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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98) 기뻐하십시오!
신앙 안에서 기쁘십니까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신앙에서 기쁨이 없다면 어떨까? 얼마 전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처음 내신 문헌 「복음의 기쁨」에서 말씀하신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1항)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기쁨이다. 기쁨 없이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 기쁨 없이는 신앙을 살 이유도 의미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에서 얼마나 큰 기쁨을 느끼는가?
성경은 구원을 발견한 이들의 기쁨으로 가득하다. 동방 박사들이 별을 다시 발견했을 때 더없이 기뻐하였다.(마태 2,10 참조) 예수님의 탄생에 큰 기쁨을 맛본 이들은 길 위의 목자들이었고, 나이가 많았던 시메온과 한나였다.(루카 2,15-20; 25-39 참조)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 선언을 통해 하느님 자녀로 사는 기쁨으로 모든 이를 초대하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
예수님의 비유 속에도 기뻐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 기쁨은 삶에서 가장 소중한 하느님 나라를 발견했을 때 찾아오는 기쁨이며(마태 13,44 참조), 회개하는 죄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하느님의 기쁨이기도 하다.(루카 15,1-10 참조)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풀어주었다.(루카 15,11-32 참조) 그 기쁨은 작은아들이 저지른 배은망덕이 더는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큰 것이었다. 물론 그 기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큰아들의 모습도 등장한다.
그런데 가장 큰 기쁨은 돌아가셨던 주님께서 되살아나셨을 때 제자들이 느꼈던 기쁨이 아니었을까.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20,20)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 그분 앞에서는 이제 죽음도 힘을 잃고 말며, 주님께서 친히 그들의 희망이 되어주신다는 것이야말로 제자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으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세상 만방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된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수난과 죽음이 배어있는 기쁨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다시 보며 기뻐할 것이고, 그때에는 그 기쁨을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 기쁨은 수난과 죽음을 관통한 다음에, 곧 수난을 통해 자신을 죽인 다음에 주어지는 기쁨이다.
신자들과 부활 체험을 나눌 때마다 확인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낮아지고 겸손해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삶에서 닥치는 고통과 시련은 근심과 괴로움으로 다가오지만, 신앙 안에서 견디어낼 때 우리는 더 높이 솟아오르는 희망을 발견하며, 고통과 시련이 나를 죽이기 위해 필요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진정한 기쁨은 나의 의지나 뜻에 따라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주님의 뜻에 나의 삶을 맡겨드릴 때 주어진다는 것을 배운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에서 오는 기쁨도 있다. 주님의 일에도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이 따른다. 그렇지만 주님께 의탁하며 끝까지 감내할 때, 내 손으로 일하지만 선물처럼 주어지는 열매가 맺히는 경험이 있다.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임을 인정하게 되고 나를 지우는 것에서 오는 기쁨이 있다.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오늘 어떤 기쁨을 좇아 살고 있는가?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97) 사랑에 눈뜨기
무뎌진 마음에 사랑을 일깨우자
사랑⋯.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 중 하나가 아닐까. 물이나 공기가 없이 살 수 없지만, 평소에는 그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처럼 사랑 또한 우리를 살게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그 중요성을 잘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얼마 전 한 수녀회의 성삼일 전례에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한 수녀님께서 사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부님, 이제 저도 세속화가 돼서 성삼일 전례에 마음을 집중하기가 쉽지 않네요.” 수녀님의 고백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것이 아닐까. 일상사와 세상 걱정으로 마음이 무뎌져,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에 마음을 쓰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장면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걷던 일을 회상하며 뜨거웠던 마음을 떠올린 때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어떤 경험이었을까? 주님께서 가까이 다가와 자신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건네주신 말씀들, 자신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시며 보여주신 친밀감에 담긴 사랑에 대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스승의 바로 그 사랑이었다. 그들은 똑같은 분의 똑같은 사랑으로 눈을 뜨고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본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 그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 그분께서 돌아가신 다음 살아나셔서 그들에게 다가오시며 똑같은 사랑으로 그들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그들이 절망과 슬픔에서 벗어나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며 새로운 희망이 떠오를 수 있도록 격려해주셨다. 재와 같던 그들 내면에 사랑의 불꽃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유학 시절 한 수도원에서 성삼일 전례에 참례하며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깊이 체험한 적이 있었다. 아무 조건도 없이, 남김없이 당신의 온 존재를 선물로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이 성삼일 전례 곳곳에 배어있었다. 그 사랑 앞에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사랑에 마음을 닫고 무딘 영혼으로 살아왔는지도 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이 세상에 왔으며,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던 것도 바로 사랑 덕분이었다. 그 사랑은 그 어떤 사심이나 욕심도 없이 그저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좋고 사랑스러웠기에 베푸셨던 부모님의 사랑이었고, 가족들과 친구들과 나눠 온 우정이었다. 그 사랑과 우정이 우리를 키우고 우리 사이를 돈독히 해주었다.
