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을 찾아랏'이란 영화가 있다. 서울시내 전역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무차별적으로 발생하고 범행현장에서 이소룡을 상징하는 표식이 발견되자 범인을 잡기 위해 언더와 오버를 넘나드는 락 그룹 크라잉넛이 전격 출동해 음악과 더불어 이런저런 무용담을 펼친다는 줄거리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짜깁기한 이 작품을 나는 아직 실제로 대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생각하자마자 다짜고짜 서세원과 이수만이 연상되니 거참 신통한 노릇이다.
눈치 빠른 축이라면 이쯤에서 무얼 말하고자 함인지 단박에 짐작할 게다. 검찰이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한 연예비리 커넥션마다 서세원과 이수만 두 사람의 이름이 약방에 감초 격으로 자주 등장하곤 한다. 영화 속 가상세계에서는 크라잉넛의 맹활약으로 살인범이 검거되지만 현실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이수만과 서세원의 행방을 탐문해도 종적이 묘연하니 실로 괴이하지 않을 수 없다.
사업체의 규모와 경영방식에서 이수만의 SM엔터테인먼트와 서세원의 세원프로덕션 사이에는 대형 편의점과 간이복권판매소에 비견될 정도의 엄청난 격차가 가로놓여 있다. MBA 소지자들의 트레이드마크인 치밀하고 지능적인 돈놓고 돈먹기 식의 야바위 게임보다는 NBA 농구의 호쾌하고 화끈한 슬램덩크 놀이에 환호하는 나로서는 부득불 서세원에 초점을 맞춰야 하겠다.
강남 모처에서 서세원이 은닉한 것으로 짐작되는 다량의 기밀장부를 검찰이 압수했는데 핵심적 내용은 이미 빼돌린 것으로 보인다는 뉴스보도에 그저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혹여 그가 정치를 하려고 차근차근 비자금을 축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하는 맹랑한 의심마저 들었다. 무대 전면에 쏟아지는 조명이 휘황찬란하고 눈부실수록 무대 뒤의 광경은 더더욱 음습하고 구리다는 속설이 여지없이 입증된 사례였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현재 서세원은 홍콩에 잠적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검찰에 포착된 혐의점의 무게는 시민단체에 의해 퇴출대상 프로그램 영순위로 지목된 서세원쇼 덕분에 쏟아지는 비판과 구설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팬들의 비난과 욕설쯤이야 소나기 피하듯 잠시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가 친분 있는 스포츠신문 기자나 방송국 PD 떨이 쳐 얼렁뚱땅 대충 반성하는 시늉 내다 슬그머니 방송계 복귀하면 그만이니 그리 대수롭지 않다. 그러나 검찰이 던지는 오랏줄에 걸리면 옴짝달싹 못한 채 사법처리를 면하기 힘들다. 사법처리란 은유적 표현이고 시쳇말로 콩밥을 먹어야 한다는 소리다.
정치든 경제든 스포츠든 연예든 한국에서 잘 나간다는 인물들은 평상시 세도에 어울리지 않게 조금만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너무나 간단하고 허망하게 대책 없이 나자빠진다. 평소의 위세와 당당함은 온데 간데 없이 포승에 묶여 초췌한 몰골로 구치소로 향하기 십상이다. 물론 대부분 솜 방방이 형량이나 본말전도된 사면복권 등의 각종 법률적 혜택을 받아 곧 여봐라 하며 감방문을 나서는 것이 부지기수이지만 죄값을 치러야 하는 그 순간만은 인간적 연민을 자아낼 만큼 비굴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다.
당당하게 자진 출두해 처벌받지 못하는 비겁한 도망자 심리기제의 밑바탕에는 잘못을 인정하지도 뉘우치지도 않는 몰상식과 파렴치함이 똬리를 틀고 있다. 대통령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동행명령에 뻔뻔스럽게 불응하는 두 전직 대통령의 철면피함과 수사망이 좁혀오자 제각각 홍콩과 LA로 도주한 서세원과 이수만의 사고의 밑바탕에는 죄과를 수긍하거나 반성하지는 않으면서도 처벌만은 한사코 두려워하는 그로테스크한 이중심리가 깔려 있다고 분석된다.
자신의 행위가 사리에 합당했으며 단죄가 억울하다고 판단되면 몸에 추 하나 더 달린 피조물답게 당당하게 조사에 응해 수사의 부당함을 국민에 호소하는 것이 사나이의 도리다. 피할 데는 있어도 숨을 곳이 없는 것은 사각의 링뿐만이 아니다. 당대에서도 역사에서도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궁극적으로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땅에 머리를 박은 어리석은 꿩은 자기 눈에 매가 보이지 않으니 매도 꿩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내가 만약 서세원의 절친한 측근이었다면 코디미계의 대선배인 이주일씨의 장례식에 참석한다는 핑계를 보호막 삼아 급거 귀국할 것을 종용했을 게다. 우리나라의 법체계가 직접 경험해보면 참 기묘하고 재미있다. 법전을 뒤적이며 근엄하게 심판대에 앉아있는 판사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의자의 태도에 따라 온정주의적 성향이 다분히 감지된다. 천인공노할 흉악범이나 구제불능의 중죄인이 아닌 이상, 이른바 개전의 정을 약간만 비추기라도 하면 방망이 두들기는 법봉 소리부터 판연히 달라진다. 그렇다고 죄짓고 참회하면 무조건 용서해 준다는 뜻은 아니니 절대 오해하지 마시라. 이 부분 노약자와 임산부, 그리고 미성년자들은 특히 유의하시라.
살아있는 자보다 죽은 이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한국인이 보편적 정서다. 서세원이 작고한 이주일씨의 빈소에 조문을 하거나 영결식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나라로 돌아왔다면 그토록 두려워하는 인정사정 없는 법의 단죄는 충분히 모면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주일씨 영정 앞에서 눈물 흘리는 서세원-최악의 경우 그것이 악어의 눈물이었다 하더라도-의 감동적이고 인간적인 면모에 그에게 적대적이던 시청자들의 여론은 우호적이고 따뜻한 방향으로 급선회했을 테고, 민심의 흐름에 민감한 사법당국 역시 지극히 온건하고 절제된 처리방침을 채택했을 것이다.
'생즉필사 필사즉생'의 고색창연한 사자성어를 굳이 되뇔 필요 없이 절박한 위기에 의연히 맞설 때 의외의 활로와 돌파구가 열리는 법이다. 살아날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 버린 서세원의 경우는 '운때가 다했다'는 형용어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겠다. 서세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인간군상들이 한국사회에는 수두룩하게 포진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전두환 노태우가 그렇고, 병역비리 공방이 가열되는 와중에 당사자이면서도 시치미 뚝 떼고 잠수 타고 있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인 정연·수연 형제도 마찬가지다.
TV 출연시기만 따지자면 고 이주일씨와 서세원의 데뷔시점은 거의 유사하다. 나는 이택림과 명현숙(나중에 임예진)이 진행했던 문화방송 '영 일레븐' 시절의 패기만만한 청년 서세원이 그립다. 도맡은 꼭지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으레 자기 머리에 반짝이 금박종이를 뿌리며 나타나곤 했던 그의 출현 세리모니는 학급 오락시간이면 개구쟁이 악동들이 항상 오마주한 불멸의 고정 레퍼토리였다. 20대 중반의 더벅머리 신인개그맨 서세원이 팬들에게 선사했던 참신한 아이디어와 몸을 사리지 않은 코미디 연기의 순수한 초심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그런 도전의지와 개척정신이 있었기에 '납자루떼'의 참담한 패배를 딛고 화려하게 재기한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