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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문법을 빌려서 말하면, 괴물이란 균형이 부자연스러운 얼개나 그러한 부분을 지닌 생물로서 사람들이 공포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들을 총칭한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능력이 빼어나고, 이에 어울리게 잔인해서 그 힘과 잔인성을 행사할 경우 인간에게 큰 해를 입히거나 고통을 겪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괴물들 중에는 다른 동물의 몸 일부를 제 몸에 갖추고 있는 것도 있다. 예컨대 스핑크스와 키마이라가 그렇다. 이런 괴물들은 야수의 무서운 성질에서 인간의 지혜와 재능에 이르기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괴물들과는 달리, 몸 크기만 인간과 다를 뿐 모양은 똑같은 괴물도 있다. 이것이 바로 기간테스다. 이 족속에 대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이 기간테스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말을 써서 어떨지 모르지만, 가령 인간적인 기간테스가 있다. 퀴클롭스, 안타이오스, 오리온 같은 기간테스는 크기만 할 뿐, 모양새는 인간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들은 인간과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신들을 상대로 한판 전쟁까지 벌인 초인간적 기간테스는 우선 그 크기가 엄청나게 컸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티튀오스는 누우면 들판을 9에이커1)나 덮을 만큼 컸고, 엔켈라도스는 신들이 꾹 눌러 놓으려면 아예 아이트나 산 전체를 들어 눌러 놓아야 할 만큼 컸다.
이러한 기간테스가 신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일이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쓴 바 있다. 실제로 이러한 전쟁이 계속될 동안 기간테스는 신들의 만만치 않은 적이었다. 기간테스 중에는 브리아레오스처럼 팔을 백 개나 달고 있는 기간테스도 있고, 튀폰처럼 불을 뿜는 기간테스도 있었다. 기간테스가 이러하니, 한때는 신들도 불안을 느끼고 이집트까지 도망쳐 갖가지 동물로 둔갑해서 숨어 살았다.
이 때 제우스는 숫양(羊)으로 둔갑했는데 이 때문에 제우스는 뒷날 이집트에서 뿔이 나선형으로 꼬인 암몬 신으로 섬김을 받았다. 당시 아폴론은 까마귀로, 디오니소스는 산양으로, 아르테미스는 고양이로, 헤라는 암소로, 아프로디테는 물고기로, 헤르메스는 새로 둔갑하여 숨어 살았다. 또 어느때엔 이 기간테스가 올륌포스를 공격하려 하기도 했다. 이 기간테스가 오싸 산을 들어 펠리온 산에다 포갠 것도 올륌포스 천성(天城)을 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이들도 결국 벼락에는 손을 들고 말았다. 이 벼락은 아테나가 발명하여, 헤파이스토스와 퀴클롭스들에게 이것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는데 헤파이스토스와 퀴클롭스는 제우스를 위해 이것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1 약 2만 평.
아스클레피오스 대리석상1)
이 종족의 괴물은 머리부터 허리까지는 사람이고, 나머지는 말처럼 생긴 동물이었다고 한다. 고대인들은 말을 몹시 좋아했기 때문에, 말의 성질이 인간의 성질과 결합되어 있어도 이를 퇴화한 복합물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따라서 켄타우로스는 고대의 공상적 괴물 가운데서도 긍정적인 특성을 부여받은 유일한 괴물이었다. 켄타우로스에게는 인간과의 사귐도 허용되어 있었다.
그래서 페이리토스와 히포다메이아가 결혼식을 올렸을 때도 다른 손님들과 다름없이 초대를 받았다. 그러나 혼인 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켄타우로스 족의 하나인 에우뤼티온이 술엔 크게 취하여 신부를 폭행하려 했다. 그뿐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른 켄타우로스들이 이 에우뤼티온과 같은 짓을 하는 바람에 무서운 싸움이 벌어져 켄타우로스 몇몇이 살해당할 정도로 싸움이 커졌다. 이것이 저 유명한 라피테스 족과 켄타우로스 족간의 패싸움으로, 고대의 조각가나 시인들은 이를 즐겨 작품의 제재로 다룬 바 있다.
그러나 켄타로우스 족이라고 해서 모두가 페이리토스의 난폭한 결혼 하객 같았던 것은 아니다. 케이론이라는 켄타우로스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로부터 교육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사냥, 의술, 음악, 예언술에 도통해 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름난 영웅들은 거의가 이 케이론의 제자들이었다.2)
특히 아스클레피오스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아폴론의 손에 이끌려 와 이 케이론에게 맡겨진 바 있다. 이 철학자 케이론이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자, 딸 오키로에가 나와 아버지를 맞이하다가 아이를 보자마자 예언자 말투로(오키로에는 진짜 예언자였다) 장차 그 아이가 얻을 눈부신 영광을 예언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장성하자 유명한 의사가 되었는데, 언젠가는 갓 죽은 사람을 살려 놓은 적도 있다. 그러니 하데스가 이를 곱게 보았을 리 없었다.
하데스는 제우스에게 이를 탄원했고, 제우스는 하데스의 탄원을 받아들여 이 대담한 의사를 벼락으로 때려 죽였다. 그러나 죽인 뒤에는 그를 신들의 반열에 넣어 주었다.
케이론은 켄타우로스 가운데서도 가장 슬기롭고 공정했다. 케이론이 죽자 제우스는 그를 인마궁3)(人馬宮)이라는 별자리로 박아 주었다.
1 아폴론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는 죽은 사람도 살린 적이 있을 정도로 용한 의사이자 의술의 신이었다. 아스클레피오스를 모신 사당에는 늘 흙빛 무독사(無毒蛇)가 몰려들었다고 해서 뱀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 의신(醫神)은 학교를 세우고 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의성(醫聖)으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바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의숙(醫塾)이 배출한 명의였다고 한다. 기원전 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대리석상.
2 가령 아킬레우스, 아스클레피오스, 이아손, 디오스쿠로이 등.
3 Sagittarius. 〈활쏘는 자〉라는 뜻. 곧 사수좌.
그리핀
그리핀 혹은 그리프스는 몸은 사자 몸이고, 머리와 날개는 독수리 머리, 독수리 날개이며, 등은 쇠로 덮여 있는 괴물이다. 이 괴물은 새처럼 둥지를 틀고 사는데 알 대신에 마노(瑪瑙)를 낳는다. 발톱은 크고 긴데, 어느 정도냐 하면, 그 나라 사람들이 이 발톱으로 술잔을 만들 정도다.
이 그리핀 혹은 그리프스의 고향은 인도로 전해진다. 이들은 인도의 산에서 황금을 발견하면 그 황금으로 집을 지었다. 이 때문에 이들의 집은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었고 이들은 밤에도 자지 않고 제 집을 지켜야 했다. 이들은 또 본능적으로 보물이 매장되어 있는 곳을 알았고, 약탈자들로부터는 있는 힘을 다해 이 보물을 지키려 했다. 당시 이 그리핀과 함께 살던 아리마스포이 족은 스퀴티아의 외눈박이들이었다.
밀턴은 『실락원』 제2편에서 이 그리핀 혹은 그리프스 이야기를 그대로 빌리고 있다.
