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8년엔가 이곳에 올렸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 절절한 마음으로 썼던 사부곡(思父曲)인데
요 며칠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자꾸 나서... 현재의 삶방 가족들 중에는 그때 이 글을 안 읽으신 분들이 훨씬 많으시기에
이른 새벽에 이곳에 다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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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국민학교 4학년 1학기를 통째로 안 다녔습니다.
왜 그랬냐 하면...
1971년 2월 경, 3학년 마친 봄방학 중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엄마랑 아버지가 자주 심하게 싸우셨어요.
두 분 사이가 많이 나빠졌었던 그 이전의 몇 달 동안
저는 지옥을 헤메이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하늘이고 엄마는 땅인데
두 분이 언성 높여 다투시고 밥상이 내동댕이쳐지던 그 상황은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제게
하늘도 무너지고 땅도 꺼져들어가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는 집을 나가셨습니다.
엄마의 유일한 희망, 하나 뿐인 자식인 저를 데리고...
짧은 늦겨울해가 기울어버린 초저녁 아버지 귀가시간 전에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들고 엄마는 제 손을 잡고 집을 나서셨습니다.
엄마와 저는 그날 밤에 서울역 근처의 여관에서 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관 천장에 매달려있던 알전구와
흰색의 양은 쟁반 위에 올려져 있던 노란 양은 주전자가
지금도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릅니다.
동틀 무렵 엄마와 저는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행선지는 전남 담양군 봉산면 마항리.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지명입니다.
(어느날 그 동네가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행정지명으로서의 마항리는 현재 없고 자연부락 지명으로만 남아있습니다.)
그곳은, 겨울철에 우리 집에 드나들던 소쿠리 행상 아주머니의 동네였습니다.
엄마는 무작정 그 멀고 낯선 시골로 제 손을 잡고 떠나셨습니다.
현재의 저보다 훨씬 젊으셨던 당시의 엄마의 심정을 나이든 제가 지금 헤아려보노라니
제 가슴 밑바닥에 모래바람이 서걱입니다...
엄마와 저는 아마도 광주까지 기차로 간 뒤 시외버스를 타고 그 마을까지 갔을 터입니다.
기차 안에서의 일은 떠오르지 않으나
버스에서 내렸을 때 어린 마음에도 그 막막하던 심정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질녘.
텅 빈 겨울 들판에 우리 모녀를 내려준 버스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떠나버리고
처음 보는 낯선 풍경 앞에서 저는 제 나름대로 막막해서 엄마에게 철없이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엄마, 저 버스가 우리를 버리고 간 것 같아..."
겨울철 장사를 마치고 농사를 준비하며 집에 머물던 그 광주리 장사 아주머니는 우리 모녀가 나타나자 깜짝 놀랬습니다.
엄마가 농담처럼, 남편하고 못살겠으니 나 거기 가서 살까, 주소 좀 알려줘요... 하셔서 가르쳐는 주었으나
진짜로 나타나니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시절, 그 옛날이라서 그 인심 좋은 아주머니는 아래채 빈 방 하나를 우리 모녀에게 내 주었습니다.
그 집은 본채엔 전기가 들어와 있었으나 우리에게 내준 아래 채에는 전기 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없고 있더라도 켤 수도 없고
읽던 책 다 두고 와서 읽을 거리 한 권 없는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는 정말 지루했고
밤이 되면 촛불을 밝힌 방에서의 어둠은 참 짙고도 길었습니다.
동네의 또래 아이들이 서울내기 왔다고 관심을 보였지만
혼자 자라서 혼자 노는데 익숙했던 내겐 낯선 아이들과의 놀이는 이내 시들했습니다.
박혜령이라는 꼬마 가수가 부른 '검은 고양이 네로'라는 노래가 인기를 끌던 무렵이었는데
그 노래를 제가 불렀더니만 자꾸만 다시 불러보라 하는 통에
수없이 그 노래를 불러댔던 일이 생각납니다.
겨울의 끝자락에 도착했던 그 마을에서 이내 봄맞이를 했습니다.
신학기가 되어 다른 애들은 다 학교에 가는데 저는 집에만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전출입이 아니니 그곳 학교에 전학을 시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공부해야 할 아이를 집에서 놀릴 수는 없으니 어찌 어찌 해서 학교에 들어는 갔습니다.
