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철학이야기
황진이의 유혹-서경덕
서경덕(1489년~1546년, 조선의 대표적인 처사)의 아버지는 남의 땅을 소작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소작료를 속이지 않고 꼬박꼬박 내어 땅주인은 일일이 확인하지도 않고 받았다고 한다.
서경덕은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였고, 또 열심히 학문을 닦았다.
공부에 열중할 때에는 밥을 먹어도 맛을 몰랐고, 길을 걸어도 어디를 갈지 몰랐다고 한다.
측간에 가서도 무엇을 골몰히 생각하느라 대변보려던 생각을 잊고 그냥 일어나 나오기도 했다.
며칠씩 잠을 자지 않는가 하면, 조금 눈을 붙여 꿈속에서 풀지 못한 이치를 알아내기도 하였다.
지나친 독서와 사색 탓으로 몸이 상하였고, 결국 스물한 살 때에는 전국 곳곳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몸을 회복시켜야 했다.
서경덕은 스물다섯 살 때에 이미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조정에서는 과거를 보지도 않은 그에게 벼슬을 천거했다.
하지만 이런 데에 마음을 빼앗길 그가 아니었다. 쌀이 떨어져 며칠씩 굶고 지내는 판인데도 조정의 녹봉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지 못해 마흔 셋의 나이에 과거장으로 나갔고,
마침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을 하였다.
그러나 벼슬살이에 대비하기 위해 들어간 성균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어수룩한 행동과 촌스러운 몸가짐은 세련된 권문세가 자제들의 눈에 좋게 비쳤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성균관에서마저 뛰쳐나온 그는 벼슬을 포기한 채, 개성으로 돌아와 송악산 자락에 있는 화담(花潭)에 자리를 잡았다.
화담 옆에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못 다한 학문에 정진한 것이다.
그의 부인은 근처 마을에 살면서 화담의 초막에 가 밥을 지어주었는데,
그리하여 이때부터 ‘화담 선생’이라는 별호(다른 이름, 호)가 그에게 붙여졌다.
그의 소문은 널리 퍼져 개성 일대는 물론이요, 서울에서까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학문에 정진하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경건하였는데, 그 유명한 황진이와의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개성 출신의 명기(名妓) 황진이는 원래 진사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는데,
사서삼경과 시서, 음률에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용모가 빼어났다.
열다섯 살 무렵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相思病)으로 죽자 기계(妓界)에 투신하여
탁월한 시재(詩才)와 미모로 많은 문인들을 매혹하였다.
당시 십 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살아 있는 부처’라 불리던 천마산의 지족 선사를 정욕으로 유혹하여
파계시키기까지 하였다.
이어 당대의 대학자인 화담을 유혹하기 위해 어느 비 오는 날, 얇은 가사 옷을 걸치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빗물에 흠뻑 젖은 옷이 아리따운 몸에 달라붙어 그야말로 맨몸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온갖 교태를 부리며 화담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끝내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황진이가 말하기를 “지족선사는 나의 농락으로 하룻밤 사이에 전공(前功)이 허물어졌다.
그러나 내가 화담 선생을 가까이 한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그 분의 마음과 몸을 어지럽히지 못하였다. 참으로 성인(聖人)이시로다!”고 하였다.
이후 개성 사람들은 황진이와 박연폭포, 화담을 묶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불렀다.
화담 서경덕은 기(氣)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창하였다.
그에 따르면, 천지만물은 모두 기로 말미암아 생성되는 물질적 실체이다.
귀신이나 죽음의 문제도 기(氣)의 모임과 흩어짐에 의해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하다.
이러한 서경덕의 유물론적 사고에 의해 풍수지리설과 같은 미신이나 불교의 공(空) 사상,
도교의 무(無) 사상 등은 설 땅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