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노을이 모래위로 흩어지는 아름다운 仙夢臺
<사진 글 ; 별장지기님>
선몽대에서 신선을 꿈꾸다
솔은 늙고 대는 높아서 푸른 하늘에 꽃힌 듯하고
강변에 흰 모래와 푸른벽은 그림그리기 보다 어렵구나
내가 지금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니
전날에 가서 기리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노라.
이렇듯 퇴계 이황은 선몽대(仙夢臺)의 절경을 시(詩)읊으면서 그 아름다움을 그렸다.
신선이 나오는 꿈을 꾼 후 지었다는 예천의 선몽대.
선몽대는 예천군 호명면 행소리마을 내성천 변에 다소곳하니 위치해 있다.
대는정면 4칸, 측면2칸의 목조와가로 8작지붕을 했다. 선몽대에는 퇴계의 친필 선몽대 편액과 퇴계의 원운(原韻)을 비롯하여 우암(偶巖), 약포 정탁,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금계 황준량 등의 차운시(次韻詩)가 걸려 있다.
1924년 우암의 유고와 유물을 보관하던 장서각이 소실되어 심유록만 전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은 「선몽대기」에서
「예천에서 동쪽으로 10여리 가면 한 냇가에 닿는다. 그 시내는 넘실대며 구불구불 이어져 흐르는데 깊은 곳은 매우 푸르고 낮은 곳은 맑은 파란색이었다. 시냇가는 깨끗한 모래와 흰돌로 되어 있어, 바람이 흩어지는 노을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람의 눈에 비쳐 들어 온다. 시냇물을 따라 몇 리쯤 되는 곳에 이르면, 높은 절벽이 깎아 세운듯이 서 있는데 다시 그 벼랑을 올라가면 한 정자를 볼 수 있다. 그 정자에는 선몽대라는 방(榜)이 붙어 있다.
선몽대의 좌우에는 우거진 수풀과 긴 대나무가 있는데, 시냇물에 비치는 햇빛과 돌의 색이 숲 그늘에 가리어 보일락말락 하니 참으로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대개 태백산 남쪽에서 시내와 산의 경치가 뛰어난 곳은 오로지 내성, 영천(지금 영주), 예천이 최고인데 선몽대는 유독 그 기괴한 모양 때문에 여러 군에 이름이 났다.
하루는 아버지를 따라 정상국(相國, 정탁)의 유상(遺像)을 배알하고, 길을 바꾸어 이 누대에 올랐다. 배회하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벽 위에 여러 시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에 하나는 관찰사를 지내신 나의 선대 할아버지께서 일찍이 지으신 것이었다. 시판(詩板)이 깨어져 글자가 갈라지고 한쪽 구석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으나, 자구(字句)는 빠진 것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손수 먼지를 떨어내시고 나에게 읽으라 하고서 말씀하시길, “공이 일찍이 영남에 관찰사로 내려 왔을 때 이 누대에 오르신 것이다. 공이 지금부터 200여년 전에 사셨던 분인데 나와 네가 또 이 누대에 올라와서 즐기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셨다.
그러고는 나에게 명하여 그 시판의 시를 옮겨 본떠서 번각(飜刻)하고 다시 단청을 입혀 걸어 놓게 하시고, 이윽고 나를 불러 기(記)를 쓰라고 하셨다.」
다산이 그의 부친 정재원을 따라 예천에 온것은 1780년(정조, 4) 그의 나이 17세였다.
예천고을 군수인 부친을 따라 온 다산과 그의 형 약전은 관아 서편의 반학정(伴鶴亭)에서 공부를 했다.
1780년 어느날 정재원 예천 군수는 아들 다산을 데리고 약포 정탁의 영정을 배알하고 예천 관아로 돌아오는 길에 이곳 선몽대에 들러 대의 내력과 명사들의 시판을 보았다. 200여년 전의 선조인 정사우의 시를 보고 정재원은 낡은 시판을 다시 새겨 걸게 했으며 아들 다산에게 기문을 쓰게했다. 선몽대는 우암(偶巖)이열도가 1563년 지은 대(臺)이다.