그리핀이,
잠 안 자고 지켰는데도 황금을 도둑맞자,
저 아리마스포이 인들을 쫓아 뛰어서 들판을 지나고,
날아서 구름과 골짜기를 넘어갔던 것처럼.
로마의 신들
해산의 여신 루키나1)
지금까지 말한 신들은, 뒷날 로마 인들 역시 받아들이긴 했지만 원래는 그리스의 신들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말하는 신들은 로마 신화에만 나오는 로마 신들이다.
사투르누스는 고대 이탈리아 인들이 섬기던 신이다. 그리스 신 크로노스와 동일시되는 이 신은, 전설에 따르면 유피테르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이탈리아로 도망쳐 왔다. 이곳에서 그가 다스렸던 시기는 소위 황금시대라고 불린다. 사람들은 사투르누스의 선정을 기념하여 매년 겨울이 되면 사투르날리아 축제[農神祭]를 연다.
이 축제 기간에는 일체의 공무(公務)가 중지되고, 선전 포고나 형벌의 집행도 연기되며 친구끼리는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노예에게는 특별한 자유를 베푼다. 이 축제 때 노예에게 특별 자유가 베풀어진다는 것은, 노예들을 위한 잔칫상이 마련되고 그들이 잔칫상에 앉으면 주인들이 시중을 드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본래 평등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사투르누스 치하에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물건을 똑같이 소유한다는 점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사투르누스의 손자 파우누스는 목초지와 목자들의 신, 그리고 예언의 신으로 섬김을 받는다. 이 이름이 복수형(複數形)인 파우니(Fauni)가 될 경우에는 그리스의 사튀로스처럼 놀기 좋아하고 익살스러운 한 무리 신들을 뜻한다.
키리누스는 전쟁신인데, 이는 다른 이가 아니고 바로 로마의 시조(始祖) 로물루스다. 이 로물루스가 사후에 신의 반열에 든 것이다.
로마의 사투르누스2)
늑대 젖으로 자라나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20세기, 파울 우드루프의 그림.
벨로나는 전쟁 여신이다.
테르미누스는 토지 경계를 주관하는 신이다. 그의 신상은 조잡한 돌기둥으로 만들어지는데 주로 토지의 경계를 밝힐 목적으로 지면에 세워진다.
팔레스는 가축과 목장을 주관하는 여신이다.
포모나는 과일나무를 주관한다.
플로라는 꽃의 여신이다.
베스타4)는 국가의 화덕(난로)과 가정의 화덕을 주관하는 여신이다. 이 여신의 신전에서는 〈베스탈〉이라고 불리어지는 여섯 처녀 사제가 수호하는 성화가 있다. 사람들은 이 성화가 꺼지지 않아야 나라가 조용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혹 처녀 사제들이 이 성화를 꺼뜨리는 일이 있으면 엄하게 그 죗값을 물리고는, 태양 광선으로부터 그 성화를 다시 채화했다.
리베르는 바쿠스, 즉 디오니소스의 라틴 어 명이고 물키베르는 불카누스5)의 라틴 어 명이다.
야누스(Janus)는 하늘의 문지기이다. 한 해를 여는 신이 바로 야누스였기 때문에 일년의 첫달은 그의 이름을 좇기로 했다.6) 문지기 신인 야누스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신으로 그려진다. 문이란, 통상 두 갈래 길에 면하여 두 개 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에는 야누스의 신전이 많았다. 전쟁시에는 그 신전의 문이 항상 열려 있었다. 자연히 평화시에는 이 문이 닫히는데, 누마 왕의 치세가 시작되고 나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 이 신전의 문은 딱 한 번 닫혔다고 한다.
페나테스 신들은 가정의 안녕과 번영을 지켜 주는 신들로 섬김을 받았다. 페나테스라는 말은 페누스(penus), 곧 식료품을 넣는 선반(pantry)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선반은 이 신들을 모시는 성소(聖所) 구실을 했다. 따라서 각 가정의 가장은 모두 자기 집 페나테스 신의 사제였다.
라레스 혹은 라르스 역시 가정을 지켜 주는 신들이었다. 그러나 페나테스와 다른 것은, 라레스가 사자(死者)의 영(靈)이 신이 된 것으로 믿어진 점이었다. 가정의 라레스는 그 가정 선조의 영으로, 자손을 보살피고 지키는 것으로 믿어졌다. 레무르(Lemur), 혹은 라르바(Larva) 같은 신의 이름은 영어의 유령(ghost)이라는 말과 거의 일치한다.
로마 인들의 믿음에 따르면, 남자에겐 수호신 게니우스,7) 여자에겐 여자의 수호신 유노8)가 있다. 곧 이 신들이 자기들을 태어나게 하고 한평생 보호자 노릇을 하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일이 되면 남자는 게니우스에게, 여자는 유노에게 제물을 바쳤다.
현대의 한 시인은 로마의 신들에 대해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포모나는 과수원을 사랑하고,
리베르는 포도를 사랑하고,
초가 지붕 오두막을 사랑한다.
베누스는 앞날을 언약한 처녀 총각의 속삭임을 사랑한다.
4월의 상앗빛 달이 은은한 밤 밤나무 그늘 아래서 속삭이는.9)
1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해산의 여신 루키나. 그리스의 〈에일레이튀이아〉에 해당한다.
2 그리스의 크로노스와 동일시되는 로마의 사투르누스. 이 그림은 크로노스를 그린 것이 아니고 로마의 신 사투르누스를 그린 것이다. 따라서 왼쪽의 여신은 헤라가 아니라, 로마 신화의 헤라라고 할 수 있는 유노(Juno)다. 16세기, 파울로 베르네제.
3 그리스 신화에서 출산을 주관하는 여신은 헤라 여신의 딸 에일레튀이아다. 이 여신이 돌아앉으면 산모는 아기를 출산할 수 없다.
4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불씨 및 부뚜막의 여신 헤스티아.
5 그리스 신화의 헤파이스토스.
6 1월을 뜻하는 라틴 어는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이다. 영어의 〈재누어리(January)〉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7 〈게니우스(Genius)〉라는 말은 〈수호신〉이라는 뜻이다. 늘 이 수호신과 함께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천재를 뜻하는 영어 〈지니어스(genius)〉는 게니우스의 영어식 발음일 뿐이다.
8 그리스 신화의 헤라 여신. 영어 이름은 쥬노(Juno).
9 제1장 〈신들의 전성시대〉는 이렇게 해서 끝난다. 제2장 〈영웅의 전성시대〉에 이르면, 영웅들은 끊임없이 신들에게 반항하거나 도전하고, 신들은 이들을 견제하거나 응징한다. 순교하는 영웅은 장엄한 찬송가의 주인공이 되고, 스스로 오만해지는 영웅은 참혹한 죽음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대부분이 신들의 피를 받은 신인(神人)들인 그리스 시대 영웅들은 사라졌지만, 그 면면은 오늘날에도 다른 모습을 하고 우리들 앞에 나타난다. 그리스 영웅에서 〈아키타이프(archetype)〉라고 불리는 인간의 〈원형(原型)〉를 찾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제2장 영웅의 전성시대
파에톤은 아폴론1)과 요정인 클뤼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어느 날 파에톤2)의 친구 하나가 파에톤에게 네가 무슨 아폴론의 아들이냐고 비웃었다. 파에톤은 화가 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던 나머지 그 길로 어머니 클뤼메네에게 달려와 투정을 부렸다.
