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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7일 토요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제1독서 : 이사 61,9-11
복 음 : 루카 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랑이란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나야 합니다. 생각만 해서는 사랑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종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냐면서 화를 내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충격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들을 위해 해줄 만큼 해주었다고 생각했고 항상 아들이 잘되기를 기도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아버지가 제게 해준 것이 뭐 있는데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즘 일이 잘 안 풀려서 그 화풀이를 아버지에게 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이 말에 아버지는 너무 서운했고 슬펐습니다.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힘든 상태에서 정신 상담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상담 선생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아드님께 ‘사랑한다’라는 말을 해보셨습니까?”
이 형제님께서는 “꼭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을 압니까?”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알아주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원망만 늘어놓았습니다.
왜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을까요? 혹시 모른 척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사랑이 아닌 당연한 부모의 의무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 없었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말과 행위가 드러나야 상대방이 알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15장에 나오는 방탕한 아들에 대한 복음 말씀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깊이 뉘우친 뒤에 아버지께 갑니다.
이를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간다.”(루카 15,20)라고 루카 복음은 전해줍니다.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행위입니다. ‘돼지 치는 일’을 그만두는 것도 하나의 행위였습니다.
“이제 아버지께 돌아가야겠다.”(루카 15,18)라는 생각을 행위로 드러냈을 때,
아버지와 아들이 기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행위로 사랑이신 아버지를 만나고 사랑을 더 뜨겁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의 진지한 결단이 담긴 말과 행위가 꼭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야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범을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님께서 보여 주십니다.
성모님께는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부터 시작해서 오늘 복음에 나오듯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는 장면 역시 이해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불평불만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루카 2,51 참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에 담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신 성모님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불평불만보다 사랑의 마음으로 하느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진정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며칠 전 한 어린아이의 기도를 읽었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 싸우지 않게 해주세요.
착한 누나는 스마트 폰 너무 보지 않고 책을 가까이하게 해주세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떨어지지 않게 용기와 힘을 주세요.”
저는 한 번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엄마가 늘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도 당연히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아픔을,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였습니다.
어릴 때 불렀던 동요가 있습니다. ‘파란마음 하얀마음’입니다.
가사의 내용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어제는 ‘예수성심 대축일’이었습니다.
어제 저는 예수님의 마음은 ‘순종’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은 ‘연민’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과 희생’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희생’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순종, 연민, 겸손, 희생’의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들 또한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성심 대축일 다음 날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로 정하였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성모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마음을 어머니의 마음을 통해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배려와 양보, 헌신과 봉사’의 마음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삶입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곳을 찾아다니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당신이 발현한 곳을 찾아다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기적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적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보여 주시는 표징입니다.
내가 신앙 안에서 기쁘게 산다면 굳이 다른 기적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보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기도하고, 미사참례 열심히 하고, 이웃과 정을 나누면서 사시는 분들에게는
다른 기적이 필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를 드리고,
나쁜 일이 생기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요구하고, 유대인들은 표징을 요구하지만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겸손의 길, 사랑의 길, 순명의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참된 진리입니다.
이 길이 성모님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주님은 비천한 이를 땅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가난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높이시어,
존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조욱현 토마스 신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축일의 유래 :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의 스승이요, 첫 번째 사도로 불리고 있다.
그는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기 20년 전부터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미 2월 8일을 마리아 성심 축일로 지냈다(1643년).
이후 교황 비오 7세는 성모 성심을 축일로 지낼 수 있도록 청하는
모든 교구와 수도 단체에 허락하였다.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온 세상을 ‘마리아의 무죄한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 등급을 올렸고, 날짜를 성모승천 대축일의 제8부인 8월 22일로 고정시켰다.
그러나 로마 전례 개혁은 다시금 지역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념일로 환원하고,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로 고정시켰다.
축일의 의미 :
이 축일은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 현존의 기쁨을 축하하는 것이다.
