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3월 15일 선거 당일, 이승만 집권을 위한 계획적인 부정이 전국에 걸쳐서 일어났다. 오후 3시에 부정에 항의하는 민주당이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마산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최초로 일어나 경찰과 충돌해 10여 명이 사망하고, 70여 명 부상당하는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자유당은 야당의 주장을 일축하고 개표 결과 이승만 90%, 이기붕 78%로 자유당의 압도적인 승리라고 발표하며 투표 부정에 이어 개표 부정까지 자행했다.
1898년 3월 15일은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던 러시아에 맞서서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키기 위한 집회인 만민공동회가 열린 날이다. 이승만은 이날 연설을 했고 군중의 대표로 외무 장관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집회의 영향력으로 러시아는 고문들을 철수시키고 한로은행도 폐쇄시켰다. 3월 15일에, 스물세 살의 젊은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외치는 정치인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육십 이년이 후 1960년 3월 15일에 팔십오세가 된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부정 선거와 187명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였다.
작년 교회 수련회에서 이 책의 내용과 반대되는 강의를 들었다. 강사분께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건국을 위한 노력과 기독교 신앙 전파에 초점을 맞추시며 그를 높게 평가하셨다. 이와 비슷한 평가를 하는 책들을 읽으면 “4·19 혁명”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집권 후기의 범죄와 이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에 초점을 맞추어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그의 업적은 다루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반대로 이런 시각의 책들은 3.15 부정 선거를 비롯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범죄를 주변인의 탓으로 돌리고 그의 하와이 망명을 “바람 쐬고 오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한 책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대체 불가능’한 업적을 이야기하며 그의 과오는 그가 아닌 다른 누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대체가능’이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관점에 따라서 그는 안타까운 인물로 비치기도 하고 하와이에서 잡아 와 처벌했어야 하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최후가 비참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자기 자신을 너무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주변인의 영향력에 의해 눈이 가리어졌던, 계획적으로 부정 선거를 주도했든 간에 그는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교만했다.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교만이었겠지만 이는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렸을 뿐 아니라 187명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
이런 점에서 “4·19 혁명”이나 이에 반대되는 시각을 가진 책들은 모두 같은 잘못을 하고 있다. “4·19 혁명”은 희생자들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가장 아픔을 당하는 자들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아야 하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결과적으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보다 ‘선’과 ‘악’의 구도로 역사를 교육하고 있기 때문에 수련회 강사님의 강의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두 관점 모두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오늘날 정치에서 이런 시각은 더욱 위험하다. 어느새 신문에서는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갈등을 증폭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4·19 혁명을 일으킨 시민들의 저항이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 모두 그 자체로 평가받기보다 정치를 위해서 이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요즘 사회에서 ‘정치’라고 여기어지는 것은 정치가 아닌 것 같다.
최근 사울 알린스키라는 사람의 말을 인상 깊게 읽었다.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완전히 확신하고 있는 자들은 내적으로 어둠에 가득차 있고, 외적으로는 잔혹감과 고통, 불의로 세상을 어둡게 한다." 맞는 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