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특별 소개 >
창간 32주년 특별소개 2
숭산 선사의 선문답 분류법,
사여(四如)에 관한 고찰:
선 수행자 깨달음의 깊이는 측정이 가능한가?
이글은 2014년 International Journal of Buddhist Thought & Culture 에서 출판된 (B. Hyun Choo) 논문, “숭산선사의 ‘사여 (四如)’는 선 수행자의 깨달음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을까?”를 최범산 불자가 미주현대불교 독자를 위하여 저자와 수정 보완하여 번역한 글이다. 각주와 참고 문헌은 지면 관계로 생략하니 필요한 분은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원제목과 저자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Author: Choo, B. Hyun, Ph. D. bhyun.choo@stonybrook.edu
Translator: Jay J. Choi, MD., doctorjaychoi@yahoo.com
‘Can Seon Master Ven. Seungsahn’s Four Suchness (四如) Measure the Buddhist Enlightenment?’
International Journal of Buddhist Thought & Culture 22: 87–114, 2014.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9415486
글 / 최종일(범산) 박사
초록
간화선은 한국 불교 조계종에서 가장 정통한 수행방법으로 인정되어왔다. 그것은 불교적 깨달음에 이르는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자성에 대한 성찰을 이루어 낸다고 주장한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스승은 얼핏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일련의 질문을 통해 정통적인 인가를 제자에게 부여한다. 1970년대 초, 고 숭산 선사는 체계적으로 선 대화를 분석하고 논리적인 체계 범위 내에서 수행자의 수행 경지를 평가하는 유용한 도구로서 “사여(四如)”를 소개했다. 이 글은 숭산 선사의 독특한 공식이 어떻게 간화선의 이해하기 어려운 특성에 관한 의미와 중요성을 밝혀내는지 분석적 검토를 시도한다. 또한 선에서의 깨달음이 과연 니까야에 나타난 붓다의 가르침과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 그 타당성을 살펴본다. 저자는 간화선이 삼법인에 관한 붓다의 궁극적인 성찰을 직접 유도하지는 않을지라도, 숭산 선사의 사여는 큰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에게 선의 신비주의를 벗어나게 하는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키워드: 숭산, 사띠 빠따나경, 간화선, 회광반조(廻光返照), 사여(四如), 안수정등(岸 樹井藤).
I. 들어가는 말
중국 선의 전통은 대각을 성취하는데 사용되는 다양한 실천 방법 중에 독특하다. 그것은 특히 기술적 측면에서 ‘비논리적’ 의문을 제기하고, 의표를 찌르는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을 하거나, 소리 지르고, 스승을 때리는 등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내던지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적, 물리적 기술을 쓰는 이유는 스승이 제자들로 하여금 합리주의 지적 능력의 마지막 장벽을 깨뜨려서, 궁극적인 위대한 깨달음이 몰록 일어나게 할 목적으로 행사한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음을 확인 받으려면, 수행인은 섬광 같은 자발적인 통찰력으로 ‘절대’를 깨치어, 합리적인 생각이나 판에 박힌 표현에 의존하지 않는 반응을 보여야 한다고 알려져있다. 바로 그때, 스승은 공식적으로 제자의 깨침의 상태를 승인하고 적법한 정통 확인의 방법인 인가 (認可)를 부여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스승은 일련의 후속 질문을 행하고 제자는 스승이 완전히 만족할 만한 ‘재치’ 있는 즉답을 해야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선은 현대 지식인, 특히 이원론적 서양 전통 지향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성적, 담론적인 논리를 초월하는 애매하고 불가해한 것으로 비추어진다. 따라서 ‘선 수행자 깨달음의 깊이는 측정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원천적으로 모순어법 (oxymoron)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잘못’을 무릅쓰고 간화선에서 사용하는 활구참선법에 신비주의를 벗어난 합리적 접근이 가능한 ‘논리적인 명확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필자는 다양한 선문답을 분류하는 최초의 방법으로 알려진 숭산 선사의 사여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 불합리하게 보이는 선의 특성과 또한 선은 왜 일반적인 이성적 이해를 초월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통찰력 있는 암시를 통하여 최소한 이론적으로 살펴보는 계기를 준다. 아울러 붓다의 사념처 (四念處, Satipatthāna)에 비추어 3장에서 자세히 논의될 것이다.
II. 선문답의 성격
선사는 ‘대답 할 수 없는’ 선 질문을 통하여 해체의 지혜를 가르친다. 그러나 제자가 해체 자체에 애착심을 갖고 집착할 경우, 스승은 또한 집착 그 자체를 제거한다. 박성배 교수는 “깨침과 깨달음” 에서 그와 같은 질문은 불교 수행자에게 이른바 전의 (轉依 āśraya-parāvṛtti, 의식의 근본적인 변혁)를 경험하게 하는 훌륭한 도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을 지적한다 (Sung Bae Park, 1983, p. 126-130). 즉 인간 존재의 근본 (āśraya/alaya)이 변혁될 경우 (parāvṛtti), 우리는 이원적 현상세계를 넘어서, 완전히 다른 불이 (不異)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로 선의 질문은 짧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주어지고, 대답은 종종 전의를 경험하지 않은 수행자에게는 얼핏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론은 대승 불교의 전통적인 유가행파의 교리에 설명되어 있듯이, 분별적 관점 (徧計所執性)의 집착을 제거하면 바로 완벽한 세계상 (圓成實性)을 즉시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분별적 관점과 완벽한 세계상은 모두 연기법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성배 교수는 변계소집성의 분별성으로부터 원성실성의 완전성과 자성의 자각으로의 변화는 연기법에 의거하여 전의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수행자가 어떻게 그것의 돌파구를 찾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유가행파는 삼성설 (三性說, Trisvabhāva)을 도입하여 포괄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삼성설은 하나의 세계를 보는 세 가지 관점을 설명하는 것으로 즉 의타기성 (依他起性), 변계소집성 (徧計所執性), 그리고 원성실성 (圓成實性)을 가리킨다. 박성배 교수는 어떻게 상호 의존하는 의타기성이 분별적인 변계소집성과 완벽한 원성실성과 서로 엮어지는 가를 설명한다. 의타기성은 서로 의지하여 같이 일어나는 세계이며 깨치지 못한 중생의 분별하는 변계소집성과 깨침을 이룬 부처님의 완벽한 성품인 원성실성의 모두를 위한 기초가 된다. 이와같은 의타기성을 인식하지 못한 평범한 중생은 변계소집의 분별성에 집착한다. 이것은 주체와 객체가 거짓으로 차별되는 깨치지 못한 중생의 이원론적 세계이다 (Sung Bae Park, 1983, p. 129). 중요한 전환의 순간은 평범한 인간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체험 실현인데 이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로 표현되는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 이것에 의해, 인간의 의식 구조 전체가 완전한 변화를 이루는 실현의 순간, 수행자는 영원히 빛을 발하는, 그리고 더없이 행복한 마음의 존재: 진여 자성 (眞如Tathatā/自性Svabhāva)을 각성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부처님의 본성과 다르지 않다는 상태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진여 자성에 기초하여 경험되는 전의의 특징은 보통의 의식 상태에 투영될 때 일반적으로 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것에 대하여, 틱낫한 스님은 명상의 목표는 7식(manas) 과 8식 (ālaya vijñāna)의 근저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Thich Nhat Hanh, 2006, p. 197).