살면서 많은 중요한 일을 겪고 큰 계획을 갖고 살지만, 결국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큰 위기나 시련을 겪을 때야 비로소 그 사랑의 고귀함을 깨닫고 그동안 그 사랑에 왜 그렇게 무감각하게 살아왔는지 후회하는 우리 자신의 무뎌진 마음이다.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인간적 사랑을 매개로 당신의 애틋한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특별히 교회 삶 전체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향한 눈을 뜨도록 이끌어 주신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 사이의 ‘사랑’에 관한 대화로 마무리한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6)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주님 사랑에, 그리고 우리 주위 소중한 사람들의 사랑에 얼마나 눈을 뜨고 살아왔나? 너무 무디고 딱딱한 마음으로 살아온 나머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을 잊고 살아오지 않았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랑을 향한 눈을 뜨게 해주시도록 기도하면 어떨까.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95) 평안하냐?
희망이 있기에 살아가는 삶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장면들을 살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의 반응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아마도 스승의 부활이 제자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사고 안에, 기다림의 지평 안에, 그분이 되살아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를 빌어주신다. “평안하냐?”(마태 28,9)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요한 20,19) 이 말씀은 좌절과 절망, 슬픔과 시름 속에 빠진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표현이었다. 당신 죽음으로 인해 겪었을 마음고생을 헤아리며 진정으로 평화가 제자들 마음에 찾아오기를 바라는 말씀이셨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의 그러한 마음을 발견한다.(루카 24,13-35 참조) 두 제자는 스승을 잃고 실의에 빠진 채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살아온 삶에 관해 물으시며, 성경을 바탕으로 당신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를 자상하게 설명해주신다. 그들의 초대에 응해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빵을 나눠주실 때 비로소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분은 곧 사라지셨지만, 그분과 함께한 길에서 경험했던 마음 뜨거움은 강렬히 남아있었다.
이 모든 것은 ‘희망’이라는 말로 귀결되는 듯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바로 그 희망이 가져다주는 은총의 선물일 것이다. 그 희망은 좌절과 절망의 절벽을 넘어 새로운 하늘을 향해 열린 창문을 마주하는 것이며, 어두운 지평선 너머로 새로운 여명이 밝아옴을 발견하는 것이다.
희망, 그것은 우리가 사는 삶 그 안에서 찾아야 할 무엇, 주어지는 무엇이다. 그렇기에 그 희망은 역설적이다. 절망스럽고 어두운 현실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 희망은 고난을 경험한 끝에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6) 이 말씀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난이 희망찬 내일로 가기 위한 디딤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고난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가능케 하고,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한다. 고난이 나의 죽음을 위해 필요했던 순간임을 깨달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희망을 놀라운 눈으로 발견할 수 있다.
부활을 맞은 우리 역시 주님과 다시 걷도록 초대되고 있다. 기쁨과 환희, 고통과 절망이 교차하는 평범한 일상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서 말이다.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은 우리의 다양한 경험, 특히 위기와 시련, 고난과 괴로움, 슬픔과 절망의 순간을 달리 바라보게 해줄 것이며, 새로 태어나는 부활의 기쁨과 환희는 바로 그러한 순간들을 겪어내지 않고선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온 삶이 전혀 무익한 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이다. 삶의 애환, 고통과 근심, 괴로움과 외로움, 우울함과 초라함 등을 모두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말씀을 건네신다. “그래, 많이 힘들었지? 이제 괜찮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아니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아직 기회가 있다. 나를 찾고, 나를 온전히 실현할 기회가. 나를 향해 서 있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가 살아온 삶에 희망이 있다. 또한 앞으로 살아갈 삶에 희망이 있다. 우리가 계속해서 걸어야 하는 이유다.
