經
반갑습니다. 오늘 12월21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 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般若心經을 가지고 공부할 것입니다. ●上壇에 본존불을 향해서 예불을 마치고 그 다음 ●中壇 神衆壇을 향해서 三頂禮를 하든지 아니면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그런 예불 형식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아침예불도 그렇고 저녁예불도 그렇고요 또 개인적으로 대웅전을 참배하더라도 부처님을 향해서 삼배 올리고 그 다음 신중단을 향해서 삼배를 올리든지 예배를 드리는 그런 순서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까지는 신중단에 華嚴神衆들을 모신 그 배경을 말씀드렸고 삼정례에 대한 그런 예불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반야심경인데요 이건 꼭 그 예불문으로서의 어떤 반야심경이라기 보다는 반야심경은 불교의 수많은 경전중에서도 대단히 아주 중요한 경전이고 그 경전 한 권만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소화한다 하더라도 불교를 다 안다고 할 수가 있고 또 우리가 불교를 믿어서 바라는 바 진정한 행복! 참으로 지혜롭고 현명한 삶을 통해서 참으로 행복하고자 하는 그 희망이 반야심경 한 편으로 충분히 충족되어 질 수 있고 해결해 질 수 있는 그런 문제 해결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반야심경은 참으로 단순히 신중단에 들려드리기 위한 한 편의 경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이해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또 세상을 이해하고 우리들 인생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더없이 중요한 경전이라고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우선 반야심경은 그 많고 많은 불교의 聖典 八萬大藏經이라고 하는 방대한 불교 성전 중에서 어느 위치에 해당되는가 하는 것을 우선 살펴볼까 합니다
흔히 경전을 공부할 때 서두에 그 경전이 전체 팔만대장경에서의 위치를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위치를 이해함으로 해서 이것이 부처님께서 평생 설하신 경전 중에 어디쯤에 해당되고 어떤 근기에 해당되는가 그리고 어느 정도의 공부를 한 뒤에 이게 해당되는 것인가? 이런 것들을 꼭 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또 그게 필요한 가르침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위치 파악을 하는데 49년 설법을 정통적인 부처님의 교설 시간으로 보고 ●阿含經을 12년동안 설했다 그러는데 아함경을 설하기 전에도 21일동안 부처님이 깨달음의 내용을 설했다 그렇게 보지요 그래서 ●최초 화엄 3*7일이라는 그런 표현을 씁니다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에서 6년 고행을 끝낸 마지막 시간에 깨달음을 성취하셨는데 이제 臘月 8일 成道齋日이 돌아오는 계절이기도 합니다만 성도재일이라는게 바로 12월 8일 부처님이 아침에 새벽별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깨달음을 이뤘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깨달음의 내용 깨달음에 의한 어떤 환희! 깨달음의 法喜禪悅! 깨달음의 궁극의 정신적 경지! 이런 것들을 남김없이 和盤托出이라 이런 말을 쓰지요 남김없이 다 드러내서 표현한 것이 華嚴經이다!!! 그렇게 합니다 3*7일 21일동안 그런 어떤 심경에서 부처님이 계셨다 이렇게 보는거죠 21일동안 다 읽기도 어려운 방대한 경전인데 일단 화엄경을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바로 21일간의 부처님의 정신 세계에다가 초점을 맞춰서 결집된 경전입니다 그 순간의 부처님의 어떤 정신 세계에다 맞춰서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화엄경은 그렇게 되어 있죠.