「어머니, 제가 정말 신의 핏줄을 이어받았다면, 뭐라도 좋으니 그 증거를 보여 주세요. 제가 참말로 신의 아들이라면,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할 권리를 보증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클뤼메네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어미가, 우리를 굽어보시는 저 태양신에 맹세하거니와 지금까지 너에게 한 말은 모두 사실이다. 만일에 내가 너에게 거짓말을 했다면, 지금부터 내 눈으로는 태양을 볼 수 없으리라. 그리고 그리 어렵지도 않을 테니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 태양이 하늘로 오르는 곳은 우리 나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가서 네 아버지 태양신께, 너를 자식으로 인정해 달라고 여쭙도록 해라.」
파에톤은 이 말을 듣고 몹시 기뻐했다. 곧 파에톤은 태양이 솟는 곳에 해당하는 인도를 향해 길을 떠났다. 희망과 긍지로 부푼 가슴을 안고, 아버지 아폴론이 그 운행을 시작하는 곳으로 떠난 것이다.
태양신의 궁전은 원주에 떠받들어져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궁전 전체가 황금과 보석 빛으로 휘황찬란했다. 천장은 잘 갈려 윤이 나는 상아로 만들어져 있었고, 문은 모두 은으로 되어 있었다. 재료도 좋거니와 다듬은 솜씨는 이를 능가했다.
벽에는 명장(名匠) 헤파이스토스가 새긴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그곳에 사는 이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바다에는 요정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물결이나, 물고기 등을 타고 노는 요정이 있는가 하면, 바위 위에 앉아 바다 빛깔처럼 파란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는 요정들도 있었다. 이 요정들의 얼굴은 서로 같은 것도 아니고, 서로 다른 것도 아니어서 딱히 말하자면 한 자매간의 얼굴과 흡사했다.
땅에는 마을과 숲과 강 그리고 들판의 신들이 새겨져 있었고 이 모든 것 위로는 장대 미려한 천계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은으로 된 문에는 좌우에 여섯 개씩 12궁 성좌가 새겨져 있었다.
클뤼메네의 아들은 험한 오르막길을 올라가, 문제의 아버지가 산다는 그 궁전 안으로 들어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발길을 멈추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선 것은, 아버지가 내뿜는 빛이 너무 눈부셔서 가까이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이보스 아폴론, 곧 휘황찬란한 태양신은 자줏빛 용포를 입고 금강석을 박은 듯이 반짝이는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좌우에는 〈일(日)의 신〉 〈월(月)의 신〉 〈연(年)의 신〉들이 서 있었고, 사이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시(時)의 신〉들이 서 있었다. 〈봄의 여신〉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서 있었고, 〈여름의 신〉은 옷을 벗은 채 익은 곡식 대로 짠 화관을 쓰고 있었으며, 〈가을의 신〉은 포도즙을 발에 묻힌 채 포도주 담글 포도를 맨발로 밟아 터뜨리고 있었고, 얼음같이 차가워 보이는 〈겨울의 신〉은 서릿발투성이인 머리카락을 하고 서 있었다. 이같은 신들에 둘러싸여 있는 태양신 아폴론은, 삼라만상 무엇 하나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눈으로 그곳의 장대 미려한 광경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 젊은이를 내려다보며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물었다. 파에톤이 아버지 아폴론의 질문에 대답했다.
「끝없는 세계의 빛이시며 빛나는 태양신이시며, 이렇게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아버님이시여, 만인에게 제가 아버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어 밝힐 수 있는 증표를 내리소서.」
파에톤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아버지 아폴론은 머리에 쓰고 있는 빛나는 관을 벗어치우고는 젊은이에게 가까이 오라고 명했다. 파에톤이 가까이 가자 아폴론은 아들을 껴안으며 말했다.
「내 아들아, 이제 네가 내 아들이 아니라고 할 자는 없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한 말은 한 마디도 틀린 데가 없다. 네 소원을 하나 말해 봐라. 네가 바라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하여 네 의혹을 걷어 주리라, 내 저 무서운 강3)에다 맹세하마. 내 아직 저 강을 본 적이 없다만, 우리 신들은 어길 수 없는 지엄한 약속을 할 때마다 저 강에다 맹세하느니라.」
이 말에 힘을 얻은 파에톤은 다른 것도 아닌 이륜(二輪) 태양 마차를 하루만 몰게 해라고 말했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 아폴론은 자기가 한 약속을 후회했다. 그래서 세 번이나 네 번이나 그 빛나는 머리를 흔들어 경고의 표적을 삼았다.
「내 약속이 너무 경솔했구나. 너의 그 소원만은 아무래도 거두어야겠다. 그래 그래 그것만은 거두어 다오. 그런 소원을 들어주면 오히려 네 안전이 위태롭다. 더구나 네 나이와 네 힘에는 너무나 벅찬 소원이다. 너는 지금까지 인간으로 살아왔으면서도 인간의 힘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을 바라고 있다. 너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이런 말을 했겠지만, 이것은 신들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저 불타는 태양 마차를 모는 일은, 이 아비밖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니라. 제우스 대신(大神)께서도 저 무서운 오른팔로 벼락을 던지실 수는 있을지언정 이것만은 하실 수가 없다. 태양 마차가 가는 길은 험하디험해서 아침에는 원기가 충천할 듯한 말들도 오르는 데 애를 먹는다. 길 중간 부분은 저 천공(天空)으로 하도 높이 솟아 있어서 이 아비조차 거기서부터는 눈 아래로 펼쳐진 땅과 바다를 내려다보면 정신이 가물가물해진다. 마지막 길은 경사가 급한 비탈길이어서 아무리 신중하게 고삐를 잡아도 나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마차를 몰아낼 수가 없다. 테티스 여신은 이 아비를 맞으러 나오시는데, 그 분조차도 이 아비가 거꾸로 곤두박질이나 하지 않을까 가슴을 졸인다고 하셨다. 어디 그뿐이냐, 천공은 늘 회전하는데 별들도 이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싸잡아 돌리는 이 운행의 흐름에 휩쓸려들지 않으려면 이 아비까지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만일에 내 이륜 마차를 빌려 준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천구가 네 발 아래서 회전하고 있는데, 네가 내 궤도를 바르게 따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태양 마차의 궤도 연도에는 신들이 사는 숲이나 마을이나, 궁전이나 신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무시무시한 괴물들 사이를 지나야 하는데 네가 할 수 있겠느냐? 무시무시한 황소4)의 뿔 곁을 지나고, 활에다 화살을 먹이고 있는 반인반마(半人半馬)인 사수(射手) 앞을 지나고 사자 입 앞을 지나고, 이 쪽에서는 전갈이 집게를 안 쪽으로 뻗치고 있고 저 쪽에서는 게가 그 집게를 바깥 쪽으로 내밀고 있는 곳을 지나야 하는데 네가 할 수 있겠느냐? 뿐만 아니다. 가슴 가득 화염을 안고, 입으로 코로 화염을 뿜으며 질주하는 저 말을 다루어야 하는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닌즉 네가 할 수 있겠느냐? 그것들이 말을 듣지 않고, 고삐 채는데도 움직이지 않을 때면 이 아비조차 애를 먹는데 네가 어쩌려느냐? 아들아, 이 아비가 어찌 아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겠느냐? 거둘 수 있는 지금 네 소원을 거두어 다오. 네가 그런 소원을 말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이 아비의 피를 받은 이 아비의 친아들이라는 증거가 아니겠는냐? 네가 이 아비의 친아들이 아니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걱정을 하겠느냐? 내 얼굴을 잘 보아라. 네가 이 아비 마음 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좀 좋으랴. 그러면 아비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불 보는 듯이 알 수 있을 터인데······.」
아폴론의 말은 계속되었다.
