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본인의 이름이 새겨진 솔로 앨범을 세상에 내놓고 불과 3개월도 되지 않은 11월 1일 갑작스러운 교통 사고로 하늘 나라로 간 유재하. 어느새 그가 우리의 곁을 떠난지 25년이 되었습니다. 혹시 그는 알고 있을까요? 2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때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사랑하고 있고, 당신은 한국 음악의 한 뿌리가 되어 당신의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이 하나의 숲을 이루며 좋은 음악들을 만들고 부르고 있다는 것을...
그의 기일인 11월 1일을 앞두고 네이버 뮤직은 유재하의 흔적들을 더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와 함께 음악을 했던 뮤지션들과 그를 함께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추억해보았습니다. 음악 선배였던 송홍섭님은 오랜 짐을 다시 뒤져서 아래 귀한 자료도 제공해주셨습니다. 오늘 잠깐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가득한 스물 다섯살의 유재하라는 청년을 다시 만나봅니다.
| 유재하 친필악보 - 처음 공개되는 유재하의 '우리들의 사랑' 친필 악보
유재하는 솔로 앨범 전에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멤버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밴드 마스터였던 송홍섭님은 유재하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해주시다가 집안의 오래된 짐을 다시 꺼내어 아래 귀한 자료를 찾아주셨습니다.
유재하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시절 송홍섭을 통해서 조용필에게 본인이 만든 노래를 소개해주고 앨범에서 불러주기를 원했는데 그 중 실제로 조용필이 먼저 부른 노래는 '사랑하기 때문에'였습니다. 당시 장조의 발라드가 생소했던 시절 조용필도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특별하게 생각해서 불렀는데 유재하는 본인이 생각하던 방향으로 나오지 않아서 아쉬워했고 솔로 앨범에서 다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필에게 유재하가 건냈던 다른 한곡이 바로 아래 '우리들의 사랑'이라는 곡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유재하가 여자친구와 극장을 함께 다니고 즐거운 시절을 보냈던 시절에 만든 곡으로 송홍섭님께 본인의 악보를 바로 뜯어서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악보가 바로 위 악보입니다. 악보에 적힌 가사가 이후에 유재하 솔로 앨범에 다시 본인이 직접 부른 곡과 다른 것이 흥미롭습니다.
"보고픈 마음 달랠 수 없어 제가 먼저 전화했대요. (악보)" → "보고픈 마음 가눌 수 없어 큰 맘먹고 전화했대요. (앨범)"
"웃고 싶어도 울고 싶어도 안 그런척 목에 힘주고 조그만 일도 화난 척 하며 돌아서서 나 혼자 웃네. (악보)" → "만나면 때론 조그만 일에 화를 내고 토라지지만 으레 그 다음엔 화해해놓고 돌아서서 나 혼자 웃네. (앨범)"
| 유재하 -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밴드 시절 김광민과 유재하
위 사진은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의 일본인 드러머가 한국 생활을 하다가 생일을 맞이하여 밴드 마스터였던 송홍섭이 본인의 집에 밴드 멤버들을 초대하여 생일상을 차려줬던 순간이라고 합니다. 송홍섭에게 유재하를 소개시켜주었던 김광민의 버클리 음대 유학 전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이 미국과 일본 투어를 앞두고 건반 연주자를 찾았는데 김광민, 정원영 소개로 유재하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유재하는 내게는 굉장히 얌전한 학생이었고 성품도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팝 음악에 대한 욕망은 대단했다. 재하는 앞으로 팝 음악에 있어서 자기 깃발을 확실히 꽂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 재하가 본인 집에 같이 가자고 해서 같이 가게 되었는데 자기가 만든 곡이라며 조용필형님이 부를 수 있도록 소개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물론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며 망설이기도 했다. 