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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마 5:7)
오늘은 팔복 중 다섯 번째 복인'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라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네 가지 복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자신에게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구원받을 만한 의가 전혀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자신에게 의로운 것은 없고 죄와 불의만 가득한 것을 느끼는 사람이 그 죄를 슬퍼하며 통한히 여기고, 더 나아가 내 이웃의 허물과 죄악, 이 민족의 죄악, 교회의 죄악을 내가 짊어지고 애통해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째,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자신에게 죄와 불의만 가득한 것을 인정하는 자가 하나님의 처분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려는 태도입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지은 죄를 원통히 여기는 사람이 이제는 죄와 반대되는 의로움을 갈망하는 마음의 자세라고 했습니다. 내 속에 이루어진 새로운 성품,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곧 의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이렇게 지금까지의 네 가지 복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구원받을 만한 의가 없어서 그것을 목마르게 사모하는 단계들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섯 번째 복부터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 신자로서 할 바 책임과 의무를 가르쳐 줍니다. 다섯 번째 복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아직 그 의를 받지 못한 불신자들을 볼 때에 불쌍히 여김을 의미합니다. 의의 밭에서 봄에 피는 아름다운 꽃처럼 최초로 자라나는 것이 다른 사람을 향한 긍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긍휼이란 말은 오늘날 흔하게 쓰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만큼 그 뜻을 이해하기도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구약 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긍휼'이라는 낱말은 히브리말로 '라하밈'이었습니다. 이는 주로 부모가 자식에게 대하는 사랑과 애정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시편 103:13의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라는 말씀처럼, 아버지가 자식의 허물과 연약함을 전혀 탓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식의 아픔을 애석하게 여기는 그런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이사야 49:15에도 나타나는데,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이란 구약에서 아버지가 자식을 한없이 사랑함으로 나타나는 너그러운 마음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긍휼이란 말이 '엘레오스'로 사용되어 졌습니다. 이는 구약 시대에 긍휼의 뜻이 근친적인 애정에 국한하였던 것을 보다 더 광범위하게 사용하면서 변천이 되어졌는데, 이 '엘레오스'라는 말은 이웃의 불행을 회복시켜 주려는 고통스런 심정을 뜻합니다. 유명한 신학자 Bengel은'은혜는 허물을 제하고, 긍휼은 불행을 제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불행을 제거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신약 성경에서 사용한 긍휼이라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므로 긍휼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구원함을 얻음으로 우리도 진정한 의미에서 긍휼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래 우리에게 긍휼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맺힐 때 긍휼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너무나도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비정한 이 시대에, 긍휼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들에게 매우 강력하게 도전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몇 년전에 이런 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선천성 심장판막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고등학교 1학년 장모군이 있었습니다. 심장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몸이 좋지 않으니까 다른 학생들처럼 활발하게 움직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을 그 반에 있는 다섯명 가량의 학생들이 그 장군을 심심하면 외딴 데로 끌고 가서 두들겨 패고, 라이터 불로 손을 지지고,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워서 비틀고, 군대에서나 볼 수 있는 원산 폭격을 시키면서 무척 심하게 학대를 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경찰에 고발을 했고, 이 다섯 명의 학생들이 연행이 되어 경찰의 신문을 받았습니다. 경찰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너희들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니?' 그랬더니 그 가운데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친구가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를 때 쾌감을 느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섬뜩하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흔히 이런 현상을 놓고 '인간성이 파괴되었다', '인간성이 상실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오늘날 세상이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점점 더 비정하고 잔인해지고 있다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비정하고 무정한 시대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약 성경에서 긍휼의 실례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여행중에 강도 만난 불쌍한 사람을 보고, 걸음을 멈추고 그가 누워 있는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았지만, 그대로 못 본체 지나갔습니다. 그들도 동정심이나 측은한 생각을 가졌을는지는 모르나, 그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많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상처를 싸매고 그 사람을 주막에 데려다가 치료비와 숙박비를 주면서 도와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보여준 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단순히 동정이나 측은한 감정이 아니고 그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일과 이익을 잊어버리고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단순한 동정심이나 측은한 마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긍휼은 분명히 어떤 행동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긍휼의 세 가지 모습을 보게 됩니다.
1)긍휼은 대상이 누구냐를 따지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죽게 된 사람의 신분이 누구냐를 보지 않고 절대 도움이 필요한 그 자체를 보는 것이 긍휼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가를 확인한 후에 도와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보다 당장 죽게 된 그의 형편이 더 중요했습니다.
2)긍휼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자기 이익과 체면을 생각했다면 그는 결코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에 시간과 돈과 정열을 다 쏟아 넣었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다면 돌아올 때 갚아 주겠다고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은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긍휼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임을 보여 줍니다.
긍휼은 머리와 가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에도 있습니다. 긍휼은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많이 흘리고 감격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말도 부드럽고 눈동자도 따뜻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가난하고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긍휼은 아닙니다. 긍휼은 구체적으로 말없이 행동하는 것이요 아무도 모르게 실행하는 믿음입니다.