경전이라는게 성격이 그렇습니다 ●涅槃經 하면은 열반경도 상당히 많은 양이 많은 40권이나 되는 경전인데 그것은 이름이 뜻하듯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그 광경 그 광경의 전후 사정들을 쭉 경전으로써 설명하고 있는 것이 열반경입니다 또 ●法華經 하면 법화경은 부처님이 70여 세쯤 됐을 때 최종적으로 그 동안 설법하신 것을 총정리하는 입장에서 결집된 것이 법화경이고 ●열반경은 바로 열반의 그 순간과 그 광경과 그리고 열반이 의미하는거 또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 중생들에게 던져주는 그런 어떤충격! 그 충격에서 우리는 또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하는거... 부처님의 열반을 바른 안목으로 봐야 한다고 하는 그런 문제들을 열반경에서 조금 다루는 그래서 바로 부처님의 열반에 초점을 맞추어서 편집된 것이다 이렇게 봅니다
●화엄경은 깨달음에 초점을 맞추어서 편집된 경전이 화엄경이죠. 그런데 흔히 말하기를 그렇게 화엄경을... 깨달음의 궁극의 경지를 그대로 드러 내놓고 이야기를 해도 아무도 알아 듣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까 최상의 성문 연각들도 귀머거리와 같고 맹인과 같았다! 그런 표현이 있어요
그러니까 아주 덕이 높고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는 그런 부처님의 제자들도 화엄경 경지에는 벙어리와 같고 맹인과 같았다! 어디에 큰 법회가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그 법회가 어디서 열리고 어떤 성격의 법회고 어떤 내용이 설해지고 누가 모였고... 하는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전혀 몰랐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 상덕 성문들도 그야말로 그 아름다운 법회가 있었다고 하는 그것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귀머거리와 같았고 맹인과 같았다 이런 표현 할 정도로 화엄경의 경전을 그렇게 높이 보는거죠
그러면 그런 청중의 수준과 관계없는 그런 설법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가 이렇게 생각했을 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깨달음의 경지를 다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수준을 낮춰서 전혀 모르는 초보자도 蒙昧한 중생들도 알아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옳지 않겠나 이렇게 보고 설했다고 하는 것이 소위 ●아함경이고 그것은 12년간 설했다 이렇게 보지요
그 다음에 수준이 조금 높아져서 ●방등부 경전을 설했다 그렇게 봅니다. 그 다음에 方等部 경전까지가 12년하고 8년 지났으니까 20년의 세월이 지났죠. 그러면 상당히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물론 그때 처음으로 입문한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마는 전반적으로 볼 때는 20년의 세월이 지난 그런 수준의 사람들을 상대로 한 그런 경전이 ●般若部 경전이다 그럽니다 반야부 경전이 양이 사실 제일 많아요 한 권으로치면 화엄경이 길지만 반야부는 무려 600권이나 되고 大品般若하면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경전입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21년간이나 설했다 이렇게 봅니다. 꼭 그것을 21년간 그 내용만 설했다는 뜻은 아니죠 아닌데 부처님의 49년간 교화의 시간에다 팔만대장경을 수준 따라서 분류를 해서 그것을 거기다가 배대를 해서 우리들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그렇게 정리 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선각자들의 팔만대장경에 대한 아주 해박한 정리에 의해서 우리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는 아주 쉽지요. 그런 시각에서 볼 때 반야부 경전은 21년간 설했고 券數로는 600권이나 되고 그 중에 金剛經 그 다음에 우리가 공부하려는 반야심경도 그 속에 포함된다 이렇게 봅니다
그 다음에 ●법화경을 또 8년간 반야부 설한 뒤에 설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전체가 49년 설법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 법화경은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입장에서 설했다 이렇게 보는거지요
●반야부 경전은 또 다른 표현으로 영지보물반야시(五詩敎判:1. 窮子驚愕 華嚴時 21일 // 2. 除糞定價 阿含時 12년 // 3. 出入自在 方等時 // 4. 令知寶物 般若時 21년 // 5. 傳付家業 法華(涅槃)時 8년 )라고 해서 부처님의 재산상황... 다시 말해서 보물을 모두 다 환히 파악 할 수 있는 그런 단계다 이렇게 봅니다.