III. 붓다의 사념처(四念處, Satipatthāna)
붓다의 가르침은 수행인을 도와주는 자비로운 노력의 일환으로, 다양성 있는 정신 훈련과 명상의 방법을 제공하며 또 이것을 필요로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불교가 다른 지역, 특히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파되면서, 여러 나라의 고유한 성향과 특성에 적응하여, 선의 전통과 같은 여러 가지 다양한 가르침으로 발전 내지 변형되었다. 붓다는 원래 그 본질을 생생하게 빠알리 경전 두 곳 (마지마/디가 니까야)에 기술되어 있는 사념처경(Satipatthāna Sutta)에서 분할되지 않은 단일 경로인 “하나의 직통로” (ekāyana maggo, direct path)라고 극구 칭찬한다. 아날라요는 그것은 하나의 목표, 즉 열반으로 가는 혼자 스스로 걸어야 하는 나눌 수 없는 직접적인 길이라고 주장한다 (Anālayo, 2013, p. 12). 이것은 또한 거의 모든 번역에서 사념처경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유일한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Gethin, 2001, p. 64). 사념처 수행에서 감각은 종교적인 경험으로의 변환을 유도하는 불가결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왜냐하면 몸의 여섯 가지 감각 능력 (제 6근은 의지)를 바탕으로 지각 인식의 현미경적 분석을 통한 연속적인 현실의 내성적 관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왜 그것이 “유일한 방법”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인간 존재의 순화를 위한, 슬픔과 통탄의 극복을 위한, 고통과 슬픔을 없애기 위한, 진정한 구도의 길을 달성하기 위한, 그리고 열반의 실현을 위한 직접경로인 즉 사념처이다. 네 가지 기초란 무엇인가? 비구는 몸을 단지 몸으로서, 열심히, 마음을 챙기어 인식하고, 세상사에 대한 탐욕과 슬픔을 멀리 하면서 명상한다. 그는 감정을 감정으로서, 열심히, 마음을 챙기어 인식하고, 세상사에 대한 탐욕과 슬픔을 멀리하면서 명상한다. 그는 마음을 마음으로서 열심히, 마음을 챙기어 인식하고, 세상사에 대한 탐욕과 슬픔을 멀리하면서 명상한다. 그는 마음의 대상을 마음의 대상으로서 열심히, 마음을 챙기어 인식하고, 세상사에 대한 탐욕과 슬픔을 멀리 하면서 명상한다. (Ñāṇamolí and Bodhi, 1995, pp. 145)
니까야에 나타난 붓다의 “하나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표현은 특히 영적 스승으로서 겸손하지 않고 부적절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붓다는 정각 (Sambodhi)을 얻은 후 사념처야말로6 년 동안..5년..2 년, 1년.. 7 달, 2달, 한 달, 단지 7일 이라도 올바로 수행하면 선정 (jhānas)을 얻어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고 극구 칭찬하면서 선언한다 (Ñāṇamolí and Bodhi, 1995, p.155). 이것은 실제로는 친구나, 가족, 교사, 또는 심지어 신 (神)까지도 대신 해 줄 수 없기 때문에 혼자 스스로 꾸준히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스스로의 큰 깨침에서 이것을 확인한 붓다의 ‘자신 있는’ 선포라고 할 수 있다. 불교도들은 붓다가 자신의 깨달음의 본질을 이와 같이 명시적으로 선언한 것은 단지 겸양의 미덕을 넘어서는 확신에 찬 주장으로, 데칼트-뉴톤적인 후대의 ‘객관적인’ 방법으로는 표현 불가능한 것으로 이해한다.
천여 년 후, 사념처의 본질은 진화하여 독특한 중국 선수행의 형태인 간화선으로 부분적으로 활성화되었으나 붓다가 제시한 지각은 강조되지 않은 형태로 나타났다. 특히, 간화선에서는 화두에 대한 순수한 집중만이 결국 자성의 근원에 도달하게 되는 내면적 성찰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내면의 마음에서 출현하는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라고 불리는 과정으로 이와 같은 전통은 임제 의현이 창시한 임제종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말이 입 밖에 나오자마자, 내면의 마음에서 나오는 광채로 자신을 돌이켜 역으로 추적하되, 다른 아무 곳에서도 찾지 말아야한다. 만약 몸과 마음이 불조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즉시 자신을 무위로 이르게 하면 깨쳤다고 이름할 수 있다. (T 1985.47.0502a12,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録)
그러나, 간화선에서는 여섯 감각 능력을 사용하는 인식작용은 궁극적인 종교 경험으로 이끄는 변환과정에 있어서 항상 사용되지는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대신, 간화선에서, 선사들의 소위 인가 일화들이 공안으로서 수집되었고, 이처럼 모은 공안을 선 스승들은 제자들이 명상하는 동안 집중하여 궁극적 실재의 본질에 관한 의미를 철견(徹見)하도록 사용하였다. 대한 불교 조계종에서 편찬한 “간화선, 조계종 수행의 길” (2005, pp. 32-44)에서 밝혀진 대로, 이와 같은 간화선법은 한국 불교 조계종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주된 확실한 수행법으로 확고하게 알려져있다. “간화선”에서는 대혜 종고 선사가 체계화한 간화선이 조사선의 핵심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수행법이어서 조사선이 강조하는 견성 체험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사들이 마음의 본래면목(本来面目)을 바로 보였던 말길이 끊어진 언행을 잘 정형화한 화두를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깨치게 하는 탁월한 수행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불교 수행자들은 간화선이야말로 한국 불교의 최고 이상이며 목적인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7대 종정(宗正) 이었던 성철 선사에 의해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인 선문정로 (禪門正路)에서 재확인된다. “선문은 견성이 근본이니 견성은 진여자성을 철견함이다” (퇴옹 성철, 1981, p.2).
