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12-23 얼마 후에
본문에서 모세는 유다의 아내가 죽은 사실에(12) 이어서 다말의 그릇된 방식과(13-18) 다말의 정체가 알려진 사실이 기록됩니다(19-23).
1. 본문 12-13절은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 혹이 다말에게 고하되 네 시부가 자기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입니다
유다는 자기 "며느리 다말에게" 그의 아버지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셋째 아들 "셀라"를 계대적인 남편으로 다말에게 주지 않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는 다말에게 계대적인 남편으로 둘째 아들 오난을 주었던 것이나 오난까지 죽은 뒤에는 다말에게 대하여 계대 결혼을 단념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이 그렇게 정해진 것은 그의 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계대 결혼 대상으로 주면 그도 "죽을까" 두려워한 까닭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제 다말이 자기가 입은 피해를 스스로 복수한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 기만을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것이 시부의 사기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셀라가 장성하자 그녀는 기만당한 것을 깨닫고 생각을 복수하기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오랫동안 심사숙고하고 이 계획을 꾸몄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유다의 출발에 대한 전갈이 그녀에게 간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때문입니다.
다말은 자기 목적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시아버지의 모든 행동을 통보해 줄 밀정을 풀어 놓았습니다.
그녀는 정숙한 부인으로서는 하지 못할 야비한 계획을 꾸몄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죄를 다소 경감시켜 주는 정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말이 유다가 독신 상태에 있는 기간을 제외하고는 그와는 결합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맹목적인 마음의 실수로 서두르다보니 죄를 짓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간음보다 더 타기 할 만한 죄였습니다.
간음은 부부간의 정절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친간의 사통은 천륜의 모든 존엄을 전복시켜 버립니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피해를 입는다고 하여 성급하게 불법적인 구제책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말에게 창녀 노릇을 강요한 것은 정욕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재혼을 금지 당했습니다.
그녀는 아이도 낳지 못한 채 집안에 틀어박혀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 때문에 고통과 슬픔을 겪었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시아버지에게 기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도 시아버지에게 속임수를 써서 그를 창피스럽게 만들겠다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때 다말이 극히 악한 죄를 짓게 되는 것을 읽습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정당한 범위를 넘어 자신의 세상적 애착에 빠질 때 흔히 발생하는 사례입니다. 심지어 명분이 정당한 일에서도 이런 일은 흔히 생깁니다.
모세가 언급하는 미망인 옷은 정숙의 법에 속합니다.
남자들의 눈길을 끄는 우아한 의상은 미망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미망인보다 아내들에게 더 많이 양보를 합니다.
이는 그들에게는 즐겁게 해주기를 바라는 남편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4절은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입니다.
해석자들은 이 구절을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문자 그대로 직역하자면 '샘들' 또는 '눈들의 문'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두 시냇물로 나뉘는 샘이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눈들이 사면팔방을 돌아갈 수 있는 광장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 해석은 이들보다 받아들일 가치가 더 있습니다.
이 표현은 두 갈래로 난 길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문이 눈 앞에 열려 있기 때문에 한 길에 있는 자들은 두 방향으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아마 그곳은 다말이 보이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그 가까이에는 곁길이 있었고 유다는 거기서 돌아 들어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간음죄를 범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은 다말이 얼굴을 가리웠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간음이 오늘날 여러 곳에서 범람하는 것만큼 난잡하게 허용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다말은 유다가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창녀 식의 옷차림을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하게 생활하는 자들 마음에 이런 수치감을 새겨 놓으셔서 그들 자신의 악함을 스스로 증거 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로부터 얼룩을 씻어낼 수 있다면 아주 기꺼이 그렇게 하려 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여기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그들은 빛을 피해 도망하는 동안 자기들 의사에 반해서 두려움에 감동되는데 이는 그들의 선한 양심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예기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점차 그 감각과 무례함이 정도를 훨씬 초과하여 자기들의 과오를 감추려는 열의가 감소됩니다.
짐승같이 방종한 자들은 형벌을 받지 않고 죄를 지을 수 있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 본연의 지각이 그런 방종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음란으로 하여금 극히 악한 자도 수치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실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다말이 가린 천은 음란이 하나님과 천사들 보시기에 야비하고 더러운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음란을 행하는 당사자들에게도 항상 정죄 받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3. 본문 15절은
"그가 얼굴을 가리웠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입니다.
성급하게 알지 못하는 여인과 관계하기를 원했다는 것은 유다의 큰 수치였습니다.
그는 이제 노인이었습니다.
노인 만큼은 비록 호색한 사람이라도 방종하는 열기를 억제해야 마땅했습니다.
유다는 멀리서 여인을 봅니다.
그러므로 그가 그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혹 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처럼 자기 정욕을 열렬히 폭발시키는 자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나 정의와 번영에 대한 존중심이 크게 떨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우리 앞에 하나의 본보기로 제시됩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만일 여호와께서 억제해 주시지 않는다면 육신의 정욕이 얼마나 쉽사리 폭발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로 하여금 갑자기 간음에 빠지게 한 것은 마음의 안일감이었습니다.
그런 안일한 마음이 우리를 몰래 점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근친상간의 결과로 유다가 입은 불명예가 하나님의 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범죄에 빠질 것입니까?
그런 범죄는 하나님께서 매우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으로 두려운 복수가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본문 16-19절은
"(16)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 자부인 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17) 유다가 가로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 지 약조물을 주겠느냐
(18) 유다가 가로되 무슨 약조물을 네게 주랴 그가 가로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 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더라
(19)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면박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입니다.
다말은 자기 몸을 팔아 이득을 얻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확실한 보증을 원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피해에 대한 보복을 자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께서 유다의 눈을 멀게 하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래 친숙했던 자기 며느리 목소리를 알아 듣지 못하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염소 새끼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에 대한 약조물을 주어야 했다고 해도 창녀에게 자기 인장을 넘겨주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우리는 그가 이중 담보물을 내어 준 불합리성을 묵과한다고 하더라도 그때 유다는 모든 판단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러한 사실들을 기록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유다가 죄 위에 죄를 쌓음으로써 성령의 등불을 꺼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정하신 심판에 의해서 그의 마음이 불행하게도 어두워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5. 본문 20-23절은
"(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약조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 그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가로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가로 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22)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가로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고 그곳 사람도 이르기를 여기는 창녀가 없다 하더라
(23) 유다가 가로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 소새끼를 보내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입니다.
유다는 친구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는데 이는 타인에게 자기 수치스런 일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가 조소를 당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잃어버린 약조물에 대한 불평할 엄두도 내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이 말씀에 대한 어떤 이들의 해석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치 유다가 자기 약속을 이행함으로써 자기 변명을 하려 했다는 듯이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라고 읽습니다.
이보다 다른 의미가 훨씬 더 적합합니다.
유다는 일을 확산시킴으로써 속인들의 구설수를 야기시키느니보다 차라리 반지를 잃어버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상실하기보다 돈을 잃는 것이 더 경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그토록 잘 속는 사람이란 비난을 당할까 두려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로 두려워했던 것은 자기 간음에서 야기되는 불명예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판단보다 세상의 여론에 더 신경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 그를 자극했을 때 어찌해서 '이제 내가 하나님과 천사들 보기에 악하게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적어도 그의 정욕이 냉각된 뒤 어째서 그는 남모르는 자기 죄를 의식하고 얼굴을 붉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세인의 치소 거리를 면할 수만 있으면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태연자약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 대로 어느 누구든지 남이 모르는 것을 근거로 자기 변명을 꾀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간음은 인간의 상식에 의해 정죄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