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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단한이 보냈던 사자 차타륵이 몽고로 발길을 돌리자, 당세천은 못다 마신 용정차를
마셔대며 나름대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현재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다. 이제 정말 표연공주와 이세혁이 비명횡사한다면...
명과 건주여진의 정면충돌은 기정사실(旣定事實)이 된다!!’
명과 여진족이 붙기만 해도 임단한의 계호기은 반 이상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계
획의 실현 가능성은 실로 높은 일이기에 당세천은 기대 가득한 얼굴로 바깥 경치를 여
유롭게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렀다. 당세천은 문득 낯익은 발소리에 정신을 챙기고 문으로 시
선을 돌린다. 과연, 몇 초 지나지 않아 당설란이 문을 열고는 모습을 드러낸다.
“아버님, 여기 계셨군요.”
딸의 모습에, 야망으로 불타오르던 당세천의 눈은 급속도로 차갑게 식어버린다.
“오오, 설란이로구나.”
“점심 진지나 드시고 이러고 계신건지 모르겠네요.”
당세천, 그도 딸 앞에서는 역시 어쩔 수 없는 보통의 아버지다. 딸의 염려에 세상 전
부를 얻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게 바로 결정적인 증거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점심은 얼마 전에 먹었으니까.”
“그러셨군요.”
얼마 전에 목욕을 하고 온 건지, 당설란의 머리카락은 수분을 잔뜩 머금고 있다.
“요새 몇 년간, 무공에만 심취하고 있는 것 같더구나.”
“예.”
“무공에 심취한다고 잔소리를 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다만 정도껏 해야지, 무리하다
가는 건강을 잃게 된다. 이 점 유의해서 행동하거라.”
당설란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물음을 던진다.
“아버님,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주실 건가요?”
당설란이 얼굴을 굳힌 채로 묻자, 당세천은 얼굴을 고치며 반문해온다.
“또 유황(硫黃)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당세천의 반문에 당설란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답을 대신한다. 그러자 당세천은 답
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몇 차례 두드리고는 말을 이어 나간다.
“누누이 말했잖느냐, 넌 아직 몰라도 된다고. 때가 되면 당연히 내가 알아서 설명을
해 줄 터인데, 왜 못 참아서 그렇게 안달을 부리는 것이냐?”
“아버님께서 유황을 사들인다는 건, 벽력탄(霹靂彈) 이나 자모연환탄을 만들기 위해
서겠지요?”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지금 여태까지 들여온 유황으로 전부 폭탄으로 만들어 버리면, 벽력탄은 130상자 정
도 만들 수 있고, 자모연환탄은 160상자 이상은 만들 수 있게 된다고요. 그 정도나 되
는 폭탄을 만들어서, 대체 뭘 하고 싶으신 건지 알고 싶어요.”
“다 우리 집안을 위해서다. 왜 그리도 이 애비 맘을 몰라준단 말이냐?”
하지만 당설란은 당세천의 호소에도 눈 한번 안 깜빡이며 뒤이어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사천당문의 위신이 그렇게 낮았던가요? 우리 집안엔 수많은 암기술, 진술같은
독문무공이 수두룩하잖아요. 그런데 왜 아버님께서는 우리 가문 무공은 내팽겨 치시고
폭탄에만 의존하시려는 건가요?”
계속해서 당설란이 꼬치꼬치 캐묻자 당세천은 고개를 돌려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당설란의 양어깨를 짚고 말을 붙인다.
“3년 안으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아니, 그 안으로 밝혀지게 될 거야.
이 애비를 믿어 다오. 결코 네게 해를 입히는 일은 아니니까, 좀 기다려다오.”
애걸복걸하며 빌어대는 부친의 모습에, 결국 당설란은 고개를 숙이더니 서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당설란의 얼굴엔 분명 미심쩍어하는 기색이 엷게 남아있다.
“아버님을 못 믿는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하필이면 왜 저주받은 물건을 만들려고
하시는지 그게 알고 싶을 뿐이라고요. 또 원망스럽기도 하고요.”
“믿어 다오. 결코 내가 사용하려는 건 아니란 것만이라도 믿어 다오.”
“하아... 그럴게요. 일단은 그것만 알아두도록 할게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당설란은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사
실은, 당세천의 일에 분명히 몽고가 끼어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일이다.
‘모르겠어.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6년 전, 당설란은 모친을 잃었다. 원인은 어이없게도 벽력탄의 제조 실패로 인한 폭발
사고였다. 그때부터 당설란은 폭탄을 ‘저주받은 물건’이라 부르며 꺼려하게 된 것
이다.
‘그때 이후로 아버님께서는 그 몽고인과 만나기 시작하셨던 것 같아. 대체 무슨 관련
이 있는 걸까?’
하지만 주어진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신이 아닌 이상, 당설란은 여기서 더 이상 유추
해낼 수가 없다.
결국 당설란은 여기서 생각을 접기로 하고, 시간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마음을 먹는다
. 그렇지만, 시간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한 당설란의 얼굴에서는 짙은 우수가 지워지
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어머니’란 존재가 당설란의 머릿속을 휘젓고 있기 때문일 것이
다.
같은 시각, 중원무성에서는 상당히 무거운 공기가 나돌고 있다. 독고천이 무슨 일로
긴급 호출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현재 태상전에는 사천당문의 문주인 천밀쾌영 당세천을 제외한, 천마궁의 혈겁을 주도
한 모든 이들이 있는 상태다. 그것만으로도 필시 심상찮은 일이란 걸 짐작해낼 수가
있다.
“독고 성주, 어찌 당 문주는 참석하지 않은 거요?”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학이 침묵을 먼저 깨고 독고천에게 질문을 내던진다.
“휴우... 당 문주는 서신을 보냈소. 최근 몽고(蒙古)의 공기가 심상찮은 관계로 당문
을 비울 수가 없다고 전해왔소이다.”
“아미타불... 그럼 이 인원이 전부 다 모인 것이란 말씀이구려, 독고 성주.”
혜광선사의 말에, 독고천은 고개를 한번 끄덕인다. 그러자 독고천의 좌측에 서있던 제
갈승이 좌중을 둘러보고는 입술을 들썩인다.
“아마 여기 계신 모든 분들서는, 저희 성주님께서 왜 이곳까지 모이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계실 겁니다.”
제갈승의 말에 무당파의 장문인인 양헌수가 대꾸하고 나선다.
“제갈 참모의 말씀이 사실이오. 독고 성주, 갑작스레 전원 소집령을 내린 이유가 대
체 뭐요?”
독고천은, 양헌수의 질문에 먼저 의도를 밝히려는 제갈승을 손짓으로 막고는 천천히
입을 연다.
“최근 사파에 백마련(百魔聯)이란 단체가 활개를 치고 있다고 장백경의 연락이 왔소
이다. 이미 장백경이 건드리기에 무리한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 같소. 이 점에 대해
여러분들과 함께 의논하고자 급히 모이라는 연락을 드린 거요.”
“백마련...?”
혜광의 혼잣말에, 이번에는 제갈승이 대꾸하고 나선다.
“백마련은, 11년 전 천마궁이 괴멸되면서 사무종의 지휘 하에서 독립하게 된 사파의
여러 방파들이 저희들끼리 연합해서 만든 조직입니다. 우리의 애초 의도와는 달리, 사
파 무리들은 서로 싸우지 않고 얼마 전에 연합세력을 구축하게 된 것이란 말입니다.”
“무량수불... 그러고 보니 최근 사파연맹체가 결성됐다는 얘기를 들었소이다. 그 조
직이 백마련이란 말씀이구려.”
제갈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독고천의 답변을 기다린다. 독고천은 잠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뒤에, 자신의 의견을 차분하게 밝힌다.
“사천당문의 당세천 문주가 빠진 이상, 군사행동을 결의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것이오. 그러니 자객을 써서 백마련의 련주(聯主)란 놈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
는 건 어떻겠소?”
“자객을 보내자니 그 적임자는 그래도 당 문주가 아니오. 그 안은 아무래도 힘들 듯
하오. 차라리 차도살인지계는 어떻겠소? 우리는 군수물자(軍需物資)만 지원해주고, 장
백경 그놈의 군대를 쓰는 거요.”
독고천의 의견에 남궁학이 다른 의견을 들고 나온다. 그러자 이번에는 혜광이 독고천
에게 시선을 맞추며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허허, 둘 다 괜찮은 방법들이긴 하다고 사료되오이다. 허나 노납에게 보다 더 괜찮
은 방법이 있소만, 들어 보시겠소?”
독고천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혜광에게로 쏠린다. 제갈승은 어떤 발언이 나올까, 하
고 흥미로운 눈길로 혜광을 주시하고 있다.
“노납의 생각이오만, 잘 들어 주시기 바라겠소이다.
이간책(離間策)을 쓰는 건 어떻겠소? 사파의 모임인데다, 아무래도 출범한 지 얼마 되
지도 않은 조직이고 하니 단합이 잘 안될 것이라 생각되오.”
모두, 혜광의 말을 곰곰이 새겨 본다. 여태까지 나온 방안들 중에서는 가장 나은 것임
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게 현재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바의 공통점이다.
“흠... 제갈 참모의 의견은 어떻소?”
정파의 두뇌, 제갈승의 결론을 기다리는 모두의 눈은 하나같이 빛이 번뜩이고 있다.
단지 혜광만 덤덤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총 세 가지 의견이 나왔습니다. 자객을 쓰는 방법, 차도살인지계, 그리고 마지막으
로 이간책입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제갈승이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는, 확실한 어조로 독고천에게 말
을 건넨다.
“혜광선사님의 의견이 가장 적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주님께서 제일 먼저 내거신 주장은, 남궁 가주님의 말씀대로 아무래도 자객을 구하
기 힘들다는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 당문의 당세천 문주님께서 안 계신 이상, 그
방법은 아무래도 효과적인 방책이라 여겨지기는 힘들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런 결
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현재 태상전에는 제갈승의 목소리만 퍼져나가고 있는 중이다. 모든 사람들은 제갈승의
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
“두 번째로 남궁 가주님께서 내거신 주장은, 군수물자의 낭비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단점을 갖고 있습니다.”
“단점이라... 낭비 말고, 하나 더 있단 말이오?”
남궁학이 의외란 얼굴을 하며 제갈승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렇습니다. 현재 사파는 백마련과 귀혼당, 두 세력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는 상황입
니다. 그러나 그 두 세력이 붙는다고 가정할 시에, 아무래도 귀혼당의 승리를 점치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만일 두 세력의 승부를 점쳐 보라고 하신다면 필시 백마련에 걸 것
입니다. 사파의 연합체인데다가, 그곳에는 아무래도 귀혼당보다 인재들이 많습니다.
백마련의 승리로 끝난다고 가정할 경우... 사파의 균형이 깨집니다. 그렇다면 백마련
은 귀혼당의 잔존세력마저도 흡수한 뒤 분명 우리 정파와의 결전을 준비하게 될 것입
니다. 그러니 이 계책 역시 효과적인 방안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다섯 사람 중에서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기에, 그들은 낮은 소리로 탄성을 내지른
다. 하지만 제갈승은 여기에 연연치 않고,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읊어나간다.
“마지막, 혜광 선사님의 의견이 현재 우리 정파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쉬우면
서도 효과적인 방책입니다. 괜히 자객을 써서 후일 백마련이 지껄일 때 골치를 썩일
필요도 없고, 괜한 군수물자 낭비로 인한 재정악화도 막을 수 있을뿐더러, 우리가 했
다는 증거도 남지 않으니, 얼마나 멋진 계책입니까.”
제갈승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양헌수가 제갈승에게 물어온다.
“이간책이 먹히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그땐 서서히 압력을 넣는 방법이 아무래도 효과적이겠지요. 그럼 제아무리 백마련이
라고 한들, 아직 세력을 떨치기엔 부족한 점이 많으니 아무래도 당분간은 조용해지지
않겠습니까?”
제갈승과 양헌수의 대화도 끝나자, 이번에는 남궁학이 제갈승에게 질문을 내던진다.
“참, 그러고 보니... 백마련의 련주란 자는 어떤 자요? 아직 그자의 정체도 모르고
있잖소?”
남궁학의 질문에, 제갈승은 미소를 지으며 결정적인 말을 내던진다.