IV. 숭산 선사의 분석적 방법: 사여
1970 년대 초에 미국에 한국 선을 전한 초기 선사중의 하나이면서 서구에 선을 전파한 가장 영향력 있는 선사중의 하나로 한국의 달마라는 칭호를 받았고 제자들 사이에서 자비심 많은 가르침과 통찰력 있는 유머 감각으로 유명했던 숭산 선사 (1927~2004)는 논리적 구조 범위 내에서 체계적으로 선문답의 특성을 평가하는 분석 도구를 소개했다. 이것은 ‘분석적’ 또는 ‘체계적’ 등의 용어들이 선 전통의 본질과는 일반적으로 양립하지 않는 미증유의 독특한 방법이다. 사실, 이러한 분석 도구는 진지한 현대 지식인에게는 처음으로 제시된 것으로서 선의 독특한 특성을 관찰하는 것은 은유적으로 “밤하늘에 멀리 있는 별을 보는 것”으로 설명 될 수 있다. 망막의 명암과 색갈을 구분하는 세포의 배열 차이 때문에 별에 직접 초점을 맞출수록 별은 흐리게 보이고, 초점을 약간 비끼면 별이 조금 더 잘 보이는 것과 같다. 혹은 그것은 비유적으로 ‘자신의 눈은 직접 볼 수 없으며, 또한 자신의 엄지손가락으로는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직접 느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선의 분석적 접근은 정확도에 관한 한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자체 내에 만들어진 붙박이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숭산 선사의 직접 가르침과 선사의 저술 (Seung Sahn, 1992, pp. 218-219; 숭산행원, 1992, pp. 542-543)에서 인증된 대로 “사여”를 재고찰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사여란 숭산 선사에 의해 정형화 된 ‘어떻게 깨달음을 평가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한 독특한 체계이다. 구체적으로는, 그것은 수행자가 선문답에 접근할 수 있게 하여주고 수행자가 얼마나 만족스럽게 대답했는지 반어적이지만 ‘정확히’ 측정하는 척도를 제공한다. 선문답에 대한 데카르트-뉴톤적 접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더 정확하게는, 언어를 넘고, 사유를 넘어, 그리고 어느 서술적 표현 영역을 넘어서는 수단으로 간주된다. 언어를 넘어서는 이러한 설명은 수수께끼 같은 모순 자체로 보일 수 있지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비유에 나타나는 인식의 한계를 염두에 두고, 숭산 선사는 형언할 수 없는 진여/자성을 정교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분석적 도구인 사여를 창안했다. 사여는 그의 저술, “세계 일화 (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에서 356번째 공안이다.
1) 무여 (無如)는 진정한 본성, 보편적 생각 이전에 원초적 본체이므로 개구즉착 (開口卽錯)이라 입을 열면 그르치는 원점이다.
2) 일여 (一如) 는 원점을 나타내나 그 기본은 이름도, 형체도, 언설도 없다. 주객이 일체요, 본성이 바로 본체이므로 그것은 입을 열지 말고 나타내는 것이다.
3) 여여 (如如)는 모두 진리요, 본체 아님이 없음을 나타내는 진리의 세계이다. 원점을 유지하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이 모든 것이 진실이다.
4) 즉여 (卽如)는 순간순간의 올바른 삶을 의미하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이다. 이것은 항상 정확한 상황판단, 올바른 관계 및 올바른 기능을 의미한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대자유와 대 평등, 대자비의 발로이다. (Seung Sahn, 1992, p. 218)
숭산 선사는 그의 저술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사여를 다음과 같이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설명한다.
무여 (無如, No Suchness) -------------- 원점 (原点, The Primary Point)
일여 (一如, One Suchness) ------------- 전일 (全 一, The One Wholeness)
여여 (如如, Such Suchness) ------------ 이사 (理事, Phenomenon and Principle)
즉여 (卽如, Immediacy Suchness) ---- 사사 (事事, Phenomena and Phenomena)
이 사귀는 역자가 1980년Provident Zen Center 에서 숭산 선사로부터 사여에 관한 자필 가르침을 직접 받은 것을 영어로 번역하여 첨부한 것이다. 사여의 의미와 차이를 명확하게 하기위하여, 선사의 저술, 세계일화에 나타난 것과는 약간 다르지만, 숭산 선사의 직접 가르침에서 이해된 내용을 바탕으로, 추가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첫 번째 여(如): 무여는 어느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단순히 진여 자성을 원점으로 가리킨다. 이것은 사고이전 또는 무념의 영역을 의미하므로, 어떤 설명을 하든 엄밀하고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2) 두 번째 여(如): 일여는 ‘입을 열지 않고,’ 진여 자성을 가리킨다. 진여 자성의 원래, 필수 기능은 하나의 전체성인 전일(全一)이다.
3) 세 번째 여(如): 여여는 보거나 듣는 모든 것은 진여 자성의 현현에 불과하여 이사(理事, 현상과 원리)가 서로 걸림 없는 영역이다 (理事無碍法界).
4) 네 번째 여(如): 즉여는 진여자성의 온전한 기능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 모든 현상은 현상과 현상의 완벽한 조화와 서로 걸림없는 영역이다 (事事無碍法界). 모든 현상은 서로 장애 없는 이상적인 세계이다. 이처럼 숭산 선사는 분명히 화엄종의 사법계관 (四法界觀)에서 여여와 즉여의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사법계관은 화엄종의 우주관으로 화엄종 제3조, 법장 현수(法藏 賢首, 643-712)에 의하여 서술된 개념으로 법장 현수는 화엄경 탐현기(華嚴經 探賢記) 20권 등 저서에서, 전 우주를 일심으로 일관하는 화엄의 교리를 크게 밝히고 이것을 현상과 본체로 보는 네 가지 영역(법계) 으로 관찰하여 화엄종의 조직적 체계와 5교 10종의 교상판석(敎相判釋)을 이루어 놓았다 (Keown, 2003, p. 210). 사법계관은 다음과 같다. 즉 (1) 사법계(法界事): 우주의 사사물물 (事事物物)은 각기 구별을 가지고 한계가 있는 차별적인 현상계를 말하고, (2) 이법계(理法界): 우주의 사사물물은 모두 그 본체가 진여인 원리의 영역을 말하고, (3)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본체계와 현상계는 일체불이 (一體不二)의 관계에 있어 연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그 본체는 무자성일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서로 융합하여 방해하지 않는다. 즉 현상과 원리는 서로 상호 침투한다. (4) 사사무애법계 (事事無碍法界): 현상계는 절대 부사의(不思議)한 것으로 각기 연(緣)에 따라 생기는 현상으로 서로가 자성을 지키지만, 서로 사(事)를 상대시켜서 보면 다연(多緣)이 서로 상응하여 1연(一緣)을 이루고, 1연은 널리 다연을 도와서 서로 그 작용이 교섭하여 개개의 현상계는 서로 막힘없이 무한히 중첩되는 사사무애 중중무진(事事無碍 重重無盡)임을 말하며 무진법계 (無盡法界)라고도 한다. 이것은 이상적인 세계로서, 모든 현상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서로 막히지 않는 영역을 말한다 (전관응, 1988, p. 122 & 660). 화엄종에서 모든 개개의 현상계는 절대 또는 일심(一心, 한 마음)의 완전한 일원성에 존재한다고 본다. 그것은 모든 특별한 현상에서 떨어져 있는 것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법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원리와 현상이라고 불리는 모든 현상의 서로 완벽한 상호 관통을 주장했다. 이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법장은 많은 형상과 은유에 의존했다. 그 중 하나는 힌두교의 신 인드라의 그물망으로 세계를 묘사하는 “인타라망”(因陀羅網, Indra’s Net)의 비유이다 (Choo, B. Hyun and Jay J. Choi, 2017, pp. 63-64). 낱낱의 그물 마디마다 보주 (寶珠)를 달았고, 그 보주의 하나하나마다 각각 다른 낱낱 보주의 영상이 반사되어, 각각의 광채가 전체 광채의 일부분이 되고, 전 광채를 각각의 광채로 받아들여서 화엄에서는 이것을 상즉상입 (相卽相入) 하고, 중중무진 (重重無盡)하다고 말하는 예로 들고 있다 (전관응, 1988, p. 122 & 123). 화엄에서는 더 나아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다른 대승사상과 구별된다. 현상과 절대의 관계가 아닌 현상과 현상 사이의 관계에 집중한다. 모든 현상은 하나의 원리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형상은, 서로 완벽한 조화의 상태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마치 같은 바다에 일어나는 낱낱의 파도와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생명이 있든 없든 최고 원리의 표현이고, 따라서 부처의 성품과 하나가 된다 (Fischer-Schreiber, 1991, p. 93). 숭산 선사는 이와 같이 사여의 개념을 화엄사상의 사법계관에서 도출했다고 밝힌다. 수행자를 시험하고 지적 능력의 가장자리로 인도하기 위해서 숭산 선사는 다시 일례로서, 연필과 책의 유추로서 비유한다.