부처님의 보물이 뭐겠습니까 당신의 깨달음이시죠. 깨달음의 경지가 그대로 보물인데 그것을 그야말로 하나도 남김없이 다 드러내서 이해시키는 거... 그래서 이 반야부 경전이 이런 입장에서 보면 중간에 있지마는, 그러나 그 내용은 상당히 깊이가 있고 또 앞 뒤로 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가르침도 이 중간에 있기 때문에, 앞에 것도 뒤에 것도 다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섯 단계로 이야기 하면 좀 복잡하다고 해서, 대개 ●세 단계로 또 축소시켜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건 상당히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방법인데
모든 존재는 “있다” 우리 중생들의 속에는 있는 것이다 있는 것으로 보잖습니까 있다고 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사람이 있고 산하대지가 있고 森羅萬象이 있고 그래서 괴로움도 있고 즐거움도 있고 온갖 것이 다 있다라고 보는거죠. 일체가 있는 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아주 이해하기 쉬워요. 왜냐하면 우리 상식하고 똑 같으니까... 그래서 ●아함부 경전은 괴로움도 있고 괴로움의 원인도 있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도 있고 괴로움을 소멸하고 나면 그야말로 열반의 경지도 있고 온갖 것이 다 있다
그래서 苦集滅道도 있고 우리의 신체적인 地水火風 四大도 있고 안이비설신의도 있고 색성향미촉법도 있고 육바라밀도 있고 십이인연도 있고 팔정도도 있고 ... 전부 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되지요
그래서 알아 듣기는 쉽습니다만 그러나 또 다른 시각에서 이렇게 보면 “있다”라고 하는 그런 지식... 그런 상식만 가지고 이 세상의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서 이해하기는 좀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어디 있다는 상식만 가지고는 부족해요. 상당히 부족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차원의 이해를 위해서 없다 = 空이다 라고 하는 이런 가르침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반야부 경전이고 금강경의 경전이고 그 다음 우리가 공부하려는 반야심경의 경전의 내용이 바로 그거지요
그래서 有 또는 相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상이나 유의 가르침을 다 공부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있다고 이해했던 것이 전부 없다라고 하는 이야기로 나아갑니다 그게 공의 가르침이고 無의 가르침이 안되겠습니까?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은 전부 공의 가르침이요 무의 가르침입니다. 금강경에는 공이라는 말은 없지만 내용은 전부 무입니다 무상으로 위종하니까요 상이 없는 것으로써 눈 앞에 보이는 게 전부 상인데 상이 없는 경지 그것으로써 으뜸을 삼거든요.
부처님도 우리가 제대로 알려면 금강경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모든 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 상이 텅 빈 것으로 = 상이 없는 것으로 이렇게 이해했을 때 비로소 부처를 볼 수 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차원의 내용은 사실 空의 안목 =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볼 줄 아는’ 그런 아주 차원 높은 안목을 갖지않으면 이해를 못한다 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 눈에는 그런 세계가 분명히 있는데 어떡합니까? 그래서 그것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기위해서 단계를 높여가지고 상의 세계 또는 유의 세계에서 단계를 높여 가지고 無의 세계 = 空의 세계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지요
그것이 말하자면 금강경이요, 또 반야부 600권의 내용이요, 반야심경의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거기서 한차원 더 나아가면은 그렇게 없다라고만 보는 것도 치우친 생각이거든요
그 다음에 空 性 相 ... 性이라고 하는 표현을 교리상으로 쓰는데 그것은 모든 것은 진리 그 자체다. 있다 없다가 문제가 아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꼭 한결같이 있는 것만은 아니요 없다고 하더라도 한결같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치우친 유도 아니요 치우친 무도 아닌 것입니다 유와 무를 동시에 겸하여 이해하는 겸하여 존재하는 세계가 있어요. 이게 좀 어려운 이야기지요 유와 무를...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런 세계를 성이라고 그렇게 합니다
성품 성性자 그게 진리의 세계라 그러지요. 따로 그런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장의 종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공간도 역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컴퓨터 모니터를 지금 보고 계시는데 거기에 글이 떠 오르고 뭐 온갖 것이 이렇게 거기에 나타나는데, 그게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요 또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거지요.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공존하는 그런 차원 입니다.
이게 컴퓨터 모니터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존재가 그래요. 우리 肉身을 두고 생각합시다 제일 중요한 것이 육신이니까요, 육신을 근거로 해서 사람이라고 하고 우리의 삶이 영위되고 있지 않습니까? 육신이라고 하는 이것도 사실은 있다고 하기도 그렇고 없다고 하기도 그렇고요.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있는 데 치우칠 수도 없고 없는 데 치우칠 수도 없는거죠. 이것은 억지로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존재가 그러한 원리 원칙으로 그 법칙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차원으로 볼 줄 알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中道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이제 성품 성●性자 성의 세계다
그래서 相---> 空---> 性 이런 순서로 나간다고 보는거죠.