“후후, 제가 이간책에 패를 건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정적인 이유가... 백마련의 련주 때문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백마련의 련주는, 나이가 이제 약관을 넘어선 젊은 애송입니다. 공손호
(公孫虎)란 이름을 가지고 있고, 검(劍)의 명수라고 들었습니다.”
“나이가 이제 약관을 넘었다...? 그런 자가 어떻게 백마련같은 거대한 세력의 련주로
추대될 수 있단 말이오?”
남궁학이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되묻지만, 제갈승은 그저 빙그레 웃을 따름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공손호란 자의 부친이 천마궁 흑사대에서도 꽤나 실력이 뛰
어난 자였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천마궁 흑사대의 후예인지라, 점수가 높았던 게
지요.
그리고 저희들끼리 련주 자리를 놓고 싸울 바에야, 차라리 이런 자가 련주를 맡는 것
이 오히려 더 괜찮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갈승과 남궁학의 대화를 듣던 독고천은 느릿느릿 말을 꺼낸다.
“그렇구려. 그렇다면, 이간책으로 정해진 거요?”
“그렇습니다. 성주님, 성주님의 의견을 듣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자 독고천은 잠시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모두를 한번 훑어보고는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한다.
“이간책을 쓰도록 하겠소. 그렇게들 알아주시고, 이제 그 준비에 착수하도록 합시다!
!”
이렇게 중원무성의 태상전에서 한창 이간책에 대한 담화가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무렵,
반면에 대련장에서는 살벌하리라 느껴질 정도로 숨 막히는 막 종결을 맺은 상태다.
엽민천이 쓰러져 있는 독고명응의 목에 도를 갖다대고 있다. 엽민천의 승리로 끝난 것
이다.
“어디 안 좋은 데라고 있어요, 사형? 오늘은 영 동작이 꽝이네요.”
“...”
엽민천은 한성도가 만들어 준 제천도(帝天刀)를 허리춤에 꽂아 넣고는 염려스러운 말
투로 묻는다. 하지만 독고명응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기 힘든 듯, 입술을 꽉 깨문 채
로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모른다.
“먼저 가서 쉴게요. 어떻게 제가 사형에게 이렇게 이길 수 있었는지...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봐요.”
할 말만 간단히 남기고, 엽민천은 대련장을 유유하게 빠져나간다.
'벌써 4개월 정도, 사형은 검을 쥐지 않고 있다. 한 소저가 온 다음부터, 사형이 검을
쥐는 모습을 보지를 못했으니...
사형에게 이번 패배는 과연 독이 될까, 약이 될까... 제갈 참모님의 부탁으로 이렇게
해보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좀 찜찜하군.’
바로 어제, 엽민천이 수련을 마치고 자기 방으로 돌아와 보니 제갈승이 기다리고 있었
다. 그를 반가이 맞이하고 찾아온 사연을 물어보니, 뜻밖에도 제갈승이 원하는 건 독
고명응의 패배였다.
안 그래도 독고명응이 수련을 놓고 한화경에게만 관심을 쏟아 붓자 답답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측은해 보였기에, 엽민천은 잠깐 생각하고 제갈승의 요건에 승낙했다.
그리고 지금, 엽민천은 별 힘도 들이지 않고 가볍게 독고명응을 제압한 것이다. 그러
니 여태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 여기고 있었던 독고명응이 받은 충격은 과연 어떻겠는
가?
엽민천이 대련장을 빠져나가며 울린 문소리에, 독고명응은 정신을 퍼뜩 차리고 눈을
한번 깜빡인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엽민천에게 완패하고 말았다는 걸 몸소 느끼게
된다.
“... 젠장...!!”
독고명응의 주먹이 죄 없는 나무 바닥을 강타한다. 주먹이 꽤나 아플 텐데도, 독고명
응의 얼굴에는 고통 따위의 감정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독고명응의 뇌에
는, 현재 오로지 분하다는 느낌이 지배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실력이 많이 낮아졌구나, 명응아. 아니, 민천이의 실력이 일취월장(日就月將)했다고
보는 게 옳겠어.”
이들의 대련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한 청년이 독고명응에게 다가가면서 뱉
은 말이다.
“... 철우 너도 우리 사제의 실력향상이 눈앞에 보이는 모양이구나.”
“물론. 저토록 빠른 쾌도(快刀)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우리 남궁세가의 검결
중에서도, 저만한 속도를 자랑하는 검결은 드물어.”
독고명응과 절친한 사이인 듯한 이 청년은, 다름 아닌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학의 아
들이다. 이름은 남궁철우(南宮哲旴)라 하고, 독고명응보다 한 살이 어린 17세다.
“후후... 검혼(劍魂) 남궁철우가 한 말이니, 믿어야겠지...”
남궁철우가 내민 손을 잡으며, 독고명응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옷을 툭툭 털어
먼지를 날리고 있는 독고명응에게, 별안간 남궁철우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는 묻는다.
“실력차가 이미 많이 벌어졌다. 최근에 대체 뭘 한거냐? 그리고 민천이가 남기고 간
말은 또 뭐고?”
“됐어. 신경 꺼. 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니까.”
독고명응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짐에도 불과하고, 남궁철우는 계속해서 독고명응에게
질문을 내던진다.
“전에 절세미인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던 약혼녀, 한화경 소저 때문이지?”
독고명응은 검집에 검을 집어넣다가 움찔하며 남궁철우를 바라본다. 안 봐도 뻔하다고
, 남궁철우의 눈이 말해주고 있다.
“민천이한테 성주 자리 뺏기기 싫으면, 아마 조금 더 노력해야 할 거다. 이미 실력차
는 많이 벌어졌어. 민천이가 하는 것 배 이상으로 해 보라고. 그러면 아마 금세 메꿔
질 테니까.”
하지만 독고명응은 좀처럼 쉽게 풀 기분이 아닌 듯하다. 오히려 가라앉은 눈으로 대련
장을 한번 둘러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남궁철우에게 말을 건넨다.
“걱정 마라. 성주 자리를 두 눈 뜨고 뺏길 정도로 내 실력은 어수룩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남궁철우는 팔짱을 꼈던 팔을 풀고, 천천히 걸어 나가는 독고명응의 뒤를 따라간다.
쉼 없이 걸으면서도 남궁철우는 쉴 새도 없이 질문을 계속 던진다.
“그런데 말이다. 네가 사랑한다는 그 사람, 내 동생을 거절하면서까지 네가 관심을
사려고 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냐?”
“...”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어차피 대답을 원하려고 한 질문이 아니니까.”
하지만 정말로 독고명응이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자, 남궁철우는 조금은 섭섭한 듯
입맛을 다시며 독고명응의 뒤를 따르고 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얼마나 아름답길래, 검에 미친 명응이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
잡을 수가 있는 걸까. 게다가, 내 동생을 거절하면서까지...’
남궁철우의 하나뿐인 동생, 남궁홍은 이미 무림에서도 빼어난 용모와 뛰어난 검술 실
력으로 명성이 자자한 소녀다. 전에 독고명응과 남궁홍은 그런대로 사이가 괜찮았기에
, 한때 독고천과 남궁학은 은밀하게 둘을 이어주려고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돌연 독고명응이 한화경과 약혼하겠노라고 선언을 해 버리자, 독고천과 남궁학
은 닭 쫓던 개 지붕 바라보는 격으로 독고명응을 바라봐야만 했다.
두 사람의 충격도 컸겠지만, 은근히 독고명응을 사모하던 남궁홍에게도 대단한 충격이
었다. 독고명응의 약혼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남궁홍은 한동안 검을 놓고 독고명응만
생각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남궁학과 남궁철우가 합동해서 남궁홍의 마음을 힘겹게 돌려놓기는 했지만, 그 뒤로
남궁홍은 독고명응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노라고, 독고명응의 약혼이 깨
지는 날까지는 검을 놓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그 뒤로 남궁홍의 검술은 그야말로 예측을 불허할 정도로 급성장을 해서, 지금은 오라
비인 남궁철우조차도 마음 놓고 상대할 수 없을 경지에까지 이르러버렸다.
‘답답한 일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명응이는 물론, 홍이마저도 평생 지금 신세를 헤어
나기가 힘들 터인데...’
남궁철우는 두 사람을 탓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하나는 절친한 친구
요, 또 하나는 하나 뿐인 여동생이 아닌가.
‘대체 이유를 모르겠어. 아버님 말씀으로는, 분명 명응이의 약혼녀는 앞으로 2년도
못 살다 갈 운명인데 왜 명응이는 미치도록 약혼녀에게만 매달리는지를...’
하지만 그건 남궁철우가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황홀경에 빠져버
리는, 그야말로 선녀조차도 시샘을 낼 정도의 한화경을 한번도 보지 못했기에 남궁철
우는 이딴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궁철우는 독고명응의 뒤를 따라가면서 빌고 또 빌고 있다. 부디 독고명응과 남궁홍
이 본래 자신의 길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말이다.
중원무성의 영락전에는 현재 한화경과 독고운이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서로 다
른 매력을 뿜어내는 사람 둘이 있으니, 화원에 피어있는 꽃이란 존재 자체가 무색해질
정도다.
밥숟가락을 쥐고 있던 한화경의 손이 잠시 멈칫하더니, 그대로 굳어버린다. 그리고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더는 못 먹겠어...”
한화경의 밥그릇을 본 독고운 역시 얼굴을 찌푸린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한
화경은 밥그릇의 밥을 반도 채 비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니... 밥 먹기가 그렇게도 힘들어요?”
“요즘... 입맛이 없을 뿐이야.”
“그렇게 먹으면 안 그래도 짧은 수명, 더 짧아지겠어요. 좀 많이 먹어요, 네?”
독고운은 아예 사정조로 빌어보지만, 한화경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
어선다.
“미안, 운아. 정말 못 먹겠는걸...”
설득을 해 봐야 반응이 없을 거란 걸 잘 아는 독고운이기에, 한숨을 푹푹 내쉬고만 있
을 뿐이다.
“휴우... 언니, 이렇게 작게 먹으면서 어떻게 오래 살 생각을 해요?”
“... 이런 새장 같은 곳에서 살아가게 될 거라면... 차라리 죽는 것이 속편할지도...
”
독고운은 한화경의 반응에 화들짝 놀라 토끼눈을 하고 한화경을 바라본다.
“어, 언니!! 무, 무슨 소리에요?”
“네겐 미안한 말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네 오라버니와는 안 맞은걸.”
“언니랑 오라버니랑 맺어주는 건 포기했으니까, 먹는 거라도 좀 많이 먹어 줘요. 언
니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인들 언니를 안 좋아하겠어요? 분명 언니를
만나러 올 테니까, 많이 먹고 몸 안 좋은 기색이라도 좀 없애 봐요. 사랑하는 사람한
테 그런 말쑥한 모습을 보여줘서, 대체 어쩌겠다는 심보예요?”
“...”
한화경이 침묵하자, 독고운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한화경을 설득하려 든다.
“난 정말 언니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이 우리
오라버니든, 다른 사람이든 말예요.
언니는 제 우상이에요. 벌써 언니를 알게 된지도 4개월이 다 됐는데, 웃는 모습 한번
제대로 못 봤다고요. 언제나 사색에만 잠겨 있고, 밥도 제대로 안 먹고 하는 언니를
바라봐야만 하는 내 기분 좀 알아 줘요.”
4개월이란 시간은 독고운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독고명응과 한화경
을 짝지어주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은 바뀌어버리지 않았는가.
“한번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요. 죽고 싶을 정도
로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그 괴로운 일을 극복하고 나면 반드시 행복은 찾아오는 법
이라고요.
언니가 사 공자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는 이미 알 만큼 알고 있다고요. 그러니
이제는 그만 기운 차리고, 같이 웃으면서 지내자고요.”
한화경은 눈앞에서 오로지 자신만을 걱정해주는 소녀의 말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이
런 타지에서도, 자신에게는 새장 같은 곳에서도 자신의 편이 돼주고 위로해주는 사람
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고맙게만 느껴진다.
“... 충고 정말 고마워, 운아.”
한화경은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말을 독고운에게 전한다. 어느새 한화경의 얼굴에는,
세상 어느 웃음보다도 진솔한 웃음이 피어나 있다.
“그래요, 그렇게 웃으면서 살아 봐요.
언니, 처음 몇 개월의 언니는 무척이나 꿋꿋한 모습이었다고요.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언니는 그 꿋꿋한 모습마저도 잃어버린 채로 살아왔고요. 이제 그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줬으니까, 앞으로는 좀 착실하게 살아 봐요, 우리.”