당시 2곡을 이야기했는데 하나가 '사랑하기 때문에'였고 다른 한 곡은 '우리들의 사랑'이었다. (위 악보) 조용필 형님도 재하의 노래에 대해서 상당히 흥미를 가졌다. 당시에는 메이저 장조의 발라드가 거의 없던 시절이기에 생소한 노래들이지만 꽤 흥미를 가졌고 '사랑하기 때문에'를 앨범에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뒷얘기로는 재하는 본인의 정서와 조용필이 부른 노래의 정서가 많이 달라서 아쉬워했고 이후 본인 앨범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부르게 되었다. 다시 유재하를 만나게 된 것은 김현식 4집의 프로듀서를 하게 되었을 때 재하를 다시 만났는데 예전의 대학생 모습이 아닌 프로페셔널한 모습이었다. 당시 유재하는 김현식과 너무 친해서 매일 둘이 술 마시면서 같이 지냈다. 유재하가 노래 만들어서 김현식에게 선물하고 김현식은 재하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2집 작업에 들어가며 여기저기 음악 동료들에게 노래를 받고 있던 중에 재하한테도 한 곡을 부탁하게 되었다. 재하는 "누나! 누나가 부를 거면 나는 언제든지 콜이지!"라며 흔쾌히 대답해줬다. 이후 재하가 직접 피아노를 치며 부른 데모 테이프를 가지고 왔다. 그 곡이 2집에 수록된 '비애'다. 그 데모테이프에서 재하는 노래를 굉장히 잘 불렀다. 재하는 내게 "누나! 이 노래 누나가 꼭 히트 시켜줘야해! 아니면 내가 다시 불러서 꼭 히트시킬 거야!"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실린 앨범은 재하가 세상을 떠난 뒤에 발매가 되었다. 이 앨범에는 여러 곡들이 사랑을 받으며 자연 발생적으로 뜨는 노래들이 많았기에 상대적으로 이 노래는 묻힐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나중에라도 그 노래를 살려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되지 않았다.
재하가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하게 되었을 때 전화가 왔다. "누나! 나 드디어 TV에 나가! 난 대중음악가가 될 거야!"라며 너무 기뻐서 전화가 왔다. 정말 재하는 정말 대중음악인이 되고 싶어했다. 단지 유명해지겠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당시 공연만 하던 우리와는 또 달랐다. 음악으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 의지가 굉장히 신선했고 대단해 보였다. 음악이 그의 인생에서는 얼마나 절실했던가에 대한 얘기다.
▶ 유재하가 잠들어있는 천주교용인공원묘원
재하는 내 동생과 전태관과 함께 같은 학교 바로 후배들이었고 우리 집은 그들의 놀이터와 같았다. 전태관, 김종진, 박성식, 장기호 등등 모두들 매일 같이 방 안에 모여서 함께 음악 듣고 같이 잼 연주하는 것이 우리들의 놀이었다. 그 중 재하는 음악 때문에 혼자서도 나를 찾아 자주 놀러 왔다. 혼자 온 재하는 같이 드럼머신 틀어놓고 베이스치고 기타치고 피아노 치면서 잼연주를 하곤 했다. 매일같이 그게 일이었다. 종종 새 노래를 만들어와서 들려주곤 했고 어느 날은 문세형한테 줄 거라며 '그대와 영원히'를 불러주기도 했다. 같이 음악도 많이 들었는데 주로 키스자렛, 팻메스니, 에버하르트 베버 등과 같은 ECM앨범들이었고 마일즈데이비스의 펑키한 음악들을 주로 듣고 음반도 빌려 가곤 했다. 내가 재하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는 버클리 유학 중이었는데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김종진나보다 더 기타를 잘 쳤던 기타리스트 유재하
아마 1983년도였을 것이다. 낙원상가에서 팻메스니가 썼던 어커스틱이라는 앰프를 사던 날 집에 가기 전에 원영이형네 집을 먼저 갔는데 그곳에 유재하라는 친구가 있었다. 원영이형은 나에게 기타 잘 치는 친구라며 같은 기타리스트끼리 서로 친하게 잘 지내라며 소개를 했다. 이후 우리는 방안에서 함께 마주앉아 기타를 연주하며 놀았다. 아래 사진의 기타가 당시 재하랑 같이 마주 앉아 치던 기타다. 당시 래리칼튼의 Room 335나 빌리코밴의 곡을 연주했던 기억이 난다. 음악을 듣고 내일까지 곡 카피를 해오자고 했는데 재하는 항상 카피를 제대로 해왔고 나보다 기타를 능숙하게 연주했다. 나는 항상 네가 나보다 기타를 잘 친다고 이야기했고 재하는 자기보다 내가 더 잘 친다고 이야기했다.
