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연만은 아닙니다.
호세아서 10:4~8
4 그들이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
5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
6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책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7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
8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한 기독교 방송에서 개그맨이 나와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주 빠짐없이 주일 예배를 드려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방 공연이 성사되어 가게 되었는데 하필 그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주일이라 마음에 걸렸지만, 공연료가 60만 원이란 말에 선뜻 거부하지 못하고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한 달 수입이 15만 원이었던 시절이었기에 60만 원이면 큰 수입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개그맨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과 딜(Deal)을 했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예배를 잘 드려왔으니 한 번만 눈감아 주시면 다녀와서 주일 예배를 잘 드리겠다고 말입니다.
마음에 꺼리는 것이 있었지만, 행사를 잘 마치고 약속대로 60만 원을 받아 돌아왔답니다. 그런 다음 날 무대를 만들기 위하여 나무를 자르는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전기톱에 무릎을 베는 사고로 이어졌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았는데 병원비 청구서에 589,000원이 찍혀 있었고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겨우 300원이 남았더라는 간증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간증을 들으면서 설마 하나님이 주일 예배 한 번 빠졌다고 그런 징계를 주실까라며 의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채찍질하시고 그에 맞는 보응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지비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으로 시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뭉개고 교만한 사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전 8:11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성도에게 죄를 꾸짖으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잠 3: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하였고 히 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내 삶의 현장에 나타날 때 어떤 자세로 이것을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말씀을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내게 들려오는 주위 사람들의 비난이 우연만은 아닙니다.
가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악성 댓글로 인하여 괴로움을 겪다가 자살로 이어지는 유명 인사들의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나름으로 열심히 살아 온 과정으로 현재의 지위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하여 갖은 욕설과 비방 그리고 조롱으로 이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음에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경우를 당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나름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나를 가꾸고 다져오면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는데 주변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고 더 나가 내게 악평하며 흠을 잡아 깎아내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 이것이 우연이라고 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호 10:4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고 했습니다.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의 말씀에서 밭이랑은 곡식을 심어 열매를 거두는 공간입니다. 풍성하게 수확하기 위하여 좋은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리고 땀 흘려 잡초를 제거하고 거름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추수할 때가 되어 밭에 나가보니 알곡의 영양분을 다 빨아먹고 자란 독초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당시 북이스라엘은 강대국인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이리저리 줄타기하며 수시로 동맹을 맺고 어겼습니다. 왕권 다툼 탓에 왕들이 암살당하고 바뀌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강대국과의 겉치레 언약에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그 맹세는 진실함이 없는 ‘헛된 말’이자 ‘거짓 맹세’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린 이스라엘 사회는 공의가 사라졌습니다. 재판관과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 굽은 판결을 내렸으며, 약자를 보호해야 할 재판 자리가 오히려 억울한 사람을 짓밟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단순한 도덕적 비판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 열매를 맺는지를 영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언약 백성임을 자처했지만, 그 삶과 입술에는 진실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외형적인 맹세나 규례 준수가 아니라 ‘인애와 진실함’입니다. 마음 중심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하는 모든 고백과 약속은 하나님 보시기에 한낱 ‘헛된 말’과 ‘거짓’에 불과합니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인생은 아무리 열심히 삶의 밭을 일구어도, 타인과 공동체에 상처와 독을 남기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인간적인 꾀나 신실하지 못한 맹세로 세운 평화나 안전은 결코 지속될 수 없으며, 결국 스스로를 해치는 독초처럼 돌아오게 됩니다.
바로 밭 이랑에 독초가 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우연이라 넘기시겠습니까? 아니면 나에 대한 비평에 대하여 시기심과 질투에서 나온 것이라고 무시하고 넘기시겠습니까?
여기서 우연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보잘것없고 흔한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떨어트림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향하는 비난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약속하고 지키지 않았는지, 나의 거짓말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상처받고 더 나가 손해를 보지 않았는지 돌아보며 회개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비난과 모함에 대하여 가슴이 아프고 괴롭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가 내 마음을 토해내십시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으로 세상에 육신으로 계실 때 이웃에게 언제나 사랑과 섬기는 겸손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런 분에게 사람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였고, 가장 악한 죄를 짓고 달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이처럼 억울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억울함에 나의 마음을 비추어 예수님의 마음으로 들어가 나의 괴로움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거룩한 피로 해결 받아 보십시오! 거기서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섬겼던 자랑이 무너졌을 때 우연만은 아닙니다.
언젠가 우연히 길을 가다 대학 동기동창을 만났습니다. 그는 반갑다며 나를 데리고 여의도에 있는 자기 사무실로 안내를 하였고, 그간 지내왔던 일들을 서로 나누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그 친구는 제게 으쓱거리며 “나는 이제 성공했지, 이만하면 성공한 것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친구는 여행사를 시작하여 여의도에서 직원 몇 명을 거느리고 대표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자기를 돋보이고 성공이란 화려한 포장으로 덮어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자랑하고자 하는 욕구 말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의욕적으로 돈을 벌려고 하고 사회적 지위도 높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해서 쌓아 올렸습니다.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웃에게 자기를 자랑할 만합니다. 그러다 한순간에 수렁으로 빠져들 듯이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깊은 허무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이것이 어쩌다 세상 말로 재수가 없어 무너진 것입니까? 아니면 우연의 결과입니까?