“최대한... 노력은 해 볼게.
고마워, 운아. 언제나 날 걱정해줘서.”
독고운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긴 한화경은 바깥에 피어 있는 꽃들로 시선을 돌린다.
‘부처님... 부처님, 언제나 초심(初心)이 흔들리지 않도록... 운이의 부탁대로, 언제
나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이젠... 더 이상 운이의 마음에 상처를 입
히고 싶지... 않거든요.’
마음속으로 이렇게 간절히 빈 한화경은 눈을 내려감으며 생각에 잠긴다.
‘사 공자님... 정말 보고 싶군요. 공자님의 차가운 척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요...
’
두 손을 모으고 생각에 잠겨 있는 한화경의 모습은 신성하기 그지없는 한 마리 학(鶴)
을 연상케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독고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엷은 미소를 지으
며 속으로 외친다.
‘오라버니, 용서해 줘요. 저는 말예요, 이 언니가 이토록 원하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보기가 싫어요!!’
사문도 일행은 적당한 의원을 찾아 강천비의 치료를 맡겼다. 그리고 이틀이란 시간이
흘렀다.
사문도의 곁에는 백룡과 금문택이 있다. 그리고 백룡의 목에는 자그마한 목통이 걸려
있다.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 백룡. 언제나처럼 곽 군사님께 전해주면 돼.”
“구구우...”
주인과 헤어지기 싫은 듯, 백룡은 낮게 지저귀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백룡의 마음을 사문도가 모를 턱이 없다. 사문도는 손가락으로 백룡의 머리를 쓰다듬
다가 다시 백룡의 등 언저리를 쓰다듬어 준다.
“조심해서 가라, 백룡. 오면서도 조심해서 돌아오고!”
손가락에 앉아 있던 사문도가 손가락을 멀리 남쪽으로 내밀자, 백룡은 날갯짓을 한차
례 하고는 멋지게 비상(飛上)해 날아간다.
“백룡이 악양까지 갔다가 주공께 돌아오는데... 얼마나 시일이 필요할 거라 생각하십
니까?”
백룡이 사라지는 모습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던 사문도는 금문택의 질문에 고개를 돌
린다.
“음... 적어도 한달 정도는 걸릴 거라고 생각되오.”
“한달이라, 생각보다 짧은 것 같습니다만.”
사문도는 금문택의 어투에 빙긋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연다.
“그때쯤이면 천비도 다 나았을 거요. 게다가 우리가 악양으로 남하하고 있을 테니,
아무래도 짧은 건 당연한 일이잖소.”
“음... 그렇다고 보기엔, 백룡의 속도가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다시 이어지는 금문택의 질문에, 사문도는 확신이 가는 어조로 또박또박하게 말을 늘
어놓는다.
“백룡은 전서구 등에서 특별한 녀석이오. 그 녀석은, 여태까지 다른 전서구의 1.5배
이상 되는 능력으로 나와 곽 군사님을 연결해 준 일등공신(一等功臣)이오.”
바로 그때, 머무르는 주막 방 안에서 강천비를 간호하고 있던 모용화운의 날카로운 목
소리가 두 사람의 귓속으로 화살이 되어 꽂힌다.
“주군, 금 대협! 와 봐요!! 천비가 정신이 드나 봐요!!”
모용화운의 목소리에, 사문도와 금문택은 번개같이 벌떡 일어나 방 안으로 달려간다.
들어가면서도 사문도는 할 말을 잊지 않는다.
“거보시오. 벌써 천비는 의식이 회복되지 않았소?”
“으... 으음...?”
강천비가 천천히 눈꺼풀을 움직이자, 금세 눈앞이 하얗게 물든다. 그러자 강천비는 눈
을 한번 비비고는 다시 눈을 실낱처럼 얇게 떠서 주위를 둘러본다.
“천비야, 정신이 좀 들어?”
모용화운의 다급한 목소리에, 강천비는 무슨 일인가 싶은 모양인지 어리둥절한 얼굴이
다. 그러다가 흑령과의 일전을 떠올리고는 눈을 번쩍 뜨며 소리친다.
“흐, 흑령?! 흑령, 그 자식은...”
“흑령은 죽었어.”
“흑령이... 죽었다고요?!”
몸을 반쯤 일으킨 채로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강천비가 소리치는 모습은 그야
말로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모용화운은 그런 강천비의 모습을 보고도 전혀
우스꽝스럽다는 얼굴이 아니다.
“응. 주군과 함께 오신 분이 흑령을 죽였어.”
“주, 주군?! 주군께서 돌아오셨어요?”
“늦어서 미안하다, 천비. 덕택에 대영반 나리께서는 돌아가시고, 넌 이 지경이 되고
말았으니...”
무표정으로 방문 앞에 서있는 사문도를 보고, 강천비는 달려가서 넙죽 엎드리려다가
전신을 화로로 지지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끄아아악!”
강천비가 비명을 내지르자, 가까이 있던 모용화운은 귀가 아픈지 귀를 틀어막는다. 사
문도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런 강천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지금 예 따위 표하려다가 네 몸 망치겠다. 그냥 누워서 내 말 들어.”
“아, 예...”
사문도의 말에 짧게 대답한 강천비는 그제야 사문도의 곁에 한 청년이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의(麻衣)를, 결코 흔하지 않은 옷감으로 옷을 입고 있는 금문택을 이제
야 본 것이다.
“저... 주군,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네 목숨을 살린 사람. 요번에 홍무극을 척살하고 날 따라오신 분이다. 앞으로 사이
좋게 지내도록 해라.”
사문도가 말을 끊자, 금문택은 싱긋 웃으며 강천비에게 가볍게 포권한 뒤 자기소개를
먼저 한다.
“반갑소, 강 소협. 난 금문택이라고 하는 무명인(無名人)이오.
강천비 소협의 얘기는 주공께 설명을 많이 들었소이다. 앞으로 함께 지낼 시간이 많을
터인데, 사이좋게 지냈으면 하는 바요.”
자신의 연장자가 이렇게 공손하게 예를 갖추고 나오자, 강천비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
다.
“바, 반갑습니다, 금 대협. 목숨을 구해 주셔서...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감사할 필요 없소. 같은 분을 모시기로 한 사람끼리 너무 예를 따지는 것도 자칫 분
위기를 딱딱하게 만들 염려가 있으니 말이오.”
강천비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리자, 곧이어 빙긋 웃고 있는 금문택의 모습을 보게 된
다. 그러자 강천비 역시 배시시 따라 웃으면서 금문택에게 말을 붙인다.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괜찮겠지요, 금 형님?”
넉살 좋은 강천비의 태도에 사문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고 있다. 모용
화운은 자신의 경우를 떠올리며 빙글빙글 웃고 있고, 금문택은 그런 강천비의 태도가
맘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하고 나선다.
“형님이라... 것도 괜찮겠지. 동생 하나 생겼다고 생각한다손 치면 괜찮을 테니까.”
금문택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오른쪽 눈을 깜빡인다. 강천비는 그제야 입이 찢
어지도록 씨익 웃음을 짓는다.
‘천비 녀석... 속 편해서 좋겠군. 걱정은 뭐처럼 시켜놓고, 지금 와서 뭐라고 할 수
도 없고...'
주막 서까래에 기대서서 강천비를 바라보던 사문도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강천비를
불러 본다.
“어이, 천비.”
“아... 옛, 주군.”
“... 늦어서 미안하다. 그리고 나도 없었는데 꿋꿋하게 싸워 줘서... 정말 고맙다.”
전혀 뜻밖의 대답이 나오자, 강천비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오른손으로 눈을 싹싹 비
빈다. 하지만 그렇게 사문도를 바라봐야 아무리 봐도 변한 게 있을 리가 없다.
“책임을 묻거나 하지는 않으마. 대신, 최대한 빨리 나아 다오.”
그 말만 남기고 사문도는 바람처럼 휙 돌아선다. 강천비는 사문도가 사라지는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다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정말 희한해. 몇 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러실 분이 아니셨는데, 어쩌다가 저렇게
유순해지신 거지...?”
금문택은 문간에 털썩 주저앉더니 강천비에게 물어온다.
“유순? 원래 저러신 분이 아니셨단 말이냐?”
“네... 4개월 전에, 원래 낙양까지 갔다 오실 계획이셨나 보지만...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지 북경으로 다녀오신 이후론 거의 저렇게 되신 거예요.”
“나쁠 건 없지 않나 싶은데. 무정한 것보다는 저 상태가 훨씬 낫잖아.”
금문택의 말에 강천비는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래도 영 미심쩍다는 얼
굴이다.
“분명히 지금, 주군께는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요. 분명히...”
하지만 그 실체를 잘 모르는 강천비기에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하지만 금문택은 그
실체를 알겠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건... 보나마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그런 거겠지.”
“!!”
강천비와 모용화운의 안색이 동시에 급변한다. 특히 모용화운같은 경우에는 그 정도가
살짝 심한 편이다.
“금 대협, 무슨 짐작으로... 무슨 확증이라도 있길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가요?”
모용화운이 질문을 던지자, 금문택은 모용화운은 바라보지 않고 차분하게 푸르기만 한
창공으로 시선을 돌리며 지나가는 투로 가볍게 대답한다.
“나도 사랑을 해 본 적이 있으니까 말할 수 있는 거요. 그때 내가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과, 지금 주공께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거요. 아시겠소, 모용 소저?”
“...”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사문도가 사랑하는 사람 정도는 있을 거라는 사실을.
하지만 모용화운은 지금처럼 이렇게 사문도가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절실하게 사랑하
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짐작에서 확신으로 바
뀐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다.
강천비는 금문택의 말을 듣고는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겨 있다. 금문택의 말을 듣
고, 사문도에게 분명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주군께서 사랑하는 사람이라... 대체 어떤 분일까. 전에도 해 봤지만... 정말, 아무
리 생각해봐도 상상이 안 되는군.’
눈을 감은 상태로, 강천비는 피식 웃음 짓는다. 자신의 이상향인 사문도가 사랑하는
사람이니만큼, 필시 보통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란 상상이 들어서다.
‘주군께서 어디까지나 변하게 되실런지... 후후, 한번 기대해 봐야겠어.’
사문도의 변화를 기대하는 강천비의 얼굴에는 엷은 웃음이 피어 있다. 자신 역시 좋아
하는 사람이 있기에... 자신 역시 사문도가 혼자 고독하게 지내는 것보다야 유순해지
는 것이 훨씬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모두가 잠자는 늦은 밤이다. 하지만 해시(亥時)가 지난 이 늦은 밤에도, 아직 잠을 자
지 않고 있는 두 사내가 있다.
고독랑 사문도와, 그 사문도를 충(忠)으로 섬기는 사내 금문택... 이들이다.
“아직... 안 주무실 생각이십니까, 주공?”
“아아, 잠이 안 와서 말이오...”
주막 마당에서 발걸음을 서성이는 사문도의 모습은 금문택이 볼 때는 불안해 보인다.
아니, 뭔가 모를 어두운 그늘이 사문도의 얼굴을 덮고 있다.
“뭔가 불안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달은 차면 기운다. 기울기 시작하는 달을 바라보며, 느닷없이 금문택이 질문을 던진다
.
“... 불안이라...”
“제가 볼 때는... 불안해 보이십니다. 뭔가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으십니까?”
금문택의 질문에 사문도는 고개를 한번 끄덕여 답을 대신한다.
‘중원무성... 영락전...’
현재 한화경이 중원무성에서 기거하고 있는 장소다. 용케도 사문도는 이 주막에서 무
림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독고명응의 약혼녀가, 현재 영락전에서 쓸쓸하게 누
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말이다.
사문도가 현재 서 있는 이곳은 북경이다. 현재 중원무림의 핵심세력이 꿋꿋하게 서 있
는 곳이 바로 이곳 북경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여인이 있는 곳도 바로 북
경이다.
“문택...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들었소.”
“... 물론 있습니다.”
뒷짐을 진 채로 칙칙한 회색을 띠고 있는 바닥을 바라보며 아무렇게나 묻는다. 금문택
은 잠시 애잔한 눈빛으로 달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역시 사문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그럼... 그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버티는지 좀 가르쳐 줄
수 있겠소?”
“...”
금문택은 잠시 사문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는다. 죽은 서휘경을 떠올리자
니 가슴이 아파와서기도 하고, 사문도의 뒷모습에서 묘한 힘이 뿜어져 나와서기도 하
다.