선비 우암(偶巖) 이열도(李閱道)
이열도(李閱道, 1538~1591)는 자가 정가(靜可), 호가 우암(偶巖)으로 찰방 굉(宏)의 아들이다. 진성이씨가 이곳 백송마을에 처음 들어온 것은 우암의 아버지 굉에서 시작된다. 퇴계의 들째형인 이하(李河)가 예천훈도로 있을때 안동 예안에서 예천의 용문 금곡으로 옮겨 왔는데 그의 둘째 아들 굉이 다시 금곡에서 예천 용문으로 옮겨오게 된것이다. 우암은 예천군 오명면 백송리에서 태어나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종조부 퇴계의 촉망을 받았다. 종조부 퇴계는 우암에게 “학업에 힘써서 충신(忠信)과 겸근(謙謹)으로 일상의 조신(操身)을 삼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깊은 애정과 관심을 쏟아 부었다. 1573년(선조, 6) 부친상을 당하여 무덤곁에 여막을 얽고 3년을 슬퍼한 후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에 임용되어 박사를 거쳐 1582년 사헌부감찰, 예조정랑, 1585년 고령현감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했다. 이후 평안도사를 사양하고 경산현감이 되었다. 그는 경산현감 시절 도백(道伯)의 부름을 받고 갔더니 도백이 책 제목을 쓰라고 하기에 “글씨 쓰는 것으로 나를 이곳에 오라고 하였는가?”하면서 그를 꾸짖으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 와 후학을 가르치다 54세에 생을 마쳤다. 그는 정사가 매우 엄격하면서도 분명했는데 아전이나 백성들이 그를 속이지 못하였다.
또한 집안 형편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개의치 않고 항상 공정하였으며 주변 사람들이 재물을 늘리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우리집은 옛부터 유도(儒道)를 숭상하여 왔는데 내어찌 분수 밖의 것을 바래서 집안의 전통을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그는 1563년 백송리 마을 앞 내성천 변에 선몽대(仙夢臺)를 짓고 자연을 소요했다. 선몽대에는 서애 유성룡, 약포 정탁, 학봉 김성일,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등 많은 거유(巨儒)들이 이곳을 거쳐가며 지은 시들이 걸려 있다.
높은 대에 올라보니 공중을 의지한 것 같구나
고기 잡고 낚시질하는 것, 나는 그러하질 못 하였네
꽃이 뜰에 떨어지니 봄이 이미 늦었는데
푸른 주렴 솔 그림자가 다시 소조(蕭條)하도다.
-서애 유성룡-
주인이 능히 스스로 맑고 빈 곳을 점쳤는데
낭원과 현도가 이보다 못하도다
꿈을 깨고 몇 번이나 대(臺)위에 누워서
하늘에 찬 달과 별을 보았을까
-약포 정탁-
반쯤 드리운 솔 그림자 푸른 공중에 기울어져
좋은 술을 두루미로 대하니 오늘 흥치가 어떠할까
자네를 빙자해 다시 유(儒)와 선(仙)의 글을 들으니
문득 세상 인심이 이 땅에 성근 것을 깨닫겠네
- 학봉 김성일-
옥같은 구름과 구슬 같은 달이 빈 대(臺)에 비치는데
유묵(遺墨)을 새로 새기니 그림 같구나
늘이 대에 올라 신선의 꿈을 꾸고자 하니
주인이 나를 기다려 드리웠던 발을 걷는구나
-한음 이덕형-
모래가 희고 내가 맑아서 담담해 빈 것 같으니
옥같은 산이요. 구슬 같은 전원에 비교하는 것이 어떨까
신선의 땅이 하도 멀어 오기가 어렵다 하나
이 정자에 오고감을 게을리 하지 말자
-청음 김상헌-
물속에 있는 신선의 집과 같이 거울처럼 비치는데
주인의 마음마저 담박한 듯하네
이틀 동안 선몽대에 오르내리니
천척이나 높은 세상 티끌이 생각에 소원하도다
난정(蘭亭)의 옛 자취가 이미 허무하게 되었으니
좋은 일 이때에 누구와 함께 할 것이냐
거북이와 학 같은 분들이 거듭 놀게 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가을이 오매 서신 보내는 것을 소홀하지 말진저
-정사우-
속인(俗人)이 이에 이르니 자연스레 마음이 허명하구나
신선을 꿈꾸는 마당에는 나래가 돋는 것 같도다
퇴계 선생이 먼저 시를 쓰고 우리 할아버지가 화답하였으니
예로부터 내려온 운치가 소홀하지 않았지요
-정재유-
물머리 청태(靑苔) 벽이 허공보다 더 푸르고
대(臺) 아래 맑은 물결 푸른 옥 같도다
강에 가서 낚시하고 산에서 나물 캐며
백년 동안 살아감이 낯설지 않겠구나
-최진방-
선비를 닮은 선몽대의 소나무
선몽대는 온통 소나무로 덮여 있다. 하늘로 하늘로 솟아오른 푸른 소나무 숲이 장관이다.