그래서 스님들이 공부하는 四集(불교 초학자를 위한 규봉대사가 불교의 교리를 개론한 네 가지 책. 書狀 · 都序 · 禪要 · 節要) 에서 도서에 보면... 그 삼종 이야기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3종 선3종 해서 모든 존재를 파악하는 어떤 그 안목의 3단계라고도 할 수가 있고요, 또 모든 존재가 존재하는 그런 그 입장을 3단계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존재하는 입장이 3단계니까 그 3단계의 입장을 이해하는 안목도 3단계라야 된다는거죠
●있는 것으로도 보고
또 한 단계 나아가서 ●없는 것으로 보고
또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동시에 공존하는 그런 안목으로도 보고
사실이 그러니까 있죠.
있는데 또 한 생각 돌이키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아주 없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동시에 공존하는 세계 ...
인연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인연 따라서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런 차원이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 불교 공부를 많이 하다보면 존재의 참모습에 대해서 우리가 그렇게 다른 어떤 세속적인 안목과는 달리 차원 높은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이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이면서 또 깨달음에 의한 가르침이 그렇게 5단계로도 나누어서 얘기할 수 있지마는 그 보다는 아주 선명하게 더욱 더 뚜렷하고 분명하게 이해를 할려면 3단계로 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런 입장입니다
그것을 흔히 禪家에서는그러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건 이제 상相의 입장입니다
모든 것이 있음의 입장이지요
●그 다음에 산은 산이 아니라 물은 물이 아니다! 라고 이렇게 하면...
그것은 空의 입장이고 無의 입장이고 없음의 입장이지요. 입장이 그런거지요.
모든 존재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에요.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어요
또한 있고 또한 없습니다!
●그 다음에 최후로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이다 이런 표현이 또 있어요
그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는 것인데...
옛날 조사 스님들이 일찌기 모든 존재를 보는 그런 시각을 그렇게 세가지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럴때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이다 할 때 ...
그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런 ●性의 입장에서 존재를 파악하는 그런 표현이지요, 흔히 법문할 때 많이 쓰지요.
이러한 것들이 禪에서나 敎에서나 보통 세상을 보는 인생과 우리 삼라만상을 보는 시각을 여러가지로 표현을 합니다. 반야심경의 팔만대장경에서의 위치라고 하는 것을 대강 그렇게 거칠지만 살펴보았습니다
그 다음 우리가 외우는 반야심경은 제목까지 270자 이렇게 하지요, 아주 짧은 경전인데, 대개 경전은 이와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 어디에 계셨고 누구와 더불어 있었다. 그래서 소위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하라고 6하 원칙이 경전상에 아주 잘 표현 돼 있는데... 반야심경은 그런 것이 생략이 돼 있습니다. 아주 짧은 경전이다 보니까... 그러면서 뜻은 깊구요...
그래서 의식을 할 때 법회라든지 아니면 어떤 불교 의식에서도 경전 한 구절을 읽고 시작하는데 그 경전이 바로 이 반야심경 아닙니까? 어떤 간단한 법회도 반야심경 읽지 않고 법회하는 경우는 없지요.
그렇습니다. 사찰에서 직원들이 조례를 한다든지 불교 단체에서 아침에 조례를 한다 든지 그런데 전부 반야심경 한 편은 다 외웁니다. 서울 총무원에서도 직원들이 많지요. 예불을 하고 아무리 간단하게 하더라도 반야심경 한 편 정도는 외우고 합니다.
참 좋은 의식인데요 반야심경의 독송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부처님의 인생과 세상사를 꿰뚫어 보는 그런 안목을 한 번 머리에 새기고 그것을 근거로... 그것을 밑바탕으로 해서 모든일을 처리하고 사물을 보자 하는 그런 뜻이겠지요.
