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화론
빼앗긴 소수자의 역사를 되찾으려는 노력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들이 생산하는 문학, 또는 그들을 위하여 창작한 문학을 소수자문학이라 한다. 여기에서 소수자는 수적인 측면이 아니라 사회적 권력 관계를 기준으로 규정되는 개념이다. 김연화의 <흑조>는 성소수자 문학 또한 성적 정체성의 다양성을 반영하며, 성이 더 이상 하나의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유동적인 정체성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어 눈길을 끈다. 문학 속 성의 표현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모해왔다. 고대와 중세에는 신화나 종교적 상징을 통해 성이 다뤄졌고, 르네상스와 근대에는 성적 욕망과 사회적 억압의 갈등을 표현하는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았다. 현대에 들어서는 성적 자유와 정체성의 다양성이 더욱 강조되며, 성은 더 이상 금기시되는 주제가 아닌,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관계를 탐구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문학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성과 문학의 역사는 곧 인간의 욕망, 갈등, 그리고 자기 정체성에 대한 탐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성에 대한 사회적 규범과 억압을 넘어,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한국문학이 역사와 기억을 마주하는 방식은 계속 변화해왔다. 민주화 이후에는 은폐된 국가 폭력의 고발이 주를 이었지만, 2010년대 이후에는 가부장제와 사회적 정상성에 의해 배제된 이들의 과거와 마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남성화된 역사 서사가 가렸던 여성 서사의 역사적 계보를 복원하고, 증언과 기억의 의미가 무엇인지 날카롭게 질문한다. 전통적 서사 형식을 변주하며 사물의 시선이나 읽기 작업의 형태로 재현하기도 한다. 이 변화는 목소리를 빼앗긴 소수자의 역사를 되찾으려는 노력들이다. 김연화의 <흑조>는 이성애자들과는 달리 동성애자들로 일부일처제 사회에서 위험에 몸을 떨며 영원히 성장하지 못하는 족속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 수필은 전통사회에서 강조하던 길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시대의 길을 찾지 못한 채 혼돈 속에 있는 성소수자들의 삶을 잘 묘파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요즘 미국이나 유럽에는, 여성이나 아이의 눈, 소수자의 눈으로 보는 문학작품이 주목받고 있다. 이를테면,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출신 작가들이, 프랑스에서는 이란계 작가가,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려주고 있다. 김연화는 성소수자들의 삶을 ‘수필’에 등재하고자 한다. 성소수자의 조명을 통해 한국문학의 낡은 교양과 감수성 비판하는 데 앞장서고자 한다. 이 수필은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지적하고 그들에 대한 이해를 촉발하고 있다. 성적 소수자들이 단순히 호기심의 대상이거나, 근본주의 목사들의 주장처럼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임산부의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많았고, 그 결과 출생한 아이의 3분의 1 이상이 동성애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호르몬 분비에 의한 성적 소수자들을 손가락질할 자격은 우리 중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작가 김연화는 ‘엠마’와 ‘써니’ 두 성소수자와의 만남을 통해 그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Ⅱ.
권력을 가진 주체들은 ‘아는 사람’이지만 약자와 소수자들은 그들에 의해 ‘알려진 사람’이 된다. 사회의 소수자들이 알려진 사람이 되지 않고 스스로 발화하는 사람이 되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수필가 김연화의 신작수필에는 그녀가 수차례 외국 여행을 다니며 성소수자 공연을 보고 들은 경험, 그리고 참고 자료를 섭렵한 그녀의 전방위적 지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도대체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예로부터 예술은 주로 약자들, 소수자들, 소외된 자들에 관해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예술가 그 자신들 역시 소외된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사회가 가진 편견과 무지, 인간의 탐욕, 위선적인 체제, 그리고 종교와 권력의 이기주의에 의해서 희생당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대신해서 외치는 사람이 바로 수필가 김연화다. 그것이 작가의 소명이다. 작가는 “어두운 곳을 비추고 지치고 버려진 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 문학”이라고 이 수필을 통해 말하고자 한다.