'사랑하기 때문에'를 녹음하던 날 이 곡의 기타 솔로를 쳐달라고 부탁받아서 서울스튜디오를 가서 기타를 연주하는데 왠지 영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재하에게 '나 이거 못 치겠다. 그냥 니가 쳐라'라고 했고 재하는 무슨 소리냐며 계속해달라고 했지만 '니가 치는게 멋있는 거야. 니가 그냥 쳐라'라고 이야기했고 그 솔로기타는 결국 재하가 연주했다. 그렇게 앨범의 모든 소리는 모두 재하의 소리였다. 재하의 천재성에 중요한 요소는 오케스트레이션이었다. 오케스트라의 화법이 분명 달랐다. 음악을 언어라고 하면 단어의 구사가 달랐고 그 언어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재하의 오케스트라는 냇킹콜, 웨스몽고메리, 그리고 70년대 오케스트라를 연구했던 것이었는데 당시 우리는 그런 것들이 먼 이야기였는데 재하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재하는 술을 무척 좋아했고 술 마시고 남들 앞에서 피아노 치며 노래하는 걸 즐겼다. 방배동 카페거리에 피아노가 있는 술집이 있는데 매일 같이 그곳에서 함께 술 마시고 술이 들어가면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여러 가지 팝송을 불렀다. 유독 좋아하던 라이오넬 리치, 필콜린스, 엘튼존의 노래를 즐겨 불렀고 종종 다른 가수들에게 줬던 본인의 노래들도 부르며 놀곤 했다.
| 김종진의 기타 - 재하와 골방에 앉아 매일 함께 연주했던 그 기타
유치원 때부터 같이 놀았던 친구 재하는 어릴 적 부터 노래를 하고 싶어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했다. 어니언스의 노래를 불렀던 생각이 난다. 그때 당시에 초등학생인데 통기타치고 노래하던 아이란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딱지치기하고 담타고 놀 때 재하는 혼자 그렇게 놀았다. 음악뿐 아니어도 당시 또래들과는 뭔가 달랐다. 이소룡을 너무 좋아했다. 헤어스타일도 이소룡을 따라 했고 패션도 이소룡을 따라 했고 매일 이소룡 흉내를 내며 다녔다. 당시 같은 친구 중에 비슷하게 유별난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는데 바로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가인 '서도호'다. 타이거마스크를 그려달라고 하면 너무나 완벽하게 똑같이 그려주었다. 나중에 서도호는 유재하 솔로 앨범의 자켓 그림을 그려주었고, 이후 우리 봄여름가을겨울 앨범의 일러스트와 디자인을 맡아주기도 했다.
한편 재하는 음대를 가려고 작정하고 피아노 레슨을 받았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클래식보다 대중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피아노 레슨하던 누나들도 재하는 맨날 하라는 숙제는 안 하고 혼자 곡 쓰고 노래하는 것만 하더라라고 했다. 재하는 그냥 그런게 너무 좋았던 것이다. 잠시 서로 연이 끊어지고 대학교 때 원영이형(정원영)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재하가 건반 연주자라며 나타난 것이다. 무척 반가웠고 다시 우리는 음악하며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유재하의 솔로 앨범은 제작사나 기획사도 없이 혼자 직접 알음알음 녹음실 빌려 가며 제작하고 앨범이 나와서도 혼자 홍보를 해야만 했다. 함께 차에 앨범을 싣고 신촌을 비롯한 대학교 앞 카페를 함께 돌며 음악 틀어달라고 앨범 뿌리는 것이 전부였다. 재하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무대에서 '꺅'소리를 너무너무 들어보고 싶었는데 앨범 나온지 잠잠한 3개월이 지나고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당시 나는 김현식씨와 같은 동네에 살면서 김현식과 만나서 음악이야기를 많이 했다. 현식이 형이 밴드 돌개바람을 하다가 새로운 팀을 하고 싶어했다. 당시 같이 연습했던 친구들 중 김종진과 전태관이 있었고 건반칠 사람을 구하다가 정원영님의 추천으로 소개를 받았던 것이 재하였다. 아마 경희대 밴드 연습실이었을 것이다. 한 친구가 기타를 메고 들어오는데 난 처음에 음악하는 사람일지 생각지도 못했다. 전혀 음악할 것 같지 않은 털털한 옷차림과 생김새였다. 갑자기 기타를 들더니 캔사스의 Carry on Wayward Son 기타 리프를 치기 시작하더니 피아노를 치면서 유행하던 팝송도 부르고 자기가 만든 노래도 부르는데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이후에는 음악적인 이야기를 함께 많이 했는데 음악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나 서양의 음악과 우리 가요와 차이 등 음악에 접근하는 것이 비슷해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재하의 집에서 잠을 자면서 밤새도록 음악 얘기를 하기도 했다. 당시 퀸시존스, 마이크스턴, 제임스 잉그램, 마이클프랭스, 필콜린스 등 다양하게 음악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고, 기타부터 피아노까지 음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관심이 많았다. 항상 우리의 주제는 언제나 음악 아니면 짝사랑이었던 것 같다.