우리 인생도 아침에 반야심경을 한 편을 외우고 그 반야심경에 근거해서 하루의 삶을 영위한다 할거 같으면 아주 여러가지가 해결이 잘 되고 잘 풀리고, 뭐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고 막히는 일이 있더라도 술술 잘 풀릴것이고 사소한 일들은 대수롭지않게 넘길 것이고 어지간한 일은 거의 정말 아주 하잘 것 없는 사소한 일로 대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삶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경전에는 으례히 제목이 있게 마련이지요. 반야심경 제목은 본래 경문에 있는 것은 아니고 마지막에 반야바라밀다심경을 마치다 이렇게 범문에는 범어로 된 경전에는 그렇게 돼 있다는데, 그런 경전 구성상의 이야기는 그만 두더라도 어쨋거나 언제 누가 붙였는지 하여튼 제목이 있습니다. 제목 있는 거는 참 잘 됐어요
불교의 경전의 제목은 특색이 있습니다. 제목 하나만 잘 이해하고 파악해도 그 안의 경전 전체의 뜻이 다 담겨있고 다 파악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화엄경이 그렇고 법화경이 그렇고 금강경이 그렇고 반야심경이 그렇고... 다 그래요 그래서 아주 불교 경전 제목은 치밀하게 지어졌습니다.
뭐~~ 앞 글자 두 자만 딱 떼어 가지고 경전 제목을 삼는다든지 아니면 그 편 그 장의 제목을 삼는다든지 하는 그런 유교 경전 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르지요 그래서 경전 제목만 외워도 한 권의 경을 외우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경전 제목 독송 하기를 바라지요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이렇게 했는데 ●마하는 크다 위대하다 훌륭하다 수승하다 뛰어나다! 이런 표현이에요. 불교 공부를 하다 보면 한문으로 해석이 되는 그런 낱말도 있고, 도저히 한문으로 해석이 되지 않는 낱말도 있고... 그래서 처음 공부할 때는 상당히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을 해서 대개 중국으로 그래서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이렇게 경과해서 또 오랜 세월 지나면서 우리 손에까지 오게 됐잖습니까?
그래서 대개 우리가 접하는 경전은 옛날 한문을 쓸 때 또 중국에서 맨 처음 인도말로 된 불경을 번역을 했고, 그래서 한문으로 된 경전을 우리가 그대로 공부를 하고 하는 그런 실정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도 한문으로 됐죠
그런데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번역하지 않는 낱말들이 상당히 많아요, 그러면서 현장법사가 번역을 하면서 ◆五種不飜의 원칙이다 이런 표현을 썼어요, 5가지는 번역하지 않는 그런 원칙이 있다. 한자로 번역할 수 없는 그런 범어를 5종류로 현장스님이 그렇게 열거하시면서 그렇게 규칙을 세웠습니다.
●비밀하기 때문이다(秘密之故不飜 ) 그랬어요
다라니라든지 그 다음에 어떤 진언이라든지 등등 그런 말 속에는 뜻이 깊고 아주 미묘해서 간단하게 그렇게 생각할 수없는 그런 내용이 담겨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은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번역해서 해석을 할래면 구구하게 해석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예불문의 헌향진언 같은 것도 번역을 했고, 앞으로 천수경의 다라니 같은 것도 해석을 해 볼 계획으로 있습니다.
