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유고시집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그 집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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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 / 박경리 눈이 온전했던 시절에는 짜투리 시간 특히 잠 안 오는 밤이면 돋보기 쓰고 바느질을 했다 여행도 별로이고 노는 것에도 무취미 쇼핑도 재미없고 결국 시간 따라 쌓이는 것은 글줄이나 실린 책이다 벼개에 머리 얹고 곰곰 생각하니 그것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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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잘하는 사내 / 박경리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왜 울었을까 홀로 살다 홀로 남은 팔십 노구의 외로운 처지 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 저마다 맺힌 한이 있어 울었을까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 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 누구나 순리에 대한 그리움 그것 때문에 울었을 거야 
산골 창작실의 예술가들 / 박경리 멀리서 더러 보기도 하지만 방 안에서도 나는 그들을 느낄 수 있다 논둑길을 나란히 줄지어 가는 아이들처럼 혼신으로 몸짓하는 새 새끼처럼 잔망스럽게 혹은 무심하게 머물다 가는 구름처럼 그들은 그렇게 내 마음에 들어오는 대상이다 회촌 골짜기를 떠나 도시로 가면 그들은 어엿한 장년 중년 모두 한몫을 하는 사회적 존재인데 우습게도 나는 유치원 보모 같은 생각을 하고 모이 물어다 먹이는 어미 새 같은 착각을 한다 숲 속을 헤매다 돌아오는 그들 식사를 끝내고 흩어지는 그들 마치 누에꼬치 속으로 숨어들 듯 창작실 문 안으로 사라지는 그들 오묘한 생각 품은 듯 청결하고 젊은 매같이 고독해 보인다 
밤 / 박경리 밤이 깊은데 잠이 안 올 때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했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방 수술 후 뜨개질을 접어 버렸고 옷 짓는 일도 이제는 눈이 어두워 재봉틀 덮개를 씌운 지가 오래다 따라서 내가 입은 의복은 신선도를 잃게 되었는데 십 년, 십오 년 전에 지어 입은 옷들이라 하기는 의복 속에 들어갈 육신인들 아니 낡았다 어찌 말하리 책도 확대경 없이는 못 읽고 이렇게 되고 보니 내 육신속의 능동성은 외친다 자꾸 외친다 일을 달라고 세상의 게으름뱅이들 놀고먹는 족속들 생각하라 육신이 녹슬고 마음이 녹슬고 폐물이 되어 간다는 것을 생명은 오로지 능동성의 활동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은 보배다 밤은 깊어 가고 밤소리가 귀에 쟁쟁 울린다 
인생 / 박경리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등교하려고 집을 나서면 가끔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조막만 했고 입을 굳게 다문 노파였는데 가랑잎같이 가벼워 보였으며 체구는 아주 작았다 언덕 위 어딘가에 오두막이 있어 그곳에서 혼자 기거한다는 것이었다 지팡이를 짚으며 그가 지나간다 하루도 그러지 않고 밥을 빌어먹기 위해 노파는 이 길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작량을 잘 했으면 저 꼴이 되었을까 젊었을 적에는 쇠고기 씹어 뱉고 술로 세수하더니만 노파 뒤통수를 향해 그런 말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젊었을 적엔 노류장화였던걸까명기쯤으로 행세했던 걸까 노파는 누가 뭐라 해도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지팡이로 길을 더듬으며 내려가던 뒷모습몰보라는 이름의 노파 
어머니 / 박경리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 여 년 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 나가는 듯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서 이렇게 나를 놓아주지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바람 / 박경리 흐르다 멈춘 뭉게구름 올려다보는 어느 강가의 갈대밭 작은 배 한 척 매어 있고 명상하는 백로 그림같이 오로지 고요하다 어디서일까 그것은 어디서일까 홀연히 불어오는 바람 낱낱이 몸짓하기 시작한다 차디찬 바람 보이지 않는 바람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뚫고 지나가는 찬바람은 존재함을 일깨워 주고 존재의 고적함을 통고한다 아아 어느 始原(시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일까 -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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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 Wagner Chor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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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잠시머물며 마음으로 담아갑니다
건강하세요..........
봄날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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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신 발길 감사 합니다
늘 건강 하시어 좋은글
좋은 詩로 활동하심
돋 보이십니다
고맙습니다 앞산 마루님^^
항상 건강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