마지막 힘을 건져 올려 밭은 숨을 내쉬며, 강인한 벗은 몸은 향기로운 땀으로 멱을 감고 있었다. 솟구치고 뛰어오르고 돌고 도는 다섯 흑조는 허리 아래 백조의 깃 튜튜를 걸친 검은 신들의 현신이었다. ‘매튜 본’이 안무한 ‘백조의 호수’에서는 남성 무용수들이 흑조를 연기했고, 초연 공연 중 일부 관객들은 불쾌감을 표시하며 ‘게이 백조의 호수’라고 빈정거리기도 했다. 영상을 통해서였지만 공연과 마주친 나는 그들의 에너지에 매혹되었고, 소름이 돋았으며 심지어는 눈물이 핑 돌았다.
로토루아 호수의 파도 위에서 춤추는 흑조를 떼로 만났다. 같이 출렁이며 춤을 추고 싶었지만, 멀리 있는 너무 많은 흑조는 렌즈로 아무리 당겨도 차이코프스키의 음악 위로 올라오지 못한다. 짙은 어둠으로 막이 내리고, 그날의 공연은 실패였다. 그리고 카우포 호수에서 우아를 떨고 있는 흑조 다섯 마리를 다시 조우하였다. 흑조를 춤추었던 남성 무용수와 흑조가 겹쳐 보이고 신성한 감각이 날을 세우며 뾰족이 일어선다. 조심스레 호수를 끼고 흐르는 흑조를 따라 그 긴 호수 변을 얼마나 걸었는지 발목이 얼얼하다. 어둑어둑 호수에 어둠이 스며들고 수영하던 아이들도 하나둘 스러질 즈음, 흑조가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호숫가 모래톱으로 들어선다. 흑조 여섯 마리를 갈망하던 내 앞에서 다섯 흑조는 그 긴 목을 기울여 쓰레기장에 부리를 박고 먹이를 뒤지고 있다. 흑조에 대한 나의 환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김연화의 <흑조> 중에서
한국문학이 역사와 기억을 마주하는 방식은 계속 변화해왔다. 요즘은 전통적 서사 형식을 변주하며 객체 지향 존재론이나 행위소-네트워크이론 등과 같은 진보적 사회학 이론이 나와 사물의 시선이나 읽기 작업의 형태로 재현하기도 한다. 이 변화는 목소리를 빼앗긴 소수자의 역사를 되찾으려는 노력들이다. 김연화의 이 수필은 오늘날 한국문학의 최전선에서 역사를 마주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함께 읽어보는 자리다. 그 변화의 맥락을 조금이나마 살펴볼 것이다. “매튜 본이 안무한 ‘백조의 호수’에서는 남성 무용수들이 흑조를 연기했고, 초연 공연 중 일부 관객들은 불쾌감을 표시하며 ‘게이 백조의 호수’라고 빈정거리기도 했다. 영상을 통해서였지만, 공연과 마주친 나는 그들의 에너지에 매혹되었고, 소름이 돋았으며 심지어는 눈물이 핑 돌았다.”는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작가는 성소수자에 대한 일반인들의 반감과는 반대의 입장에 서고저 한다.
그런데 흑조의 25%가 동성애라는 충격적인 문구와 함께 흑조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암컷 한 마리를 부른 뒤 집단으로 관계를 맺고, 암컷이 알을 낳고 품어 40일이 지난 후 알이 부화되면, 암컷을 둥지에서 내쫒아 버리고 일부일부가 새끼를 돌본다고? 몹쓸 조류의 행태라고 치부해 버렸으면 좋겠는데, 그 방법이 안식처를 더 잘 지키고 먹이 공급도 원활해서 새끼를 훨씬 잘 키울 수 있는 여건이라 한다. 문둥이박쥐의 상식적이지 못한 진화, 빈대의 가학적이고 동성애적인 번식 방법 외에도 달팽이, 초파리, 거미, 풍뎅이의 번식법 등 자연은 수많은 동성애와 다양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니 이 무슨 괴란인가! 육십 넘은 나이까지 알아 왔던 상식이 와르르 무너진다. 지고지순한 사랑이라고 배워왔던 일부일처제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본능을 거세한 사회적 담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두운 색으로 뇌리를 휘젓는다.