그런데 경전상에서는 그렇게 길게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번역을 안한다 이러죠 비밀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뜻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함고(含多故不飜) 라 그랬어요. 바가범薄伽梵(인도에서는 덕이 있는 장부를 바가범이라고 한다. 부처님을 바가범이라고 불렀음)이라든지 등등 그런 말은... 摩訶라고 하는 마하반야 라고 할 때 마하 이런 말들도 뜻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많다, 수승하다, 승자가 수승할 승勝자죠, 크다 위대하다 훌륭하다, 이런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쉽게 번역할 수가 없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차방무고(此方無故不飜) 라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이 지방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말이 있어요. 이 지방에는 없다. 閻浮樹(인도에 널리 분포된 교목. 학명은 Eugenia Jambolana. 잎 길이 4~5촌. 葉脈이 가늘고, 葉面은 미끄럽고 광택이 있음. 4~5월경에 누르스름한 작은 꽃이 핌. 과일은 새알만하고, 익으면 자색이 되고 맛을 떫고 심)라든지 등등... 중국에나 한국에나 없는 그런 물건들을 고유명사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런 것들은 인도에서 쓰는 발음 그대로 써야지 어떻게 할 수가 없죠 번역이 안 되니까 있으면 번역이 되겠지만 그래서 그대로 두고 번역하지 않는 경우
그 다음에 ●순고고(順古故不飜)라 해서 옛부터 익숙하게 써 온 그런 낱말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든지 보살이라든지 아라한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언제부터인가 익숙하게 벌써 써 왔어. 그래서 그걸 번역하지 않고 번역하지 않아도 여러 사람들이 대개 알 수 있는 그런 낱말들 그래서 그건 또 번역하지 않는다 그래요
●그 다음에 존중고(尊重故不飜)라 그랬습니다. 반야 하는데 반야를 지혜라고 번역해도 되지만 그대로 두면은 어딘가 좀 무게가 있어 보이고 의미심장해 보이고 존중스러워 보이고 그런 느낌이 가는 낱말들은 또 번역하지 않고 그렇게 무겁게 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번역하지 않는 경우 이렇게 비밀하기 때문에, 뜻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지방에 없기 때문에, 옛 법을 따르기 때문에, 존중하기 때문에 뭐 이런 다섯가지의 이유로써 오종불번을 이야기 했습니다
●마하라고 하는 것도 이제 이것은 다함고라고 하는 많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번역을 하지 아니했다 그 다음에 ●반야는 깨달음의 지혜지마는 이것도 지혜... 이렇게 하는 것 보다 는 그래도 어딘가 반야 이렇게 두면 좀 더 근사해 보이죠 ●바라밀다... 바라밀다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심자나 경자는 그대로 번역을 또 했어요.
그래서 경 제목이 ●마하반야바라밀다... 이거는 범어고 ●心은 중심이라고 하는 뜻인데 여기서는 이 심자는 번역이 됐고 ●經도 번역이 됐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혼란스럽게 했나...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데 이렇게 함으로 해서 간단명료하고 뜻은 많이 포함하고 있고... 그런 좋은 점이 또 있습니다.
●마하라고 하는 것은 반야를 수식하는 말로 그렇게 흔히 이해하고 설명도 그렇게 하는데, 그냥 결국은 위대하다, 크다, 많다, 넓다, 없는 데가 없다, 온 우주에 꽉 차 있다... 이런 마하의 뜻이라면 결국은 우리 한마음 자리를 뜻 하는 것이지 달리 다른 것이 아니죠. 또 반야를 깨달음의 지혜라고 하는데, 아주 마하반야 = 위대한 지혜 이렇게 해도 좀 부족해요. 그래서 마하는 따로 떼 놓고 그야말로 끝도 한도 없는 그런 사람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그런 불성, 부처로서의 권능, 자격, 능력... 바로 우리 인간의 본성이며 부처의 본성, 그것을 마하라고 하자... 이렇게 이해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죠
그 다음에 ●반야만 하더라도 이미 깨달음의 지혜입니다. 이건 보통 지혜가 아니죠. 그래서 지혜... 깨달음의 지혜!