「······세계를 두루 구경하고, 바다가 가지고 있는 것이든 땅이 가지고 있는 것이든, 네가 갖고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 골라 보아라. 연후에 아비에게 일러 다오. 이 아비가 거절하는 일은 없을 터인즉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이 아비의 태양 마차를 몰겠다고 조르지만 말아 다오. 네가 바라고 있는 것은 명예가 아니고 파멸이다. 아직도 이 아비 목에 매달려 조르는 것이냐? 할 수 없구나, 서약을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네 원대로 하려무나. 네가 이보다 나은 것을 선택하면 이 아니 좋겠느냐만······.」
아폴론은 이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파에톤은 아버지의 이러한 경고를 들은 척도 않고 끝내 제 고집만 부렸다. 달래고 또 달래었으나 끝내 듣지 않자 빛나는 태양신도 어쩔 수 없이 태양 마차를 둔 천계로 아들을 데려갔다.
태양 이륜차는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 선사한 것으로, 황금으로 되어 있었다. 뼈대도 황금, 바퀴도 황금, 바퀴 굴대도 황금이었으나 바퀴살만은 은이었다. 마부석에는 감람석과 금강석이 무수히 박혀 있었는데 이는 태양의 빛을 사방팔방으로 비추기 위함이었다.
대담무쌍한 청년 파에톤이 반쯤 얼이 빠진 채 이 태양 마차를 바라보고 있을 동안, 〈새벽의 여신〉은 동쪽의 자줏빛 문을 열고, 장미가 만발한 길을 드러내었다. 별들은 〈금성〉의 손짓에 물러나 자취를 감추었다. 땅이 빛나기 시작하고, 달이 물러나려 할 즈음 아버지 아폴론은 〈시(時)의 신〉들에게 명하여 말에 마구를 준비시키라고 명했다.
시의 신들은 명령대로, 암브로시아[神食]를 배불리 먹인 준마들을 마구간에서 끌어내 고삐를 채웠다. 아버지 아폴론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아들의 얼굴에다 특효 영약을 발라 불꽃에 그을지 않게 해주었다. 그런 다음 아들의 머리에 빛나는 관을 씌워 주고, 불길한 일을 예감한 듯 한숨을 쉬면서 당부했다.
「얘야, 네가 이렇듯 가려 하니 가기는 가되 내 말 몇 마디만을 새겨듣도록 하여라. 채찍은 아끼고 고삐는 꽉 틀어쥐어야 한다. 말은 기운차게 달린다. 이들을 제어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다섯 권역(圈域) 사이로 곧장 가서는 안 된다. 반드시 왼쪽으로 돌아서 진입하여야 한다. 맨 가운데에 있는 세 권역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고, 한대권이나 열대권으로도 들어가지 않도록 하여라. 이 아비가 지나던 마차 바퀴 자국이 네 눈에도 띌 게다. 잘 보고 따르면 이 자국이 네 길을 안내해 줄 게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열을 골고루 받게 하기 위해서는 고도를 너무 높게 잡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너무 높으면 천상에 있는 신들의 처소를 불태우게 되느니라. 너무 낮게도 잡지 않도록 하여라. 너무 낮게 잡으면 땅에 불을 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중도(中道)가 가장 안전하고 좋은 길인 것이다. 내 이렇듯 일렀으니 이제 모든 것을 네 운명에 맡기기로 한다. 네가 여지껏 네 신변의 안전을 염려해 온 이상으로 운명의 여신들이 네 신변을 염려해 주면 얼마나 좋으랴. 보아라, 〈밤의 여신〉이 서쪽 문 밖으로 나가려 하고 있다. 너도 서둘러야 한다. 자, 어서 고삐를 잡아라. 이 아비의 충고를 따를 생각이 있거든,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여기 얌전히 있거라. 대지를 따뜻하게 비추는 일은 이 아비에게 맡기고······.」
그러나 재빠른 젊은이 파에톤은 이륜 태양 마차에 뛰어올라 가슴을 펴고 고삐를 잡고는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아버지에게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러는 동안에도 천마들은 콧바람과 불길의 숨결을 식식거리며 발굽으로 바닥을 긁어 대고 있었다. 이윽고 마구간의 가로장이 걷히자 끝없는 우주의 대평원이 눈앞으로 뻗어 있었다. 말은 기세 좋게 앞으로 돌진하여 앞길을 가로막는 구름을 박차고, 거의 같은 순간 동쪽에서 불어온 아침의 미풍을 앞서 내달았다. 말은 곧 자기들이 끌고 있는 마차가 조금 가벼워진 것을 알았다. 바닥짐 없는 배가 거친 파도에 휩쓸려 바다 위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동요하듯이 무게가 전 같지 못한 이 태양 마차도 빈 마차처럼 덜컹거렸다.
말이 함부로 돌진하는 바람에 마차는 늘 다니던 궤도에서 벗어났다. 파에톤은 몹시 놀랐으나 고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설사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으리라.
〈큰곰〉 자리와 〈작은곰〉 자리가 맨 먼저 불길에 그을렸다. 이 둘5)은, 차라리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하고 싶어했다. 또 북극에서 또아리를 틀고 점잖게 동면하고 있던 〈뱀〉6)도 몸을 꿈틀거리며, 그 포악한 성미가 동하는지 눈을 꿈벅거렸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소몰이〉7)도 쟁기를 걷어치우고 늘 동작이 굼뜬데도 불구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났다고 한다.
불운한 파에톤은 잠깐 발 아래의 지상을 내려다보았는데, 그게 너무 아득하게 펼쳐져 있어서 그만 파랗게 질리면서 두 무릎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휘황찬란한 빛이 비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몽롱해진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에는 어쩌다 손을 대었던고, 누구의 아들이든 그런 것은 확인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아버지도 그렇지, 어째서 이런 청을 들어주셨단 말인가.’
그는 이런 생각을 두서없이 했다. 폭풍에 흔들리는 조각배처럼 그 역시 그렇게 흔들리며 실려 갈 뿐이었다. 배가 그렇게 흔들리면 키잡이에게도 신들께 기도하는 것밖에는 다른 수가 없는 법이다. 파에톤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머나먼 천공의 길을 뒤로 했으나 남은 길은 그보다 멀고 멀었다. 그는 앞을 보고 위를 보고 했다. 뒤로 보면 떠나 온 동쪽 하늘이 보였고 앞으로 보면 도무지 이를 것 같지 않은 서쪽 하늘이 보였다. 고삐를 당겨야 할지, 늦추어야 할지, 아니 그것은 고사하고 말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
천공에 산재해 있는 괴물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바로 옆에서는 전갈이 두 개의 커다란 집게를 벌리고, 집게 달린 꼬리를 펴고는 하늘의 12궁 가운데 두 궁을 덮치려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젊은 파에톤은 전갈이 독액을 흘리며 침을 겨누고 다가오는 걸 보고는 그만 힘이 빠진 나머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삐를 놓아 버리고 말았다.