하지만 그 학교에서의 공부는 채 일주일을 못갔습니다.
천만 뜻밖에도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든 엄마는,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도 이곳 주소를 아버지께 알려준 이모 원망을 많이 하셨습니다.
밤이었습니다.
촛불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방안에서 엄마는 아버지의 편지를 꺼내셨습니다.
그 편지의 수신인은 저였습니다.
엄마는 편지를 제게 보여주시지 않았지만 펼쳐드신 편지지에 촛불 빛이 비쳐서
투박한 아버지의 낯익은 필체는 편지지 뒷면을 통해 좌우가 바뀌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보기싶은 내 딸아'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보기싶은 내 딸아,
보기싶은 내 딸아...
경북 사투리를 쓰시던 우리 아버지가 적으신 그 일곱 글자는
그때까지 아버지 생각은 별로 하지 않고 지내던 제 가슴을 느닷없이 칼날처럼 후벼팠습니다.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나를 보고 싶어하시는구나...
엄마랑 나랑 도망을 가서 울 아버지 많이 속상하신가 보다.
내가 보고 싶으시다는데, 어쩌면 좋아?
내가 도망가서 울 아버지를 속상하게 해드렸네, 어쩌면 좋아?
이내 솟구쳐 오르는 눈물이 제 얼굴을 적셨습니다.
그 뚜렷한 통증은, 내 열한 살 인생에서 최초로 느낀 통렬한 죄책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그 감정은 지금까지도 아프게 내 안에 살아있습니다...
날이 밝자 엄마는 또 짐을 싸셨습니다.
미구에 아버지가 들이닥쳐서 저를 빼앗아 가실까 두려우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다니던 학교엔 아침마다 아버지가 교문에서 기다리신다는 이모의 전갈이 있었기 때문에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는, 저를 아버지께 뺏기기보다 학교에 안 보내는 쪽을 택하셨습니다.
서울 남산 밑의 어느 동네 허름한 단칸방에서 그렇게 저는 봄과 여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7월 초순 무렵에 엄마는 저만 집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저를 더 이상 학교에 안 보낼 수도 없고 실질적으로 닥치는 경제적인 문제도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저를 포기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보시자 우셨습니다.
아버지가 해 주시는 밥을 먹으며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직전부터 다시 학교엘 갔습니다.
한 학기를 통째로 빼먹고 나니 다른 과목은 다 따라가겠는데 산수는 헤메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처지기 시작한 산수가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내내 지겨운 수학으로 번번이 제 평균점수를 깎아내렸습니다.
훗날 철들고 난 뒤 한 학기를 통째로 못 다니게 만든 그 시절 엄마의 파격적인 선택을 원망한 적도 있었으나
그것이 그 당시 엄마의 제게 대한 절실한 사랑법이었음을 이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엄마가 저를 두고 혼자 나가셨더라면, 그 상처를 어린 제가 감당하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그렇게 아버지하고만 산 것이 3년 정도.
제 국민학교 졸업사진엔 독사진과 친구랑 찍은 사진뿐입니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못 오시고 엄마 대신 오신 이모는
몹시 춥던 그 날 제 이종사촌 동생이 오줌을 싸서 바지가 어는 바람에 졸업식 중간에 가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입학할 무렵에 엄마는 오랜 불화를 접고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우리 집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으나
금간 부분을 봉합만 했을 뿐, 두분은 이전의 금슬을 회복하시지 못했습니다.
묵묵히 가족을 부양하시는 아버지와 나는 너 하나 바라보고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는 엄마 사이에서
사춘기를 통과하는 저는, 엄마를 미워하고 아버지를 동정하는 편에 섰습니다.
'애증(愛憎)이란 낱말을 그 때 배웠습니다.
제게 대한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알지만,
블쌍한 아버지께 냉담한 엄마의 고자세는 이해할 수 없었고 원망스러웠습니다.
나는 자라서 저렇게 살지 않을거야...
혼자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더랬습니다...
그 아버지는 저 대학 2학년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 엄마는 제가 결혼한 뒤에도 저랑 함께 사시며 외손녀 셋 다 키워주시고
2019년 1월에 93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아버지!!
잊고 지냈던 아버지가 요 며칠 새 못견디게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어제 그제 저 혼자 훌쩍 훌쩍 울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그 야위신 마지막 모습을 봬면서,
아버지는 피와 살을 다 제게 주고 가셨다는 생각에 전율하며 정말 마음 아팠었는데...
