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2 / 김남희
여는 글
산티아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다.
길이 하나 있다. 한 점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다 문득 눈을 들면 온 천지가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길,
그 밀밭 길을 지나면 붉은 흙을 단단히 움켜쥔 채 열매를 키워가는 포도밭이 푸르게 이어지는 길,
언덕을 오를 때면 어린 양들이 오랫동안 따라오기도 하고, 올리브 나무 아래서 비를 피할 때면 누
군가 마른 빵 한 덩이를 건네주는 길. 천년이 넘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조개껍질을 배낭에 달고
지팡이를 짚으며 이 길을 걸어 왔다.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몇 달에 걸쳐.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던 길. 그래서 길의 끝은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의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한다. 그 길의 이름은 '카미노 데 산티
아고', 바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다.
밀밭 포도밭
이곳은 스페인 카돌릭의 역사에서도 의미가 깊은 곳이다. 1212년에 나바라 지역의 왕인 산초 엘
푸에르테가 이슬람 군대를 물리쳐, 기독교 '성지 재탈환'의 신호탄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을의 광
장에는 그 전투를 기념하는 조각이 서있다.
이곳 성당에서는 매일 저녁 여덟 시에 순례자들을 위한 축복미사를 거행한다. 대부분의 순례자들
은 종교와 상관없이 미사에 참석해 앞으로 걸어갈 길을 축복받는다. 신부님은 오늘 이곳에 도착한
모든 이들의 국적을 일일이 언급하며 이 길을 걷는 내내 어려움 없이 순례를 마칠 수 있기를 축원
해주신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이 길 내내 이들과 함께하셔서
갈림길에서 이정표가 되어주시고
지칠 때면 힘이 되어주시고
위험 앞에서 지켜주시고
더위 속에서 그늘이 되어주시고
어둠 속에서 빛이 되어주시고
용기가 꺾일 때면 위안을 주시어
이들의 의지를 굳건히 붙들어 주시옵소서
당신의 안내를 따라 상처나 부상 없이 무사히 길의 끝에 서게 하시고
자비와 선행으로 그들의 삶을 충만하게 해주시고
이들의 귀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에게 돌아갈 때
영원히 지속하는 기쁨과 평안을 지니고 갈 수 있게 하소서.
인간이 신의 이름으로 다른 이를 축복한다는 것.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관습이 아닐까?
성당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다.
..... 카나다 퀘백에서 온 스무 살 처녀 주느비에브. 프랑스의 르 퓌에서 시작해 지난 40일 동안
이미 1천 킬로미터를 걸어왔다. ..... 주느비에브가 내게 부탁한다. 자기 수첩에 'Thank You' 를
한국말로 써달라고.
"내 인생에서 정말 감사하고 싶은 분들이 게시거든. 나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주신분들이야, 그
분들께 엽서를 쓸 때 감사한다는 말을 각기 다른 나라 말로 적고 싶거든."
그녀가 감사하고 싶은 붇들은 6개월 간 사귀다 헤어졌다는 전 남자친구의 부모님. 헤어진 남자친
구의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그녀. 딸처럼 사랑해주셔서 고맙다는 편지를 쓸 줄 아는 어여쁜 마음.
상큼한 외모 발랄한 성격만큼이나 속도 깊은 '퀘베콰' 아가씨다.
..... (아랍인들이 프랑스 사회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전제 열거) ....
프랑스 사회에서 흥미로운 건 중국인과 한국인 사회야. 중국인은 경제적으로 완전히 프랑스에 동
화해. 그들은 프랑스어를 배우고, 프랑스인과 거래하고 프랑스인을 상대로 돈을 벌어. 하지만 문
화적으로 자기네 문화를 지켜가지. 그런데 한국인은 달라. 그들 중엔 프랑스어를 못하는 사람도 많
아. 그들은 프랑스 사회 내의 한국인을 상대로 돈을 벌고 장사를 해. 문화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프랑스 사회에 동화하지는 않아.
하지만 두 두 사회의 공통점은 어느 쪽도 프랑스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지.
..... 스페인 여행을 하다 보면 바스크 지역에서도, 갈리시아에서도, 카탈루냐에서도, 그리고 여기
레온에서도 분리 독립 주장이 난무해 나라 전체가 삐거덕거리는 수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가우디가 설계한 집과 늙은 성당들을 둘러보고 돌아와 중국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매일 반
복되는 비슷한 식사에 물려 있던 터라 시내에 중식당이 있다는 말에 다들 환호한다. 알렉스, 크리
스티나, 닐스크리스티안, 마흐진느를 비롯한 여덟 명이 그 이름도 정겨운 '장성반점'으로 몰려갔다.
토마토계란국, 볶음국수, 새우죽순표고볶음. 오랜만에 먹는 동양음식이 성양음식에 물린 혀를 아
쉬운 대로 달래준다.
숙소로 돌아오니 수녀님이 주재하는 미사가 기다리고 있다.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미사 내내 졸았
다. .......
오늘 내 홈 페이지에 누군가 이런 글을 올렸다.
Work like you don't need the money,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Love like you've never been hurt,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Dance like nobody's watching, 춤추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Sing like nobody's listening,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Live like Heaven on Earth. 살아가라, 여기가 천국인 것처럼.
오늘, 천국이 이 작은 마을에 내려앉았다.
미국인 아줌마 캐시가 들고 다니는 수첩에는 사소한 것까지 빼곡히 적혀 있다. 이 여행을 준비할
때 고등학생인 둘째 아들이 엄마에게 그 수첩을 선물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학에 입학하
면 저도 그 길을 걸을 거니까 저를 위해 그 수첩에 좋은 정보를 많이 남겨주세요." 아들을 위해 매
일매일 세심한 정보를 남기는 엄마. 따뜻하고 정겨운 모자지간이다.
첫댓글 나도 어느날 문득 생각했다.
걸어야겠다고..
그래서 서울에서 반 천리 길 내 고향 문경까지 걸었고,
그 고향땅 구석구석 700리 길을 걸었고,
일림이 친구와 함께 서울에서 600리 길 속초까지 걸었고,
해발 5,416m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초롱라 고개를 넘었다.
그냥 걸은 것이 아니다.
내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며 걸었다.
그 모두가 감사할 것들 뿐임을,
내 그때 알았다.
또 걷을 거다.
어디를 걸을 것인지 지금 생각중이다.
근질근질 ~
새로이, 새 역사를 쓰고자 하시누만!
참~! 대단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