말은 등 뒤의 마부가 고삐를 놓친 것을 알고는 갑자기 돌진했다. 자기들을 제압하는 자가 없어졌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말들은 저희들도 알지 못하는 천계의 땅으로 들어가 별 사이를 돌진하면서 때로는 길 아닌 길을 달리는가 하면, 때로는 하늘 높이 내닫고 그런가 하면 지상으로 뚝 떨어지며 이륜차를 끌었다.
달의 여신8)은 오라버니의 이륜차가 자기 마차보다 낮은 궤도를 달리는 걸 보고 대경실색했다. 구름은 연기를 내기 시작했고, 산꼭대기에 불이 붙었다. 들판은 그 열기에 메말랐고, 풀과 꽃은 시들었으며, 잎이 무성한 나무는 불탔고, 추수할 곡식은 불덩이로 변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니었다. 큰 도시들이 그 성벽과 탑과 함께 불탔다. 나라라는 나라는 모두 그 국민과 함께 잿더미로 화했다. 아토스 산, 타우로스 산, 트몰로스 산, 오이테 산 등 삼림이 울창한 산에는 불이 옮겨 붙었다. 유명하던 이데 산의 샘도 물 한 방울 남김없이 말라 버렸고, 무사이 여신들이 살던 헬리콘 산도, 하이모스 산도 불타고 말았다. 아이트나 산9)은 안에서 바깥으로 불길을 내뿜었고 파르나쏘스 산도 두 개의 봉우리와 함께 불붙었으며, 로도페 산도 그 아름답던 눈[雪]의 관을 벗어야 했다.
북극에 있어서 추위로 잡인(雜人)의 범접을 경계하던 스퀴티아 산에게도 이제 추위는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 코카서스 산이 불탔는데 오싸 산, 핀도스 산이 무사할 리 없었다. 이 두 산보다 훨씬 높은 올륌포스 산까지 탔을 정도였다. 하늘 높이 솟아 있던 알프스 산맥의 봉우리도 탔고, 눈을 쓰고 있던 아페닌 산맥의 봉우리도 탔다.
파에톤 역시 세계가 불바다로 변해 있는 걸 보았다. 그 열기에 자기 자신도 견딜 수가 없었다. 마시는 공기는 거대한 화로에서 나온 공기처럼 뜨거운데다 빨갛게 단 재가 잔뜩 섞여 있었다. 연기는 시커멓게 오르고 있었다. 그는 그 속을 뚫고 무작정 돌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때부터 에티오피아 인들의 피부는 밖으로 몰려나온 체내의 검은 피 때문에 시커멓게 변했고, 리비아 사막도 이 때의 열기에 메말라 오늘날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샘의 요정들은 머리를 풀고, 물이 말라가는 걸 애통해 했다.
둑 아래를 흐르는 강도 무사하지 못했다. 타나이스 강에서는 연기가 올랐고, 카이코스, 크산토스, 마이안드로스 강도 메말라 버리고 말았다. 바빌로니아의 에우프라테스, 강게스,10) 사금(砂金)이 나오는 타고스, 백조가 사는 카이스트로스 강도 마찬가지였다. 나일 강은 도망쳐서 머리를 사막에다 처박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머리를 감춘 채 그대로 있다. 옛날에는 이 강이 일곱 개의 입으로 물을 뿜어 바다를 향해 내보였는데 지금은 일곱 개의 마른 강바닥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대지는 툭툭 갈라졌고, 그 갈라진 틈으로 빛이 새어들어가 저승의 왕과 여왕을 아연실색케 했다.
바다도 마르기 시작했다. 전에 바닷물로 차 있던 곳이 메마른 평원으로 변한 것이었다. 파도 아래 숨어 있던 산은 그 머리를 드러내어 섬이 되었다. 물고기는 더 깊은 바다를 찾아들어갔으며 돌고래는 전처럼 바다 위로 뛰어오를 용기를 감히 내지 못했다. 해신 네레우스와 그의 아내 도리스까지도 딸들인 네레이데스 자매들을 줄줄이 데리고 깊은 바다 동굴로 찾아들어갔다. 포세이돈까지 세 번이나 바다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가 세 번 다 열기에 쫓겨 다시 들어가야 했다. 〈대지의 여신〉은 물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머리와 어깨는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쉰 목소리로 제우스에게 부르짖었다.
「오, 신들의 지배자여, 나에게 이러한 벌을 받아 마땅한 허물이 있고, 그래서 당신의 뜻에 따라 불에 타 죽어야 마땅하다면 어째서 당신은 벼락으로 나를 태워 죽이려 하지 않으십니까? 부디 당신의 손을 들어 나를 치소서. 당신을 본 마음으로 섬기고 땅을 풍요롭게 한 값이 겨우 이것인가요? 가축에게는 목초를 먹였고, 인간에는 과실을 주었으며 당신의 제단에는 유향(乳香)을 바쳐 왔더니 그 값이 겨우 이것입니까? 설령 이 몸이 당신의 호의에 값할 거리가 못된다고 하더라도, 내 아우인 〈바다〉 (포세이돈)에게는 무슨 허물이 있다고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십니까? 우리 둘만으로 당신에게 자비를 빌 수 없다면, 원컨대 당신이 사는 천공을 생각하세요. 당신의 천공을 버티는 두 개의 극주(極柱)가 연기를 뿜으며 타고 있는 걸 보세요. 그것이 불타면 궁전은 내려앉고 맙니다. 아틀라스도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워, 금방이라도 제 짐을 떨어뜨리려고 하지를 않습니까? 바다와 땅과 하늘이 무너지면 우리는 다시 옛날의 카오스[混沌]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바라건대 아직 살아 있는 것만이라도 이 겁화(劫火)에서 구하소서. 오, 얼마나 무서운 순간입니까? 우리를 구할 방도를 세우소서.」
〈대지의 여신〉은 이렇게 호소했는데 시시각각으로 달아오르는 지상의 열기와 갈증 때문에 더 이상은 할 말이 있어도 할 수가 없었다.
이 말을 들은 전능한 대신 제우스는 신이라는 신을 모두 증인으로 불러 모았으니, 파에톤에게 이륜 태양 마차를 빌려 준 아폴론도 거기에 있었다. 제우스는 이들을 향해 어떻게든 한시바삐 손을 쓰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남아나지 않겠다고 말하고는 높은 탑으로 올라갔다. 그 탑은 제우스가 지상으로 구름을 뿌리고, 갈래진 벼락을 던질 때마다 올라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지상의 열기를 막을 구름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증발하지 않고 남아 있는 비는 한 방울도 없었다. 제우스는 우레를 일으키고 오른손에 거머쥐고 있던 벼락을 휘두르다 이륜 마차를 몰고 있는 파에톤에게 던졌다.
