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마중물이 현재 활동중인 대전향토문화연구회 소속 대전지명연구모임 3월답사기입니다. 조금이라도 대전을 알고 대전을 사랑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하면서 글을 올려 드립니다.
[3월 답사기]
3월4일, 올들어 두번째 답사. 참여인원은 4명. 오붓하고 단촐하다.
오늘은 대덕구로 향한다. 구체적 행선지는 대덕구 상서동 '선바위'버스 승강장(신탄진방향)에서 모여 경부고속도로 지하도를 이용, 서쪽으로 이동해 지수체육공원 일원을 둘러본 후, 을미기공원까지 걸어가면서 그 옛시절을 그려볼 예정이다.
여느 답사때처럼 이번 답사에서도 땅이름(지명)에 배어있는 당시 환경, 배경, 땅이름의 변화과정, 그리고 옛사람들의 삶의 모습, 생각 등을 그려본다. 땅이름 깊숙이 옛사람들의 자취가 감춰져 있다.
만남시간인 오전10시를 조금 넘겨 선바위삼거리 승강장을 출발했다. 조금 나아가면 선바위삼거리가 있다. 인근에 그 옛날 큰 바위가 서있는 모습으로 있어, 선바위(섬바위, 입암 立岩, 입바위)라 했고, 이 마을을 '선바위마을'이라 했다. 마을앞에 장승이 서있는 경우가 있듯이, 어느 마을의 경우 액운을 막는다든지, 아니면 마을아낙들의 바람끼를 잠재우기 위해 남근석역할을 하는 돌기둥, 즉 입석(立石)을 세우는 경우가 있다. 그 연장선이리라.
우선 상서고가도에 올라 그 주변을 조망해 보기로 했다. 4차선 국도위에 시설된 고가(高架)인만큼 주위를 둘러보기엔 안성맞춤이다. 특히 평촌동을 비롯한 신탄진 방향의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상서동은 그 옛날 서당(書堂)이 있었다는 데서 비롯된다. 상서동과 이웃한 평촌동에 각각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상서동에 있는 서당을 '윗서당'(웃서당, 상서 上書)이라 했고, 평촌동에 있는 서당을 '아랫서당'이라 칭했다고 한다. 그후 1914년 일제에 의해 대대적인 행정구역개편이 이뤄지면서 상서동은 '서당이 있었다'는 사실이 반영돼 작명(作名)되었고, 평촌동(坪村洞)은 지형적으로 드넓은 벌판이 펼쳐진 곳이라서 그 특징을 살려 작명됐다고 할 수 있다. 평촌동엔 실제 '벌말'이란 지명이 있다. 야트막한 논밭으로 이뤄졌기에 담배인삼공사, 대전철도정비창 등 공공기관 및 시설이 들어서고 각종 공장시설이 산재해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무진이고개'의 이름유래, 담배이름에서 유래된 태양마을, 청자마을, 신탄진 지명에서 따온 담배이름 '신탄진' 등등. 참고로 똑같은 한자이름의 평촌동이 서구에도 있다. 그 곳은 현재 공단조성이 한창이다. '평촌일반산업단지'. 평탄한 곳은 대규모 공장들이 들어서기에 최적의 입지인 것이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신탄진방향 좌측인도를 따라 걸어 내려갔다. 10여분 걸으니, 좌측 안쪽에 '죽림병사'란 은진송씨 재실이 우릴 반겨준다. 이 일대를 죽림(竹林), 또는 '대숲'이라 일컫는다. 또 인근에 산막(山幕)이란 마을이 있다. 대나무는 절개, 지조를 뜻하고, 선비들이 더위를 피해 산막에서 시(詩)를 짓고, 시국(時局)을 논했을 법하다. 그 옛날이 눈앞에 다가온다.
이어 상서육교를 지나 경부고속도로 지하도를 따라 동서를 횡단한다. 다음 행선지는 지수체육공원. '지수'란 말은 계수(桂水)란 단어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계수'가 구개음화현상을 거쳐 '지수'가 됐다는 것. 달이 뜬 밤에 인근 매봉재에 올라 지수마을을 건너다보면 마을에 은빛물결이 잔잔히 흘러가는 모습이었다는 데서 계수라 칭하게 됐고, 더나아가 지수로까지 변모했다는 얘기다. 우린 '계수'씨를 곧잘 '지수'씨라고 부르지 않는가
완만한 경사의 골짜기에 들어서니, 10여채의 민가가 한적한 시골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조금 오르니 지수체육공원이다. 예전에 움푹 파인 곳이었는데, 쓰레기매립을 하고 성토를 한 뒤, 그 위에 조성된 체육공원이란다.
되돌아나오다가 좌측에 야트막한 둔덕길이 있어 조금 오르니 갑천 건너 테크노밸리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 곳에도 10여호의 민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밭에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마을얘기를 들었다. 시집와서 52년째 살고 있다는 그 할머니는 그 옛날 지수마을은 100여호가 훌쩍 넘는 큰 마을이었다고 회상해주셨다.