“혹 버틸 방법이 있다면... 좀 가르쳐 주시오.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소.”
“... 그렇습니까...”
금문택은 잠깐 한숨을 내쉬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사문도는 여전히 모든 것을 빨
아드릴 것만 같은 바닥을 보며 금문택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방법... 힘듭니다. 아니, 사람에 따라서는... 성격에 따라서는 아예 못하는 게 바로
주공께서 앓고 계신 병입니다.
기다려야만 하는... 미치도록 보고 싶은 사람을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
이 고통스럽다는 건 잘 압니다. 저도 겪어봤으니 말입니다.”
“...”
“지금 주공께서는 사랑이란 이름을 가진... 헤어나기 힘든 수렁에 빠지신 겁니다.”
“빠져나올 방법은... 없는 거요?”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저도... 비가 오거나 달 밝은 날이면, 죽은 그 연인이 생각
나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술을 마시는 것도, 꽤나 괜찮은 방법입니다. 오래 가지는 못하더라도, 사
랑이라는 그물에서 잠시나마 헤어나는 데는 이만한 것도 없습니다.”
“후후... 술이라...”
한 열흘쯤 전에 금문택과 술잔을 나눈 뒤로, 여태 술은 입도 댄 적이 없다. 사문도는
술이라도 마셔볼까 생각하고는, 고개를 조금 들어 금문택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문택, 잠깐 시간이라도 좀 내 주시오. 술이라도 같이 마시러 갑시다.”
사문도의 답변에, 금문택은 기다렸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달에서 시선을 돌린다.
“뭐... 좋습니다. 안 그래도 술도 마시고 싶었고, 주공 부탁이신데...”
“말상대나 좀 되어 주시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이곳 북경에서 홀로 날 기다
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맨정신으로 버티기는 힘들 것 같소.”
“... 그렇습니까.”
금문택은 조용히 사문도의 뒤를 따르면서 속으로 외친다.
자신은, 자기 목숨만치 사랑하던 사람과 판을 박은 듯한 모용화운이 자신의 마음을 뒤
흔들어 놓고 있다고. 이제 겨우 사문도의 뒤를 따르면서 잊겠노라고 다짐한 서휘경이
란 존재가 모용화운이란 존재 덕택에 다시 되살아나게 됐노라고.
‘겨우 서휘경이란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는데... 이제 모든
게 다 순탄하게 돌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모용화운이란 존재에, 금문택은 전신의 힘이 다 빠지는 듯한 무력감을 느껴야만 했다.
첫 번 눈이 마주쳤을 때, 마치 서휘경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모용화운이 자고 있을 안채를 힐끗 바라보던 금문택이 막 사문도의 뒤를 따라가려던
차다. 사문도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후후... 문택. 화운에게 관심이라도 있는 거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문도의 태도에, 금문택은 뭐라고 형언
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는 몸을 한차례 떤다.
“..,?”
사문도의 안색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자신의 말이 너무했나 하는 생각 등등이 사
문도의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간다.
“실은... 모, 모용 소저가...”
“화운이... 무슨 잘못이라도...”
사문도가 얼굴을 굳히고 묻자, 금문택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자신의 마음을 사문
도에게 내던진다.
“잘못이 아니라... 모용 소저는, 제가 사랑하던 사람을... 휘경이를... 너무 닮았습
니다...”
“...!!”
금문택의 반응에, 사문도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굳어간다. 금문택은 밝게 빛나는 밤하늘
의 별들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절실한 심정을 토해낸다.
“정말, 이런 날은... 술이라도 마셔야 할 것 같습니다, 주공. 당분간 아무래도... 술
없이 자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오.”
벌써 주막 내의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는 터라, 사문도는 다른 곳을 찾아보기로 결정
하고 주막에서 발길을 돌린다. 금문택은 그런 사문도의 뒤를 조용히 따르며, 메어오는
가슴을 부여잡는다.
‘잊고 싶다. 서휘경... 너란 존재를 이젠 잊고 싶다.
네가 날 사랑했던 만큼, 나 역시 널 사랑했다. 네가 진정 날 사랑했다면... 이젠 내
기억에서 지워져 다오.
할아버지 말씀대로, 너로 인해 이제 더 이상은 마음 아파하기 싫다... 네 목숨을 내
목숨보다 사랑했던 나였기에,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널 잊으려 노력하고 있단 말이다
.
이젠 내 발목을 놔 다오. 지금은 내 앞에 계신 분께 충성을 하고 싶다. 왜 내 맘은 몰
라주고 계속해서 내 발목을 놓아주질 않는단 말이냐, 휘경아...’
밤길을 총총히 걷고 있던 사문도였기에, 보지 못했다. 자신을 열심히 따라오고 있는
금문택의 눈꼬리에, 가늘게나마 고통의 눈물이 걸렸다는 사실을.
[귀거래혜] 28.귀환(歸還)하는 길
“어이, 천비. 귀환이다.”
“옛!”
열흘이란 시간이 흘러, 강천비의 몸도 거의 말끔하게 치유된 상태다. 한참동안 붙어
다녔던 금의위와도 끝이고, 이제는 분명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악양까지는 긴 여정이 될 것이다. 건강 해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
해라!!!”
“염려 놓으시라니까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문도의 당부에, 강천비는 질리겠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도 대답은 잊지 않고 있다.
사문도는 이미 북경 저잣거리에서 말[馬] 네 필을 구해둔 상태다. 금문택과 모용화운
은 각각 말고삐를 움켜쥔 채로 사문도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금문택과 모용화운이 먼저 말 위에 가볍게 앉자, 강천비도 말에 사뿐히 올라탄다. 전
원이 말에 타자, 사문도도 가볍게 말 위에 올라타며 주위를 둘러본다.
“준비 끝났으면... 갑시다!”
“존명!!”
사문도가 먼저 말을 몰자, 뒤이어 금문택과 모용화운이, 그 뒤를 이어 강천비가 천천
히 말을 몰고 사문도의 뒤를 따라나선다.
악양. 강천비와 사문도에게는 아주 익숙한 곳일지언정, 모용화운과 금문택 두 사람에
게는 결코 익숙한 곳이 아니다.
모용화운은 약양에서 얼마 머무르지 못해서 그렇고, 금문택은 명으로 건너온 이후로
북경 말고는 장주에서 타지로 돌아다닌 적이 없는 탓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말은 북경 외곽으로 빠져나온다. 북경을 빠져나오자, 그때부
터는 아찔해질 정도로 푸른 숲길이다.
두 눈 앞으로 펼쳐진 녹색바다에, 모두들 설렌 얼굴로 말고삐를 재촉한다. 말도 신나
기나 하는 듯, 각자 자기 속도로 천천히 달리다가 천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돌아갑니다, 아저씨들... 군사님. 생각보다 짧은 여정이 되긴 했지만, 충분히... 아
니, 충분 이상의 수확을 거둔 방랑이었단 걸 전 결코 의심치 않습니다!!’
한달여의 기간동안, 사문도는 한단(邯鄲), 안양(安陽), 개봉을 지나 하남성(河南省)의
남양(南陽)에까지 도착했다.
북경에서 남으로 남으로 남하한 결과 이뤄진 결과다. 사문도를 비롯해 모두의 얼굴에
는 피곤한 기색이 엿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얼굴에서 희망이란 빛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저기가... 남양인가?”
강천비가 멀리 자그마한 점처럼 보이는 곳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저기가 남양 맞다. 쉬어갈 준비나 해 둬. 오래 달려왔으니, 말도 그렇고 우리도 좀
쉬어야 할 테니까.”
강천비에게 충고 아닌 충고를 내던지는 사문도의 품에는, 언젠가부터 백룡이 자리를
틀고 고개를 집어넣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다.
“객잔이라도 찾아 봐야겠지요, 형님?”
강천비가 금문택에게 넌지시 말을 던지자, 금문택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자신의 의
견을 내비친다.
“객잔이 아무래도 괜찮겠지. 벌써 유시가 다 돼가니까, 짐도 풀고... 몸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
모용화운도 금문택의 말에 찬성하는 듯 말을 몰면서 천천히 고개를 몇 번 끄덕인다.
네 필의 말은 남쪽에 보이는 자그마한 성, 남양을 향해 달리고 있다. 초원길을 달리고
달리며, ‘휴식’이란 이름을 가진 달콤한 열매를... 그들은 기대하는 얼굴이다.
남양의 객잔에 사문도 일행이 모여들기가 무섭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넷에게로
집중된다.
너무 잘 생겨서, 검을 두 자루나 메고 다니는 게 신기해서, 차가워 보이는 용모가 인
상적이어서, 귀엽게 생긴 것과 다르게 큼직한 도를 메고 있어서란 게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다.
벌써 몇몇 장한들은 모용화운의 단아한 자태에 넋을 잃은 상태다. 개중에는 침 떨어지
는 줄도 모르고 모용화운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자들도 있다.
“저기 구석으로 가서 앉는 게 좋겠습니다만...”
강천비가 사문도에게 가볍게 귀띔하자 사문도는 어딜 앉아도 상관없다는 듯이 강천비
가 지목한 구석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간다.
“후우...”
사문도가 숨을 내쉬고는 흑의를 한번 털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뒤이어 금문택이
사문도의 옆에 조용히 앉고, 모용화운은 사문도를 마주보는 쪽에 자리를 잡는다.
“어이, 점소이! 여기 백건주(白乾酒) 세 병이랑 여아홍(女兒紅) 세 병! 안주로는 녹
두활어(綠豆活魚)로, 없는 건 아니겠지?”
“예, 물론입죠. 잠깐만 기다려 주십쇼잉!!”
점소이가 헐레벌떡 주방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서야, 강천비는 모용화운의 옆에 조심
스레 앉는다. 그러면서도 넉살좋게 말을 던지는 건 잊지 않는다.
“후우... 어딜 가나 누님의 인기는 대단하군요?”
강천비가 장난스레 내던진 말에, 금문택과 사문도는 가볍게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강
천비를 한번 바라본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모용화운은 돌이라도 씹은 표정을 지으며
강천비를 한껏 노려본다.
“윽, 누님!! 그런 눈으로 노려보지 마요, 무섭잖아요?”
“헛소리 좀 그만 해라, 천비야. 날 보는 게 아니라, 주군을 보고 있는 거겠지!”
“아니, 잘 보라고요. 주군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누님을 보고 있는가...”
모용화운이 다시 한번 강천비를 노려보자, 강천비는 그제야 입을 다물고는 조용히 금
문택에게로 말을 건넨다.
“형님 생각은 안 그러세요? 확실히, 모용 누님 정도라면 중원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미인이니까... 이 정도의 시선이 쏠리는 건 너무도 당연하잖아요.”
하지만 금문택은 그저 씁쓸하다는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그러자 사문도는 금문택의 심정을 알아챈 듯이 서둘러 화제를 돌린
다.
“악양까지는 얼마 안 남았소. 이미 화운과 나, 천비는 얼굴이 많이 알려져서 정파 무
리라도 만난다면 필시 곤란한 일이 생길 것이오.”
“하지만 주군, 여태까지는 아무런 일도 없이 여기까지 왔잖아요? 이젠 반 이상은 온
것 같은데, 안심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저도 있고, 천비도 있고... 게다가 금 대협도
있잖아요?”
그러자 이 말에는 사문도 대신 금문택이 답변을 내린다.
“방심해서 나쁠 건 없소, 모용 소저. 방심하면 언젠가 피를 부르게 되어 있는 법이오
. 안 그래도 주공께서는 무공도 사용하실 수 없는 상태니까, 우리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소?”
“... 금 대협의 말씀이 옳군요.”
모용화운이 순순히 자신의 말을 수용하자, 금문택은 헛기침을 한차례 하고는 사문도에
게로 시선을 돌린다.
사문도는 약간이나마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고는
강한 어조로 금문택의 말을 반복한다.
“문택의 말이 맞소. 아쉽게도 지금 이 몸으로는 도망치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는 몸
이오. 조금 힘들지 모르겠지만, 화운은 천비와 함께 조금 더 주변 시선에 주의를 기울
여 주시오.”
“명심할게요.”
모용화운이 금방 수긍하고 나서자, 사문도는 강천비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강
천비에게 말을 붙이려는 순간, 점소이가 쟁반을 들고 뒤뚱거리며 그들 넷이 앉아있는
탁자에 모습을 드러낸다.