김연화의 <흑조> 중에서
위 글에서 눈여겨 볼 점은 작가의 상식에 대한 회의다. 인간 사회의 일부일처제만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편견을 허물 동성애적 번식방법과 다양한 종류의 사랑법을 자연에서 찾아 제시한다. ‘몹쓸 조류의 형태’ ‘상식적이지 못한’ ‘가학적이고 동성애적인’ ‘이 무슨 괴란인가’ ‘상식이 와르르 무너진다’ 등의 어구로 볼 때, 흑조에 대한 지식이나 생태계의 다양성에 대한 공부를 하기 전, 작가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이런 편견은 일반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눈에 봐도 ‘구부정한’ ‘바르고 정상적인 언어’가 되지 못한 불온한 말들이 뜨겁게 들끓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지극히 정상적이라 여겼던 일부일처제에 대한 회의가 눈길을 끈다. 지극히 정상적인 취향에 대한 회의와 의구심을 풀어놓으면, 기존 평단에서 차별까진 아니더라도 이질적 존재로 인식될 수 있는데도 미움받을 용기를 내었다는 데 대해 박수를 보낸다. 글을 전개해 나가면서도 약간 위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소수자문학의 집을 짓는 데 벽돌 하나 보태기 위해 그녀는 여러 텍스트를 미련할 정도로 모두 찾아 읽은 것 같다. 그녀는 지금까지 수필작가의 상식에 기댄 보수성을 벗고 이제 ‘세대’와 ‘젠더’를 문학 창작 및 향유의 주된 벡터로 만들고자 한다.
오래전, 인도여행에서 새빨간 사리를 입고 붉은 루즈를 칠한 채 땀범벅이 되어 거리에서 춤추고 있는 남자 무용수를 보고 가까이 가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들은 인도에서 아주 천대받는 집단이라 했다. 그 뒤 태국에서도 성소들을 멀찍이서 지켜보았고, 필리핀의 민도르섬에서는 게이클럽에도 가보았다. 그들은 허리쯤에 번호표가 달린 간단한 단체복 원피스를 입은 채, 천천히 돌아가는 무대 위에서 고혹적인 자태를 취하며 서 있었다. 그네들의 아름다운 각선미를 복잡한 감정으로 바라보았는데, 다음 날 알고 보니 그들은 자체 단체를 만들어 민도르섬의 불쌍한 사람들을 보살피며,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학비를 대주는 등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미국 여행 중, 그레이하운드에 깔끔한 거구의 흑인 남성이 어린아이 두 명과 같이 승차하였다. 시간이 지나자 그 남성은 레이스가 예쁘게 달린 바구니를 내리고, 안에서 하얀 앞치마를 꺼내 검은색 남자 정장 위에 장착하더니 굵은 음성에 여성의 어투로 30여 분 잔소리를 하며 아이들에게 점심을 먹였다. 여성의 역할을 하는 남성이었나 보다. 적응되지 않는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셀라론 계단은 낮엔 발 디딜 틈새도 없는 밝은 관광지이지만, 밤이 깊어지면 아주 음험해지는 두 얼굴을 지닌 곳이다. 동성애자들이 몰려들고 거리의 사람들이 길을 지배하는 밤이 되면 난 계단 옆 숙소의 발코니에서 성속을 넘나드는 그들의 애정 행위를 관음증의 눈으로 지켜본다, 그곳은 고양이의 삼각관계까지도 선명하게 읽히는 땅이었다. 길을 걷다 멋진 복장을 한 남자들이 잔뜩 모여있는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중엔 거의 반드시 등이 파인,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고운 화장의 남자들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다. 드물지 않은 광경이란 말은 그야말로 같이, 더불어 잘 살아간다는 말 아니런가! 안보는 듯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그들을 훔쳐보는 것처럼, 그네들도 드러내놓고 관심받기를 즐기진 않는다. 그러나 호주에선 그들이 좀 더 적극적이었기에 호주가 왜 성소수자들의 천국인지 한 번에 이해하게 되었다.