이와 동시에 파에톤은 그 이륜 마차 마부석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떠나야 했다. 파에톤은 머리털에 불이 붙은 채 거꾸로 떨어졌다. 그 모양은 하늘에서 빛의 꼬리를 끌며 떨어지는 유성 같았다. 큰 강의 신 에리다노스는 그를 받아들여 불타고 있던 그의 몸을 식혀 주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나이아스11)는 그를 위해 묘석을 세우고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겼다.
파에톤,
벼락에 맞아 이 돌 아래에 잠들다.
아버지의 불수레는 제대로 몰지 못했으나
그 뜻만은 가상했다.
파에톤의 누이들인 헬리아스들12)은 오라비의 운명을 슬퍼하다 강 기슭의 포플러 나무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강의 수면에 듣는 족족 호박(琥珀) 구슬이 되었다.
밀턴은 『세이모』(Samor)라는 시에서 파에톤 이야기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제11편).
그것은 시인들이 노래하고 있듯이,
태양의 아들로 태어난 젊은이가 떼를 써서 빈 아버지의 이륜 마차를 몰아,
무서운 천공의 동물들 사이를 겁 없이 질주했을 때,
기가 막힌 우주가······ 오직 어안이 벙벙해진 채
바라보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벼락의 신은 젊은이를 반쯤 그을려
천상에서 에리다노스 만으로 떨어뜨렸으나,
파에톤의 죽음을 슬퍼하다
나무가 되어 버린 누이들이 지금도 호박 구슬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월터 세비지 랜더가 노래한 다음의 아름다운 시에는 조개 껍질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여기에는 태양신의 궁전과 이륜 마차에 대한 인유가 함께 나온다. 물의 요정이 다음과 같이 노래하는 것이다.
내겐, 속이 진주 색깔인 꼬불꼬불한 조개가 많이 있어요.
그 광택은 태양의 궁전 현관 끝에서
아직 마구에 연결되지 않은 이륜 마차가 반쯤은 바다에 잠긴 채 빨아들인 빛깔입니다.
조개를 하나 흔들어 보세요. 잠이 깰 테니까요. 그리고 반짝이는 조개의 입술을 당신의 귀에 닿게 해보세요.
그 궁전을 추억하며, 넓은 바다가 그러듯
당신의 귀에 속삭일 테니까요.
1 정확하게 하자면 〈포이보스 헬리오스〉가 옳다. 아폴론이 헬리오스의 뒤를 이어 태양신이 된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다. 하지만 벌핀치가 〈아폴론〉으로 쓰고 있으니, 〈아폴론〉을 그대로 두기로 한다.
2 〈빛나는 자〉라는 뜻.
3 저승 앞을 흐르는 스튁스 강. 이 강의 이름을 두고 한 맹세는 신들도, 심지어는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도 번복할 수 없다.
4 곧 황소자리. 이하 하늘의 짐승띠, 다시 말해서 12궁을 지칭하는 것임.
5 즉, 제우스 대신이 별자리로 박아준 칼리스토 모자(母子).
6 뱀자리 성좌.
7 목동 자리.
8 여기에서는 아르테미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셀레네. 셀레네는 〈달〉이라는 뜻.
9 화산으로 유명하다.
10 인도의 갠지스 강.
11 샘이나 강의 요정들.
12 헬리오스의 딸들, 곧 〈태양의 딸들〉.
페르세우스1)
그라이아이는 세 자매인데 태어나면서부터 백발이었다. 그래서 〈그라이아이〉2)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또 고르곤 세 자매란 괴물 같은 여자들로, 엄니는 멧돼지 엄니 같았으며,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이 모두 뱀이었다. 이들은 신화에 별로 등장하지 않으나 고르곤 세 자매의 하나인 메두사만은 예외다.
우리가 여기에서 이러한 여성들을 다루는 것은 현대의 작가들이 지어낸 이론을 소개하기 위함이다. 곧 이 고르곤 세 자매와 그라이아이는 바다가 우리에게 주는 공포를 의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르곤은 바다를 지키는 〈강한〉 파도를 상징하고, 그라이아이는 암벽에 부서지는 〈흰〉 물보라를 상징하고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괴물들의 이름은 위에서 〈강한〉, 〈흰〉이라고 쓴 형용사의 그리스 어로 보아야 마땅하다.
페르세우스는 제우스와 다나에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페르세우스의 외조부 되는 아크리시오스는 자기가 외손자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신의 뜻을 읽고는 딸 다나에와 외손자 페르세우스를 상자에 가두어 바다에 띄워 버렸다.
상자가 세리포스 섬으로 떠내려가자 한 어부가 이를 발견하고는 건져냈다. 이 어부는 다나에 모자를 섬의 왕 폴뤼덱테스에게 데리고 갔다. 왕은 이 모자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페르세우스가 장성하자 폴뤼덱테스는, 예부터 그 섬을 위협하는 무서운 괴물 메두사를 퇴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메두사는 원래, 머리채가 특히 곱기로 소문난 아름다운 처녀였었다. 그런데 이 메두사가 감히 아테나 여신과 그 아름다움을 겨루려 한 것이 그만 아테나를 몹시 노하게 했다. 아테나는 메두사의 아름다움을 거두고 그 머리채를 올올이 쉭쉭 소리를 내는 뱀으로 만들어 버렸다. 메두사는 이렇게 해서 잔인한 괴물이 되었는데, 사람이든 짐승이든 한 번 보기만 해도 모두 돌이 되어 버릴 만큼 그 얼굴이 그렇게 무시무시했다.
메두사가 사는 동굴 근처에는 석상이 즐비했는데 이 모두가 그 얼굴을 보고 돌이 된 인간들의 석상이었다. 페르세우스는 아테나와 헤르메스의 총애를 받던 처지라 아테나로부터는 방패를, 헤르메스로부터는 신기만 하면 마음먹은 대로 날 수 있는 비행화(飛行靴)를 빌 수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이런 비기(秘器)로 무장하고 메두사가 잠자고 있는 동굴로 숨어들었다. 그리고는 그 얼굴을 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빛나는 방패에 비치는 메두사의 모습을 겨냥하여 목을 잘라 버렸다. 페르세우스는 이 메두사의 머리를 아테나에게 바쳤다.
아테나는 이것을 자기 아이기스 방패 한가운데에다 붙였다.
밀턴은 『코무스』에서 아이기스 방패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머리털이 뱀인 고르곤의 방패가 대체 무엇인가,
어진 아테나, 저 정복될 줄 모르는 처녀신이 가지고 있던,
적을 돌로 얼어붙게 한다는 저 방패란?
그것은 순결한 엄위와 드높은 품위를 갖춘
뛰어난 용모였다. 저 야수의 폭력에
존경할 줄 아는 마음,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르치는 용모였다.
『건강을 지키는 법』(The Art of Preserving Health)이라는 시를 쓴 시인 암스트롱은 강물에 뜬 얼음의 효과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세찬 북풍이 불어 대지를 얼어붙게 하면,
옛날 키르케나 메데이아가 자랑하던 것보다
훨씬 강한 마법의 힘으로
둑을 집적거리던 어떤 시냇물도,
쐐기처럼 둑 사이에 끼인 채 조용히 눕되
마른 갈대 하나 흔들지 못한다.