그것으로써 ●바라밀다...바라밀다는 도피안 그러죠. 저 언덕에 이른다...저 언덕에 이른다 고 하는 것은 이 언덕의 반대가 저 언덕인데 이 언덕은 어리석고, 집착 많고, 고통 많고, 문제 많고, 그저 여기 받치고, 저기 부대끼고 그저 여기에 맺히고 저기에 맺혀 가지고 일체 삶이 풀리는가 하면 맺히고 맺히는가 하면 또 풀리고... 이런 모든 고통과 문제와 번뇌와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반복이 되는 그런 삶의 세계를 이 언덕... 그래요
그럼 저 언덕 바라밀다라고 하는 저 언덕 ... 그런 문제가 다 해결된 곳을 저 언덕이라고 합니다. 고통도 없고 문제도 없고요 맺힌데도 없고 막힌데도 없고 그저 시원시원하게 툭툭 터져서 그냥 잘도 풀리고 잘도 해결되고 어려움이라고 하는게 전혀 없는 그런 어떤 삶과 그런 어떤 정신... 그런 마음 씀씀이 이게 이제 바라밀다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말하자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그런 가르침. 마하반야바라밀다 또는 반야바라밀다! 이 경전은 많죠
금강경만 하더라도 금강반야바라밀다죠 그리고 또 대품반야라고 하는 것도 흔히 금강반야바라밀다, 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 마하반야바라밀다, 그런 반야바라밀다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경전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 수 없는 반야부 경전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고 중심이 되는 경전이다
이 心자는 그래요 심자는 그렇게 봐야 됩니다. 그런 가르침 경전은 가르침이라는 뜻이지요 심자는 꼭 마음의 경이다 불교의 경전은 마음 경전 아닌 게 없습니다 전부 마음의 경전이기 때문에 여기 이 글자를 우리가 좀 더 교리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할려면 많고 많은 반야바라밀다의 경전중에서 핵심이 되고 중심이 되는 경전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런 가르침이다 그거죠
마하반야바라밀다는 많습니다, 그러나 요 작은 제목을 빼버리면 260자인데 아주 엑기스로 뽑아놓은 그런 핵심이 되는 가르침!!! 그래서 心經!!! 그렇게 하죠.
그러니까 이것은 짧은 가르침이지만 아주 수승하고 위대하고 어디에도 없는 것이 없는 그런 어떤 마음으로 아주 깨달음의 반야를 활용해서 저 언덕에 이르러 가는, 중심되는 그리고 핵심이 되는 가르침! 저 언덕에 이르러 가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는... 또 해결하게 하는 또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문제든지 취직문제도 좋습니다, 진학문제도 좋아요, 사업문제도 좋고 장사하는 문제도 좋고, 인간관계 문제는 더욱 좋구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어떤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 이웃과 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 일체 문제를 다 해결하는 열쇠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바라밀다가요!
그럼 반야바라밀다니까 깨달음의 지혜로써 해결하니까 해결 안 될 수가 없지요. 아주 경전이 담고 있는 의미는 참 무겁고 크고 책임도 대단히 무겁습니다.
또 살펴보면 근본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낱낱이 그 문제에 나아가 가지고 하나 하나 헤집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러니까 이렇게해라 저렇게 해라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게 아니거든요.
근본적으로 한꺼번에 그야말로 한 방에 날려 버리는 식으로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당치도 않는 해결책이 아니라 참으로 근본적으로 잘 해결하는구나!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해결책은 이거 하나 해결 하면 다른거 다 해결 되니까요. 그래서 이러한 정신 위에 모든 불교 적인 행사가 행해지고, 업무가 이 정신위에 이뤄지고, 법회도 이 정신위에 법회가 이뤄지고... 불공이 됐든 薦度祭가 됐든 기도가 됐든 참선이 됐든 무엇이든지 이 반야심경의 정신 위에서 행해질 때... 모든 문제는 물 흐르듯이 쉽게 쉽게 잘 풀리고 아무 어려움이 없을것이다! 하는 그런 뜻으로 불교의 모든 의식이나 법회나 행사나 업무나 이런 것에 앞서 반야심경을 외우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하루에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 가지고 하루일과를 시작할 때 반야심경을 이렇게
운다든지, 사경을 한 번 척 한다고 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반야심경 정신위에서 하루가 살아질 것이라 이렇게 생각 하면, 참 좋은 일이기도 하지요.
특히 공부하는 자녀들에게 하루에 반야심경 한 편정도 쓰도록 훈련을 시키는거 참 좋은 일일거 같아요. 글씨쓰는 법도 익숙해질 것이고, 한자도 익숙해 질것이고, 한문으로 해석하는 것도 익숙해 질것이고 무엇보다 아주 위대한 지혜가 여기서 나올테니까,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반야심경 공부 첫시간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이렇게 3일은 강의가 없는 날입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창에 79명이 이렇게 동참 해 계십니다 (세상끝님 ...........여울님! )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동참해서 법석을 빛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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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