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NrRusTUxVXU?si=GQOEM5go8V-DmI1S
Bartók : Concerto pour violon et orchestre n°2 joué par Nikolaj Znaider
20세기 가장 위대한 헝가리 작곡가이자 현대음악의 대표 주자였던 버르토크는 민속음악 전문가이자 뛰어난 교육자였다. 그는 헝가리 민속음악의 주제, 선법, 리듬 패턴 등을 통해 음악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버르토크는 이에 그치지 않고 민속음악적 요소와 동시대 음악의 영향을 종합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완성했다. 리듬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부터 악기의 음색을 취급하는 방법, 음악가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음계 같은 기초적인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독특하고 도전적인 실험을 시도하여 손대는 장르마다 새로운 종류의 표현과 시정(詩情)을 담아냈다.
자연에서 비롯된 버르토크의 음악은 청량하고 시큼한 불협화음으로 넘쳐나며, 듣는 이로 하여금 자연 세계의 기이함과 무차별적인 폭력을 떠오르게 하는 소리와 텍스추어로 가득하다. 이러한 음악이 생경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처음 충격의 진입 장벽만 넘고 나면 놀랍도록 아름다운 소리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참신하고 대단히 자극적인 풍경을 만나고, 섬세한 음악과 거친 강세가 귀를 때리는 음악이 공존하는 것을 보며, 때로는 그 무한한 생산력과 자기 재생력 앞에서 일종의 종교적 경외마저 느끼게 된다.
버르토크의 음악에서 가장 큰 특색은 항상 조국 헝가리의 민요를 창작의 토대로 삼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헝가리 민요는 브람스나 리스트가 이용했던 이국 취미적인 것이 아니라, 마자르(Magyar) 민족혼이 담긴 노래로서 근원적인 것이었다. 버르토크는 유럽의 새로운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이 근원적인 노래를 모체로 하여 받아들인 뒤, 자신감에 충만한 독자적 어법으로 작품을 전개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의 음악이 이른바 민족주의라는 좁은 테두리에 구애받지 않고, 넓고도 깊게 호소하는 인간적인 힘을 가진 것도 그 때문이다.
툭하면 현악기의 줄이 끊어지는 ‘버르토크 피치카토’
날카롭고 거친 불협화음을 즐긴 버르토크의 작품을 연주할 때 현악기의 줄이 ‘툭’ 끊어질 때가 왕왕 있다. 바로 강한 피치카토 주법 때문이다. 피치카토(pizzicato)란 이탈리아어로 ‘꼬집다’는 뜻이다. 바이올린이나 첼로 등 현악기에서 손가락으로 현을 뜯어 소리를 내는 연주 기법을 말한다. 버르토크는 새로운 피치카토 주법을 개발했는데, 줄을 두 손가락으로 잡고 뜯어서 지판(指板)에 줄이 부딪치면서 ‘딱’ 하는 소리가 들리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버르토크 피치카토’라고 부른다. 버르토크는 현이 악기 지판에 수직으로 강하게 부딪칠 정도로 온 힘을 다해 잡아 뜯으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현을 혹사시키다 보면 조율한 음정이 불안해진다. 더욱이 버르토크의 작품은 활로 거칠게 현을 긋는 대목이 많아 줄이 끊어지는 불상사가 빈번히 발생하는 것이다.
“버르토크라는 이름은 예술과 정치에서 원칙과 개혁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상징한다.” ―졸탄 코다이
만약 버르토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을 연주할 때 독주자의 바이올린 현이 끊어졌다면 어떻게 될까. 독주자는 줄이 끊어진 바이올린을 악장에게 주고 악장의 바이올린을 빌린다. 악장은 부악장의 것을 ‘빼앗아’ 연주한다. 이렇게 해서 맨 뒷줄 단원에게까지 가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줄이 끊어진 바이올린을 든 단원은 어쩔 수 없이 연주 시늉만 하는 ‘핸드 싱크’를 해야 한다. 그러다 연주가 잠깐 중단되는 악장 사이에 호주머니에서 여분의 줄을 꺼내 교체하기도 한다. 최은규 음악 칼럼니스트는 “버르토크는 현을 세게 퉁기는 강한 피치카토를 통해 타악기의 음색을 구현하려고 했다”며 “그는 악기의 새로운 소리를 찾는 작업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고 설명했다.
버르토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은 바이올리니스트 졸탄 세케이(Zoltán Székely, 1903-2001)의 의뢰를 받고 1937/38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파시즘의 광기가 휩쓸던 이 당시 버르토크는 매우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 자신은 반파시스트라고 입장을 표명했으며, 그 때문에 생명까지 위협당하는 위험에 빠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 작품의 초연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1939년 3월 23일 졸탄 세케이의 바이올린과 빌헬름 멩겔베르크의 지휘,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올려졌다. 작품을 의뢰하고 초연을 한 졸탄 세케이에게 헌정되었다.
https://youtu.be/3Ji7vuHZ7-E?si=eEVA7LMdI2-QEYHh
Bartok: Violin Sonata 2, Sz. 76 - Leonidas Kavakos /Ferenc Rados
1악장: 알레그로 논 트로포
소나타 형식. 도입부 주제와 제1주제, 제2주제의 세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도입부 주제는 5음계적이고, 제1주제는 5음계적으로 시작하여 점차 경과음이 추가되어 12음계적으로 되며, 제2주제는 12음의 선율적인 형태를 취한다. 이 주제들은 변형되어 3악장의 주제로 사용된다.