무서운 북동풍에 짓씹힌 파도도,
애태우고 애끓이며 머리를 흔들어 대며
미친 듯이 거품을 뿜어댄다.
그러다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변하고 만다.
···
너무 지독하고 너무 갑작스러운 이러한 변화는
저 무서운 메두사의 얼굴이 해놓은 짓이다.
메두사는 숲속을 걸으며 짐승들을 돌로 만들었다.
사자가 거품을 뿜으며 돌진해 와도,
메두사가 쓰는 재빠른 마법의 힘은
사자의 속도를 앞질러 버린다.
그리고 사자는 그 자리에 우뚝 선다.
대리석으로 만든 분노의 조상(彫像)처럼.
아이기스 방패3)
메두사를 죽인 뒤 페르세우스는 이 메두사의 머리를 가지고 땅 위, 바다 위를 가리지 않고 온 세계를 날아다녔다.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페르세우스는 해가 떨어지는 곳인 이 땅의 서쪽 끝에 이르렀다. 페르세우스는 그곳에서 아침까지 쉬어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은 아틀라스 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아틀라스 왕은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힘이 센 사람이었다. 그에겐 양과 소가 많았으나 그 나라를 노리는 이웃 나라나 원수진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그가 가장 뽐내는 것은 황금 과일이 열리는 뜰이었다. 과일은 황금빛 가지에 매달린 채 황금빛 잎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아틀라스 왕에게 말했다.
「나는 손[賓]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혹 왕께서 뼈대 있는 가문의 후예를 대접하신다면 말씀드리거니와 제우스 신이 제 아버지십니다. 혹 위대한 공적을 이룬 자를 후하게 대접하신다면 말씀드리거니와, 저는 고르곤을 퇴치한 장본인올습니다. 바라건대 하룻밤 유숙할 것을 허락하시고 허기를 채우게 하소서.」
그러나 아틀라스에겐 짚이는 데가 있었다. 옛날 자기에게 내려진 신탁이 마음에 걸린 것이었다. 아틀라스는 언젠가 제우스의 아들이 황금 사과를 빼앗아 갈 것이라던 신탁을 되새기며 이렇게 대답했다.
「가시게.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대의 허장성세나 가문의 자랑도 그대를 지켜 주지 못하리라.」
아틀라스는 이 말끝에 페르세우스를 밖으로 밀어내려 했다.
페르세우스는 그 거인이 힘으로 나온다면 도저히 자기 상대일 수 없음을 아는지라 몸을 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나의 우정을 그렇게 싸구려로밖에는 쳐주지 않으니 선물이나 하나 드릴 수밖에요.」
페르세우스는 제 얼굴을 돌리며 메두사 머리를 쑥 내밀었다. 그러자 아틀라스의 거대한 몸은 돌로 변했다. 수염이나 머리카락은 숲이 되었고, 팔과 어깨는 절벽, 머리는 산꼭대기, 그리고 뼈는 바위가 되었다. 몸의 각 부분은 마침내 거대한 산이 되기까지 부피가 시시각각으로 커졌으니(신들이 참으로 좋아할 만한 일이지만) 뭇 별들을 거느린 하늘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페르세우스는 비행을 계속하여 에티오피아 인들이 사는 나라인 케페우스의 왕국에 이르렀다. 케페우스의 아내 카시오페이아는 제 미모를 뽐내면서, 감히 바다 요정들의 아름다움에다 비교한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난 바다 요정들은 거대한 괴물을 보내 이 나라 해안을 아주 못쓰게 만들었다. 이 바다 요정들의 노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케페우스는 신탁을 청했는데, 신탁에 따르면 딸 안드로메다를 바쳐야 요정들의 분노가 가라앉겠다는 것이었다. 케페우스는 신의 뜻대로 했다.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페르세우스의 눈에, 사슬로 바위에 묶인 채 바다 괴물인 큰 뱀을 기다리는 처녀가 보였다. 얼굴이 창백한 이 처녀는 사슬에 묶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으니, 뺨에 흐르는 눈물과,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아니었더라면 페르세우스도 그저 대리석상이라고 여겼을 터였다. 페르세우스는 처녀의 아름다움에 어찌나 놀랐는가 하면, 비행화의 날갯짓하는 것까지 잊을 뻔 했을 정도였다.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의 머리 위를 선회하면서 말을 걸었다.
「오, 처녀여!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로 묶는 사슬에 묶여 있어야 마땅한 그대가 그런 사슬에 묶여 있다니. 말해 주오, 그대가 사는 이 나라 이름을, 그리고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그 까닭을.」
안드로메다는 처음에는 처녀답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었다면 두 손으로 얼굴까지 가렸으리라. 그러나 페르세우스가 되풀이해서 묻자, 잠자코 있으면 상대가 제 입으로는 차마 말못할 잘못이라도 저지른 줄 오해할까 봐 자기 이름과 나라와 그리고 어머니가 아름다움을 뽐내다 그런 일을 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처녀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바다 저쪽이 시끌벅적해졌다. 괴물이 나타난 것이었다. 나타난 괴물은 머리를 바다 위로 불쑥 내민 채 넓은 가슴으로 물결을 가르며 돌진해 왔다.
처녀는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 어머니도 그 곁에 있었으나, 딸을 구할 수 없는지라 발을 구르며 애만 태웠는데 특히 어머니 쪽이 더 그랬다. 두 사람은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어, 그저 통곡하며 딸을 껴안으려 했을 뿐이었다. 페르세우스가 외쳤다.
「눈물은 나중에 얼마든지 흘릴 수 있습니다. 지금 급한 것은 한시바삐 처녀를 구하는 일입니다. 나는 제우스 신의 아들이며, 고르곤의 정복자이니 처녀에게 구혼할 자격은 이로써 넉넉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신들께서 은총을 내리신다면, 기왕의 내 공훈에다 덧쌓을 공훈으로 처녀를 얻고자 합니다.
내 공훈으로 처녀가 구조될 경우 나는 상으로 바로 저 처녀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안드로메다의 부모는 이를 승락하고(어떻게 머뭇거릴 수 있었으랴?) 지참금으로 왕국까지 넘겨 줄 것을 약속했다.
그 때 이미 괴물은 팔매질의 명수라면 돌을 던져 맞힐 수 있는 거리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청년 페르세우스는 몸을 솟구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하늘 높은 데서 햇볕을 쬐다가 뱀을 발견한 독수리가 수직으로 내리꽂아 그 목을 물고 비틀어 뱀에게 독니 쓸 기회를 주지 않는 것처럼, 청년 페르세우스도 그렇게 괴물의 등줄기로 날아내려 그 겨드랑이를 칼로 찔렀다. 상처 입은 괴물은 미쳐 날뛰다 못해 하늘 높이 몸을 솟구쳤다가는 바다 속으로 쑥 들어가곤 했다. 괴물은 낭자하게 짖어 대는 사냥개 무리에 둘러싸인 멧돼지처럼 좌우로 몸을 돌리며 페르세우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청년은 날개 덕분에 그런 공격을 쉬 피할 수 있었다. 청년 페르세우스는 비늘 사이로 맨살이 보일 때마다 옆구리, 배 그리고 등에서 꼬리 쪽으로 내려가며 닥치는 대로 푹푹 찔러 상처를 입혔다.