“주문하신 것들 갖고 왔습니다. 맛있게 드십쇼!”
“아, 고맙네.”
금문택이 쟁반에 놓여져 있던 술잔에다 여아홍을 한잔 가득 붓고는 사문도에게 정중하
게 잔을 권한다.
“먼저 드십시오, 주공.”
사문도는 금문택에게 고맙다는 미소를 띠우고는 점잖게 술잔을 받는다. 그리고 사문도
가 여아홍 한잔을 가볍게 입속으로 비우기가 무섭게, 금문택은 각자 술잔에다가 여아
홍을 천천히 부으며 각자에게 질문을 내던진다.
“모용 소저는... 이걸로는 모자랄 듯싶은데...”
사문도에게서 모용화운의 주량은 말술이란 얘기를 들은 금문택이기에 여아홍 술잔을
넘겨주려다가 잠시 손을 멈춘다.
“괜찮아요. 금 대협 말씀대로 좀 모자란 맛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유를 즐기면서
먹는 거니까 상관없어요.”
모용화운의 서늘한 얼굴에도 약간의 미소가 떠오른다. 금문택은 알겠다는 듯이 숨을
한번 내쉬고는 모용화운이 앉아있는 탁자 모서리에 정확하게 술잔을 던진다.
‘탁’하고 모서리에 정확하게 떨어진 술잔에서는, 놀랍게도 술은 한 방울도 흘러내리
지 않고 있다. 그냥 한번 찰랑이더니, 그걸로 멎고는 만다.
모용화운은 금문택의 실력에 속으로는 탄성을 터트리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술잔을 받아 가볍게 비운다.
“거기, 아우도 한잔 받아야지. 안 그래?”
“주시겠다면 당연히 받아야지요, 형님.”
강천비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이 씩 웃으며 공손하게 금문택이 넘겨주는 술잔을 받
는다.
“크아... 맛 좋고.”
강천비가 사원하게 잔을 비우며 낮게 탄성을 지른다. 사문도는 이미 한잔을 비우고 여
아홍 병을 잡고는 그걸 천천히 부어 가며 마시고 있는 중이다. 모용화운은 홀짝거리며
천천히 마시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하며, 금문택은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여아홍의
맛을 음미(吟味)하고 있다.
연거푸 세 잔을 비운 사문도는 이젠 녹두활어에 손을 대고 있다. 젓가락으로 녹두활어
를 한 점씩 집어먹고 있는 사문도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유, 놀라운 건 이 여
유가 놀라울 정도로 아늑한 느낌을 가져다주고 있다는 것이다.
고즈넉한 사문도의 모습에, 객잔 내에 있는 모든 여인들은 넋을 잃고 사문도만 바라보
고 있다. 사내들이 모조리 모용화운을 주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변의 시선을 모조리 잡았다는 것을 이들이 모를 리가 없다. 역시 제일 먼저 티를 내
는 인물은 강천비다.
“큭큭, 모용 누님은 어딜 가나 사람 시선 뿌리치기는 글렀어요. 주군께서도 마찬가지
고 말입니다.”
“쳇, 그런 소리는 안 해도 잘 안다. 사람 생긴 걸로 더 이상 갖고 놀지 마라, 천비.
뼈저리게 후회할 날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사문도가 거의 협박조로 나오자, 강천비는 실실 웃으며 넉살좋게 대답한다.
“그러겠습니다. 네, 네.”
하지만 강천비의 태도에, 사문도는 못 미덥다는 얼굴이다. 그리고는 이번엔 여아홍을
병째로 입으로 가져간다. 깨끗하게 비워버릴 속셈인 것이다.
“... 맛은 괜찮군. 신선도가 좀 떨어져서 그런 걸까?”
사문도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술병을 탁자위에 탁 내려놓는다. 그리고 이번엔 백건주
병을 움켜쥐고 잔에 따라 마시려는 순간,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터진다.
“쯧, 멀쩡하게 생긴 녀석이 혼자서 분위기 다 잡고 앉았군. 젠장!!”
별안간 객잔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에 사문도를 제외한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리
로 쏠린다.
굵직한 목소리에 비해 상대는 의외로 젊다. 갓 20대 중반을 넘긴 듯한 용모에, 짙은
청의(靑衣)를 걸치고 있다. 매서운 눈매가 인상적인... 무사(武士)의 모습이 간간이
느껴지는 사람이다.
“부련주(副聯主)님 말씀이 옳습니다. 여기 저희가 세라도 낸 줄 아는 모양입니다만.
”
먼저 말을 꺼낸 사내의 곁에 있는 다른 청년이 편을 들고 나선다.
이들의 도발적인 발언에, 간만의 여유로움을 즐기던 세 사람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간
다. 단 한 사람, 처음부터 지금까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문도를 제외한, 전원
은 긴장상태다.
“신경 쓰지 말고, 휴식이나 좀 더 취하도록 하시오. 피라미들에게 신경을 쏟아 봐야,
돌아오는 건 아무 것도 없소. 귀중한 휴식시간 아니오?”
사문도는 괘념치 말라는 듯이 세 사람에게 넌지시 말을 던진다. 하지만 이 말은 사문
도 일행들에게 도발을 건 자들에게는 어떻게 들리겠는가?
“아니, 저 우라질 자식이 미쳤나? 감히 어느 안전(顔前)이라고 그딴 망발을...”
“그만 해라, 재군.”
먼젓번의 사내가 가볍게 말하자, 재군이라 불린 사내는 금세 꼬리를 내리며 자리에 다
시 앉는다. 하지만 형형한 눈길만큼은 여전히 사문도에게 던지고 있다.
“큭큭... 알고 보니 꽤나 재밌는 놈이로군.”
그 말을 끝으로, 청의사내가 가볍게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병장기(兵仗器)를 휴대한
채로, 가볍게 사문도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천비, 탁자 정리 좀 해 둬라. 술병은 술병대로 챙겨 놓고, 안주는 안주대로 따로 정
리해 둬. 아무래도 조금 시끄러워질 것 같다.”
강천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탁자 위를 정리한다. 금문택은 아니꼽다는
얼굴로, 모용화운은 떫다는 얼굴로 다가오는 청의사내를 주시하고 있다.
“배, 백마련 소속인가?!”
“그, 그러게... 오른쪽 어깨에 저 백(百) 자로 봐서는... 틀림없어!”
“게다가... 방금 부당주라고 했...”
“부당주라면... 무적괴부(無敵怪斧)?!”
‘백마련’이란 말을 들은 사문도의 검미가 살짝 움직인다. 그 기색을 못 알아챘을 리
가 없는 무적괴부는 병장기인 대부(大斧)를 휘두르면서 천천히 사문도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어느덧 그 청의사내, 무적괴부란 사내가 탁자 앞에 도착하고는 발걸음을 멈춘
다. 그리고는 탁자를 대부로 내려찍고는 기세 좋게 사문도에게 말을 던진다.
“내가 어디 소속인지는 알았을 테지. 팔 하나 내놓고 조용히 사라질래, 아니면 목을
내놓을래?”
느닷없이 다가와서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을 해대는 이 사내를 흘낏 바라본 사문도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변을 한번 둘러본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는 반면에
, 오히려 몰려오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무림인들끼리의 싸움이, 이곳에서는 그리 흔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강천비, 금문택, 모용화운은 전투준비를 모두 끝마친 상대다. 이들 셋에게서는
상대가 어디의 누구더라도, 결코 지지 않겠다는 결사의 의지마저 내비치고 있다.
“백마련에서 부당주라면, 분명히 무적괴부 부검악(符劒岳)이겠지.”
“흐흐, 그렇다. 왜, 혈풍월부(血風月斧)의 초식이라도 보고 싶은 거냐?”
“아니, 협상하자. 협상 어때?”
재군이라 불린 사내, 원재군(元渽君)은 시종일관 반말로 부검악을 상대하는 것을 더는
못 보겠다는 듯, 검을 뽑고는 거칠게 달려온다.
“아니, 저 빌어먹을 자식은 존칭 쓰는 법도 못 배웠나? 어디서 히죽거려? 정말 뒈지
고 싶어?”
원재군의 발언에 강천비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동시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원재근에게
로 시선을 돌린다.
(경거망동 하지마라, 천비.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
사문도의 전음이 기습을 치자, 강천비는 흠칫하며 사문도를 한번 바라본다.
“재군,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너는 좀 조용히 있어라. 제발!”
부검악이 악을 지르자, 그제야 원재군은 움찔하며 고개를 숙이고는 뒤로 물러선다. 그
러자 부검악은 험상궃은 얼굴에 부스스 미소를 지으며 사문도에게 말을 던진다.
“협상이라. 팔도 잘리기 싫고, 목도 잃기 싫다... 이거냐?”
“물론. 목숨이란 귀한 거잖아.”
의외로 협상 분위기로 돌아가자, 주변에 몰렸던 사람들은 김이 빠진 듯 수군거리며 여
기저기로 다시 사라진다. 그래도 아직은 많은 인원이 객잔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상태
다.
“큭큭, 협상 조건이 좀 까다로울 텐데... 상관없느냐?”
“들어 보고 결정하지.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협상을 체결할 순 없으니까.”
당돌한 사문도의 반응에 부검악은 피식 웃으며 탁자 위에 침을 탁 뱉으며 떠벌떠벌 협
상조건을 늘어놓는다.
“피라미라 부른 대가랑 내 정체를 알았음에도 불과하고 끝까지 반말 쓴 대가로 황금
100냥. 대신 네놈 몸에는 손대지 않겠다. 이건 어때?”
“너무 비싸잖아. 좀 싸게 해 줘.”
“흐흐, 그럼 이 조건은 어떠냐? 네놈 곁에 있는 그 계집을 우리한테 넘겨라. 그럼 황
금은 아예 받지도 않으마. 이 정도면 꽤나 괜찮은 조건이라 생각한다만.”
음흉한 눈길로 모용화운의 몸을 훑던 부검악이 괴소(怪笑)를 지으며 조건을 내던진다.
모용화운은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고개를 숙여 몸을 부르
르 떤다.
“괜찮은 조건이다. 황금 100냥을 낼래, 아니면 그 계집을 이리로 넘길래?”
안하무인(眼下無人)한 이 사내의 발언에, 강천비는 눈을 질끈 감고는 도 손잡이 부분
을 꽉 움켜쥔다. 금문택은 아미를 찌푸리다가 사문도에게 묻는다.
“주공, 이 피라미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금문택의 발언에 얼굴이 단풍으로 물든 산처럼 얼굴을 마구 붉히는 부검악과 덤덤한
얼굴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금문택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사문도는, 별안간 경멸(
輕蔑)어린 투로 대꾸하고는 술병을 쥔다.
“죽일 가치도 없는 자요. 정신만 차리게끔 해 주시오.”
“존명!”
돌변한 사문도의 태도에 부검악은 울화통이 터지는지 대부(大斧)를 뽑고는 참을 수 없
다는 듯이 일갈을 내지른다.
“보자보자 하니까 이 자식들이, 감히 백마련을 물로 봐?”
허공에서 시퍼런 빛을 번쩍이는 대부가 피의 향연을 벌이려는 순간, 금문택의 두 검도
허공에서 현란하게 춤을 춘다.
챙! 두 무기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객잔을 가득히 메운다. 놀랍게도, 백마련의 부련주
란 직위를 가진 부검악의 대부가 금문택의 두 검에 의해 공세를 완벽하게 차단당한 상
태다.
“경거망동 하지 마라.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뉘 안전이라고 되지도
않은 무기 들고 설치는 거냐?”
“미친놈들!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뒤로 한걸음 물러선 부검악은 자신이 지닌 최강의 절기, 혈풍월부를 12성 공력으로 전
개시켜 나간다.
“핏덩어리로 만들어 주마! 혈풍월부!!”
진한 핏빛으로 물든 초승달 몇 개가 금문택, 사문도를 도륙내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날
아든다. 하지만 금문택의 두 자루 검이 이를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하다.
“진전격적세(進前擊賊勢)!”
금문택의 두 자루 검은, 마치 빛을 가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벌처럼 날아드는 핏빛
초승달을 하나하나 격파하고 있다.
핏빛 초승달이 금문택의 두 자루 검에 부딪치기가 무섭게, 잔잔한 파편을 뿌리며 객잔
안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부검악의 공격도 화려하지만, 그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
는 금문택의 모습 역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엔 모자람이 없는 듯
하다.