아울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에
주님이 거주하도록 안배하시어 거룩하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 자신도 하느님 영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마리아께 전구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그 목표로서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유년기의 예수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를 완성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내는 루카에게
마리아가 이미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지혜와 파스카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님이 지혜 자체이며, 파스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사건의 배경은 구약의 파스카 축일이다.
구약의 파스카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의무적이었는데, 아마 12살이 그 규정 나이였던 것 같다.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은 구약의 파스카 예식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파스카 예절에 관한 것을 질문하고
가장 연장자가 파스카의 역사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는 학자들이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경탄하게 하는 지혜의 스승, 지혜 자체로 보인다.
또 파스카적 용어를 통하여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의 고통과 기쁨을 미리 체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부활 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2,41; 22,8.13), “사흘이라는 시간”(2,46; 24,46),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필요성”(2,49; 24,7)과 “이해하지 못하였다”(2,50; 24,25)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흘이라는 시간 개념은 성서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사흘 길을 걸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고래뱃속에 사흘간 머물렀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사흘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개념은 고통의 최대치를 드러낸다.
사흘이란 의인들의 최대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소년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것은
의인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잃어버린 다른 어머니처럼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훗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의 고통을 미리 겪으셨다는 것을 아울러 미리 보여 주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 꾸짖는 가운데
요셉을 아버지로 언급하는 데 대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은 예수께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절ㄴ)는 진술은
신앙의 길을 걷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함’은 지혜의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있음, 내맡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목동들이 다녀간 이야기에도 나타난다(2,19).
거기에는 이 신비를 간직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묵상의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간직하였다”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또 이 이야기에서는 ‘찾다-발견하다.’는 신앙의 도식을 볼 수 있다.
불 신앙인은 찾아도 얻지 못하지만, 신앙인은 찾으면 얻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열심히 찾는 마리아의 신앙을 묵상하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한 마리아의 신앙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너무나 자주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나 홀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그것을 나 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마리아는 사흘간의 고통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는다.
이것은 우리도 잘못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에,
즉시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갈 때,
비로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를 따르는 자세이다.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고 따르도록 노력할 때,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대한 더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은총을 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자.
잔소리와 조언을 구분하셨던 성모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한 그룹의 아이들이 2박 3일간 피정을 끝내고 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게 좋았다, 저런 게 좋았다, 재잘재잘 말들이 많았습니다.
한 아이가 그랬습니다.
“엄마 아빠 잔소리 안 들으니, 처음에는 너무 이상했지만, 정말 좋았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이 짧은 세상 살아가면서
쉼 없이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또 반대로 잔소리를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이 먹어감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우리는 잔소리와 진심 어린 조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잔소리 듣는 것 엄청 싫어 하는데, 어린 자녀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것이 잔소리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 역시 아들 예수님을 잘 동반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경 안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어떻게 동반하셨는지
부족한 자료를 통해서나마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성모님의 동반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동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무렵,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갔다가, 귀갓길에 소년 예수를 잃어버렸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길을 거슬러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율법 학자들 사이에 끼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당혹스러웠던 성모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세게가 아니라 넌지시 나무랐습니다.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이 특별한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방관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나이 또래 소년에게 필요한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12살 무렵부터 메시아로서 탁월한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셨습니다.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언변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경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를 향한 답변이 엄청 강도가 높았습니다.
아주 세게 나온 것입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 순간, 성모님께서는 직감했습니다.
아, 예수님께서 서서히 준비를 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거기다 더 이상 또 다른 잔소리를 퍼붓지 않으십니다.
침묵 속에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찾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런 성모님의 노력에 대해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을 향해 할 말씀을 하셨지만, 듣기 싫은 잔소리로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강약 조절을 하신 것입니다.
어린 예수님을 위해 방관하지 않으시고, 적절히 개입하시고,
그러나 지나치지 않으시고, 그렇게 균형 잡힌 동반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성심에 자신의 마음을 묶은 어머니 마리아
박상대 마르코 신부
“너희들은 불쌍한 죄인들이 가야 할 지옥을 보았다.