연필이 책과 동일한가 혹은 다른가? 만약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것에 집착되어 있는 것이고, 동일하다고 대답하면,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지금, 당신은 대답을 반드시 하도록 강요되고 있다. (숭산행원, 1992, p. 542)
이것은, 소위 1700 공안하나인 수산죽비 (首山竹箆, 무문관 43화, T 2005.48.292-299c)와 비슷하다. 실제로, 선사들은 흔히 특정 상황에 따라 네 가지 답변을 채택한다. 숭산 선사는 다음과 같이 각 종류의 실제 예제로 설명한다.
‘침묵’의 형태인 대답은 무여의 경우이고, 일여는 ‘할(喝 소리),’ ‘봉(棒),’ 또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는(一指)’ 것으로 표시된다. 여여에 속하는 대답은 ‘연필은 노랗고, 책은 파랗다.’ 라고 할 수 있고, 즉여는 ‘연필로는 쓰고, 책을 읽는 것’ 에서 가장 잘 표현된다. (숭산행원, 1992, pp. 542-543)
V. 숭산선사의 사여의 응용
사여의 개념을 응용하여, 숭산 선사는 안수정등(岸樹井藤 , “A Vine-tree off the Cliff hanging into the Well”. 이 일화는 빈두로돌라사위우타연왕설법경, 賓頭盧突羅闍爲優陀延王說法經T 1690. 32.784c-787b에서 처음 비롯되었다)이라는 유명한 공안에 관한 다른 선사들의 답변을 비교 분류하여 평가한다. 이 일화는 종종 한국불교 선 전통의 여러 선사에 의하여 공안으로 인용되고 있는 극적인 표현으로, 매우 심각하고 비참한 애처로운 곤경에 빠져있는 다음과 같은 실존적인 인간의 상황을 보여준다:
어느 사람이 망망한 광야를 걸어가는데 [인간의 삶의 여정], 갑자기 광폭한 야생 코끼리 [무상]가 그를 쫓아 따라오고 있다. 급박한 위험을 느끼면서, 그는 삶과 죽음의 상황에서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절벽처럼 깊은 우물 속에 걸려있는 등나무 덩굴 [수명]을 발견하고, 서둘러서 그 덩굴을 잡고 내려간다. 그런데 깊은 우물 밑에서는 거대한 독룡 [사망]이 입을 크게 벌리고 올려보고 있고, 우물 주변 사면에는, 무시무시한 네 마리의 뱀 [신체의 네 성분]들이 똬리를 풀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어느 틈인가, 절벽 같은 우물 위에서는, 검고, 흰 두 마리의 쥐 [낮과 밤]가 나타나서 나무 덩굴을 갉기 시작한다 [생명이 매 순간 짧아지고 있음]. 덩굴이 잘려나가는 순간, 그 사람은 즉시 독룡의 입으로 추락하여 잡혀 먹히게 되어 있다 [죽음]. 이 사람에게는 깊은 우물 중간에 걸려 있는 나무 덩굴에 절망적으로 매달려 있는 것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한편, 나무의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그 위에 있던 벌집이 기울어져서, 그는 수많은 벌의 독침을 쏘이게 된다 [잘못된 견해, 생각, 행동 등]. 위를 보니, 그는 들판에 큰 불이 범람하여 등나무 뿌리를 태우기 시작한다 [노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우연히, 그는 몇 방울의 꿀[오욕] 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신의 입으로 똑똑 떨어지는 꿀을 맛보는 순간, 그는 순간적으로 위험한 상황을 잊고, 단맛 [삶의 작은 즐거움]의 황홀경에 빠진다 [괄호 안에는 실제 인간의 삶이 비유적 의미로 표시되어 있다].
20 세기 초에, 도봉산, 망월사 (望月寺) 에 주석하고 있던 용성 선사는 처음 이 비유를 화두로 사용하여 당시 잘 알려진 일곱 선사에게 묻는다.
나무 덩굴에 매달리어 꿀을 맛보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가 있을까?
춘성 선사는 ‘미소’로 대답했다.
향곡 선사는 ‘아이고, 아이고!’
월산 선사는 ‘지금은 불국사에 잘 머무르고 있다’ (我現在佛國寺安住).
탄허 선사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밤에도 쉬지 않는다’ (流水聲聲夜不休).
벽초 선사는 ‘안수정등을 내려놓아라’ (放下着岸樹井藤)
고봉 선사는 ‘아야, 아야!’
전강 선사는 ‘달다, 달다’ 하였다.
용성 선사는 전강 선사의 대답을 비할 데 없다고 칭찬한다. 그 후, 혜암 선사는 ‘입으로 꿀을 빨면서, 손가락으로는 용의 입을 가리키리라,’ 그리고, ‘묻는 사람이 자신의 몸과 생명을 잃게 되리라’(問者喪身失命). (Shin, Myo-Bong, 1986, pp. 204-207)
후에 숭산 선사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사여 분류 체계에 따라 용성 선사가 수집한 여러 선사의 대답을 재평가하여 중요한 검토를 제공한다.