“캬, 멋지다!”
“저렇게 멋진 초식들은, 난생 처음 보는군!”
어느덧 객잔에는 짙은 핏빛의 초승달은 모조리 사라진 상태다. 대신에,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금문택의 무표정한 얼굴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초리로 금문택을 바라보
는 부검악의 얼굴이 크게 비치고 있을 뿐이다.
“공격은 꽤나 날카로운 편이군. 중압감이랑 빠르기도 괜찮고.”
공세를 모조리 차단한 금문택은 손목이 저리는 듯 손목을 가볍게 풀고 있다. 하지만
부검악이 상상하던 모습은 이게 아니었던 듯, 부검악의 면전은 경악(驚愕)과 불신(不
信)으로 짙게 물들어 있다.
“부, 부련주님의 혈풍월부가... 마, 막혀...?!”
뒤에서 조용히 사태를 관전하던 원재군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뒷걸음질을 친다. 부검
악의 신변을 지켜야 한다는 자신의 임무 따위는 이미 망각(忘却)한지 오래다.
“이, 이럴 수가... 12성 공력으로 전개시킨 혈풍월부가... 이토록 허망하게...”
“너무 섭섭해 할 필요 없어. 나 역시 진전격적세를 12성 공력으로 전개시켜 보는 게
상당히 오랜만이니까.”
금문택의 발언에 사문도가 재밌다는 얼굴로 금문택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부검악이 의
외로 금문택의 진전격적세를 전력으로 전개시킬 정도의 실력자란 건 미처 몰랐다는 얼
굴이다.
“이제 네놈은 모가지다, 모가지. 네놈은 우리 주공을 얕봤고, 모용 소저까지 모욕했
다.
여기 우리 전부가 달려들면, 제아무리 네놈이라도 당해낼 수 없을걸?”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쥐어 짜보려는 것일까? 부검악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더니,
눈을 부릅뜨고 고성(古聖)을 지른다.
“닥쳐라! 여기서 일을 쳐봐야, 불리한 건 너희들이다! 백마련의 부련주인 내가 이런
곳에서 피떡이 돼서 귀환한다면, 과연 련주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이제 안 되니까 협박조다. 그래선지 부검악의 부릅뜬 눈은 미미하게나마 떨리고 있다.
“...”
금문택은 경청이라도 해 주겠다는 듯이 검을 바닥에 늘어트리고 하려면 해 보라는 얼
굴로 서 있다.
“백마련은 사파 최강의 연합체다! 결코 네놈들이 좌지우지(左之右之)할 수 있을 정도
로 호락호락한 조직이 아니란 말...”
“부련주인 네놈 실력이 그 꼴인데, 나머지들은 안 봐도 뻔하지. 네놈들이 각자 세력
의 권세로 직위를 결정하지 않은 이상은 말이다.”
사문도가 재미없다는 얼굴로 내뱉은 말을 부검악은 그대로 받아친다. 이게 자신에게는
다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는 최후의 방편이니까.
“나보다 더 강한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백마련에 소속된 인원은 이미 3만 명을 넘
어섰다! 일일이 대적해 본다면, 필시 날 능가할 자들...”
“그럼 너희 백마련은 끝장이다.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수하보다 무공이 약하다니.
그러고도 너희 백마련이 사파 최강의 연합체라고 단언할 수 있단 말이냐? 내가 볼 때
는, 이간책(離間策)을 조금만 쓰면 금방 무너질 것 같은데?”
부검악은 당황하며 뭐라고 대꾸하려 하지만, 사문도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마치
폭포수 쏟아지듯이, 사문도의 말은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다.
“착각하지 마라. 내가 볼 때는, 이대로 가다가 백마련은 향후 10년 안으로 붕괴된다.
백마련은 얼마 안 지나면 분명히 귀혼당과 충돌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 귀혼당과 싸워
살아남는다손 치더라도, 앞으로 정파 세력들과는 어떻게 싸울 거란 말이냐?”
“그건 련주가 결정할 일이지, 내가 할 일은...”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다. 부련주라면, 련주를 보좌할 수 있을 정도의 학식과 무공
은 갖고 있어야 한다. 네놈을 보아하니, 그만한 학식은 못 갖고 있다. 그렇다면, 그
공간을 메울 모사꾼은 있는 거냐?”
사문도의 논리정연한 말에 부검악은 할 말을 잃는다. 사문도의 말을 들어보자니, 완전
히 엉성하기 그지없는 조직체계가 아닌가?
“얼굴을 보니 없다는 말이로군. 어리석은 놈! 10여 년 전의 천마궁은, 네놈들의 그
씨잘 데도 없는 백마련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교한 조직체계를 갖고 있었어. 천
마궁 이상은 못 될망정, 그 이하는 안 돼야 하는 게 너희 백마련도의 할 일이 아니란
말이냐?”
사문도는 같은 사파로서, 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조직체가 무너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는 얼굴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이 부림
주란 사내에게 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가라. 가서 공손호에게 전해라. 2년 안으로, 이 고독랑 사문도가 백마련을 접수하기
위해 움직일 거라고 말이다!”
“...!!!”
돌발적인 사문도의 발언에 부검악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고, 고독랑 사문도?!”
“무정검 조무환을 쓰러트렸다는... 신진고수...?”
“그 고독랑이... 나중에 백마련을 접수하겠다고?!”
이미 중원 전역에 그 군웅대회의 얘기가 널리 퍼져있는 상태인지라, ‘고독랑’이란
말이 나오자 삽시간에 주변 공기는 불 때고 있는 압력솥처럼 들끓는다.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이 부기지수다.
“그럼, 저기 소년이 질풍귀 강천비?”
“그 옆에 잘 빠진 여인은... 사망빙화 모용화운이겠지?!”
“저기... 그럼, 저 심복인 듯한 사람은 뭐지?”
구경꾼들이 사문도, 강천비, 모용화운을 보고 신기하다는 듯이 수군거린다. 덤으로,
아직 무림에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금문택도 들먹이고 있다.
하지만, 지금 부검악의 귀에는 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고 있다. 대신
귓가에 전해지는 소리는 뭔가 모를 웅웅거리는 소리뿐이다.
‘뭐, 뭐라고 할 수가 없다... 갑자기... 갑자기 왜 이자가 이토록 거대하게 보이는
거란 말이냐... 어떻게 마치 하늘[天]을 바라보는 느낌이 든단 말이냐...! 나보다도
어린 녀석에게서, 어떻게 이토록 무서운 공기가...!!’
그때, 부검악이 양손으로 쥐고 있던 대부를 떨어트린다. 자신도 모르는 새, 두려움이
라는 그림자가 자신의 마음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부, 부련주님!?”
뒷걸음질치던 원재군이 정신을 차리고 부검악에게로 달려간다. 하지만 부검악은 현재
자괴감에 빠져 정신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모든 면에서 사문도에게 진 것이다. 무공에서, 그리고 인간의 완성도에서도 완패(完敗
)당한 것이다. 서로 무기를 겨뤄보지도 않았건만, 부검악은 짐작한 것이다. 현재 자신
의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눈앞의 이 소년을 능가할 수 없
다는 사실을 말이다.
“갑시다. 쉴 만한 숙소라도 찾아야 할 거 아니오.”
“예.”
강천비, 모용화운이 동시에 낮은 소리로 대답하고는 먼저 움직이는 사문도의 뒤를 조
용히 따라 나간다. 금문택은 뽑았던 두 자루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는 사문도의 뒤를
따라간다. 그러자 바로 그때,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부검악이 소리를 질러 금문택을
불러 세운다.
“거기, 내 혈풍월부를 격파한 네놈의 이름이 궁금하다. 이름이 싫다면 별호라도 밝혀
라.”
끝까지 백마련 부련주의 자존심을 잃지 않겠다는 태도에, 사문도는 속으로 가볍게 웃
으며 금문택에게 가르쳐 주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 철혈쌍검(鐵血雙劍). 이름은 금문택. 이젠 됐겠지, 무적괴부 부검악 나리?”
“!!”
철혈쌍검이란 별호는, 부검악을 비롯한 몇몇의 얼굴을 흙빛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
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철혈쌍검이란 별호로 왜 이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드는지 알
수가 없다는 얼굴이다.
“처, 철혈쌍검이라면... 3년 전 그 철혈쌍검...?”
“그래. 색존인가 뭔가 하는 놈을 죽였지.”
“하, 하북성에 있어야 할 네놈이 어떻게... 이곳에...?”
사색이 되어 오른손으로 간신히 자신을 지목하고 있는 부검악을 보고 금문택은 씩 웃
으며 새털처럼 가볍게 말을 내던진다.
“저분을 모시기로 했거든. 하북성에서 내려온 이유는 그게 다다.
주공 말씀대로라면 귀혼당이랑 붙겠지. 몸 관리나 잘 해라.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또
겨뤄봐야 할 것 아니냐?
난 이만 간다. 불만은 없겠지?”
부검악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는 것을 보고 사문도는 먼저 객잔에서 발길을 돌린다
. 맨 마지막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있는 금문택은 한참이나 저리던 손목을 주무르고 있
다.
‘무적괴부 부검악... 실로 대단한 자임엔 틀림없다. 진전격적세를 전력으로 펼쳤는데
도 손목이 저리게 할 정도의 공력을 실을 수 있는 자라니...!’
부검악과 대조적으로 금문택의 얼굴에는 야릇한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다. 천상신의
말대로 중원이 넓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는 데서 느낀 즐거움 덕택이다.
‘무림엔 저런 녀석들이 득시글거린단 말이지. 후후, 정말 재밌겠어.’
금문택은 땅거미가 내린 서편하늘을 바라본다. 방금 전의 일전으로 자신에게 시선이
어느 정도 몰렸다는 것을 느끼며... 기분 좋은 얼굴로 사문도의 뒤를 따라나선다.
다시 한달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이미 사문도 일행은 열흘 전에 호북성(湖北省)에 입
성했고, 벌써 악양 나루터에 도착한 것만도 이틀째다.
“주공, 그... 마을에는 언제쯤이면 도착하는 겁니까?”
사문도 일행이 현재 걷고 있는 길을 살펴보자면, 여름나무가 화사하게 우거져 있는 숲
길이다. 물론 거기엔 상록수(常綠樹)도 적잖게 보인다. 소나무, 떡갈나무, 단풍나무
등등 여러 가지 종류의 나무들이 근사한 숲길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음... 천비, 우리가 걷기 시작한지 며칠이나...”
“이틀째입니다, 주군.”
강천비의 조언을 듣고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사문도는 손가락을 투두둑 꺾으며 대
꾸한다.
“이 길을 보니, 반 시진도 안 남았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
“주군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이 주변 지리는 잘 알아서 하는 말입니다만, 여기서 모
퉁이 두 개만 돌면 이제 최종 목적지인 무지촌이거든요.”
사문도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강천비의 말을 들은 금문택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부지런
히 걷고 있을 무렵, 모용화운은 혼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평소 그
녀답지 않은 모습이다.
‘우리 빙궁의 생존자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사형은... 살아 있을까?’
이미 북해빙궁이 궤멸된 지도 수개월이 지났다. 생존자가 있었더라면, 중원으로 흘러
들어온 자들도 있을 텐데 그들에 대한 소식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게 모용화운의 여린
마음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사문도 일행들이 모퉁이 하나를 돌아선다. 모퉁이를 돌아서기가 무섭게, 강천비는 모
용화운의 침중한 얼굴을 보고는 조용히 묻는다.
“... 누님,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응? 아, 응... 아무 일도 아냐.”
“아무 일도 아니긴... 얼굴이 많이 심각해 보이는데요?”
강천비의 질문에 모용화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멀리 앞을 내다본다.
공연히 북해빙궁 이야기를 꺼내 화기애애(和氣靄靄)한 분위기를 깨기가 싫은 모양이
다.
“누님, 귀찮으면 대답 안 해도 돼요. 사람에게 비밀이란 건 하나씩은 있다고 알고 있
으니까.”
강천비의 말에 모용화운은 미안한 얼굴이다. 그러나 굳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다는
일념 하에, 끝까지 침묵을 지키리라 결심하고는 굳세게 앞을 향해 걷는다.
‘후... 사형은 어디에 있을까? 살아있기나 한걸까?’
무엇보다 지금 제일 궁금한 게 이거다. 부친 모용백은 이미 비명횡사했고, 남은 희망
은 사형인 풍유성 아니겠는가?