성 요셉의 칠고칠락(七苦七樂)
고통도 기쁨도 묵묵히 받아들이며 헌신한 성가정의 보호자
성 요셉은 성경에서 예수의 탄생기와 성장기에만 나타날 뿐 공생활이 시작된 후에는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마태오복음서와 루카복음서에 관련 일화들이 소개돼 있지만, 마르코복음서와 요한복음서에서는 거의 행적을 찾을 수 없다. 「야고보의 원복음서」나 「토마스복음서」 같은 외경에서 그의 삶을 참조할 수 있다.
성 요셉의 일생은 담담하다. 묵묵히 성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해 헌신했고, 하느님 구원 계획에 협력하며 순종했다. 또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의 뒤에서 필요한 보호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일생의 행간에서 우리는 성인이 지녔을 기쁨과 슬픔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성모 마리아의 ‘칠고칠락’(七苦七樂)은 잘 알려져 있으나, 상대적으로 성 요셉의 ‘칠고칠락’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성 요셉 성월을 지내며 성인이 예수의 양부로서 감당했던 일곱 가지 고통 및 일곱 가지 기쁨을 생각해 본다.
성 요셉에 대한 공경
성 요셉의 칠고칠락을 살펴보기에 앞서 성 요셉을 향한 공경과 신심에 대한 유래를 살펴보면, 성모 마리아가 초대 교회 때부터 특별히 기도의 대상이 됐던 것과 달리 요셉을 공경하는 모습은 비교적 늦게 생겨났다. 「가톨릭대사전」은 이에 대해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의 아버지라는 요셉의 독보적인 위치가 마리아의 동정과 예수의 기적적인 탄생에 관한 교리에 오해를 빚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다. 그러다가 외경 등의 영향으로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할 때 나이가 많은 노인으로 여겨졌고, 요셉이 예수의 양부로 선택됐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제 아론 경우처럼 요셉의 지팡이에 싹이 났다는 일화도 생겼다. 이런 이유를 배경으로 요셉 공경에 대한 최초의 흔적은 4세기 초 동방 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또 800~900년대 콥트 교회 달력 7월 20일 자에 나타난다.
3월 19일이 성 요셉 축일로 자리 잡은 것은 12세기 무렵이다. 예루살렘 성지를 이슬람에게서 탈환하려는 십자군은 성 요셉을 공경하고자 나자렛에 교회를 세웠다. 그 뒤로 성인에 대한 공경과 축제는 주로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노력으로 유지되고 전파되었다. 1479년 프란치스코회 회원이었던 식스토 4세 교황은 요셉 축일을 모든 교회로 확산시켰고, 1870년 비오 9세 교황은 요셉을 ‘거룩한 교회의 수호자’로 선언했다. 한편 1955년에 비오 12세 교황은 해마다 5월 1일을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했다.
우리나라는 교회 설정 초기 조선대목구가 속한 북경교구의 수호성인인 요셉을 조선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모셔 오다가, 1838년 성 앵베르 주교의 요청으로 요셉과 함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모셔 왔다. 그 뒤 주교회의 2015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오직 한 수호자만 모셔야 한다는 교황청 경신성사부의 의견에 따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만을 한국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정했다.
미사 경본의 고유 감사송은 1920년 처음 도입됐고, 성 요한 23세 교황은 1962년 요셉의 이름을 미사의 감사 기도문에 수록시켰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보편 교회의 수호자 성 요셉’ 선포 150주년을 기념해 2020년 12월 8일부터 2021년 12월 8일까지 ‘성 요셉의 해’로 선포했다.