고개마루에 이르니, 신도비같은 큰 비석이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비앞면에 동래정공계담대유허비(東萊鄭公桂潭臺遺墟碑)라 쓰여있다. 계담대는 선조때 호조참의를 지낸 정복시(鄭復始)가 낙향해 이 곳에 은거하면서 지은 정자라고 한다. 대(臺)는 본래 지형상 높은 곳의 평탄한 지역에 붙는데,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그 옛날은 어땠을 지 모르나, 갑천이 한참 아래 유유히 흐르고 있다.
정복시의 외종손인 송국사(宋國士)가 낙향해 계담대터에 풍월정이란 정자를 지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그러나 그 둘의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
큰 차도로 내려와 장고개삼거리, 시알들삼거리를 지나 을미기공원에 도착했다. 장고개는 예전 상서동 사람들이 신탄진장을 보러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이밖에 동일한 이름의 장고개가 두 개 더 있다. 덕암동에서 넘어오는 장고개, 평촌동, 저 멀리 용호동, 장동 사람들도 이 고개를 이용했다. 그 옛날 신탄진장은 계담대 인근에 있었는데, 홍수가 져 물난리가 나는 바람에 지금의 한국타이어 대전공장 인근인 신흥리로 옮겨갔다고 한다. 계담대 인근의 장터를 계담장터라 했고 신흥리 이전 후 옛장터를 '구장터'라 일컬어졌다고 한다. 또다시 그 후에 도로건너편 신탄진역뒤편으로 자리를 옮겨 오늘의 신탄진장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다.
드디어 오늘 답사의 마지막 행선지 '을미기공원'에 이르렀다. 들말두레전수회관앞에서 기념촬영 을 했다. 갑자기 심한 허기를 느꼈다. 오늘따라 많이 지치는 거같다. 몸상태가 별로였다. 일단 밥부터 먹자고 제안해 인근에 있는 강원도막국수집으로 들어갔다. 일단 휴식을 취하니, 좀 나아진 거같다.
다시 길을 나서 을미기공원 초입에서 유래비에 씌여진 들말두레에 관한 글을 음미해 보고, 을미기의 뜻을 반추해 봤다. 일단 유력설은 여울목에서 절묘한 음운변화를 거쳐 을미기가 되었다고 한다. 신탄진에 가면 새일이란 이름들이 눈에 자주 띈다. 새일은 새여울에서 왔고 여울이 '일'로 변했으니, '을'로 변하기란 식은죽 먹기다.미기는 '목'에 '이'가 붙어 연철돼 '모기' 그리고 그 다음은 '을'과 결합돼 발음되면서 '미기'로 변했다. 우리말은 뜻글자가 아니고, 소리글자이기때문에 음운변화가 아주 자유롭다. '아, 어, 오, 우, 으, 이' 등 모든 모음간에 호환성이 매우 뛰어나다. 대화당사자간에 소통만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음운변화가 이뤄진다고 할 수 있다. 신일동에 들판이름인 '시알들'에서 '시알'이 '새일'에서 비롯됐다면 무슨 새뚱맞은 얘기냐고 할런지 모른다. '새일'이 모음교체가 이뤄져 '시앨'이 되고 자연스레 '시알'이 됐다고 풀이된다. 어느 땐 '이'모음역행동화, 순행동화가 이뤄져, '아','어'가 '애','에'가 되고 어느 땐 발음하기 편하게 '아'나 '어'로 되돌아간다. 이처럼 우리 말은 한마디로 자기멋대로 변화해간다면 지나친 언사일까? 같은 의미의 말이 지역마다 달라 수많은 방언을 양산해 내는 게 우리말의 대표적 특징이다.
이어 을미기장고개유래비앞을 지나 신대저수지(을미기방죽)유래비앞에 잠시 멈췄다. 신일동은 예전에 신대동의 한 지역이었다. 제4공단이 들어서면서 분동(分洞)돼 신일동으로 독립했다. 마지막으로 큰 도로가에 서있는 문평동유래비를 읽어보는 것으로 우리의 답사를 마쳤다.
첫댓글 "땅이름(지명)에 배어있는
당시 환경, 배경, 땅이름의 변화과정,
그리고 옛사람들의 삶의 모습, 생각 등을 그려본다" 라는
글을 다 읽고나니 느끼는 점이 많아지네요.
많은 공부하고 갑니다..
잘 보고합니다.
선바위가 바위가 섰다해서 선바위라는 명칭이네요
신탄진에 새일초등학교가 있는데 새일이란 뜻을 잘몰랐는디 새여울이란 이쁜 이름이었네요
신탄진의 마을 이름을 이제사 상세하게 알게 되었으니 과연 향토사 보람이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