춘성, 벽초, 혜암 선사의 대답은 ‘무여’ [무여/일여]의 정신에 대응하고 월산과 탄허 선사의 대답은 ‘여여’에 부합하고, 향곡 선사의 대답은 ‘90% 즉여’에 해당되고, 전강 선사의 대답은 ‘99% 즉여’라고 할 수 있으나 1 % 부족하다. (숭산행원, 1992, p. 548-550)
전강 대우(田岡 大愚, 1898~1974)선사는 만공 월면 선사(滿空月面, 1871~1946)에게 적자로 인가를 받은 후, 전국 여러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며 당시 최상의 지혜 선사로 알려졌고, 현대 한국 선풍 진작에 큰 자취를 남겼다. 숭산 선사는 더 이르기를 “가장 좋은 대답은 네 번째 즉여이지만 99% 즉여는 완전한 정답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올바른 대답은 ‘거의 완전한’ 대답이 아닌, ‘100% 완전한’ 대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숭산 선사는 수행인에게 생각으로 이리 저리하는 담론적 사고 과정에서 나오지 않은 최상의 직관에서 나오는 진정한 100% 자신의 말이나 행동의 올바른 해답을 하라고 더욱 다그친다. 만일 다른 선사의 말을 모방하면 몽둥이로 삼십 번 맞지만 이 문제만 힘써서 생각 이전에 한 소식을 얻으면 1,700 공안을 단번에 해결할 것이라고 격려한다. 선사는 수행자가 진부한 틀에 박힌 지식에서 벗어나 오직 ‘이뭣고’ (시심마, 是甚麽)의 큰 질문을 가지고 정진하면 어느 날, 확실히 “돌로 만든 닭” (A Stony Rooster)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숭산행원, 1992, p. 543).
역자는 여기에서 왜 숭산 선사는 전강 선사의 대답이 1% 부족한 99 % 즉여라고 말했는지 유추할 따름이다. 만일 어느 사람이 진여 자성의 전일 (全一 ‘One Wholeness’)에 완전히 융합되어 있는 상태에서 고통, 공포, 달콤한 맛에 깊이 몰입 되어 있다면 통증이나 단맛의 생각이 들어설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어느 순간의 담론적 사고 과정이라도 작은 간격을 만들어서 100% 즉여를 표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전강 선사의 대답, “달다, 달다”는 100%가 아닌 1% 부족한 대답일지 모른다. 그 이후, 빈두로돌라사위우타연왕설법경 (賓頭盧突羅闍爲優陀延王說法經, Bharadvaja Sutta)의 비유에서 유래한, 한국적 공안의 하나인 안수정등은 한국 불교 선 전통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VI. 경전에 나타난 사여의 정신
1. 대승 경전
다음으로, 사여의 정신은 경전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관련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무여의 형식은 특히 대승경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무여를 상기시키는 유명한 침묵의 이야기는 대승 경전 중 하나인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에서 침묵의 두 극적인 대조적 순간을 제공하는 것으로 밝혀진다. 이중 첫 번째는 사리불이 여신과 대화할 때 나타나는데 대승 경전에서 의도적으로 격하된 사리불의 침묵이다. 유마경에서에서 사리불은 너무 빨리 대화를 중단하기 때문에 깨어지고 굴욕을 당한다. 가필드는 언급하기를, “특정 상황에서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지혜 자체의 표시도 지혜를 전하는 수단도 아닌 진전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이 극적인 삽화에서 사리불의 실패작인 침묵은 유마힐의 훨씬 더 명료한 침묵에 대조적 전주곡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Garfield, 2001, pp. 170~171). 이 점에서, 사라불의 침묵은 선의 관점에서 무여로 보기에는 기술적으로 크게 동 떨어져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과연 사리불의 침묵은 실패작이었을까? 최소한 유마힐 소설경에 나타난 바로는 지혜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지혜제일로 널리 알려진 붓다의 상수제자인 사리불에게는 다분히 의도적인 왜곡과 폄훼가 옅보이는 삽입으로 적합하게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는 유마힐의 침묵이다. 유마힐은 32보살들과 불이 법문에 관한 주제를 논의하며 각각 보살들은 불이법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다양한 답변을 제시한다. 문수 보살이 마지막으로 대답하기를, “내 생각으로는 일체법에 대해 말하지 않고, 설하지 않고, 보여주는 바 없고, 식별하지 않고, 모든 문답을 떠나는 것을 불이 법문에 든다고 한다.”고 언급하며 우리 모두가 말했는데 불이법에 관한 유마힐의 견해가 무엇인지 밝히라고 요구한다. 유마힐는 그때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킨다. 그 순간, 문수 보살이 감탄하며 말한다. “과연 옳습니다. 옳습니다. 문자와 말과 설명이 일체 없는 것이 진정한 불이 법문에 드는 것입니다” (유마힐소설경 維摩詰所說經, T 475.14.551c.18-24; Luk, 1972, p.100; Cleary & Cleary, 1977, pp. 541~547; 이기영, 2000, pp. 224-225). 유마힐의 침묵은 불이법의 본질을 언어의 방식을 초월하여 나타내는 것으로, 침묵을 보여주는 무여에 비유될 수 있다. 문수 보살과 다른 보살들의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적극적인 서술은, 설명의 형태를 보이면서 유마힐의 침묵의 대답에 미치지 못하는 이원론에 빠져들게 한다. 이러한 침묵을 강조하여, 고메즈는 선의 전통이야말로 명시적으로 침묵의 명상 실천을 강조하는 유마힐의 침묵의 불교라고 주장한다 (Gomez, 2005, p. 5310).
그러나, 유마힐 소설경을 그러한 선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가? 정확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침묵을 대화의 수단으로 능숙히 사용한 유래는 아무도 붓다 이외에 창시자를 찾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근원을 추적하여 보면, 니까야 원전에서는 붓다는 수천 년 후에 선사들이 자신의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한 ‘대화로서의 침묵’을 실행한 최초의 주창자인 것은 명백히 알려져 있다. 그 이후, 침묵은 선 전통에서 ‘말할 수 없고 사유할 수 없는’ 본질을 나타내기 위해서 명상 스승들이 흔히 이용하고 있다. 대략 육십여 년 전, 한국불교 조계종 2대 종정이었던 청담 선사 (靑潭, 1902~1971) 는 천여 청중에게 법문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거의 한 시간 여 연단에 앉아 침묵의 법문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서울에서는 매우 놀라울만한 일이었다. 숭산 선사의 분류에 따르면, 그것은 당대 최고의 선사가 한국의 일반 대중에게 보여준 첫 번째 무여의 경우이다.
2. 빠알리어 니까야
흔히 붓다의 “고귀한 침묵” (Noble Silence)이라고 불리는 것은 학자와 불교 수행자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예를 들어, 니까야 원전에서는 붓다에게 일련의 질문을 한 것으로 알려진 방랑하는 수행자, 밧차고따와의 대화에서 붓다의 침묵이 언급되고 있다. 밧차고따는 묻는다: “세계는 영원한가, 아닌가? 세계는 유한한가 또는 무한한가? 영과 몸체는 동일한가, 다른가? 붓다는 죽음 이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지도 않는가?” 붓다는 그러한 질문에 이렇다 저렇다 할 다른 의견이 없음을 분명히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그 이유는 열반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어떤 가능한 설명도 다른 잘못된 견해에 이르는 견해를 만들 것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밧차, 이 세상은 온갖 견해들, 잡목 숲처럼 황량하고, 뒤틀리고, 동요하고, 족쇄를 채우는 견해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것은 고통, 괴로움, 절망, 초조로 둘러싸여 있어서, 각성, 냉정, 평화로운 지혜, 그리고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러한 사변적인 견해는 나는 갖지 않는다. (Ñāṇamolí and Bodhi, 1995, pp. 590-594)
이 대화는 붓다가 침묵을 보인 예는 아니지만, 그와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붓다의 대답 없는 질문은 불교의 가르침중의 중도를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모든 것은 존재한다, 가전연 [迦旃延Mahākaccāna, 십 대 제자 중의 하나, 논의제일 論議第一] 이것은 한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 이러한 두 극단 중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여래는 중도로서 법을 가르친다. (Bodhi, 2000, p. 544).