그 후로도 오랫동안, 엄마도 저와 제 딸들에게 피와 살을 다 주시고 가셨다는 생각에 또 가슴이 메어집니다.
아버지...
보고 싶어요...
우리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가 이땅에 남기고 가신 단 하나의 혈육이, 그 사랑을 기억하며 이 글을 아버지 영전에 드립니다...
울 엄마도
계를 3번 실패후
쫏겨나서 사시다가
60갖 넘기시며
돌아가셧어요
효도도 못하고
오랜동안 혼자살면서는 미안해서 산소도 못갓엇구요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그 시절엔 어느 동네에서나 어떤 계가 펑크났다는 소식이 수시로 들렸지요.
제이정님 어머님의 삶도 참 마음 아프네요.
우리네 어머님 세대엔 한 분 한 분 사연도 많아요.
공감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저에겐 지금이 아침입니다 ^^
일 시작전 글을보면서
마음이 찡합니다
과거를돌이켜보면 마음이 아프고 추억이되지만
이렇게 용기있는글은 님의 마음씨를볼수있네요
다만 지나온추억을 회상함은 지금의평화로운일상이 보상일겁니다
지금행복해서 올리신글로 생각되서 훈훈합니다
어머님도 장수하셨고 아버님도그시절 평균수명이라 생각됩니다
동시대에사셨던 저의 부모님은 오래사시지못해 항상 저에게 무거운마음이라
그래도 조그만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
나도 남자인관계로 아버지에향한 애정글은
역시 딸이좋은것같습니다 ㅎㅎ
여린마음의 글을보니 참 스마트하고 좋은분으로느낍니다 ..........
댓글달고 하루 시작합니다 ^^~
좋은하루시작하세요^^
퍼니맨님은 해외에 계시군요.
장문의 댓글 감사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셨고
저는 우리 아버지 49세, 우리 엄마 34세에 얻으신 단 하나의 혈육입니다.
아버지가 1981년도에 69세에 돌아가셨으니 아주 단명하시진 않으셨지요.
엄마는 중년 이후 늘 편찮으셔서 늘 한 움큼 씩의 약을 드시곤 하셨는데
그래도 제 아이들 다 거둬주시고 93세까지 장수하셨어요.
저의 현실은 그냥 하루 하루가 단조롭지만 평안합니다.
늘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려고 노력하지요.
퍼니맨님 공감의 말씀 감사합니다!
@달항아리 아닙니다 ㅎ
서울토박이입니다
아침은 게을러서 늦게시작합니다
지금이시간에도 안자고 있으니 올빼미족입니다 ㅎㅎ
그시절 우리에모든분이 다어려웠죠
저도 5형제에 막내라 항상 부모님이 힘들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은 고혈압으로43에돌아가셨죠
아버님은 재혼을 안하고 5형제아들을 키우고 73세 돌아가셨지요
그래서 저도 아버님에 대한 사랑이 큽니다
어느덧 형님들도 전부 떠나시고 저혼자 됐네요
집안이 단명한편이죠
늦은밤 편한밤 되세요^^
달항아리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내 딸에게 어떤 아빠였나 생각합니다.
딸아이의 동생인 아들 녀석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다 보니
자연 큰 아이에게 신경이 덜 쓰이게 되어, 많이 외롭고 힘 들었을 텐데도
잘 자라주고, 지금은 또 한 아이의 엄마로 잘 살아주고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지금, 딸아이의 얼굴을 떠 올리며, 달항아리님께 그 시절 잘 이겨 내 주어서 고맙다고 토닥여 드립니다.
산애 오라버님의 따님은 아버지를 닮아 아주 예쁘고 귀티가 날 것 같아요.
삶방 모임 때 데리고 오셨던, 눈빛이 맑은 아드님 모습도 기억나고
자애롭게 아드님을 챙기시던 오라버니 모습도 떠오릅니다.
따님이 가정 이뤄 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든든하실까요.
오라버니도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늘 제게 좋은 조언 해주심에 많이 감사드립니다!
언젠가 달항아리님 만나면 하고픈 말들이 많을 것 같아요.
딸을 보고싶어 하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일 평생 못 잊고 그리워하는 딸..
저와 똑같아서 눈물이 납니다.