김연화의 <흑조> 중에서
평자가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TEFL을 공부하고 있을 때, 여성 교수 한 분이 자신을 태연하게 성소수자라고 소개해서 깜짝 놀란 바가 있다. 다른 여성과 결혼해서 살고 있고,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우고 있는데, 대여섯 살 되는 여자 아이 두 명을 데리고 와서 강의실 뒷공간에서 놀게 하였다. 나는 그녀의 당당한 고백에 엄청 충격을 받았지만, 미국사회라서 문화의 다양성 차원에서 이해하여고 노력했다. 그때는 실례가 되는 줄로 모르고 민감한 질문을 했던 것 같다. 내가 그 교수에게 한 질문은 부부가 둘 다 여성이면, 아버지 역할을 하는 부모를 아이들은 어떻게 부르는지 물어봤다.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해주었다. 엄마 역할을 하는 사람은 ‘맘’이라고 부르고, 자신은 아빠 역할을 하는데, 아이들은 자신을 ‘마미’라고 부른다고 설명을 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바꾸게 된 계기가 아마도 이때부터가 아닌가 여겨진다. 아이들도 행복해 보였고, 성소수자인 그 교수도 결혼생활에 엄청 만족하고 있는 듯보였다. 작가는 여행 중에서 만난 성소수자를 보면서 “복잡한 감정으로 바라보았는데... 다음 날 알고 보니 그들은 자체 단체를 만들어 민도르섬의 불쌍한 사람들을 보살피며,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학비를 대주는 등 사회에 선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에 대한 편견이 차츰 엷어지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케언즈에서 써니를 만났다. 하늘하늘한 하늘색 실크 원피스를 입고 긴 금발 머리를 한 프랑스인 써니는, 어둔 밤 방향 잃고 정신줄 놓은 나를 구출해준 아가씨다. 심지어 가느다란 발목에 높은 하이힐을 신은 그녀가 엘리베이터 없는 숙소의 3층까지 무거운 나의 짐을 번쩍 들어 옮겨주었을 때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발코니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고, 그녀가 ‘그 남자’임을 눈치챘다. 고마움의 표시로 밥이라도 한 끼 사주려고 했으나, 케언즈에 머무는 동안 항상 그가 먼저 무언가를 내게 내밀었다. ‘저 착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프랑스의 부모 형제로부터는 인정받고 있을까? 그냥 주어진 성대로 살았다면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편했을 텐데... “ 그의 고통을 각색하며 아픈 쪽으로 자꾸 장면을 전환한다. 헤어지기 전날 그가 선포했다, ”고통? 그게 뭔데? 난 지금의 삶이 지극히 행복해, 매일 신께 감사드리는 나날이야!“ 순간 성소수자들이 내 삶의 동일선상에 섰다. 케언즈 도서관에서 본 성소수자들의 사진첩 속 장면들도, 여자 수영복이 불쌍해 보였던 뉴질랜드 픽턴의 레이디보이 엠마도 가슴에 담았다.
세상 곳곳, 어디라도 있어 왔던 동성애다. 딸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2주 간의 방학 동안 기숙사는 비워주어야 하는데, 갈 곳도 없고 경비도 없어 고민되었나 보다. 학교의 어린 학생을 뉴욕에 있는 집까지 데려다주고 그 집에서 머물다 다시 아이를 학교로 데려오는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그 초등학생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선 그어지지 않는 인간관계로 아주 혼란스러웠나 보다. 남성은 엄마고, 여성은 아빠이며, 아빠인 여성을 엄마라 부르는 아이, 여성과 사랑에 빠진 여성, 남성 연인과 같이 온 남성이 여성과 다시 사랑을 나누는 등의 복잡한 세상을 겪었다. 사회적 규범을 무시하는 온갖 성이 드나들었던 그 집에서 딸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세상을 한꺼번에 보고, 한번 만에 이해하고, 지금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성소수자들을 백안시하고 무시했던 나의 어리석음과 그들을 동등한 사람으로 받아들인 딸의 입장은 지금도 바람과 바다처럼 충돌을 일으켜 종종 파도를 일으킨다. 아직도 일반적인 명사들을 쉽게 대화에 섞지 못해 효모, 트렌짓, 레드, 걔, 레보, 꼬툭튀라고 표현하는 그것 자체가 우스운 회피임을 인정하면 파도가 잦아들까?
김연화의 <흑조> 중에서
1990년대 이후 신경숙, 공지영, 양귀자 등 여성서사와 여성독자가 있었고 뒤이어 2000년대 자폐적 내면의 기록이 등장하면서 한국문학은 서사를 잃었다, 김연화는 사회적 규범을 무시하는 온갖 성이 드나들었던 그 집에서 딸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세상을 한꺼번에 보고, 한번 만에 이해하고, 지금 관련 일을 하고 있다고 적었다. 성소수자들을 백안시하고 무시했던 저신의 어리석음과 그들을 동등한 사람으로 받아들인 딸의 입장은 지금도 바람과 바다처럼 충돌을 일으켜 종종 파도를 일으킨다고 하면서, 아직도 일반적인 명사들을 쉽게 대화에 섞지 못하고 효모, 트렌짓, 레드, 걔, 레보, 꼬툭튀라고 표현하는 그것 자체가 우스운 회피임을 인정하면 파도가 잦아들까 하며 독자에게 되묻는다. 편견이 얼마나 깨기 어려운 것인가를 심문하는 듯하다. 작가의 딸은 소수자 문제에 긍정적이고 우호적이다. 가장 보수적인 한국문단의 일면을 보여주는 성소수자에 대한 뜨악한 반응이야말로 어쩌면 뻔한 것 아닐까. 하지만 그녀의 글은 성소수자 문제를 극복해야 할 문제로 제기하는 열린 작가로 평가받을 만하고, 그녀의 ‘서툰 도전’이 진보적이란 평가를 내려본다.