성 요셉 칠고칠락
167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은 성 요셉을 중국과 벨기에의 수호자로 공식 인가했다. 교황에 의해 성 요셉이 중국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자,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요셉에 관한 전기를 여러차례 발간했다. 브뤼에르 신부(Benjamin Brueyre, 이수방, 1808~1880)가 1862년 저술한 「중국대주보성약슬성월」, 북경교구장 들라플라스 주교(L. Gabriel Delaplace, 田類斯)가 저술해 1872년 북경에서 간행한 「성요셉성월」(聖若瑟聖月, 목판본) 등은 한국에도 전래됐다. 특별히 「중국대주보성약슬성월」은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 감수하에 1887년 한글로 번역됐다. 이후 1961년까지 거듭 재판돼 보급되며 신자들에게 성가정의 삶과 가장의 역할을 알리고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몫을 맡았다.
요셉의 칠고칠락은 브뤼에르 신부의 「중국대주보성약슬성월」에 실려있다.
이에 따르면 요셉의 일곱 가지 기쁨은 ▲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 모두를 위하여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하신다는 천사의 알림(마태 1,20) ▲ 많은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태어난 아기 예수에게 경배와 찬양(루카 2,14) ▲ 천사의 고함으로 아기를 예수라 하여 구세주이심을 알게 되심(루카 2,21) ▲ 성전에서 예수가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라는 예언을 시메온으로부터 들으심(루카 2,27-33) ▲ 이집트로 피난 가실 때 (마태 2,14) 모든 우상이 쓰러짐을 보심 ▲ 타국에 오래 있다가 나자렛 본향에 이르러 평안히 살게 되심(마태 2,20) ▲ 예루살렘 성전에서 학자들과 계신 예수님을 찾으심(루카 2,48)이다.
반면 일곱 가지 슬픔은 ▲ 마리아 태중의 잉태를 아시고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마리아를 떠나려 하심 ▲ 탄생하신 예수님이 말구유에 누워 계신 것을 보심 ▲ 예수님이 할례를 받으실 때 성혈을 흘리며 우는 소리를 들으심 ▲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라는 예언을 들으심 ▲ 헤로데왕의 박해로 예수님과 이집트로 피하심 ▲ 이집트에서 유다 땅으로 돌아오실 때 새 왕이 예수님을 해칠까 염려하심 ▲ 성모 마리아와 예루살렘 성전에 참배하고 오는 길에서 소년 예수님을 잃고 3일 동안 찾으려고 애쓰심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어느 수사 두 명이 바닷물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요셉이 구해 주시며 “모든 믿는 이들이 칠고칠락을 묵상하며 기도하면 나의 풍성한 은혜를 받을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성인이 겪은 칠고칠락을 묵상하는 것은 그분이 걸었던 영적인 길을 따라가고자 결심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권고 「아버지의 마음으로」를 통해 “전능하신 분의 아드님께서는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께는 당신을 지켜주고 보호하며 돌보아주고 키워줄 요셉이 필요했다”고 강조하고, “요셉 성인은 주목을 받지 않으면서도 신중하고 드러나지 않게 매일을 살아가는 사림이자, 구원 역사에서 필 수 불가결한 역할을 수행한 성인”이라고 했다.
현대에 와서도 교회는 중요한 갈림길에 설 때마다 성인에게 위탁했다. 성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기 직전, 공의회의 준비와 성공을 위해 도움을 청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현대 교회에서 성 요셉의 사명을 ‘보호 및 방위·수호와 원조’라고 했다. 이런 가르침들은 성 요셉 성월에 드리는 여러 기도에 스며져 있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88) 부끄럽지 않은 신앙
흘러넘치는 은총 헤아리기
외부 식당에서 혼자 식사할 때 성호를 긋는 것이 꺼려지는 것은 모든 신자에게 공통적이지 않을까 싶다. 기차나 비행기 여행 중에 시간 전례(성무일도)를 바칠 때 성호를 긋는 것이 조심스럽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마르 8,38) 이 말씀을 들으며, 자신을 가톨릭 신자로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는 것이 예수님과 그분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은 아닌지 묻게 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신앙은 나에게 어떤 것이며,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신앙은 내 삶에서 무엇을 바꾸었나’ 하고 질문을 던지면, 막상 떠오르는 것이 없다. 아마도 신앙 안에 깊이 들어가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군인 시절 주일 미사에 참여할 수 없었을 때, 평소엔 잘 느끼지 못했던 미사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던 것이 기억난다.