한역 잡아함경에 해당하는 쌍윳따 니까야 (Saṃyutta Nikāya) 에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수행인이 연기법을 이해하면, 더 이상 세계나, 자신, 과거, 현재 혹은 미래에 대한 질문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고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어느 고결한 제자가 서로 의존하여 일어나는 현상인, 연기법을 올바른 지혜로 분명히 볼 때, 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나는 과거에 존재 했는가? 미래에 존재할 것인가?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등의 생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Bodhi, 2000, p. 552)
또 다른 경우에, 남송 무문 혜개 스님(無門慧開, 1183-1260)이 저술한 무문관 48칙중 제32칙에서 붓다는 진정한 의미의 침묵으로 응답하기도 한다. 어느 철학자 수행인이 한 때 붓다를 방문하고 질문한다. “말 없이, 말 없음 없이, 당신은 내게 진실을 말 할 수 있는가?” 붓다는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는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엄숙히 절을 하고, 붓다에게 감사하면서 말한다. “당신의 자애로운 친절로서, 내 모든 망상이 사라지고, 올바른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 수행인이 떠난 후, 제자 아난다가 붓다에게 묻는다. “그 철학자 수행인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붓다가 대답했다: “준마는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뛰는 법이다” (T2005_.48.0297a21-26禪宗無門關, Reps, 1982, pp. 119-120. Senzaki and Reps, 2011, p. 54). 이 일화는 붓다가 진실을 표현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유마힐의 침묵은 단순히 붓다의 “고귀한 침묵” 의 복제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붓다의 고귀한 침묵은 많은 선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인기 있는 방식의 원래 뿌리로 해석 될 수 있다. 숭산 선사는 그것을 무여로 분류한 것이다.
두 번째 일여에 관해서는, 선의 전통에서 나타나는 특유한 표시로서 니까야에서는 해당하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세 번째 여여는 두 제자, 바히야와 마룬키야풋타에게 주어진 두 가르침에 해당하는 부분이 나타난다. 바히야경은 붓다에 의하여 청정한 대상에 관한 청정염의 중요성이 강조된 우다나경에 나타난다. 어느 바히야라는 수행승이 한 단어로 된 말로 간단히 표현된 지침을 물었을 때, 붓다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실천의 규칙을 설한다.
바히야, 볼 때는 오직 보이는 것만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들을 때는 오직 들리는 것만이 있고, 생각할 때는 오직 생각만이 있고, 알게 될 때는 오직 아는 것만이 있는 것을 배워야한다. 그래서, 바히야, 보이는 것에 관한 한, 오직 그것만 보이는 것을 배워야한다. 이것이 바로 고통을 끝내는 것이다. (Strong, 1902, p.11)
여여에 관한 또 다른 예는, 쌍윳다 니까야에 나타난 마룬키야풋타경 (마라가구경, 摩羅迦舅經)이다.
마룬키야풋타 존자는 붓다에게 다가가 말했다; 제가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와서 늙고, 기력도 쇠퇴하였지만 붓다께서 저에게 간략하게 불법을 가르쳐 주시면… 혼자 고요한 곳에 머물면서 열심히 굳은 결의를 가지고 살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룬키야풋타, 너는 결코 과거에 본 적이 없고, 지금 보이지 않고, 보일 것 같지 않은 눈으로 인식 할 수 있는 그 형태에 대한 욕구, 욕망, 또는 애정을 가지고 있느냐? 아닙니다.’ ‘귀로 인식 할 수 있는 모든 소리에 대하여, 코에 의해 인식 할 수 있는 그 냄새에 대하여, 혀에 의해, 몸으로 인식할 수 있는 촉감에 대하여, 결코 과거에 인식해 본 적이 없고, 지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인식할 것 같지 않은 마음으로 인식 할 수 있는 정신 현상에 대한 욕구, 욕망, 또는 애정을 가지고 있는냐? 아닙니다.’ 그렇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인식되어지는 것에 보여지는 것에는 다만 보이는 것만이 있고, 들리는 것에는 다만 들리는 것만 있고, 감지되는 것에는 다만 감지되는 것만이 있고, 인식되는 것에는 다만 인식되는 것만이 있을 것이다. 마룬키야풋타, 그러면 너는 그것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고, 따라서 그곳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여기에도, 그것을 넘어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그 중간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종결이다. (Bodhi, 2000, pp. 1175-1178)
붓다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정념은 마음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알려져 있다. 정념이나 치유에 대한 가르침이 암시하는 것은 바로 붓다가 “직통로 (Ekāyana Maggo)”라고 선언한 사념처에 관한 붓다의 위대한 가르침에 팽배해있는 ‘염처에 집중하라’는 경책에 담겨있다. 정념은 대상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된다. 그것은 (1) 몸 (2) 느낌 (3) 마음의 상태, 즉, 주어진 순간의 일반적 조건에 따른 상태 (4) 마음의 대상, 즉 주어진 순간 느끼는 확실한 인식 내용이나 대상이 그것이다. 청정한 염이라는 방법으로 수행할 때는 모든 사물의 근본 상태로 돌아간다. 마음의 활동에 적용하면 이것은 마음이 무엇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있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관찰은 인식 과정의 첫 번째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Nyanaponika Thera, 1962 &1988, p. 29-31). 정념은 사성제의 네 번째인, 괴로움을 소멸하는 진리로 인도하는 팔정도의 일곱 번째 요소이다. 경전에 나타난 해석으로 그것은 사념처로 정의된다. 팔정도는 크게 계율, 선정, 지혜의 세부분으로 나뉘는데 정념은 정정진 (正精進), 정정 (正定) 과 함께 선정에 속한다. 정념은 칠각지 (七覺支bojjhaṅga) 중 첫 번째이다. 이것은 칠각지중 다른 여섯 요소를 완성시키는 기본이 되고, 특히 두 번째 요소인 택법각지 (擇法覺支) 에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 의한 통찰력은 정념으로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정념(正念)은 청정한 염(Bare Attention)이라는 구체적 관점에서 보면 사념처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최고의 목표를 이룰 때까지 사념처의 독특한 수행의 핵심이 되고, 또한 그것의 체계적 수행을 할 때 줄곧 따라서 준수하게 되어있다. 냐나포니카 테라는 청정한 염 실천의 기초가 되는 일반 원칙을 다음과 같이 간결 명료하게 요약한다.
