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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0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제1독서 : 2코린 8,1-9
복 음 : 마태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보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사람들이 웃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웃을 일을 찾았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매일 밤 하나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서로에게 들려주는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주제는 ‘우리가 석방된 후에 벌어질 수 있는 재미있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날을 상상하며 배꼽 잡으며 웃었다고 하네요.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
결국 가스실로 끌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유다인 강제 수용소입니다.
말로만 듣고 책이나 영상을 통해 보게 된 ‘아우슈비츠’라는 공간은
죽음만이 있고 어떤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한가운데에서도 유머를 통해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죽음의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웃을 일이 없다고 단정 짓고 있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만들 힘이 있는데도
그 힘을 무시하고 그냥 그 힘을 버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삶은 죽음의 수용소가 아닙니다.
특히 주님께서 희망을 간직하지 못하는 우리와 언제나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안 좋은 상황만 볼 것이 아니라, 희망의 주님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에 집중하고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오늘 복음에서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라고 확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 중에서 아마 가장 실천하기 힘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명령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특별한 사람만을 사랑하시지 않지요.
악인이나 선인, 의로운 이나 불의한 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따른다면 하느님처럼 우리도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악인에게 해를 비춰주시고,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주님
사랑이 불공평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이렇게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태 5,48 참조).
그래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자리를 죽음의 수용소가 아닌, 하느님 나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과연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그 사랑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하느님 나라도 가까워집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꽃동네 오웅진 신부님의 팔순 감사미사에 다녀왔습니다.
신부님과는 23년 전에 인연이 있었습니다.
수녀님과 함께하고 싶었는데 본당의 여건상 수녀님을 모시기 어려웠습니다.
꽃동네 오웅진 신부님께 꽃동네의 수녀님을 파견해 주실 수 있는지 청하였고,
오웅진 신부님은 기꺼이 2명의 수녀님을 파견해 주었습니다.
수녀님들은 꽃동네 수도회의 영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늘 겸손한 자세로 신자들을 대하였고,
본당의 어려운 일들은 솔선해서 하는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수녀님들은 주일미사가 끝나면 성당에서
남은 주보를 정리하였고, 화장실 청소를 하였습니다.
예비자 교리, 가정방문, 봉성체에 함께 해 주었습니다.
제가 휴가를 가면 공소예절을 해 주었습니다.
수녀님은 김수환 추기경님께 예쁜 손 편지를 보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기꺼이 ‘대림특강’을 해 주셨습니다.
수녀님의 예쁜 손 편지가 한 몫을 했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에서 가장 규모가 작았던 성당에 대한
김수환 추기경님의 배려가 있었습니다.
저는 사제생활 32년 중에 가장 행복했고,
보람 있었던 시간을 수녀님들과 함께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오웅진 신부님께서 뉴욕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팔순 감사미사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인연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신부님의 팔순 감사미사에 참석하였습니다.
23년이 지났지만, 신부님은 여전히 건강하였습니다.
3시간 미사에 2시간 넘는 강론을 하였는데 하나도 지친 모습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면, 내어주면 나머지는 하느님께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신부님의 말씀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충실하게 하는 사람에게 볼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이제 막 서품을 받은 새 사제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평생 성무일도를 하였습니다.
나는 매일미사를 한 번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신부님도 그렇게 하세요.”
신부님은 새 사제에게 ‘강복’을 청하였고 새 사제는 신부님에게 ‘첫 강복’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과 함께했기에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과거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21세기는 ‘융합의 시대, 영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를 늘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고, 성자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고,
성령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은사를 주시는 것처럼
신앙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독사, 저출산, 유산’과 같은 문제는 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된다고 하였습니다.
꽃동네가 추구하는 영성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관계’의 회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60세가 되는 생일에는 노숙자 60명을 모시고 식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70세가 되는 생일에는 노숙자 700명을 모시고 소풍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80회 생일에는 한국에서 멀리 미국까지 와서 ‘영성센터’ 건립을 위한 모금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고독한 사람들을 위해서 평생 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모든 것들을 채워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인간에게 있는 3가지 욕구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소유욕, 지배욕, 사랑의 욕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소유에 대한 욕구는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아서
가지면 가실수록 더욱 큰 욕망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지배에 대한 욕구는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에 대한 욕구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하였습니다.