호 10:5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벧아웬’의 이름의 뜻은 ‘허영의 집, 허무의 집’입니다. 사실 이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호세아가 조롱의 의미를 담아서 부른 것입니다. 본래의 이름은 ‘벧엘’이라는 명칭이 있습니다. 이 벧엘은 아브라함이 처음 제단을 쌓은 곳이며, 야곱이 돌 베게로 단을 쌓아 예배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벧엘은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 중심지였고, 이스라엘의 영적 구심점 역할을 감당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스러운 곳이 여로보암 왕이 금송아지를 세운 후에는 점점 시간이 갈수록 우상의 도시가 되었고, 그 금송아지가 자랑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권력이 막강한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물 위에 떠다니는 거품'에 불과합니다. 한순간 화려해 보이지만 곧 터져 사라져 버립니다. 또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던 화려한 산당과 제단에는 결국 '가시와 찔레'만 무성하게 자라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에서 벗어난 인생은 허무하고 우울합니다. 그런 까닭에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쾌락이라는 우상을 쫓고 즐거움의 오락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그동안 내가 추구하였던 행복의 기준이 무너지고 마음이 허탈해지고 달랠 길 없는 허무의 늪으로 빠지는 느낌이 들어 서서히 무기력증에 빠진다면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 자리에서 벗어나 내 정욕과 욕심에 치우치는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구약 시대처럼 금이나 돌로 만든 신상을 절하며 섬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내 삶의 안전과 존재 가치를 의탁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라는 본질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팀 Keller 목사나 현대 심리학·사회학자들이 분석하는 현대인의 우상은 ‘돈만 있으면 내 삶과 미래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많은 돈을 추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르는 인기인이 되고 싶어합니다.
여기서 벗어난 내 영혼의 풍성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을 바라 보십시오! 로마 군병은 예수님의 조롱하고 멸시하기 위하여 가시로 된 관을 머리에 억지로 쓰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묵묵히 수치의 면류관을 쓰시고 고통을 받으신 것은 믿음의 성도의 수치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가시 면류관을 기억하며 나의 자랑과 내 노력으로 성취한 업적이 사라졌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허물을 회개할 때 높이고자 하는 주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나의 낮아지고 허무함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담긴 은혜를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나의 자랑이 사라질 때입니다.
세 번째는 세상 사는 의미를 잃고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마음도 우연은 아닙니다.
제가 큰형님과 둘째 형님의 대화를 엿듣고 크게 당황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형제 중 단연 독보적인 존재는 둘째 형님입니다. 학벌도 서울 대학교를 나왔고, 취업도 좁은 길이라 여겼던 삼성 물산의 비서실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인물도 나무랄 데 없이 잘난 분이었습니다.
그런 형님이 잘 나가던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사업을 하다 쫄딱 망하여 빚을 엄청나게 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둘째 형수님이 47세 되던 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큰 절망감에 휩싸여 큰형님께 자신의 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형님! 나는 요즘 살기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 물속에 풍덩 빠져 죽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빚독촉을 날마다 때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고 앞길이 캄캄하기만 합니다.”
이 이야기를 무심히 듣고 있던 큰 형님의 답변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래 그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 여러분이 어떻습니까? 참 슬프디 슬픈 답변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절망에 빠져 차라리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 절규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의외로 많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입니다.
호 10:8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아웬’(아웬)이란 5절의 ‘벧아웬’을 가리키는 말로 곧 벧엘을 지칭합니다. ‘산당’(바모트)이란 ‘높은 곳’이라는 의미로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언덕이나 구릉, 높은 산 등에 우상을 섬기기 위해 세워둔 우상 숭배 장소를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새 성전이 지어지기 전 솔로몬 등은 이런 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스라엘인들은 산당에서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쌓았습니다.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는 표현에서 극심한 공포와 절망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심판의 날에 임할 아시리아(앗수르) 침략의 공포가 얼마나 참혹한지, 차라리 산에 깔려 죽거나 묻히는 편이 낫다고 부르짖는 절망적 상태를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대에서 죄인이 겪을 절망을 오늘 느낄 수 있다면 회개할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절망의 때를 만난다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뤄진 사건에 대하여 마 27:46에서는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외침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을 넘어선 영적 절망과 고통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기에, 죄를 차마 보지 못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상징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완전히 외면당하고 버림받는 영적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good news, 복음으로 가가 왔습니다. 예수님의 절망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에게는 영생을 얻는 은혜의 기회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비난의 아픔도 내 자랑이 무너지는 허무함도 죽음의 고통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오라는 징조입니다. 이런 주님의 손짓을 무시하지 않고 우연으로 돌리는 것이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초청으로 믿는 성도에게는 하늘의 영원한 축복으로 이뤄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