청정한 염은 인간의 지각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명확하고 한결 같은 외골수(single-minded)의 인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이나 육감을 구성하는 마음을 통해 제시된 지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이기 때문이다. 청정한 염이란 어떤 행위, 말이나 어떤 판단에도 얽매이지 않고, 관찰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등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수행자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판단은 청정한 염의 대상이 되고, 그것은 ‘거부되지도 따르지도 않으면서’(neither repudiated nor pursued) 한 순간 마음에 간단한 기록을 남긴 뒤 사라지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Nyanaponika Thera, 1962 &1988, p. 30)
다음에 사념처의 수행을 시작한 수행자가 평범한 일상에 어떻게 청정한 염의 단계적 분석 과정을 적용할 수 있는지 가상적인 예를 들어본다. 여기 어느 수행자가 숲속에서 조깅을 한다고 하자. 호흡에 관한 사념처에 몰두하면서 팔 다리를 앞뒤로 흔들면서 조깅을 한다. 이 단계는 몸의 상태를 관찰하는 신념처 (kaya)가 된다. 우연히 가시장미 덤불에 미끄러져 장미 가시에 자신의 얼굴을 찔린다.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는 순간, 더러운 상처에서는 피가 솟고, 부어오르는 모습에 집중한다. 느낌과 고통은 수념처 (vedanā)의 대상이 된다. 이어서 화가 나고, 욕이 나오고, 후회하는 등 일어나는 자기중심적 자아를 형성하는 다양한 생각에 집중하게 된다. 이것은 심념처(citta)가 된다. 그 다음에 마음의 대상에 관하여, 그것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요인에 집중하면서, 명확하게 그것의 일시적인 속성을 인식한다. 념처에 집중하는 동안 수행자의 마음은 진정되고, 몸에서 집착이 떨어지면서 집중하게 된다(dhamma). 이와 같이 최고의 지혜는 무아의 본질적인 요소를 갖는 연기법의 통찰력으로 개발된다. 즉, 몸, 느낌, 마음과 그 대상에 집중하여 자기중심적 아상, 영속하는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 무아를 깨닫게 된다. 이것은 괴로움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건강하지 않은 상태인 탐욕, 분노, 어리석음 (탐진치) 세가지 삼독을 다스리기 위한 수행법으로 사념처 수행의 준비단계이고, 초기경전에서 그 연원이나 수행적인 기반이 나타나는 오정심관(五停心觀)중에 어리석음을 제거 내지 치료하는 인연관(因緣觀: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하는 연기법을 관찰) 내지 계분별관(界分別觀: 아만, 아집의 성향을 제거하여 실체가 없는 무아를 통찰하게하는 관)으로 다섯 가지 번뇌 극복을 위한 사념처의 보조적인 수행법이다.
네 번째 즉여는 니까야에 직접 드러난 명시적 표현은 없지만 두 제자, 바히야와 마룬키야풋타에게 주어진 두 담론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에서 분명한 점은 붓다는 언어 자체의 기교에는 관심이 없고, 주로 중도와 고통의 소멸에 초점을 맞춘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붓다는 눈, 코, 혀, 몸, 마음으로 인식할 수 있는 확고한 염처의 상태가 탐진치에 물들여지지 않고 어떻게 수행자를 중도로 이끌고 결국 고통을 소멸할 수 있게 해주는지를 분명히 설명한다.
VII. 덧붙인 견해
숭산 선사의 사여는 다양한 선의 질문에 대한 적절한 응답을 체계적으로 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답변을 평가하고 추가 선문답으로 도전 할 수 있게 하는 미증유의 첫 번째 시도이다. 예를 들어, 붓다의 “고귀한 침묵”을 숭산 선사의 즉여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그러한 붓다의 반응을 숭산의 사여에 비추어 논할 수도 있다고 본다. 원칙적으로, ‘침묵’이란 요소는 선 전통에서 명상을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자연적으로 꽃이 만개하게 되었지만, 일반적으로 그것은 명상 수행에 필요 불가결한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어서 침묵이 갖는 본질적인 정수를 나타낸다. 후에 불교가 중국에 소개 될 때, 보편적인 대승의 공사상은 토착 도교 개념인 비유(非有)와 병합하여 혼성 불교-도교 사상으로 변형된다. 이것은 결국 중국 불교의 가장 특징적인 선 전통의 철학적 배경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심재룡 교수는 선불교는 “지적 훈련과 충격 치료 기법의 체계”라고까지 부른다 (Shim Jae-ryong, 1999, pp. 6-7). 이처럼 숭산선사의 사여는 통찰력이 열매를 맺어 파생된 정형화된 분석적인 공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그 자신의 견해로 불법의 정의를 평이하게 다음과 요약한다.
우리가 보통 '세상사'라고 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견해일 뿐이다. 당신의 견해를 없애버리면 무엇이 남는가? 바로 그 점이다. 당신의 견해 – 상태, 처한 상황 –을 버리면 당신의 마음은 허공처럼 분명해진다. 허공처럼 맑아진다는 것은 거울처럼 명확한 것을 의미한다. 거울은 모든 것을 반영한다: 하늘은 파란색이고, 나무는 녹색이고, 설탕은 달다. 바로 진리와 하나가 되면 그게 바로 선 스타일이다. 당신의 마음이 허공처럼 맑아서 명확하게 보고, 분명하게 듣고, 냄새 맡아서 모든 것이 분명해지면 그것이 바로 달마이고, 진리인 것이다. (Murthy, “Master Seungsahn” In Tricycle, 2005, pp. 22-23).