저희 엄마도 오래 사셨으면 제 두 딸을 다 키워주셨을텐데요.
글정이 담뿍 든 우리 베리님,
실제로 대면한 횟수는 두 번에 불과하지만
성장한 환경에 동질감을 느끼다 보니 더욱 가깝게 느껴지지요.
베리님은 저보다도 훨씬 더 어릴 때 아버님을 여의셨으니 그리움이 더욱 크시겠지요.
두 분 부모님께서 천국에서, 두 딸 잘 키운 베리님을 얼마나 흐뭇하게 내려다 보고 계실까요?
우리 베리님 공감의 댓글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너무 반듯하고, 푸근하고,넉넉한 달항아리님...
지는요~~
울 딸들에게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용솟음
치는데...
글 읽고 난후 달항아리님도 사랑해야 할것
같은 맘이 듭니다.
잘살고 있어서 얼마나 이쁜지...^*^
여성방 송년 모임에서 도마 언니 만나 얼마나 반갑던지요!
하나도 안 변하신 모습, 몇 년 전에 딱 한 번 모임에서 만났던 것이 다인데도
마치 어제 보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되었지요.
부족한 저를 늘 좋게 봐주시고 예뻐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차카게 살렵니다. ㅎㅎ
아이코
그 때도 지금도 여전히 먹먹합니다ㆍ
그런 가운데에서
어쩜 그렇게
생각기둥이 단단하고 옳바르게
커 갔을까요
달샘을 보면
부모님이 어떤 분이란 걸
가늠이 갑니다만
그 청아한 웃음소리는
누굴 닮았나요
그 게
궁금했는데
몇 년만에야 물어보게 되네요
장해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1.04 21:00
성의 이 질문을 받고 생각해보니..
우리 엄마도 아버지도, 생전에 소리 내어 크게 웃으셨던 기억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것이 또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다혈질인 성품과 노래 부르기를 즐기는 성향 등이 딱 엄마를 닮았고
웃음 소리가 큰 편인 것은 돌연변이인갑소.. ^^
봄날은 간다, 그 노래가 말이예요, 울 엄마 애창곡이었어요.
다음에 우리 성이 그 노래 부르는 거 듣게 된다면 나 울 것 같네..
지금 양양의 리조트에서 남편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이러고 댓글 숙제 중이예요.
늘 고마우신 우리 성, 사랑해요, 평안한 밤 되시어요!
가슴 아리게 하는 생생한 글에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립니다
달항아리님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애틋함 그 맘 조금은 알것같아요
아버지 조금 더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텐데ㅠㅜ
어머니의 마음도 이해되고 아버지의 측은한 어깨도 안쓰럽고....
달항아리님 고생하셨습니다
그래도 반듯하게 멋지게 잘 자라서.... 지금까지 오셨으니
이제 가족들과 행복만 누리시면서 사십시오
글 감사합니다
이렇게 따뜻한 말씀으로 위로 받으려고
주저리 주저리 제 속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나 봅니다.
우리 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사셨더라면
제가 졸업하고 발령 받아서 첫 월급 타는 거라도 보고 가셨더라면..
아버지 빈소에 들어선 조문객들이
뽀송한 눈으로 들어왔다가 상주라고는 달랑 저 하나 있는 것을 보고는 다들 눈물을 훔쳤더랬지요.
둥근해님, 따뜻한 공감의 댓글 감사합니다!
엄마 아빠의 이야기
아빠에 대한 그리움의 글
사각한다는 감정표현의 글 어찌그리.
울림을 줄까요~~
애증이란 이런 맘일꺼야 그런맘으로
달항아리님의 글 잘 감상하고 갑니다 ^^
늘 이 쉼터를 가꾸시기에 여념이 없으신 지인 운영자님,
이렇게 댓글로도 찾아와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수 만 명의 회원들을 아우르시기에 부족함이 없으신 지인 운영자님의 큰 그릇에 늘 감탄합니다.
공감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어요. ^^
담담하게 써내려간 글에... 여러 감정이 교차되네요. 불행과 행복 사이에 다행이 있다더니
와중에 두 분에겐 더없이 소중한 따님이 있어서
지탱하셨을겝니다.
사부곡에 회한의 눈물을 흘렸을 그 심경에
마음이 쓰입니다.