본디 모용화운은 사문도의 일을 다 도운 뒤에 사형 풍유성과 북해빙궁을 재건시킨 뒤
에 여진족을 뒤에서 갉아먹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문도란 존재 하나가 지금 모용화
운이 굳게 먹은 결심을 뿌리째로 뒤흔들고 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아버님께서나, 먼저 죽은 사람들이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하
는 걸 원할 리가 없는데...’
언젠가부터 사문도에게 마음을 뺏기기 시작했다. 풍유성을 사모하던 모용화운으로선
많이 당황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은 거의 상사병 수준까지 다다르게 돼버
린 것이다.
북해빙궁 일은 뒷전으로 날려 버렸다. 지금 모용화운의 마음 한구석을 지배하고 있는
꿈은, 다름 아닌 사문도를 계속 도왔으면 한다는 것이다.
모용화운이 한창 상상에 빠져있을 무렵,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금문택과 사문도는
모퉁이 하나를 더 돌게 된다. 그러자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은, 너무도 평화로워 보이
는 작은 농촌마을 하나와 아름다운 경치다.
“여기가... 바로 주공께서 말씀하신 무지촌입니까?”
“그렇소.”
사문도의 말은 비롤 짧을지언정, 그 안에 담겨 있는 감정은 가히 무궁무진할 정도로
다양하다. 강천비 역시 희열과 행복 등등이 눈동자에서 교차되고 있다.
“여길 보니까, 고향 생각이 납니다.”
금문택이 애써 웃으며 남긴 말이다.
“고향이라... 조선(朝鮮)말이오?”
“예. 아버님께서 평양에서 감사를 지내실 적에, 아버님과 함께 자주 밖에 나가곤 했
던 적이 있습니다. 여기 이 풍경을 보니... 그때 산에 올라가 아버님과 대동강(大同江
)이 흐르는 평양 교외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후후... 문택, 평양이란 곳이 여기만큼 멋진 곳이란 말이오?”
사문도의 질문에 금문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술을 연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조선 땅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곳이란 사실입니
다. 평양이란 곳은, 그 아름다운 조선 땅 중에서도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강원도
의 금강산은 그중에서도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곳으로, 경치가 가히 예측을 불허할 정
도입니다.”
조선 이야기가 나오자 금문택은 신이 나는 듯이 계속해서 설명을 갖다 붙이고 있다.
강천비와 사문도, 모용화운은 흥미로운 얼굴로 이런 금문택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듣고
있다. 물론 가까이 보이는 마을, 무지촌을 향해서 말이다.
“형님, 조선 같은 작은 나라에 그토록 진귀한 풍경들이 많단 말인가요? 거 참, 믿기
가 힘든데요?”
“믿거나 말거나, 그건 네 자유지. 난 사실을 말할 뿐이다.”
“문택의 말이 아마도 옳을 거다. 서적을 보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나... 조선은 비
록 나라는 작을지언정 진귀한 풍경은 우리 중원과도 맞먹을 지경이라고 했다.”
“후우, 정말 놀랍군요. 조선이란 나라가 그토록 아름답다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덧 무지촌의 입구다. 사문도가 기분 좋
은 얼굴로 무지촌에 발을 넣기가 무섭게, 천지를 진동시키는 함성이 마을을 한껏 메운
다.
“소, 소궁주님!!!”
무서울 정도로 우락부락한 체구에다가 고슴도치를 연상케 하는 바늘수염을 한 뇌명을
필두로, 수라쌍성 태무극과 오태청이 그 뒤를 바람을 가르며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
가?
그들의 기세에 움찔 놀란 금문택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선다. 채 1초도 지
나지 않아, 그들 셋이 달려와 사문도 앞에 무릎을 꿇는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소궁주님!”
“걱정 많이 했습니다, 소궁주님!!”
“빨리 돌아오셔서 기쁠 따름입니다, 소궁주님!!!”
그 셋은 꿇어앉은 순서대로 각자 말을 던지고는 고개를 든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미소
를 머금고 있는 사문도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와 박힌다.
“일어나세요, 아저씨들.”
사문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번개같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정중하게 사문
도 앞에 일렬로 줄을 선다. 그러자 사문도는 강천비에게 눈짓을 한다.
“아, 인사부터 하시지요. 이번에 새로 우리 주군을 돕게 된 분으로, 금문택이라고 합
니다.”
그들의 충성을 보고 어느 정도 정신을 회복한 금문택은, 한걸음 앞으로 걸어 나와 정
중하게 포권하며 묵직한 목소리로 세 사람에게 인사한다.
“반갑습니다. 금문택이라고 합니다.”
금문택에게서 풍기는 범상찮은 기도를 읽은 세 사람은 한결같이 듬직한 눈으로 금문택
을 훑어본다.
“오, 소궁주님. 그럼 이 대협이 조선 사람이라는...?”
태무극의 질문에 사문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말을 늘어놓는다.
“맞아요. 조선 검도의 달인(達人)이지요. 충직함도 결코 아저씨들의 아래가 아닐 겁
니다.”
“금 대협, 별호가 있소? 있으면 말씀해 주시구려.”
세 사람의 호의적인 눈길에, 금문택은 적이 만족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별호를 털어놓
는다.
“혈귀 어르신이지요? 철혈쌍검이라고 합니다.”
“색존 이손문을 척살한 그 철혈쌍검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금문택의 덤덤한 모습을, 세 사람은 감탄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뒤이어 이번에는
오태청이 한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빙그레 웃으며 금문택에게 오른손을 내민다.
“금 대협, 능력껏 우리 소궁주님의 보필을 부탁하겠소. 앞으로 소궁주님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터인데, 적절한 상황 대처 부탁하겠소.”
금문택은 황송하다는 듯이 부스스 웃으며 역시 오른손을 내밀어 오태청의 손을 잡는다
.
“수라쌍성의 혈제 어르신이지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미력하나마, 주공의
오른팔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오태청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태무극이 점잔을 빼며 다가와 엄숙한 얼굴로 말을 늘어
놓는다.
“금 대협, 우리 셋이 선대 궁주님부터 천마궁에 몸 바쳐 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리
라 믿소. 금 대협은 비록 소궁주님 대부터 섬기게 되긴 했지만, 우리 이상의 충성을
바쳐주기 바라오!”
태무극의 강하게 나오자, 오태청과 뇌명은 웃긴다는 얼굴로 뒤에서 큭큭거리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다. 금문택은 빙그레 웃으며 태무극에게 강한 어조로 답변을 남
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흑사풍 어르신. 제 능력을 쥐어짤 수 있는 데까지는 쥐어짜도록
할 테니, 너무 심려치 말아 주십시오.”
“크핫핫핫! 금 대협의 호탕함이 맘에 드는구려. 다시 한번 잘 부탁하겠소. 수라쌍성
의 흑사풍, 태무극이오.”
태무극, 오태청, 뇌명 이 셋과 금문택이 인사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던 사문도는 입가
에 엷은 미소를 띤 채로 이 장면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모
습이 눈에 들어오자, 사문도에게 피어 있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진다.
“어머, 곽 군사님 오시네요?”
모용화운도 지금 달려오고 있는 곽경환이 반가운 듯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게
떠오르고 있다. 그건 강천비 역시 마찬가지다.
“휴우, 휴우. 소궁주님, 저는 소궁주님께서 일찍 오셔서 기쁘기만 합니다.”
“저도 곽 군사님의 얼굴을 일찍 뵈니까 좋아요.”
무공을 익히지 않은 곽경환이기에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전신을 흠뻑 적시고 있는 땀
을 닦느라 정신이 없다.
빙긋 웃으며 한창 땀을 닦던 곽경환은, 문득 눈앞에 서 있는 마의청년 금문택을 보고
는 부처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오오, 대협이 바로 소궁주님을 모시게 됐다는 분이오?”
“예, 군사님. 철혈쌍검 금문택이라고 합니다.”
“소궁주님께 이미 자세한 소식은 들었소이다. 같이 가서 이야기나 합시다.”
곽경환이 빙글 돌아서서 현재 거주하고 있는 초가집으로 뚜벅뚜벅 걷는다. 그러자 뇌
명은 실망스럽다는 얼굴로 소리를 내지른다.
“어이, 곽 군사. 방향이 틀렸잖소? 먼저 시원하게 술이라도 한잔 걸치러 가는 게 예
의 아니겠소? 환영식도 할 겸 말이오.”
뇌명의 제의가 나오기가 무섭게 오태청이 찬성표를 내던지고 나온다.
“뇌 아우의 말에 찬성이오. 언제나 우리 심중 파악을 잘 하는 사람인줄 알았더니만,
이제 보니 영 꽝이오?”
둘의 반응에 곽경환은 가볍게 웃으면서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늘어놓는다.
“저 역시 술이라도 한잔 했으면 합니다. 하지만 소궁주님을 비롯하여 금 대협과 모용
소저, 그리고 천비는 2개월간 여기까지 대강대강 쉬면서 내려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
다. 그런 분들께 휴식이 아닌 술부터 권한다면,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될까 하여
이런 결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곽경환의 말에 뇌명과 오태청은 입을 꾹 다문다. 경솔한 자신들의 행동이 남 보기 부
끄러운 것이다.
“가십시다, 소궁주님. 두세 시진쯤 푹 쉬시고 나서 술을 마시러 가든지 결정하십시오
.”
사문도는 두말하지 않고 곽경환의 뒤를 따라간다. 오태청과 뇌명은 축 처진 얼굴로 터
덜터덜 곽경환의 뒤를 졸졸 따라간다. 그러자 태무극은 큭큭거리며 둘의 뒤통수를 한
대씩 때리면서 낮게 소곤거린다.
“나처럼 가만히 있기라도 하면 부끄럽지는 않지. 왜 그렇게 경솔한거냐?”
“아이고... 좀 살살 치시오, 태 형님! 곰 손바닥으로 사람 뒤통수를 때려서 어쩌시려
고... 아고고...”
“오 형님의 말씀이 맞소. 언제 맞아도 태 형님의 손바닥 맛은 장난이 아니란 말이오.
애고고고...”
둘의 이 익살스런 담화를 금문택이 못 들었을 리가 없다. 금문택이 피어오르는 미소를
오른손으로 가리려던 찰나다.
“웃음을 숨길 필요는 없소. 방금 전에는 좀 엄숙하게 행동했지만, 원래 저분들 중에
서 제일 자상한 분이 태 아저씨니까 말이오.”
“하하, 주공께서는 정말 재밌는 분들을 많이 데리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실이오. 아저씨들도 그렇고, 주변에 개성이 독특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렇
게 숨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오.”
수하를 절실하게 아끼는 사문도의 마음이 잘 표현된 말이다. 금문택은 푸른 하늘을 바
라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린다.
‘일단 하나같이 반겨주시는 기색이라 정말 다행이다. 주공 말씀대로, 조선인이란 이
유로 차별받는 일은... 상상도 못 할 정도니까...’
한시름 덜게 된 금문택의 얼굴에서 미소는 더더욱 짙어진다. 그 미소가 언제까지 짙어
질 수 있는지, 사문도는 은연중에 기대하는 얼굴이다.
“크핫핫핫! 자, 부어라! 마셔라!!”
“백마련의 무궁한 앞날을 위하여!!”
“위하여!!!”
오른쪽 어깨에 백(百) 자가 선명하게 수 놓여진 옷을 입고 있는 무림인들, 즉 백마련
도들이 호북성 일대 최고의 기루인 백옥루에서 거나하게 잔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 정말 보기 꼴사나운 광경이로군.”
“자기네들이 무적인 줄 알고 있어. 부련주란 녀석이 내 상대도 안 되는 주제에. 흥!
”
금문택과 모용화운이 각자 자그마한 목소리로 한마디씩 내던진다. 다른 사람들은 백옥
루 저쪽 구석에서 막 올라오는 열불을 눌러 참으며 꿋꿋이 술을 마시고 있다. 정파가
아닌 사파 조직인 백마련이라서 그래도 좀 괜찮은 편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다시 분명히 말해 두겠지만, 저들에게 절대 시비 걸지 마시오. 피로나 풀려고 왔는
데, 괜히 여기서 피로를 쌓아간다면 그게 무슨 손해가 되겠소?”
“명심하겠습니다.”