살면서 겪는 위기와 시련은 신앙이 어떤 의미와 힘을 지니고 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순간들이다. 필자는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동반하면서 그것을 경험했다. 물론 신앙이 즉각적인 힘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한참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실 때, 하느님께 의탁하는 기도를 드려보라는 필자의 말에 어머니는 답하셨다. “아무 소용없어.” 우울감에 빠진 어머니에게 힘을 좀 내시고 밝게 웃으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답하신다. “신부님이 아파봐.” 신앙도 긴 병 앞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희망할 것이 없을 때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데 어머니와 힘겨운 마지막 날들을 지내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알게 모르게 기도해주고 도움을 주신 수많은 분들이 곁에 계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집에서 병원으로, 그리고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가면서 곳곳에 주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이 계심을 알았다. 다만 주님의 손길에 맡겨드리기만 하면 되었다. 나머지는 모두 주님께서 알아서 채워주셨다. 신앙이 없었다면 못 알아보았을 수많은 은총의 순간들이었다.
당시 어머니와 함께 걸은 길을 적어놓은 필자의 노트를 최근에 발견하였다.
“요양보호사 자매님께서 청국장 찌개를 끓여주셨다. 어머니 대녀가 케이크 한 조각을 가져오셨다. 반찬가게에서 반찬을 사는데 사장님께서 물김치를 선물로 주셨다. 가게 문을 닫고 아버지께서 집으로 오시며 빵 가게 아주머니가 남은 빵을 한 보따리 주셨다고 가져오셨다. 가게에 어떤 자매님이 주신 반찬을 깜빡 잊고 가져오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셨다. 큰이모께서 전화하셔서 고등어가 필요하냐고 물으시니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대답하셨다. 내가 내일 학교로 가져갈 품목이 늘었다. 상추, 쑥갓, 떡국 떡, 아로니아⋯. 은총에 은총이 차고 흘러넘친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은총의 선물들이 쏟아진다. 오늘을 살게 하는 기적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눈을 열어준다. 특히 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하느님 은총을.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은 당신 자녀를 돌보고 보살피시며 배불리 먹이시는 분, 한없이 자비하시고 은총에 은총을 더해주시는 분이시다.
무뎌진 마음 때문에, 때로는 시련으로 인해 하느님 은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간절히 청해도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느님이 계시는 것일까’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는다. 우리가 넘치고 넘치는 은총 속에 살고 있음을.
신앙이 없었다면 나의 삶은 어땠을까. 흘러넘치는 은총을 매 순간 헤아릴 수 있기를 청해본다. 이제 자랑스러운 신앙을 당당히 드러내며 성호를 그을 수 있지 않을까.
[영성의 샘] 예수 성심 대축일과 성심성월
1. 예수 성심
‘성심’은 가톨릭 신앙인이 아니라도 한 번쯤은 들어본 단어일 것입니다. ‘성심병원’이나 ‘성심약국’처럼 유독 병원이나 약국 이름으로 많이 쓰는 말이지요. 성심(聖心), 거룩한 마음이라 하면 종교적인 뜻이 담겨 있으리라 짐작은 하지만, 막상 뜻을 설명하자면 난감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신앙인들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고, 유월 내내 성심성월 기도를 바칩니다. 매달 첫 금요일에 바치는 성시간도 예수 성심께 봉헌된 시간입니다. 하지만 그런 신심을 통해서 우리가 신앙 신비의 어떤 면을 기념하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성녀 마리아 알라콕 수녀에게 환시를 보여주셔서 성시간을 지낸다는 역사적 유래에 대해서는 많이 듣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했나 봅니다.
2. 심장의 의미
예수 성심은 영어로 Sacred Heart라고 씁니다. 마음 대신에 ‘거룩한 심장’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백성들, 나아가 서구 문화는 심장에 특별한 의미를 뒀습니다. 서양 학문 전통의 큰 기둥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장에 영혼이 머문다고 주장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였습니다. 서양 의학의 근간을 세운 갈레노스 역시 인간 영혼이 심장에 머문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심장은 단지 하나의 장기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이 담긴 결정체로 다뤄졌던 것이지요.
