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정귀수(2024.12.7)
창문밖엔 자동차의 불빛이 소리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낮과 밤이 바뀐 첫날. 억지로 눈을 감고 두 손을 양옆에 가만히 놓은 자세로 천정을 향했다. 새벽 2시. 결국은 모발 폰에 이어폰 끼고 평소에 즐겨 듣던 방송을 틀었다. 잠자는 것을 포기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훤하게 밝아진 창문의 햇빛에 눈을 떴다. 아내는 꿈속을 헤매는 듯 조용하다. 발뒤꿈치를 들고 현관문을 살그머니 열고 집을 나섰다. 1년 반 만에 미국의 조용한 주택가에서 새벽이 아닌 아침 산책을 시작했다. 상큼한 느낌과 차분한 적막감이 참 반가웠다.
신호등 없는 교차로에 서 있는 내 앞에 차 한 대가 정지했다. 나는 감사 표시를 하며 길을 건넜다. 뭔가 어색했다. 신호등 없는 시드니 Eastwood 동네 길을 산책할 땐, 항상 차가 지난 후 길을 건넌다. 주행속도와 엔진 소리가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Los Altos 주택가도 출퇴근을 시작하는 많은 차로 분주했지만 차분하고 조용하다.
어느 날 컴컴한 새벽, 아무도 없는 그곳 교차로에서도 모든 차가 어김없이 정지하고 있었다. 4번째 방문한 이번에 비로소, 이 어색한 원인을 발견했다. 첫째, 신호등 없는 교차로엔 4개, 횡단 보도엔 2개의 팔각형 일단정지판이 어김없이 서 있다. 둘째, 먼저 정지한 차가 먼저 출발했다. 도로 운영 체계상 과속은 불가했고 적막감은 당연했다. 모두의 약속이 지켜지는 곳이었다. CCTV도 없었다.
우리의 삶에서 약속은 가장 중요하다. 30여 년 전에 방송인 이경규 씨가 진행했던 한국의 인기 방송이 생각났다. 새벽에 교차로의 정지신호 준법(= 빨간 불 바뀜까지 정확히 기다리는)자를 발견하면 양심 운전자라며 대형 냉장고를 선물했다. 주인공은 서민과 장애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당시 나는 전국 출장을 많이 다녔고, 습관적으로 과속을 많이 했다. 그 덕에 벌(세)금을 꽤 내고 다녔지만, 면허가 정지되는 일은 없었다. 사정을 하면 봐주는 한국적 인정의 관습 덕(?)이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과보를 호주에서 오지게 감당하게 될 줄이야. 이민 초기 그 운전 습관은 벌점을 빠르게 누적 시켰고, 면허 일시 정지로 천금 같은 준공무원(시내버스 운전) 직업을 잃을 상태가 되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변호사를 고용했고 반성문과 두 달 교육평가서도 제출했다. 호주 법원의 판결로 16년 호주 버스 운전 경력자로 은퇴할 수 있었다. 그 쉬운 교통법규(약속)를 못 지켜 퇴출 직전에 보잘것없이 쪼그라진 충격적 내 모습을 마주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에서 새벽 산책이 끝나가던 어느 날, 차량 통행이 점점 많아질 때였다. 교차로에 동시 정지한 운전자 두 명이 서로 먼저 지나가라며 양보하는 수신호가 보였다. 서로가 미소를 띠더니 한 명이 먼저 감사의 손을 들며 지나갔다. 그들이 지나간 교차로엔 약속된 평온함이 훌렀다. 인종 시장 강대국 미국의 힘이고 세계 경찰국가로서 자유민주, 정의, 평화의 상징이 될 만했다.
문제는 국가 아닌 정권 중심. 약육강식 동물의 세계로 바뀌는 요즘의 이 세상을, 미국이 선도하는 듯하다는 점이다. 트럼프와 바이든이 12년간 교차 집권하면서 광기의 국가로 바뀌고 있는 느낌이다. 만약 한 분 이상이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미 의회 폭력 사태와 관련됐거나, 한국 첨단기술의 탈 중국 후 미국 경제 안보에 예속시키려 했다면. 그러한 행위는 보잘것없이 쪼그라진 미국의 충격적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더 이상 자유민주와 정의의 상징인 세계의 경찰국가, 한미 상호 존중도 의미가 없다. 자국민의 경제 안보적 삶을 최우선 한다는 미국 대통령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니 한국의 대통령도 이와 동일해야 할 것이다.
내치를 망친 정권은 교체하면 되지만, 외교를 망치면 망국이다. 일제 36년과 6.25부터 74년간 지금도 전시 군 통수권이 미국의 (혈맹)방어 약속에 의존하고 있다.
뜬금없는 ‘북한의 오물 풍선’과 ‘한국의 조선업’을 언급한 한국과 미국(당선자)의 대통령 간 첫 통화 뉴스를 접하며, ‘감당 불가한 과도한 방위비 증액’과 ‘거제/울산 조차도시(租借都市*) 요청’ 후 인심 쓰듯 양자택일을 거만하게 던질 것 같은…. 트럼프가 떠오른다. 과민함이 만들어낸 뜬금없는 망상(妄想)일 것이다.
*조차도시(租借都市): 한나라가 타국의 일부를 빌려 통치함(1898~1997영국령 홍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