잘 자라셨으니 보람이셨을 겁니다.
잘했어요~ 그렇게 풀며 사는겁니다~
우리 이쁜 몽연님, 크루즈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불행과 행복 사이에 다행이 있다!
KNY 어록에 추가요. ^^
나는 집에서는 어쩔 수 없이 조용한 애였는데
학교와 교회에서는 밝고 명랑하게 잘 지냈어요.
제게 주신 우리 부모님의 사랑 덕분이니 참 감사하지요.
그래요, 우리 속의 말들 이렇게 풀며 서로를 더 알아가며 서로 다독이며 지내요.
항상 고마워 하는 거 알지요?
위의 아느 분의 말씀처럼
소설 한 편을 읽은 듯 합니다.
막힘없이 술술 읽어지는 글속에
아버지도 어머니도 어린소녀도
선명히 떠오르네요 ~ 부모님의
지대한 사랑, 소녀의 부모님에 대한
애증, 부모님간의 갈등...그리고 그리움..
철철 넘치셨던 부모님의 사랑이,
오늘의 사랑많고 상냥한 달항아리님을
탄생시켰군요 ~휼륭하신 부모님께
제가 감사드려야할 듯 합니다 ~~
다른 분의 사부곡이나 사모곡을
대힐때면, 어김없이 내 엄마 아빠생각이
차올라서 눈물콧물울 빼곤하는데,
오늘 달항아리님의 사부곡은 온전히
그안에 침잠하게하네요..소녀의 마음이
이입되어 석류알처럼 가슴이 탁탁
쪼개졌습니다...
이쁘고 사랑스런 달항아리님,
지금 넘나 예쁘게 살고계시고
넘나 행복하게 살고계시니,
바라보는 마음이 마냥 행복합니다.
사랑과 존중과 감사를
그대에게 한아름 드리며,
행복하고 또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사랑합니다 ~^^
언제나 원글보다 더 빛나는 댓글을 써주시는 우리 귀한 언니,
오늘도 댓글 창에 감동이 메아리칩니다. ^^
트롯방 번개 잘 다녀오신 거, 예쁘신 모습 사진으로 봤어요.
가족 여행 가는 날 아침에 갑자기 이 글을 올리고 싶어서 올렸네요.
풍족한 환경에서 자녀를 키우시며 엄격함과 자애로움을 적절히 베푸신 언니의 부모님은 정말 훌륭한 어버이셨지요.
그 부모님께 받으신 사랑을 언니가 또 제게 베푸시니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오늘도 고마우신 언니의 과찬에 몸둘 바를 모르며 인사드리고 물러갑니다.
사랑합니다~~~^^♡♡♡
아이고 이를 어쩌면 좋아요.
우리 엄니 아부지도 면에서 유명한 쌈박질댁이었습니다.
모내기하다가 온동네 사람들 팽개치고 몸빼 걷어 부치고 도망가는 엄니를
상욕을 해가면서 쫓아가는 우리 아부지.
하루라도 싸우지않으면 살 수가 없었던 우리 엄니 아부지.
식모살이하러 서울로 가신다는 말을 곤백번 들어가며 유년기를 보냈지요.
말뿐이고 모질지 못하신건지 용기가 없어서인지
우리곁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사는것이 지옥처럼 느껴서 아부지가 돌아가시면
눈물 한방울도 흘리지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더군요.
그래도 곁에 있어주기를 바랬나 봅니다.
통곡을 하시더군요.
달항아리님과 어머님을 내려놓고
흙먼지 날리며 무정하게 떠나가는 버스 생각에 눈물이 핑~ 돕니다.
늘 제게 다정하신 가리나무님!
그랬지요, 그 시절의 우리네 삶에서는 그런 장면 흔히 봤지요.
남남이 만나 가정 이뤄서 평생을 함께 산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일까요.
우리 6촌 동서도 맨날 남편과 싸우고 원수처럼 지냈는데
그 남편이 어느 날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리 섧게 울더라고요.
그리고 살아 생전 정없어 보이던 그 남편을 지금도 그렇게 그리워해요.
공감 능력 뛰어나시고 정도 많으신 가리나무님,
이번 일본 지진으로 피해는 없으시겠지요?
늘 평강 속에 지내시기 바라며 항상 감사드립니다!
지나간 세월속의 행복하지 못했던 날들의 기억을 풀어내셨군요~~~
달 항아리님 !