소유와 지배는 문화와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지만,
소유와 지배는 전쟁과 폭력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기후 위기, 자연 파괴, 생물의 멸종은 지배와 소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욕구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온전히 내어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랑에서 희망의 꽃이 핀다고 하였습니다.
3시간의 미사와 2시간이 넘는 강론이 자칫 힘들 수도 있었지만
제게는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정의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강론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서는 억울하고, 분노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정의를 실현하였을 때라도 불안감이 생깁니다.
하지만 사랑하면 억울함도 사라지게 됩니다.
사랑하면 불안감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웅진 신부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온 힘과 정성을 다하여 따르고 있었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넘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모두를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자애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로움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단지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그에게도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가 기도해 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하고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
나를 힘들어하고 나의 용서가 절실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원수를 사랑하여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원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미워한다는 것은 당사자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수 있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영에 큰 해를 입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를 보여 주었다(사도 7,60 참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이렇게 원수를 사랑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은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아드님과 같은 참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여기서 해는 그분의 지혜를, 비는 진리의 가르침이 적셔주는 것을 뜻한다.
이 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우리의 몫이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47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보물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본능을 넘어 행동하는 것이므로 그는 큰 보물을 지닌 것이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완전한 상속자가 아니다.
하느님을 우리가 누릴 수 있고, 그분을 참으로 누릴 수 있으려면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나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하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은 선으로 완전해진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믿음은 분노가 앙갚음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분노를 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부드럽게 바꾸어 놓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상속자들의 삶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을 보이도록 부르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교회는 법정이 아니라 치유의 장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매일 우리가 접하는 복음 말씀, 때로 정말이지 신기하고 또 신비롭습니다.
어떤 날은 우리에게 건네시는 한 말씀이 어찌 그리 제게 딱 필요한 말씀인지?
어찌 그리도 제 가슴을 후벼 파시는지? 어찌 그리도 따뜻이 저를 위로하시는지?
오늘 말씀 한 구절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밥 먹듯이 죄를 짓고 사는 우리 죄인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의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오 복음 5장 45절)
우리 주님의 자비는 바다같이 넓으며, 동시에 누구에게나 공평하십니다.
선인에게는 약간 빈정 상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선인에게뿐만 아니라
악인에게도 매일 아침마다 화려하고 찬란한 일출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하루가 저물 무렵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주님께서는 선인뿐만 아니라
악인에게도 또 다른 선물, 장엄하고도 황홀한 석양을 선물해주십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오늘, 이 아침 주님께서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하루 24시간이라는 금쪽같은 보물을 골고루 나눠주셨습니다.
속절없는 세월이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고,
이제 나이 들어 돌아보니, 금쪽같은 세월을 많이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실망과 상처, 무기력과 나태함으로 그 아까운 날들을 무가치하게 소모했습니다.
우리가 악하고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선인에게 베푸시는 그 크신 은총과 축복에 깊이 감사드리며,
부단히 악의 땅에서 선의 나라로 건너와야겠습니다.
“그대는 거리에서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를 지을 때마다 지은 죄에 대해 참회하십시오.
또다시 죄를 지을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새롭게 뉘우치십시오.
약속된 상급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교회는 법정이 아니라, 치유의 장소입니다.
여기 교회에서는 그대의 죄를 셈하지 않고, 그대에게 용서를 베풀 따름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거룩함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를 가르친다.
오늘의 기본 명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것이며,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반명제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것이며,
이로써 여섯 가지 대당명제가 모두 선포되었다.
이를 다시금 정리하자면, 예수께서는 “더 옳게” 사는 방법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제시하셨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 것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이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록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율법의 참된 정신을 곡해하긴 했지만,
세부적인 규정에 이르는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인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더 옳게” 산다는 것은
율법의 세부규정을 더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밝혀 주신 것이다.