숭산 선사는 수행자가 자기의 견해를 제거하고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기위하여 마음을 맑게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선종의 관점에서 볼 때 청정한 염이라는 독특한 수행의 핵심을 제시하는 정념(正念)의 개념을 상기시킨다. 한편 간화선에서는 화두에 대한 순수한 집중이야말로 자기 성찰의 가장 좋은 도구라고 하여, 그것은 결국 자신의 본성인 진여/자성의 본질을 깨우치는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로서, 간화선의 전통에서 화두에 온전히 몰두하여 자신의 이분법적 견해를 제거하는 방법은, 진여자성을 철견하는 견성 그 자체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반야 지상주의로 치우칠 수 있어서, 이것은 연기법에 철저히 바탕을 두고 있는 붓다의 삼법인: 무상(無常 anicca), 무아(無我 anatta), 고(苦 dukkha)의 궁극적 성찰을 통한 ‘고통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정각의 깨침으로 직접 유도한다고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화두선의 전통에서는 ‘지혜’를 완성한 후에 인가하는 스승과 인가받는 제자가 같이 나름의 큰 깨침을 이루었다고 하는 ‘드높은 자아 정체감’이 불러올 수 있는 치명적 유신견(有身見) 즉 ‘나’라는 영원하고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하는 견해로 재무장될 수 있는 자가당착적 모순을 극복해야만 하는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붓다의 처방인 사념처는 미묘한 마음 챙김인 선수행의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훨씬 더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확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보통 사람의 변별력을 초월하여 경계를 넘어선 신비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보통의 인식상태에서 지극한 주의 집중을 하지 않으면 그 과정을 완전히 인식하지는 쉽지 않는 특징이 있다. 주의 집중은 염처 수행의 초기 배아 단계에서 나타나는 ‘알아차림’의 기본 형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현재의 인식을 과거에 기억된 비슷한 인식과 비교할 수 있게 하여 준다. 이러한 방법으로 경험의 조정은 심리학에서 “연관적 사고”라고 불리는 일련의 과정이 뒤따른다. 이 단계는 마음의 발달 과정에서 기억과 집중의 기능 간에 긴밀하고 지속적인 연결을 명확히 드러낸다. 승려 학자인 나나몰리 비구와 보디 비구는 빠알리어 불교 용어 사용에서 사띠(sati)의 정확한 의미를 이와 같이 강조한다 (Ñāṇamolí and Bodhi, 1995, p. 1188). 즉 염처(satipaṭṭhāna)는 합성어로서 첫 번째 부분, 사띠는 원래 기억을 의미하지만, 현재에 집중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잠정적으로는 마음 챙김이라는 염(念 mindfulness)으로 쓰인다 . 그것은 생리학적 단계로서 경험을 일반화하고 수정하여 개발하는 보통 자기라는 개념, 즉 자아를 개발하는 연관적인 사고에서 나온다. 한편 지각은 확실히 상세하고 포괄적이지만 반드시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 가지 잘못된 연관, 편견, 그리고, 희망 사항 등에 의해 다소 오염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모든 망상의 주요 원인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연이나 생명체에 내재해 있는 자아에 영속하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기인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요인에 의해 보통 인식은 신뢰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판단은 심각하게 손상되거나 불분명해질 수 있다. 붓다의 극도로 예리한 관심은 오로지 바로 ‘청정한 염’에 초점을 집중하고 있다. 주의 집중을 점차 전개해 나가면 정념(正念, sammāsati)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점에서 냐나포니카 테라는 치밀한 검토 끝에 왜 그것이 올바른 염이라 부르는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힌다. 그것은 마음이 변조되고 조작되는 것으로부터 보존하고, 올바른 이해의 부분과 전체의 기본이 될 뿐더러, 붓다가 지적한 고통의 소멸이라는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Nyanaponika Thera, 1988, p. 26). 그는 실제로 이러한 왜곡되지 않은 사실에 입각한 실재의 제시는 즉 삼법인: 무상, 무아, 고에 관한 모든 불교 수행의 온전한 기초를 형성한다고 결론 짓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붓다는 정념, 염처이야말로 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명쾌하게 선언한다.
VIII. 나가는 말
선의 전통은 깨침을 얻지 못한 범부에게 대각의 경험을 고취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개발했다. 그러나 중국의 선종, 특히 간화선의 화두 수행법은 합리적인 지적 인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수수께끼처럼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선수행의 기술적 측면에 내재된 것은, 합리주의적 지성인이 갖고 있는 완고한 장벽을 깰 수 있고, 스승이 자신의 제자를 위대한 깨달음으로 일깨울 수 있는 충격 요법으로 쓰는 모든 종류의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면을 포함한다고 주장되어 왔다. 흔히 제자들은 스승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완전한 대답이나 반응을 그 자리에서 즉시 반응할 것으로 요구되는데, 그와 같은 선문답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수행인의 상태를 평가하기 위해 고 숭산 선사는 논리적 구조의 범위 내에서의 유용한 도구로서 사여를 도입하였다. 첫 번째, 무여는 어느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원점으로서 단순히 진여 자성 (Tathatā/Svabhāva)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고이전 또는 무념의 영역을 의미하므로, 어떤 설명을 하든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두 번째, 일여는 입을 열지 않고 진여자성을 가리킨다. 진여자성의 본래의 필수 기능은 하나의 전체성인 전일(全 一)이다. 세 번째, 여여는 보거나 듣는 모든 것은 진여자성의 현현에 불과하여 이사(理事, 현상과 원리)가 서로 걸림 없는 영역 (理事無碍法界)이다. 네 번째, 즉여는 진여자성의 온전한 기능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 모든 현상은 현상과 현상의 완벽한 조화와 서로 걸림 없는 영역 (事事無碍法界)이다. 모든 현상은 서로 장애 없는 이상적인 세계를 표현한다. 이처럼 숭산 선사에 의해 정형화된 사여는 서술적 표현 영역을 넘어서는 진여 자성에 바로 그 자리에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명쾌한 최초의 시도이자 독특한 체계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수행자가 선문답에 접근할 수 있게 하여주고 수행자가 얼마나 만족스럽게 대답했는지 정확히 측정하는 척도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분석 도구는 진지한 현대 지식인에게 처음으로 제시된 것으로 선문답에 대한 데카르트-뉴톤적 접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더 정확하게, 언어를 넘고, 사유를 넘어, 그리고 어느 서술적 표현 영역을 넘어서는 수단으로 간주된다. 언어를 넘어서는 이러한 설명은 수수께끼 같은 모순 자체로 보일 수 있지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인식의 한계를 염두에 두고, 숭산 선사는 형언할 수 없는 진여 자성을 정교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그의 저술, “세계일화” (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에서 356번째 공안으로 분석적 도구인 사여를 창안했다.
선 전통과 붓다의 사념처에서 다르마(dharma)의 정의를 비교하는 것은 현미경의 분야에서 화면의 해상도를 비교하는 것에 비유 할 수 있다. 높은 배율은 파장의 용어로 더 높은 해상도를 의미한다. 전자 현미경의 해상도가 광학 현미경에 비해 훨씬 우수한 이유는 전자의 파장이 광의 파장보다 훨씬 짧아, 전자 현미경의 배율이 광학 현미경에 비해 훨씬 우수한 시야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특히 다음의 가상 질문은 근본적인 문제에서 진지하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약 오늘날 안수정등의 공안에서 묻는 생존의 문제를 붓다에게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붓다는 과연 숭산 선사의 사여, 특히 즉여를 100% 완벽한 점수로 통과할 수 있을까? 혹은 역으로 중국 선종의 제1 대 조사인 보리 달마이래로 숭산 선사 내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모든 선사들은 붓다에 의해 제시된 궁극적인 깨달음을 충분히 성취했다고 판단되어 질 수 있을까? 비록 숭산 선사의 사여가 수행인에게 통찰력 있는 반야 지혜 내지 깨달음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는 지식을 부여한다고 해도, 필자는 붓다의 깨달은 지혜는 촛불을 태양에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모두’를 능가한다고 주장한다. 혹자는 그와 같은 질문의 유효성을 궁금해 할지 모르나, 그것에 대한 대답은 이 논문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 마하푸리사(Mahāpurisa)”의 제목으로 다음 기회에 다루려고 한다. 어느 날 사밧티에서 사리풋다 존자는 붓다에게 경의를 표한 후 질문한다.
붓다여, 위대한 사람, 위대한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위대한 사람이 됩니까? 붓다는 대답한다. 마음이 자유롭게 해방되면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Bodhi, 2000, p. 16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