2악장: 안단테 트란퀼로
변주곡 형식. 주제와 7개의 변주, 주제로의 복귀의 9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3악장: 알레그로 몰토
소나타 형식. 18세기 헝가리 춤곡인 베르분코슈(Verbunkos) 스타일을 바탕으로 한 춤곡 풍의 활발한 악장이다. 1악장의 주제가 변형되어 주제로 사용된다. 빠르기와 박자, 발상의 전개들이 상위된 형태로 변주되어 제시되며, 전개부의 몰토 트란퀼로의 제1주제는 고음의 독주 바이올린으로 매우 인상적으로 전개된다.
민족적이고 현대적인 음악을 함께 추구했던 버르토크
버르토크는 헝가리 남부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교사였다. 아버지는 음악에 관심이 없었고 어머니는 음악 애호가였다. 일곱 살 때 가장을 잃은 그의 가족은 고향을 떠나 포조니란 곳으로 갔다. 당시 헝가리 문화의 중심지였던 포조니는 음악적 환경이 좋았다(지금은 체코 영토). 어머니에게서 피아노 기초를 배운 버르토크는 이곳에서 자신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나타낸다. 17살(1899)에 그는 빈 음악원에 합격했다. 들뜬 마음으로 유학생활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유학을 가지 말고 헝가리의 음악을 연구하자고 설득했다. 그보다 네 살 위였던 이 음악도는 나중에 훌륭한 작곡가가 되는 도흐나니(Ernst von Dohnányi, 1877-1960)였다. 버르토크는 이 설득에 넘어가 빈 음악원 유학을 포기했고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입학했다.
1902년 버르토크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초연을 듣고, 새로운 작곡법에 대한 커다란 시사를 받아 교향시 <코슈트(Kossuth)>(1903)를 작곡했다. 1905년 그는 파리에서 열린 루빈스타인 콩쿠르에 참가하여 피아노 부문에서 빌헬름 바크하우스(Wilhelm Backhaus, 1884-1969)에게, 작곡 부문에서 아틸리오 브루뇰리(Attilio Brugnoli)에게 패했다. 바크하우스는 버르토크를 이긴 것을 평생 자랑했고 프로필로 사용했다. 1907년에 부다페스트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가 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음악원 시절의 친구인 졸탄 코다이(Zoltán Kodály, 1882-1967)와 함께 헝가리 민요의 채집과 연구에 몰두하고, 민요를 토대로 민족적인 음악 어법의 개척에 노력을 집중했다. 1911년, 두 사람은 신작 발표를 위해 신 헝가리 음악협회를 창설했지만 저널리즘의 공격과 경제적인 곤란 때문에 이듬해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버르토크는 실의와 고립 속에서 1차 세계대전을 맞이했다.
전쟁 후의 혁명과 격동기는 버르토크에게도 고뇌의 시기였지만, 이 동안에 완성된 바이올린 소나타 1번(1921)을 비롯한 일련의 작품에 의해 차츰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동시에 유럽의 신음악과 쇤베르크의 영향을 밑거름으로 하여 창작한 피아노 소나타와 피아노 협주곡 1번(1926)은 새롭고도 강렬한 양식이 도입된 작품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어지는 1927년에서 1930년까지는 국제적인 연주 여행과 활발한 창작으로 풍부한 결실을 거둔 시기였다.
1930년 이후 다시 민요 연구에 박차를 가해 새로운 창작 활동 준비를 했다. 1934년 무렵부터는 원숙한 최성기를 맞아, 현악 4중주 5번(1934)을 비롯한 일련의 대표적인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버르토크는 파시즘에 적극 대항했는데, 1939년 개전 소식을 접하자 망명을 결심하여 이듬해 10월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생활은 몹시 궁핍했고, 강의나 작곡 의뢰도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은 체질로 건강이 나빴던 버르토크는 이에 응할 수가 없었다. 1943년에 겨우 원기를 회복하여 최후의 활동에 들어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1943)을 비롯하여 몇몇 작품에 착수했지만, 1945년 9월 26일 피아노 협주곡 3번의 마지막 마디를 미완성으로 남긴 채 백혈병으로 뉴욕에서 눈을 감았다.
글쓴이 : 갠지스(옥련암)
https://youtu.be/Y5E2Kf_imHU?si=L_s7fws4bwmy1pVL
Henryk Szeryng plays Bartok's Violin Concerto No.2, Netherlands Radio Philharmonic Orchestra, Willem van Otterl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