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나의 티 없는 성심에 대한 신심을 이 세상에 불러일으키려고 하신다.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는 것을 행하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며, 또한 평화가 올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계속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 드린다면,
머지않아 더 참혹한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어느 날 밤 이상한 빛을 보게 되거든 이것이 세상의 많은 죄악에 대한 징벌
곧 전쟁, 기근, 교회와 교황에 대한 박해가 다가왔다는 하느님으로부터의 징표인 줄 알아라.
이를 막기 위하여 내가 오리니 사람들은 이 세상을 나의 티 없는 성심에 의탁하고
매월 첫 토요일에 보속의 영성체를 하도록 하라.
만일 내 청이 이루어지면, 소련은 회개할 것이며, 평화가 이루어지리라.
그렇지 않을 경우, 소련은 그 오류를 온 세계에 전파하고
전쟁과 교회에 대한 박해를 유발할 것이며, 착한 많은 사람들이 치명할 것이며,
또 교황은 많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이고, 여러 민족들이 멸망하게 될 것이다. ...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나의 티 없는 성심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7월 13일 메시지)
이는 성모 마리아의 파티마 발현 메시지 중의 하나이다.
포르투갈의 파티마에서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매달 13일에 세 명의 어린 목동 루치아나, 히야친타, 프란치스코에게
총 6차례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매번 메시지를 통하여 죄로 인해 상처받은
하느님의 성심과 이를 또한 아파하는 마리아의 성심과 사랑을 드러내 보여 주셨다.
오늘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이다.
예수성심대축일 다음 날인 오늘 교회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을, 마음을 공경하고 경축한다.
전례 개혁이 있기 전에는 8월 22일을 그 기념일로 지냈지만,
1970년에 개혁된 로마 전례에서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날로 이 축일을 결정하였다.
일찍이 많은 교부들이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을
예수 성심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서 묵상하여 왔다.
교황 비오 7세(1800-1823)께서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을 시작으로
비오 12세(1939-1958)는 1944년 전세계교회에 이를 선포하였다.
이는 1942년 10월 31일 파티마에서 거행되었던
“티 없이 깨끗하신 마리아의 성심에 인간성을 봉헌하는 행사”를 계기로 선포된 것이었다.
이로써 교회는 인간 마음의 상징적 의미에 따라 하느님과 아들에게 봉헌한 마리아의 사랑을
全인간을 위한 모성적 사랑으로 공경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 성심과 더불어 성모 성심을 공경하는 이유는
성모의 마음이 천주성을 지닌 예수의 마음에 전적으로 매어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루카 2,41-51)은 예수의 유년 시절에 관한 보도이다.
이 보도의 배경에는
“눈을 감은 채, 그러나 미소를 머금은 밝은 얼굴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무엇인가를 간직하려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려 주고 있다.
그녀가 간직하려 하는 것이 당장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예수의 성장과 함께 하나씩 밝혀질 것이며,
마지막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그녀의 마음 전부를 채울 것이다.
12살의 예수는 과월절 축제를 지내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 상경 길에 올랐다.
축제기간이 끝나고 사람들은 제각기 고향으로 향했지만,
예수는 의도적으로 가야 할 고향길을 접어버렸다.
3일 동안 예수는 “아버지의 집”(49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 랍비 등의 학자들과 함께 말이다..
예수는 그들 사이에서 듣고, 묻고, 피력하는 가운데 자신의 奇智를 모두 발휘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지능과 그 대답하는 품에 경탄하였다고 한다.
예수는 서서히 부모와 선생들과 그리고 자신이 속해 있는 유대교를 벗어나
다른 意識에로 커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자기의 때는 오지 않았다.
아직 메시아로서의 결정적인 도래는 멀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의 自意識 속에 메시아로서의 의식이 아직 충만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방금 태어난 “아기 예수” 안에 온전한 하느님의 神性과
인간으로서의 人間性이 內在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만약에 그렇다면 “아기”일 수 없다.
아기 예수 안에는 아기로서의 신성과 인간성이 내재할 뿐이며,
이 두 가지 本性은 온전하고 충만한 신성과 인간성을 향한 잠재력이다.