실제로 긍휼의 완벽한 예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서 죽게 한 데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인생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죄를 짓고 법을 위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과 절망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기로 마음먹고 모든 것을 희생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자격이 없고 무가치한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를 아낌없이 부여하셨고 변덕이 죽 끓듯한 인간에게 신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조건없이 무한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망과 저주의 존재에게 생명과 부활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5절에 보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결국은 조건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확신한 성도들은 긍휼의 삶을 살기 위하여 오지에 선교사로 나가기도 했으며,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과 평생을 살기도 했으며, 고아원과 병원과 수많은 구제 기관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긍휼은 그리스도인의 마크입니다. 그가 아무리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고 천사같은 말을 한다 할지라도 긍휼의 마음과 행동이 없다면 거짓말쟁이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향한 진실한 긍휼의 상실에 있습니다. 작은 긍휼이 있고 큰 긍휼이 따로 있겠습니까마는 무엇보다도 최대의 긍휼은 영혼구원에 있습니다. 그 영혼이 지옥에 갈 것을 생각하고 잠 못 이루며 통곡하는 심정을 가진 긍휼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믿지 않는 내 가족, 내 이웃, 내 친구 누구도 지나치면 안됩니다. 그들의 영혼의 실제를 보고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사명).
▶그러면 우리가 이처럼 다른 사람의 영과 육의 실상을 보고 구체적으로 긍휼을 베풀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그것은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우리들의 실제 생활에서 수없이 경험하는 일입니다. 좋은 씨를 뿌리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긍휼을 심으면 긍휼의 열매를 얻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지금도 언제든 실수할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아마도 최후의 심판때에도 긍휼없이 천국에 들어갈 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긍휼은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절대 필요합니다. 특별히 젊었을 때 긍휼을 많이 베풀면 늙어서 긍휼히 여김을 받는 감격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긍휼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마태복음 18장 24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주인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용서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말씀에 나오는 종은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종을 불쌍히 여긴 주인은 그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종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런데 탕감을 받고 나간 후에 그 종은 자기에게 빚진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빚은 백 데나리온으로서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그것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받은 긍휼은 모두 잊어버리고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관의 목을 잡고 야단을 치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것을 보다못해 화가 난 동료들이 주인에게 말을 했을 때 그 주인이 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령합니다. (마 18:32-34)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긍휼을 입은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숲속의 왕인 사자가 따뜻한 햇볕은 받으면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그 때 생쥐 한 마리가 주위를 두리 번 거리면서 지나가다가 잘못하여 사자의 수염을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사자는 잽싸게 생쥐를 붙잡아서 앞발로 꼭 눌렀습니다. "이 놈! 조그만 놈이 겁도 없이 나의 잠을 방해해?" 생쥐는 바들바들 떨면서, 애처롭게 빌었습니다.
"사자님,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신다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흥! 네까짓 작은 놈이 은혜를 갚는다고?" 사자는 웃으면서 놓아 주었습니다. 며칠 뒤에 사자는 잘못하여 사냥꾼이 쳐 놓은 그물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힘이 센 사자였지만, 그물은 질기기 짝이 없어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몸부림을 칠수록 그물은 사자의 몸에 더 엉켜 들었습니다. 사자는 분하고 원통하여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 마침 주위에 있던, 그 생쥐가 사자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생쥐는 재빨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이빨로 그물을 물어 뜯기 시작을 했습니다. 생쥐 덕분에 사자는 사냥꾼이 오기 전에 그물에서 풀려 날 수가 있었습니다. 생쥐는 사자에게 말했습니다. "사자님, 사자님은 내가 조그만 생쥐라고 비웃었지만, 내게도 당신을 구할 힘이 있다는 것을 아셨지요?" 사자는 생쥐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습니다.
"고맙다, 생쥐야. 지난번에 내가 건방진 말을 해서 정말 미안하구나."
긍휼을 베풀면 자기도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남에게 악하게 대하면 반드시 악이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주일날 예배를 잘 드리는 행위만큼 실제 생활 속에서 이웃의 형편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요, 산 제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긍휼의 신앙을 갖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긍휼의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우리 자신이 긍휼함을 입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엡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롬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를 묵상해 보십시오.
두번째로 긍휼을 마음과 생각에 머물게 하지 마시고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십시오.
신명기와 야고보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신 15:7-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약 2:15-17)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세번째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비난하거나 욕하면 안됩니다. 또한 죄로 인하여 절망과 고통에 있는 자에게 또 하나의 짐을 던져주면 안됩니다. 지금 그들은 위로와 격려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긍휼의 마음은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죄는 미워하고 불의와 부정은 단호하게 거절하되 죄에 빠져있는 사람, 죄로 인한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 사단의 공격을 받고 있는 사람은 이해하고 사랑하고 감싸주십시오. 좋은 말을 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상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네번째로 기도하십시오.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고 성령충만해서 성령이 지배할 때 우리가운데 긍휼의 마음이 생깁니다. 기도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의 긍휼의 옷을 입게 합니다. 특별히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웃이란 오직 긍휼의 대상이요, 기도의 대상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실수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고통을 주고 손해를 끼친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 긍휼히 여겨야 할 그 대상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긍휼의 근원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본래 긍휼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음으로 긍휼함을 체험하였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보다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저와 여러분이 긍휼의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또 주님의 심정으로 이웃을 대할 때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우월의식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생각이 아닙니다. 행동입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길 때 비로소 우리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은 무엇보다 주님의 심정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