강희안(姜希顔,1417~1464)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소나무를 숭산(嵩山)에 심으면 바다의 정기가 몸안에 고이고 해와 달빛이 비쳐 봉황새가 날아와 쉴것이며 나무아래에는 샘물이 소리를 내어 흐를 것이고 신령스러운 바람이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무색하게 할 것이며 곧은 뿌리는 땅 속 황천의 깊이에 이르고 가지는 뻗어 푸른 하늘에 닿을 것이다. 줄기는 명당의 기둥감이 될것이고 이는 많은 나무중의 으뜸이라.”고 해서 소나무의 자리가 한 없이 높아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소나무는 빗속에 푸르고 눈속에 더욱 푸르르며 바람이라도 한줄기 부는 날이면 그 소리의 청아함이 그만이다. 햇살 고운 겨울날 눈을 덮어 쓴 소나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맑아옴을 느낀다. 소나무는 경박하지 않고 장중하며 화사하지 않고 엄숙하며 다변하지 않고 과묵하며 속되지 않고 고결하며 자질구레한 기교 또한 갖추지 않았다. 발랄하기보다는 숙성해 보이고 과시적(過時的)이기보다는 항시적(恒時的)이며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우며 평면적이지 않고 다차원적이며 편협하지 않고 화동적(和同的)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민족은 소나무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이러한 물질적, 정신적인 면 뿐만 아리나 소나무의 굳센 모습과 아름다운 심성은 면면히 오늘에 이어져 오고 있다.
소나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변하지 않는 푸르름에서 배어 나오는 고매한 선비의 기품이 느껴진다. 봄날 선몽대 소나무 벤치에 앉아 은은한 솔향에 가슴을 묻고 있노라면 노오란 송화가루 노을처럼 살며시 옷깃을 적셔 온다.
넓은 들판에 나홀로선 낙락장송, 금슬 좋은 부부처럼 동네에 우뚝한 부부송,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면 금새 하늘에 닿은 우리네 오욕을 빗자루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쓸어가는 소나무.
겨울이 오고 눈이라도 내리면 눈 속에 든 소나무는 장관이 축 늘어진 가지, 하얀 눈(雪)과 썩 잘어울리는 푸른 잎들. 또한 햇살이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소나무 위의 흰눈은 금빛을 내며 무아지경을 만든다.
조선 선비가 그리운 사람있다면 선몽대에서씩씩한 기상에 가슴 넓고 풍채 좋은 소나무 그늘에 앉아 솔바람 소리 벗 삼아 눈 한번 감아 보라 가슴을 찌르는 선비의 향기가 느껴질 것이다.
솔바람도 맑고 시냇물도 맑아 내 마음도 맑아진다.
어느 옛 선인이 시내와 솔밭 사이에 작은 집을 짓고 삼청(三淸)이라 했는데 이곳 선몽대에가서 소요하다보면 유독 그 삼청이란 말이 떠오른다.
‘솔바람이 맑고, 시냇물이 맑아 내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선몽대에 오르면 무심한 마음도 맑아진다.
「서경」에“위태로운 것이 마음이요, 잊기 쉬운것이 정이니 거듭 충고하건데 일에 임하여 실천하는 일을 두려워 하라”고 했으니 “마음의 관청은 생각이요, 생각하면 얻으나 잊으면 잃게 된다”는 것이다.
선몽대는 혹여 어느 이름없는 바닷가에 온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내성천변 솔밭아래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는 벤치는 이국적 풍경을 자아내게 한다. 텅 빈 내성천의 고운 모래는 쏟아지는 햇살을 끌어안고 연신 얼굴을 붉힌다.
선몽대 푸른 솔밭을 거닐다 돌아오며 도연명의 시(詩) 부진군시(赴鎭軍詩)를 한 수 되뇌어 본다.
구름을 바라보니 높이 나는 새에 부끄럽고
물에 임하니 노니는 물고기에 부끄럽네
처음뜻은 자연을 즐기려는 것이었는데
형적(形跡)에 얽매일 줄 누가 생각했오랴.
|
첫댓글 잘보고 읽고 ... 감상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