3. 심장과 갈비뼈
구약의 전통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창세기 2장에는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와를 창조하실 때, 사람 몸에 있는 3백 개가 넘는 뼈 중에서 하필이면 갈비뼈를 빼서 만드셨다지요. 왜 하느님은 튼튼한 다리뼈나 두개골이 아니라 기침만 잘못해도 부러지는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을까요?
어떤 이는 갈비뼈가 하나쯤 없어도 별 지장이 없는 것이라서 그러셨을 것이라고 합니다만, 성경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먼저 창세기 2장 20절은 홀로 있는 인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혼자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받을 상대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로운 인간입니다. 이 인간에게 짝이 생기려면 먼저 필요한 일은 닫혀 있는 마음을 열고 빗장을 푸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마음의 빗장을 푸는 일이 쉽지 않으니 하느님께서 아담, 곧 사람을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를 빼내서 협조자를 만들어 주십니다. 심장을 둘러싸는 갈빗대를 빼셨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심장, 영혼의 거처인 심장을 둘러싸던 빗장을 풀어주셨다는 이야깁니다.
또 이렇게 빼낸 갈빗대로 사람의 협력자를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이 서로에게 서로 심장을 보여주고 또 보호해 주는 관계로 창조되었다는 말씀이겠습니다. 자기 세계에 꽁꽁 매여 사는 사람에게는 협조자가 없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상대가 없는 삶입니다. 삼위일체의 영원한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라고 불리기 민망한 모습이지요. 사람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대로 온전한 삶을 누리려면, 자기 심장을 감싸고 있던 갈빗대를 적어도 하나쯤은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하고 사랑받는 협조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삼위일체를 닮은 삶이고 하느님께서 뜻하신 삶입니다.
4. 상처와 심장
예수 성심의 신비는 바로 그런 맥락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 심장을 드러내신다는 것은 당신의 모든 것을 열어 보이고 내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옛 신앙인들은 예수 성심을 늘 예수님 옆구리의 상처와 함께 생각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찔리신 그 상처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심장, 예수님의 전 존재, 가장 내밀하고 본질적인 그분의 인격을 보게 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문이시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가 창에 찔렸을 때 여러분에게 그 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무엇이 흘러나왔는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들어가고자 하는 곳을 선택하십시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물로 여러분은 정화되고 그 피로 여러분은 구원을 받습니다.”(설교집, 311,3)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중세기에 특별히 두드러졌습니다. 베르나르도, 보나벤투라, 루갈다 성인같이 학식과 성덕으로 유명한 많은 성인들이 이 신심을 발전시키고 권장했습니다. 성인들은 예수님의 상처를 드러난 그분의 심장에서 자비의 자리, 약속의 땅, 참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신심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발전을 거듭합니다. 얀센주의자들이 하느님의 엄격한 심판을 주장하였을 때에,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효과적인 대응책이 되었고, 신자들에게 주님에 대한 사랑과 주님의 성심으로 상징되는 그분의 무한하신 자비에 대한 신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유독 하느님의 심판을 강조하면서 엄격한 규율과 규칙만을 강조하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통해 당신의 심장을 열어주시는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 넘치는 사랑과 자비를 일깨운 것이 예수 성심 신심이었던 것입니다.
5. 상처를 통해서 마음을 열기
우리 레지오 단원들에게도 한 번쯤은 서로 마음 상할 일이 있겠지요. 성향이 다르고 처지가 다른 사람들이 한 단체를 통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간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주고받는 말 속에 서로 상처를 줄 일도 생길 수 있고, 또 그런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 마음의 벽을 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닫힌 마음을 규칙이나 규율 같은 것으로 억지로 뚫어 보려고도 합니다.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을 강요하려고 법과 규칙을 앞세우는 경우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심성월에 우리에게 상처 입은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그 상처를 통해서 당신의 심장을 열어 보이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은 높이 세웠던 내 마음의 벽을 다시 보게 합니다. 인간은 상처를 통해서 서로 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심장을 드러내고 보호해 주는 존재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