이윽고 괴물이 콧구멍으로 피 섞인 바닷물을 뿜었다. 용사의 날개는 그 핏물에 젖어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했다. 페르세우스는 파도 사이로 고개를 내민 암초 위로 올라가, 삐쭉 솟은 칼바위에 몸을 의지하고는 가까이서 떠오른 괴물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해변에 모여 있던 군중은 산이 울릴 만큼 큰 소리로 환성을 울렸다. 딸의 부모는 기쁨에 겨워 이 장래의 사위를 껴안고는 〈케페우스 일문(一門)의 구주(救主)이며 구제자〉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괴물과 벌이게 된 싸움의 꼬투리이자 승리의 상품이기도 한 처녀는 사슬에서 풀려나 바위에서 내려올 수가 있었다.
카시오페이아는 에티오피아 사람이었다. 따라서 아름다움을 몹시 뽐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시오페이아는 흑인이었다. 적어도 밀턴은 이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밀턴은 『깊은 생각에 잠긴 사람』에서 이 이야기를 쓰면서 〈우울〉(Melancholy)을 향하여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슬기롭고 거룩한 여신이여,
당신의 기품 있는 모습은 하도 빛나서
인간의 시각에는 정확하게 비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약한 시력에는
검고 낡은 〈예지〉의 색깔에 가려 보입니다.
검디 검다는 말은 존경하는 의미에서 쓴 말입니다.
멤논 왕자의 누이에게나, 혹은 별이 된 에티오피아 왕비에게
어울리는 찬사입니다.
제 아름다움을 바다 요정들의 아름다움 이상이라고 뽐내다
신들의 노여움을 얻었던 저 카시오페이아에게나.
여기에서 카시오페이아가 〈별이 된 에티오피아 왕비〉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 여자가 죽은 뒤 천상으로 불려 올라가 같은 이름의 별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카시오페이아는 이런 명예를 얻었으나 그래도 감정의 앙금이 남았던 바다 요정들은 카시오페이아를 별자리로 붙박되 북극에서 가까운 하늘에 배치되게 했다. 매일 밤의 반은 고개를 숙이게 함으로써 겸양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멤논은 에티오피아의 왕자다. 이 멤논은 뒤에서 다루기로 하자.
안드로메다의 부모는 희희낙락, 페르세우스와 딸을 데리고 궁전으로 돌아왔다. 거기에는 이미 잔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두가 축제 기분으로 먹고 마셨다. 그런데 돌연 전쟁터에서나 들리는 함성이 일며 처녀의 약혼자였던 피네우스4)가 제 동아리들을 이끌고 쳐들어와 처녀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케페우스는 하릴없이 이런 말로 피네우스를 나무랐다.
「네가 내 딸을 요구할 생각이었다면, 내 딸이 괴물의 산 제물로 바위에 묶여 있을 때 마땅히 요구했어야 했다. 신들께서 내 딸에게 그런 운명을 점지하셨을 때 우리의 계약은 무효가 된 것이다. 죽음이 모든 계약을 무화(無化)하듯이.」
피네우스는 일언반구도 않고 있다가 페르세우스를 겨냥해서 갑자기 들고 있던 창을 날렸다. 그러나 창은 과녁을 벗어나 바닥에 떨어졌다. 페르세우스가 이에 응수하여 제 창을 던지려 하자 이 비겁한 침입자는 재빨리 제단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동들은 모두 제각기 제 몸 지키기였으니 결국 잔치는 난투극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나이 많은 왕은 말려 봐야 보람이 없겠다는 걸 알고 신들을 향하여,
「섬김을 받아 마땅한 신들에게 저질러진 그 모욕의 허물이 저에게 있지 않음을 굽어살피소서.」
이렇게 빌고는 자리를 떴다.
페르세우스와 그의 동아리들은 한동안 아주 불리한 싸움을 버티었다. 상대의 수가 워낙 많아 패배는 시간 문제였다.
바로 그때, 페르세우스는 오냐, 내 적으로 하여금 나를 보호하게 하자, 이런 생각을 하고는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내 편이 여기 있거든 고개를 돌리시오!」
그리고 고르곤의 목을 번쩍 쳐들었다.
「그까짓 장난에 우리가 겁 먹을 줄 아느냐?」
테스켈로스가 이렇게 외치며 창을 던지려다가 창을 겨눈 채로 돌이 되었다. 암피코스는 쓰러진 상대의 몸에 칼을 박으려다 말고 팔이 굳어 빼도박도 못하고 돌이 되었다. 또 한 사람은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다 그대로 굳어졌기 때문에, 입은 열려 있었으나 소리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페르세우스와 한편이었던 아콘테우스도 고르곤의 머리를 보고는 다른 사람처럼 굳어져 돌이 되고 말았다. 아스티아게스는 그것도 모르고 칼로 아콘테우스를 내리쳤다. 그러나 상처를 입히기는커녕 칼은 쨍 소리와 함께 튀어나왔다.
피네우스는 자기가 시작한 이 공평하지 못한 싸움의 뻔한 결과를 보니 기가 막혔다. 그래서 제 편 군사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보았으나 대답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손을 대어 보았지만 모두가 돌이 되어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페르세우스 쪽으로 두 손을 내밀고는 고개를 돌린 채 이런 말로 자비를 빌었다.
「다 가져 가시오. 그러나 내 목숨만은 내게 붙여 주시오.」
페르세우스가 대답했다.
「천박한 비겁자여, 그렇다면 내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마. 지금부터는 어떠한 무기도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못한다. 뿐이냐, 이 사건의 기념품으로 너를 내 집으로 데려가겠다.」
이렇게 말하면서 페르세우스는 피네우스가 고개를 돌리고 있는 쪽에다 고르곤의 머리를 내밀었다. 피네우스는 무릎을 꿇고는 두 손을 벌리고, 고개를 돌린 모습으로 돌이 되었다.
페르세우스에 대한 다음 인유는 밀턴의 『세이모』에서 취한 것이다.
저 전설로 이름 높은 리비아의 혼인 잔치 마당에서,
페르세우스는 분노로 속을 끓이면서도 침착하게 일어나,
뒤꿈치의 날개를 펄럭이며
반쯤 공중으로 몸을 날리니,
방패에서 빛나는 메두사의 머리가 난투하는 자들을 돌로 변하게 했다.
브리튼의 왕 세이모도 마법의 무기는 없었지만,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몸짓과 험상궂은 눈길을 하고 일어섰다.
그러자 주위는 그 위엄에 눌렸으니,
그 소란스럽던 대전(大殿)이 일시에 잠잠해졌다.
1 메두사의 목을 들어 보이는 페르세우스. 1920년에 출간된 신화집의 삽화.
2 〈노녀(老女)들〉이라는 뜻이다.
3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죽이러 가기 전에 아테나 여신으로부터는 방패를, 헤르메스 신으로부터는 날개 달린 신발을 빌렸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목을 자르고, 그 목을 아테나 여신의〈아이기스〉방패에다 매달아 주었다. 이 때부터 아이기스 방패는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무적의 방패〉가 된다. 카라바지오의 그림.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4 국왕 케페우스의 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