김광민함께 유학 계획을 이야기하며 설레던 유재하
처음 만났을 때는 둘 다 대학생이었다. 당시 세션 연주 활동을 많이 하던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재하를 소개를 시켜주었다. 재하의 음악은 서정적이지만 사람 만나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적극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이었다. 음악적인 것뿐 아니라 이런저런 것들이 나랑 무척 잘 맞아서 친하게 지냈다. 함께 술도 둘이 참 많이 마셨다. 새벽까지 술 마시다가 돈이 떨어지면 집에 가서 돈 들고 나와서 다시 술 마시기도 하고, 어느 날은 오후 2~3시부터 술을 마시는데 밤이 되고 이 식당 저 식당 돌아가며 계속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는데 어느새 날이 밝아 아침이 되어 사람들이 들어와서 아침을 먹고 가고 우리는 계속 술 마시며 이야기하다 보니 점심이 되어 사람들이 점심식사하고 가던 날도 있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항상 음악과 사랑이었다.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으로 함께 활동할 때 일본에 한 달 동안 공연을 가기로 되어서 나랑 재하랑 함께 가기로 했는데 클래식 음대였던 재하에게 당시 학과장이 활동을 승인해주지 않아서 함께 가질 못해서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많이 난다. 같이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던 중 나는 미국으로 음악 유학을 가게 되었고 당시 재하는 한국에서 음반을 준비하고 있어서 전화로 음반 계통에 있는 사람들을 소개시켜주기도 하며 고민을 나누기도 했다. 당시 재하는 앨범을 준비하며 주변의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등은 모두 재즈를 하겠다고 준비하는데 재하가 생각하는 방향은 그쪽이 아니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재하는 재즈보다는 베리메닐로우와 같은 발라드를 좋아했던 것도 나와 통했었다. 그래서 나는 재하에게 니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격려를 해주곤 했다.
그렇게 솔로 앨범이 나오고 나는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한국으로 잠시 와서 그해 가을 여자친구와 함께 결혼 후 버클리 유학을 준비하던 재하를 만나서 유학 계획을 함께 나눴고 다시 미국으로 간 나는 그 가을 재하의 유학 소식이 아닌 사고 소식을 듣게 되었다.
|
첫댓글 사랑하기때문에 라는 노래로 유재하라는 가수를 알게 되었는데, 이렇게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지 못하고 먼저 떠났다는게 안타깝네...
사랑하기 때문에를 조용필이 먼저 불렀다고 하던데...유재하노래는 유재하가 불러야 하나봐요.ㅎㅎ 주옥같은 노래들...살아있었다면 얼마나 더 주옥 같은 곡들을 만들었을지 생각하면 아쉽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럼....곡도 곡이고...저런 감성 가진 사람 언제쯤 나올라나...
유재하.한곡도 안빼고 정말 다 좋아요.
무건 악세서리를 내려논 느낌.
개인적으론 빠른 노래들은 왠지 동요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ㅋㅋ 발라드 곡들은 정말 쵝오....
유재하 LP판이 있었는데 이사하면서 그걸다 ... 암튼 천재뮤지션 유재하 안타깝다!
그래서 요새는 뭐 하나 버리기가 아까워요.ㅋㅋㅋ유재하, 김현식, 김광석 다들 라이브로 들어보고 싶은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