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은 봄만 되면 '춘수(春叟)' - 봄 늙은이 이야기를 한다.
올해에도 어느 잡지에 이 말을 써먹었다.
칠순이 넘었으니 늙은이인 게 확실하지만,
늙은이로 앉아 있으면 글쓰기 쉽고 말을 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봄은 늙음과 함께 온다. 춘수라는 말에 노인의 건강과 병, 시름과 기억이 다 들어 있다.
'춘한노건(春寒老健)'은 봄추위와 노인네 건강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걸
“봄이 추워도 노인은 건강하다”
고 새기는 사람이 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게 아니라 노 젓기 좋다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억지를 부리고 새로운 해석을 하거나 말거나, 헤르만 헤세는 시에서 봄을 이렇게 말한다.
그는 대체 왜 이런 걸 썼을까?
아이들은 다 알고 있다,
봄이 말하는 걸.
살아라, 자라나라, 피어나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새싹을 움트게 하라.
몸을 던지고 삶을 겁내지 마라!
늙은이들은 다 알고 있다,
봄이 말하는 걸.
늙은이여, 땅속에 묻혀라.
씩씩한 아이들에게 자리를 내주어라.
몸을 내던지고 죽음을 겁내지 마라!
-헤르만 헤세 '봄의 말'
이런 말 해주지 않아도 잘 낡고 잘 늙어서 갈 때 되면 알아서 잘 갈 텐데.
1절만, 아이들 이야기만 하고 마시지.
하지만 헤세가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들은 건강하고 싶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겁내면서도 앞으로 봄을 얼마나 더 맞을까 싶어 꽃 주위에 다가가게 된다.
노인의 건강은 눈이 생명이다. 눈동자가 풀리면 가는 거다.
늙었지만 기력이 정정하다는 말이
'확삭(矍鑠)'
인데, ‘矍’자에 형형한 눈 두 개가 형형하게 박혀 있다.
허균(1569~1618)이 사명대사(1544~1610)의 모습을 돌이켜보는 글에도 그 말이 나온다.
“안장에 기대 좌우를 돌아보면서 요기(妖氣)를 쓸어버리려는 의지는
또 확삭(矍鑠)한 노장(老將)과도 같기에 내가 더욱 경중(敬重)해 하면서….”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승병장의 모습이 약여하다.
하도 확삭하여 왜병들을 향해 눈으로 확 레이저를 쏜 장군도 있다.
“공은 모습이 장대하고 씩씩했으며, 안광(眼光)이 횃불과 같아서 깜깜한 밤중에도 사물을 비출 수 있었는데,
선조대왕께서 일찍이 ‘잠자는 호랑이 상[眠虎相]’이라고 칭하신 적도 있었다.”
갈암 이현일(1627~1704,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의 아들)의 충의공 정기룡(1562~1622) 장군 에 대한 묘사다.
확삭의 '삭(鑠)'은 녹이다, 태우다란 뜻이니,
레이저에 데거나 타고 녹은 왜병들이 많았던 거 같다.
'확삭', 재미있는 말이다.
모처럼 알게 된 이 말을 한번 써먹으려고 요즘 재미있는 글로 독자들을 이리 끌고 저리 몰고 다니는 칼럼니스트에게
“늘 확삭하시오, 할아부지”
하고 써 보냈다. 그랬더니 재깍
“하루가 다른디요? 확삭이 아니라 팍삭이야요”
하는 답이 왔다.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뒤,
“이런 걸로 글 한 편이 되겠네”
그러고는
“내가 쓸 팅게 손대지 마셔”,
이렇게 으름장을 놓은 게 2주 전이다.
그 뒤 머릿속에서 글 제목을 이리 공글리고 저리 떠다밀고 해봤지만,
‘확삭 팍삭’
만 떠오르지 뭔가 좀 있어 보이는 일곱 자를 만들기가 어려웠다.
무슨 글이든 칠언(七言)이 돼야 그럴 듯해 보이는데.
‘확삭 팍삭 동방삭’
이래 볼까?
동방삭(東方朔)은 무려 삼천갑자를 살았다니 당연히 확삭한 사람이었을 테지.
그러다가 더 시간 끌기 거시기해서 일단 글을 쓰던 중 그 칼럼니스트가 새벽 4시 조금 넘어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걸 알게 됐다.
반갑고 궁금해서
“안 잔 겨? 깬 겨?”
하고 물었다가 오줌이 마려워 3시쯤 깼다는 대답에
‘소변삭’
을 떠올리게 됐다.
오줌을 조금씩 자주 누는 증상이 '소변삭(小便數)'이다.
수삭(溲數), 소변빈삭(小便頻數)도 같은 말인데, 두 자나 네 자는 필요 없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이
‘확삭 팍삭 소변삭’
이 됐다.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글 쓰는 게 늦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목 붙이느라 제주도 말로 정말 ‘폭삭 속았다’.
노인들은 대개 소변삭을 한다. 자다가 몇 차례 깨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확삭하다가 팍삭해져서 소변삭으로 자다 깨다 결국 가는 거 아닐까?
헤세가 뭐라거나 말거나 내가 아는 노인들 모두 확삭하면 좋겠다.
‘아기 궁둥이 같은’(소설가 박완서의 표현) 눈엽(嫩葉, 嫩=어릴 눈)에서 새로운 기운을 얻으며.
-임철순 글씨 '확삭'
* 임철순 (호 淡硯)
1953년 공주 생. 보성고,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역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등 수상.
저서 ‘손들지 않는 기자들’, ‘노래도 늙는구나’ 등. 대한민국 서예대전 5회 입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