아직까지 난 무지개 색깔의 건널목을 보면서 의미를 따지고, 남자끼리 손을 잡고 가면 그들을 그늘에 세운다. 그러나 이제 알고는 있다. 써니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그냥 써니는 있는 그대로 이해되어야 함을. 무지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은 틀렸다. 그때는 맞다고 배웠지만, 지금은 틀렸다. 흑조도 배고프면 쓰레기통을 뒤질 수 있고, 살아남기 위한 진화 수단으로 수수가 자식을 지킬 수도 있다, 그것이 거대한 자연의 섭리인 것을!
김연화의 <흑조> 중에서
수많은 문학, 연극, 음악, 오페라, 미술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약자들이었다. 가장 화려해 보이는 장르인 오페라만 봐도, <나비 부인>의 초초상은 소녀 가장,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는 매춘부, <카르멘>의 주인공은 집시, <리골레토>의 주인공은 장애인이다. 이처럼 예술 작품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사회의 약자들, 즉 소외된 자들이다. 이 수필에서 김연화는 성 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의 삶을 살펴본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졌던 자신의 편견을 교정한다. “써니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그냥 써니는 있는 그대로 이해되어야 함을. 무지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은 틀렸다. 그때는 맞다고 배웠지만, 지금은 틀렸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중요한 층위는 담론층이다. 발단부 전개부를 거쳐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결말부로 오면서 사라지고 만다. 가장 강력한 설득적 근거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라는 어구다.
Ⅲ.
성소수자를 제외하고 한국문학 전체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전체는 부분의 총 집결체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문학의 지배적 가치를 구축한 이들의 여성혐오, 소수자혐오, 순문학주의에 집착하는 제국주의적 욕망 등 불만족스러웠던 성격 전반의 종족화된 기표로서 ‘개저씨’란 개념이 문학 저편에 존재한다. 페미니즘을 ‘비문학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는 비평적 시도도 있다. 한국근현대사의 폭압을 특권적으로 경험한 남성 주체들이, 시민이자 역사적 주체로서 자격이 박탈된 성소수자 문학 출현에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문제일 수 있다는 점을 노정하면서, 일부일처제 상식이 아직도 진리인가를 그녀는 은근히 묻는다. 세상에 아직도 편견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이 있는데, 작가들이 아파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젊은 독자들은 은밀하게 웹툰과 비엘(보이스 러브, 남성간 성애물)을 보고 있는데, 한국문학 자체가 드넓은 서사장르에서 재현하지 못하고 있는 영역에 대해 한번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도 제기한다.
소수자문학의 가부장적 문학질서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던 노력이 누군가에겐 충격이고 누구에겐 선물일 것이다. 불편해하거나 후련해하거나, 둘 중 하나다. 타자의식을 등재시키려는 그녀의 작업은 성소수자문학이라는 라벨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에 갇혀 있다. 이 수필은 사사로운 욕심에 함몰되었던 우리에게 세계를 열어 주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진리를 드러낸다. 삶과 실천 사이에서, 개인의 윤리와 세상의 문제를 마주쳐 보고, 자신의 인식과 세계 사이의 간극에 작가는 막막해지는 것이다. 우리를 불편하고 아프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문학이다. 문학이 주는 고통을 견뎌 낼 때, 비로소 내 속에서 진정한 문학이 된다. 카프카의 말처럼, 진정한 예술은 “사람들의 얼어붙은 내면의 얼음을 깨는 도끼 같은 것”이다. 문학이 슬퍼할 때, 문학이 진정으로 눈물 흘릴 때, 비로소 우리는 지고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김연화 수필의 메시지이고, 그런 수필이야말로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