잘 살아 내셨습니다
같은 신앙 안에서 반갑고 든든한 고들빼기님 감사합니다.
제 어린 시절은 물 속 같이 고요한 집안에서 왁자지껄한 기쁨은 못 누렸어도
학교나 교회에서는 나름대로 기 죽지 않고 씩씩하게 잘 지냈습니다.
어서 빨리 나이들어 어른 되고 싶어 조바심 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제 자신이 스스로 애틋하여 마음이 찡하지요.
오늘도 은혜 가운데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힘든 유년기의 시절..
잘 이겨내셨네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더 실감나게 읽었습니다.
모두 돌아 가신 후 제가 그 자리에 서 있으니..
세월의 무상함도 느끼고..
부모님의 자식 사랑에 대해서도 많이 느낍니다.
부모님을 그리워 하는 달 항아리님의 애절한 글..
잘 읽었어요.
자수성가하신 김포인님에게도 저와 비슷한 성장기의 애환이 있으셨군요.
그럼에도 오늘날의 멋진 가장이요 성공한 사업가로 우뚝 서셨으니 존경스럽습니다.
김포인님이 쓰신 지난 글들을 찾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잊고 지내던 부모님이 문득 떠오를 때면
가슴 한 켠에서 묵지근한 통증이 느껴집니다.
저는 연로하신 우리 엄마께 살갑지 못한 딸이었는데
제 딸들은 얼마나 살뜰하게 사랑을 주는지,
위로도 빚쟁이 아래로도 빚쟁이가 된 듯합니다.
늘 따뜻한 말씀으로 공감해주심 감사합니다!
저는 왜 이글을 처음읽죠?
보고나니 마지막부분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납니다 11살 초등4학년 우리집 큰애의 심정이 되어 읽으니 더 막막하고 두려웠을거 같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착한사위랑 금쪽 같은 손녀 셋이랑 행복하게 살다가셨는데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요 하나뿐인 그딸을 표현은 못하셨더라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셨을까
우리 친척애도 11살에 엄마가 버리고 가고 형제도 없이 할매랑 날마다 술에 쩔어사는 아버지랑 너무너무 불쌍하게 자랐어요
사관학교 출신 군장교를 소개시켜줘도 행여 술많이 마시는 빡씬 남자일까봐 피하고 교회에서 만난 양처럼 순한 남자랑 결혼했어요
그결혼 제가 완강하게 반대했어요 남자가 직업이 뚜렷하게 없었거든요 그군인은 결국 지동기랑 결혼했는데 현재 해군대령이며 공교롭게도 우리집 윗층에 살아요 저는 보면 아깝지만 우리는 서로를 모릅니다
다행히 남편은 정말 착한 남자라서 지가 휘두르며 사니 지엄마 인생이랑은 정반대이지요
그애딸이 올해 진주 부산 교원대 다붙었어요
도쌤 얘기에 뿌연 눈으로 제 얘기만 했네요
하필이면 11살때라니까 큰애와 친척애 엄마가 버리고 갔을때 나이랑 같아서 눈물났어요
오늘날 교장사모님으로 천재딸을 둔 엄마로 사시니 좋아하실거예요
저 위에 이젤님 답댓글로도 썼지만
우리 엄마가 저 결혼시키시고 함께 사신 오랜 세월은 결코 행복하지 않으셨어요.
우리 애들이 어릴 땐 육신이 고단하셨고
(막내는 엄마 연세 70이실 때 낳았기에 앞집 집사님께 수고비 드리고 맡겼었지만)
애들 다 큰 후엔 넓지도 않은 집안에서 엄마 방만 외딴 섬인 양, 그렇게 외로우셨습니다.
저는 엄마랑 성격적으로 안 맞았고
엄마랑 사위도 잘 맞질 않는데
그럼에도 한 집에서 오래 함께 산 세월이 많이 힘들었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뒤 제가 엄마를 서운케 해드린 숱한 일들이 정말 마음 아팠으나
보내 드린 후 너무 쉽게 잊어버린 제 자신이 스스로 가증스러웠어요ㅠㅠ
몸님 내외분은 참 살가운 막내 아들이요 며느님이셨지요.
어머님 보내드리고 진정으로 애도하며 그리워하시는 글들을 읽으며
정말 효자요 효부이심에 감동했더랬어요.