금문택은 재빨리 얼굴빛을 고치며 사문도의 뜻에 동의를 표하지만, 사문도의 뒤에 줄
줄이 앉아 있는 사문도의 가신들은 영 아니꼽다는 얼굴이다. 물론, 곽경환은 예외고
말이다.
“소궁주님, 소궁주님의 뜻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말씀드렸잖아요. 저 지금 마음대로 무공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란 걸...”
촉새처럼 튀어나오는 뇌명에게 사문도가 한마디 던지자, 뇌명은 금세 입을 꾹 다문다.
누가 뭐래도, 사문도는 자신이 하늘처럼 떠받들던 사람의 아들이 아닌가.
“소궁주님의 말씀이 옳소. 백마련은 현재 사파에서 가장 강력하다고도 할 수 있는 단
체요. 그런 단체들과 괜히 시비가 붙어서 우리가 골머리를 썩일 이유는 없잖소?”
“크음...”
뇌명은 그래도 아니꼽다는 얼굴로 술병을 낚아채고는 입으로 가져간다. 곽경환은 벌컥
벌컥 술을 마셔대는 뇌명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찬다.
“쯧쯧, 저 친구... 저러다가 또 사고라도 칠까 걱정되는군.”
“뭐, 소궁주님의 명령이니까... 알아서 잘 처신하리라 믿소.”
태무극이 덤덤하게 말을 던지면서, 우두커니 앉아 죽엽청만 마셔대고 있는 모용화운에
게 술병 하나를 내민다.
“큭큭, 모용 소저의 주량이 세다는 말은 전에도 한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소만. 그
렇게 잔으로만 비우는 건 아무래도 성에 안 찰 것 같은데...”
“아, 기분 전환하려고 왔는데 취하는 건 싫거든요.”
모용화운이 태무극에게 술병을 하나 내밀며 생긋 웃는다. 태무극은 괴상한 미소를 지
으며 주저 없이 그 술병을 받아 입으로 가져간다. 쏴한 술내음이 태무극의 코를 적시
더니, 곧바로 혀를 적시며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간다.
금문택은 강천비와 함께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병을 비우고 있다. 뇌명과 오태청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문도와 곽경환은 백마련도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지, 술병에 손을 뗀지 오래다.
“귀혼당과의 결전 날짜가 대강 정해졌더군.”
“언제쯤이라던가?”
“내년 원단(元旦)일이라던가? 하여튼 그때를 전후로 한달 시차를 두고 공격 개시라고
들었지.”
“큭큭, 역시 부련주님을 따라다니다 보니까 얻는 이야기도 많은 모양이로군?”
“흐흐. 괜찮은 편이지. 누가 뭐래도 부련주니까, 아무래도 련주랑 하는 얘기가 많을
것 아닌가?”
사문도는 ‘원단’이란 단어를 먼저 입에 떠올린 사내를 보고는 득의의 미소를 짓는다
. 그 사내는, 전에 악양으로 귀환하면서 잠깐 만난 사내... 부검악의 측근으로 보이던
원재군이란 자기 때문이다.
“근데 왜 그렇게 계획이 뒤로 미뤄졌지? 원래 12월 전후로 칠 계획이 아니었던가?”
한창 술을 마시던 청년이 질문을 던지자, 원재군은 별안간 못 볼 것이라도 봤다는 얼
굴을 하며 거친 목소리로욕을 내뱉는다.
“제기랄!! 그때 부련주님께서 빌어먹을 새끼 바람에, 백마련 사기가 많이 저하됐다는
풍문 때문이야.”
“빌어먹을 새끼라...? 아, 그때 부련주님의 혈풍월부를 간단하게 막아냈다는?”
“그래, 그 철혈쌍검! 그 새끼 때문에, 지금 사파의 변절자를 칠 수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엉?”
원재군은 이미 술이 거나하게 된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괴성을 꽥꽥 질러대고 있다.
그리고 동료인 듯한 자들도, 술이 됐다는 건 마찬가지인 듯하다.
“겨우 귀혼당을 궤멸시킬 세력이 하나 등장했나 싶더니만, 참 웃기는 일이로군.”
“그래!! 그 고독랑인가 뭔가 하는 나발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
겠는가?!”
“그리고 부련주도 좀 웃기는 사람이로군. 거기서 그대로 밀어붙였으면, 그 철혈쌍검
인가 뭔가 하는 놈이랑 동수 정도는 가볍게 이뤄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혈풍월부
좀 막혔다고 거기서 당황하는 꼴이라곤!!”
원재군은 이젠 자신이 곁에서 모시는 사람마저 욕을 하고 있다. 술빨이 갈 데 까지는
간 것이다.
“큭큭, 말조심해. 언제 부련주가 찾아와 네 목을 딸지 모르니까.”
“으하하핫, 그래. 말은 언제나 조심해야지. 언제나... 언제나...?!?!”
원재군은 취기가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지만, 돌연 눈빛이 확 바뀐다. 취
기는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경악으로 짙게 물들어 있을 뿐이다.
“허... 허헉...”
원재군이 눈을 부릅뜬 채 몸을 부들부들 떨자, 곁에 앉아있던 동료들은 희한한 얼굴로
원재군에게 묻는다.
“어이, 왜 이러나? 부련주님이라도 나타나신 거냐?”
“에이, 설마! 지금 부련주님은 련주님과 같이 있을 터인데.”
“그럼 이 친구가 왜 오줌 싸다 흘린 인간처럼 몸을 부르르 떠냐? 게다가 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은 뭐고?”
“저... 저, 저기... 저기...”
원재군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사문도가 씩 웃으며 앉아 있다.
중요한 것은, 원재군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는 것이다.
“히야... 저 소년은 누구지? 아는 사람이냐?”
“큭큭, 계집애같이 예쁘장하게 생겼구만. 왜, 너보다 잘생겨서 말이 안 나오는 거냐?
응?”
“그,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바로 이때, 금문택이 사문도의 동태를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묻는다.
“주공, 왜 그렇게 웃고 계신 겁니까? 뭐 좋은 일이라도...?”
“구면(舊面)인 사람을 만났구려. 저기 좀 보시오.”
사문도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금문택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쭉 뻗
는다. 금문택은 취기가 올라오는 듯 머리를 몇 번 흔들다가 사문도의 손가락이 가리키
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음, 저 녀석이라면...? 아아, 그때 부련주란 놈을 따라다니던 놈 아닙니까.”
하지만 왁자지껄한 분위기 덕택에 금문택의 말이 백마련도들에게까지는 안 전해진 듯,
그들은 수상한 눈초리로 금문택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응? 웬 놈이 우리를 쳐다보는데?”
“어이, 너 혹시 저놈들을 아는 거냐?”
“뭐야, 임마. 그렇게 잔뜩 굳어서는. 자초지종이라도 설명해줘야 할 것 아니냐, 엉?
”
바로 그때, 원재군은 비명을 터트리며 쏜살같이 바깥을 향해 튀어나간다.
“으아아아악!!! 철혈쌍검과 고독랑이다!!!”
백옥루를 뒤흔들 정도로 거대한 소리였기에, 백마련도들의 시선은 모조리 원재군이 달
려 나간 문 쪽으로 쏠린다. 원재군이 나간 문을 보며 한마디씩 말을 던지는 건 잊지
않는다.
“뭐야, 저 친구는?”
“별 희한한 녀석 다 보겠네, 큭큭.”
“방금 뭐라고 하면서 뛰쳐나갔냐?”
“으음, 글쎄. 고독 뭐랑 철혈쌍검인가 뭐라며 나가지 않았...?!”
100여 명의 시선이 허공을 휘젓다가, 멀리 구석 쪽으로 서서히 몰린다. 흥청이는 분위
기로 가득하던 백옥루는, 언젠가부터 희한한 긴장감으로 들떠 있다.
“고, 고독랑에다가 철혈쌍검이라면...”
“무정랑 조무환을 격파시킨 고독랑에... 게다가, 우리 부, 부련주님마저 경악시킨 철
혈쌍검이...?”
백마련도들은 하나같이 술렁이고 있는 가운데, 전혀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기녀들
이다.
“얘, 저 사람... 여자 아냐?”
“호호, 글쎄. 남자 같지는 않은데... 분위기를 보니까 남자 맞나봐.”
“너무 잘생겼다! 아아, 넋이 빠질 것 같아...!”
끈끈한 눈길로 사문도를 바라보는 시선도 몇몇 있다. 하긴, 봄바람 같은 미소를 품고
있는 사문도의 모습은 어디 누구라도 혼을 빼놓기에 모자람은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만.
“그럼, 저들이 고독랑 사문도의 일행들...?”
“... 어째 숫자가 좀 많은 것 같지 않냐? 사망빙화, 철혈쌍검, 질풍귀... 거기 또 있
단 말인가?!”
그때, 금문택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백옥루에는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흐른다.
“두 자루 검... 철혈쌍검이다!”
금문택이 술병을 쥔 채로 주변을 한번 훑어본다. 그리고는 부스스한 얼굴로 피식 웃으
며 백마련도들에게 말을 던진다.
“여어, 너희가 최근 무림을 뒤흔들고 있다는 백마련 소속 무사들이냐?”
“그... 그렇다!”
“네, 네놈들이 소속된 방파 이름은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
“사파 입에서 ‘예의’란 말이 다 나오다니, 언제부터 사파가 제멋대로이던 모습을
잃어버리고 정파화(正派化) 되어가고 있었던 거지?”
이번엔 사문도가 말을 툭 내던지고는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선다. 질문을 던진 백마련
도는 아무 말도 못하고 사문도의 동향을 살피고만 있다.
“사파는 사파다. 격식 따위를 따지는 정파와는 차이가 있다는 걸 꼭 몸으로 깨달아야
만 한단 말이냐?”
처음으로 사문도의 얼굴빛이 변하자, 백마련도들은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린다. 단순히
유흥을 즐기기 위해 온 덕택에 무기를 두고 왔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후후, 뭐 여기서 붙고 싶다는 건 아니다. 단순히 술이나 마시러 온 거니까...”
사문도가 동행한 수하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중얼
거린다.
“이만 갑시다... 여기 있어봐야 괜히 분위기만 떨어질 것 같으니 말이오.”
“예.”
“알겠습니다.”
모두들 한결같이 대답하고는, 먼저 바깥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 사문도의 뒤를 조용히
따라 걷는다. 아무도 사문도 일행들을 막는 이는 없다. 최근 명성이 자자한 이들을 건
들만한 용기가, 이들에게는 없는 탓이다.
사문도가 입맛을 다시며 백옥루를 빠져나가려던 순간, 백마련도들이 한 질문을 떠올리
더니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백마련도들은 흠칫하는 얼굴로 사
문도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아아, 아까 어떤 녀석이 물었지? 우리가 소속된 방파가 어디냐고...”
모두들 침을 꿀꺽 삼키며 사문도의 입에서 떨어질 말을 기다린다. 곽경환을 비롯한,
사문도의 수하들조차 기대어린 눈빛으로 무슨 말이 떨어질지 기다리는 눈치다.
“하늘[天]. 우리가 소속된 방파는 하늘이다.”
하지만 사문도의 말을 우습게 듣는 이는 아무도 없다. 사문도의 전신에서 흐르는 묘한
기운이 그들에게는 쇳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덕분이다.
“큭큭큭, 하늘이라... 하늘. 멋진 비유 같습니다, 소궁주님.”
오태청이 맞장구를 치자, 곽경환은 이제 됐다는 듯이 엄숙한 얼굴로 넌지시 충고를 건
넨다.
“저들에게 우리의 정보를 뿌려 봐야, 우리에게 득 될 일은 없습니다. 이젠 그만 자제
하시지요?”
“후후, 좋아요. 이만 돌아갑시다.”
사문도 일행들이 거침없이 문을 빠져나간다. 그들이 나간 뒤에도 백옥루는 한동안 정
적에 잠긴다. 한 기생이 사문도가 한 말을 되뇌기 전까지는.
“하... 하늘...?”
“부, 분명히... 고독랑이 자기가 소속된 방파는 하늘이라고 했지?”
“으, 으응. 내 귀에도 똑똑히... 그렇게 들렸는데...”
이미 술 마실 흥은 깨진지 오래다. 그들은 사문도가 남긴 의미심장한 말을 떠올리며
상상의 바다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일 말고는, 이미 다른 일에는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
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니, 꿈속에서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하
늘. 하늘이 의미하는 바, 그것이 천마궁이라는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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