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보(李賢輔)의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자(字)는 비중(棐仲)이고 농암(聾岩)이라 스스로 호를 지었으며 연산 무오년에 등제하였다. 나이 70세에 참판으로 예안현(禮安縣) 분천(湓川)가에 물러나 살면서 애일당(愛日堂)을 짓고 말년을 한가로이 지냈다. 나이 90세에 지중추사(知中樞事)에 승질(陞秩.정3품 이상 품계에 오름)되었으며 '효절(孝節)'이라는 시호에서 알 수 있듯 농암은 이 땅의 효(孝)의 표상이다.
● 이 효절공(李孝節公)은 임술년에 사관(史官)이 되었다. 사관은 임금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는 직책인데, 멀리서 엎드려 있으면 미처 임금의 말과 행동을 들을 수가 없으니 탑전(榻前)에 가까이 가게 되면 언어와 동작을 기록하는 데 빠짐이 없게 할 수 있겠다 하니 폐주(廢主.연산군)는 마음에 거슬렸으나 그대로 두었다. 을축년에 폐주가 임술년에 탑전에 가까이 오기를 청했던 것을 보복하려 하여 공의 성명을 기록하지 않고 다만, “그때 검열(檢閱)로 있으면서 철면피로 수염이 긴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여, 이내 금부의 옥에 내려 국문(鞫問)하였다 (연산이 어처구니 없이 농암의 이름을 몰라서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했다는 일화도 있음).
● 농암이 참판으로 있을 적에 물러가기를 원하여 배[舟]를 사서 돌아가는데(당시는 한양에서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단양에서 소백산을 넘어 안동방면으로 통행하였음) 당시 벼슬아치들이 서울을 비우고 전송을 나와 도성문으로부터 제천정(濟川亭)까지 거마가 떼를 지어 모두 시를 지어 이별하니 당시에 성사(盛事)라고 칭하였다.
● 분천(湓川)에 물러나 거처하는데 동쪽 언덕에 커다란 바위가 물에 다달아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10여 장(丈)으로 매우 웅장하였다. 부모를 봉양하고 노닐며 완상하려고 그 위에 집을 짓고 이름을 애일당(愛日堂)이라 하고 농암(聾岩)이라 자호(自號)하였다. 물이 바위 앞을 지날 적에 여울을 만나 물살이 급해져서 장마 비로 물이 불으면 바위에 오르는 자가 남의 말을 들을 수 없어(귀머거리 바위,즉 농암이라는 자호를 쓴 이유) 농암이 분천가에 퇴거한 것이다. 시내와 개골 사이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흥이 일면 문득 노는데 빠져 돌아가기를 잊곤 하였다. 그리고 반드시 산을 즐기는 조그마한 도구를 가지고 다니며 숲을 헤치고 봉우리에 오르고 들을 끼고 시내를 따라 노니, 농부나 목동이 보고도 재상(宰相)인 줄을 몰랐다.
● 시골로 돌아가 늙으면서는 월란(月瀾),임강(臨江) 등에서 놀기를 제일 좋아하여 작은 배를 짧은 노로 저어 왔다 갔다 하며 놀면서 시중드는 아이에게 「어부사(漁父詞)」를 부르게 하여 흥을 실어 아득히 세상을 버리고 자신의 지조를 지키려는 뜻이 보였다.
● 일찍이 조그마한 정자를 집 옆에 짓고 명농(明農)이라 편액하고 벽에 도연명의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려서 걸어 놓으니 사람들은 모두 퇴휴(退休)의 뜻이 있음을 알았다.
● 이 효절공이 일찍이 차례를 넘어 당상(堂上)의 품계를 제수받고 서울에서 내려올 때 양친이 모두 아무 탈이 없었다. 옥관자를 만지며 좋아하여 말하기를, “이 관자는 구멍이 많아 꿰기가 어렵겠구나.” 하니, 공은 어리광으로 답하기를, “걸기가(벼슬하기가) 어렵지 꿰기는 쉽습니다.” 하니, 그때 사람들이 미담(美談)으로 여겼다.
● 일찍이 부제학으로 부모를 뵈러 오는데 선친의 나이는 94세, 숙부 균(鈞)은 92세, 장인 첨지중추(僉知中樞) 권수(權受)는 82세였으므로 고을 사람으로 70세 이상인 6명을 모아 구로회(九老會)를 만들고 공이 직접 어린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며 효도하였으니, 지극한 효도는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흥기시켰다. (끝)
出典: 해동잡록5권 / 해동야승.고전번역원 역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