이는 곧 법의 형식 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선포된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복하라 → 앙ㄱㅍ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기본명제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반부는 구약의 율법 구조문이지만(레위 19,18),
“원수를 미워하라”는 후반부는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계명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오히려 원수에 대한 사랑을 높이 평가한 부분은 있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되려 살려주는 대목에서 사울이
“원수를 만나서 고스란히 돌려보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도 네가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야훼께서 너에게 상을 주시기를 바란다.”(1사무 24,20)라고 말한 곳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제에 대하여 성서학자들은
반명제를 위해서 死海 근처에 모여 살았던 꿈란 공동체의 규범 중에서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을 미워할지니,
그들은 자신의 罪過대로 하느님의 보복을 받을 것이다.”는 대목을
마태오가 빌어와 加筆한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 예수님의 요구는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웃과 원수의 구별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가 내 이웃이며, 누가 내 원수인가?”라는 물음에 머물러 있다면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새로운 義를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의 새로운 의로움에 따르면,
우리가 내 이웃이 아닌 사람들을 원수로 규정하고
내 이웃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이웃끼리 인사하고 잘 지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세리들과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따라서 거기엔 어떠한 償도, 더 나음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내 이웃이나 원수에게 똑같이 대해주시기 때문이다.(45절)
세상 사람 모두가 하느님의 模像을 따라 빚어졌기 때문이다.(창세 1,26)
어떤 원수라도 그가 사랑을 받는다면 그는 원수가 아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는 어떤 원수도 없다.
이로써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대당명제의 깊은 의도와 의중이 모두 드러났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는 것 안에 있다.
完全하다는 것은 “온전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이다.”는 것이며,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늘 혼란스럽고 갈라지며 그 마음 또한 朝夕으로 변한다.
굳은 결심으로 시작한 하루가 그 마감 시간에는 깨지고
흩어진 마음을 주워 모아야 하는 아픔으로 반복된다.
속으로는 한결같은 마음을 먹지만 마주 대하는 상대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우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을 배우고 익히도록 요구된다.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은
그분이 인간에 대한 어떤 차별도 없이 수행하시는 사랑에서 드러난다.
하느님 사랑의 방법에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곧 완전하게 되는 길이다.
오늘은 적어도 왜 하느님께서 善人에게 바로 償을 주지 않으시고,
惡人에게 바로 罰을 내리지 않으시냐고 말하지 말자.
그래서 하느님은 오늘도 沈默만 하고 계신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똑같이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에서 우러나는 창조적이고 거룩한 사랑인 것이다.
민동규 다니엘 신부 (갑곶순교성지)
찬미 예수님!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 주님의 말씀 역시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얼마 전 읽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나 싫다는 사람은 신경 끄고, 나 좋다는 사람만 신경 쓰며 살아갈 것.
조금 더 나를 위한 관계를 지향하며 살아갈 것.’
또 이런 말도 있었습니다.
‘이미 시든 관계를 애써 붙잡지 말고, 잘 자라고 있는 관계를 힘써 망치지도 말 것.’
그런데 위의 내용을 읽다 보니 무언가가 명치에 ‘툭’하고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 내용 때문이지요.
‘원수를 사랑하고, 그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라고 가르치신
주님의 말씀이 제 명치에 걸린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내용은 참으로 편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명과 말씀은 늘 세상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제 명치에 걸렸던 그 말씀은 아마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명치에도 걸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자니 내가 지는 것 같고,
세상의 말대로 살자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 모습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지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벌써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주님의 가르침을 모르면
명치에 그 말씀이 걸릴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매번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한 번이라도 눈 감고 원수를 사랑해볼 수는 없을까요?
그리고 그 한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살아 있다는 증거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황과 변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이 말은 생물학적인 육체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육체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방황과 변화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변화를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대부분 시대의 젊은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햄버거 가게 키오스크(전자주문기) 앞에서,
국밥집, 국숫집 키오스크 앞에서….
우리 서로가 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방황과 변화를 사랑할 수 있도록
변화에 무릎 꿇고 후퇴하는 모습이 아닌
젊은이 변화의 선두에 서서
그 변화를 따라오는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모두 살아 숨쉬기를 희망해봅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이 릴리안 수녀
"너희는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서 기도를 할 때
가해자들보다는 피해자들을 위해 기도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셨던 이 구절을 계속해서 되새겨 볼 때
피해받은 이들도 물론 기도가 필요하지만,
정작 더 필요한 기도는 가해측의 이들이라고 말씀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더 이상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기를...
그들의 마음을 선하게 할 수 있게 더 간절하고 자주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그 마음이 아마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이 되지 않을까요?
[출처] 마태 5,43-4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