장문의 공감 댓글 감사해요.
몸님 글이 없는 삶방은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오랜 팬이 또 한 번 감사드리고 갑니다. ^^
글을 읽고 길게 썻다가 지웟습니다.
위에 뎃글이 모두 저의 맘과 같기에 더 이상 덧붙히는 건 중언부언이 될 것 같아서요.
달항아리님의 사부곡
가슴아프면서도 감동입니다.
아름다우신 리진님, 실물을 대면하고 소통하고 싶은 분들 중 한 분이신데
내일 월드팝 모임에서 만나게 되니 기대가 큽니다.
참 지적이고 단아하신 분 같아요.
우리 나이까지 살아온 이들의 삶은 각자가 다 한 편의 소설,
다들 여태 살아낸 세월을 스스로 치하해도 된다고 여깁니다.
오래도록 건강만 하십시다.
내일 반갑게 뵈어요. ^^
@달항아리 노래는 못하는데도 가끔 참여합니다만
전혀 아름다운 사람은 아니에요.
내일 오시면 싫망이 클것입니다.
제가 전체적으로 작아서 사진은 실물보다 조금 잘나오는 편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옛말.
내 나이 만큼 늙어가는 중이랍니다.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봐 걱정입니다.
우야든동 내일 반갑게 만나요.
달항아리님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 쓴 이글을 전 봤어요
경우는 다르지만 저도 그 나이에
비슷한 아픔을 겪어서 동병상련을
느꼈어요
그후 어디에서 만나도 친근감이 들었구요
이 글..
두번 읽었는데 댓글들이 엄청나서
답글달기 벅찰까바 가만 있을라 하다가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 남깁니다 ^^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 마디 남겨주심 감사해요. ^^
사이버 세상이 넓고도 좁아서
해솔정님이 그때 그분이시라니! 너무도 반가웠지요.
이곳의 몸부림님, 윤슬하여님, 무늬님은
저와 20년 가까운 글벗들이십니다.
고마우신 해솔정님 손을 꼭 쥐고
우리 여기서 함께 오래 오래 정답자고 다짐하고픈 아침이네요.
항상 많이 감사드립니다!
60여 년 전 그 시절에
무남독녀 외동딸 이라니......
형제자매 그 情들을 모르시고.
그치만, 부모님 자꾸 그리워 하시면,
그분들 저 높은 곳에서 맘 불편해 하실거여요
저는요
지난 달에 막내고모님 찾아가서
제가 배다른 애 인지 물어봤습니다
우리 아버지 49세, 우리 엄마 34세에 저 하나 낳으신 뒤
더는 자식을 못 낳으셨어요.
고모님 찾아가서 출생에 대해 질문을 하셨다니
어쩜 그리 저와 같으신지요!
저 어릴 적, 나이든 부부가 부모 닮지 않은 딸 하나 데리고 산다고
데려온 딸 아니냐고 동네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듣고 상처를 받고 우니까
저 낳을 때 입회하셨던 고모님께서
달항아리야 울지 마, 네 엄마가 너 낳는 거 내가 봤단다,
하시며 달래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제가 나이들어가며 엄마 얼굴 판박이가 되어 있지요. ^^
향적님 감사합니다. 평안한 금요일 되시어요.
음~~
참으로 슬픈 이야기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행복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지난일에 대해 회한을 이야기 하고
반성도 하고 그리워도 한다는 것은
모든 슬픔들과 화해하는 모습이기 때문이겠지요.
다른 이야기겠습니다만..
비애미가 미의 최상단에 자리함은 당연하다고 나름 결론 짓습니다.
슬픈 이야기는 우리 눈물샘을 자연스레 자극..흐르는눈물로 우리 감정을 정화시켜주니 말입니다.
달항아리님..오늘도 힘차게 으라차차~~^^
네 네 가을님, 으라차차! 감사합니다! ^^
눈물은 카타르시스의 한 종류이지요.
저는 못말리는 울보라서 나이가 드니 나잇값을 못해 부끄러울 적도 많은데요,
시원하게 울기를 잘하니 마음 속 응어리가 생길 새가 없는 것 같아서 정신 건강에 도움을 받는다고 느낍니다.
가을님 근무 시작하셨나요?
멋진 도전을 힘차게 응원합니다!
으라차차차! 지화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