어린 소년 예수는 바로 그 완성을 향하여 매일 노력하며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나자렛으로 돌아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이 순종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기 삶 전체를 세상에 내어놓을 그런 순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은 아직 오늘 일어난 사건과 소년 예수의 말을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 이성의 능력이나 통찰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예수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머릿속이 아니라 마음속에 간직하시는 것이다.
이 점은 하느님의 신비가 머릿속에서 파악되기보다는
마음 안에서 충만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찾아 헤맨 “3일간”(46절)은
나중에 “파스카 신비의 3일” 안에서 그 참뜻이 밝혀질 것이다.
민동규 다니엘 신부 (갑곶순교성지)
찬미 예수님
성모님을 표현하는 말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오늘 축일로 지내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삶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기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순탄치 않았던 삶입니다.
아기를 배속에 품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고,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모습도 봐야 했습니다.
모든 죽음은 슬픈 일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어미가 자식을 떠나보내는 아픔은
그 어떤 슬픔보다 깊고, 깊고 또 깊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곳 순교 성지 봉안당에서 봤습니다.
그 아픔이 얼마나 슬픈 것인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
성모님께서는 이러한 고통을 간직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과거의 것과 동시에, 미래에 다가올 모든 일에 관한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마음속에 상처를 표현할 수 있다면
우리 주님께서 맞으신 채찍의 생채기만큼
성모님의 마음도 수많은 생채기를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성모님을 ‘티 없이 깨끗하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맞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상처와 아픔, 그리고 깊은 슬픔까지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을 잉태할 때의 그 말씀을 끝까지 이루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신 이 말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티 없이 깨끗하신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입니다.
외식
아주 어렸을 적 일주일에 한 번 외식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 기억을 선명하게 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저는 단기기억은 좋은데 장기 기억력은 나쁜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어릴 적 일주일에 한 번 외식한 것은 기억납니다.
왜 기억할까요?
너무 좋은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외식 전에 목욕을 꼭 해야 하는 가족 규칙이 있었다고 하는데
목욕한 기억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마 목욕을 좋아하지 않았었나 봅니다.
그저 목욕한 후 외식을 한 기억밖에 없습니다.
메뉴는 늘 ‘돼지갈비’였습니다.
어쩌면 제가 다른 누군가보다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지 않을까 합니다.
좋은 기억만 간직하는 것 말입니다.
오늘은 외식 어떨까요? 값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잊히지 않는 추억의 외식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추억은 앞으로 우리에게 순간순간의 행복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곰곰이
발음 [곰:고미]
품사 「부사」
여러 방면으로 깊이 생각하는 모양.
⋅곰곰이 꼽아 보다.
⋅곰곰이 돌이켜 보다.
⋅곰곰이 들여다 보다.
⋅곰곰이 따져 보다.
⋅곰곰이 생각 하다.
<출처 : 한국어 기초사전>
김 아니마 수녀
사춘기 예수님과 마리아...
오늘 복음에서 나는
서툴지만 제 목소리를 내는 소년 예수님을 만난다.
미묘한 감정이 흐른다.
갈등 앞에선 어머니는 곧바로 아들을 다그치지 않으셨다.
‘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하였다.’ (루카1.29)
어머니는 행동하기보다 먼저 헤아리시는 분으로 종종 묘사된다.
오늘 복음에서 또한 이러한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그분은 아들 예수의 대꾸 앞에서 멈추어 서 계신다.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주고
조건 없이 수용해 주는
안전하고 넉넉한 품을 발견한 아이는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할 용기와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용기를 가지게 된다.
그 모든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어머니의 넉넉한 마음을 묵상해본다.
때로는 불안하기도 하고
때로는 초조하기도 했을 마음이겠지만
내색하지 않고 기다리시고
또 홀로 가슴앓이를 감내하신다.
그런 어머니에게
이윽고 되돌아오는 것은 소년 예수님의 순종이다.
나를 믿고 기다려준 어머니에게 더 큰 사랑을 내어드린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자녀들에게...
[출처] 루카 2,41-51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