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이백일곱 번째
내 이름을 불러줘
어느 작가가 그럽니다. “만일 우리가 한 송이의 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누구이고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꽃이 아직 피지 않은 순간도 마땅히 아름답다.” 생명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그 합당한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소시지에 한눈팔고 있을 때, 선생님으로 보이는 남자가 몽둥이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왔다. 나는 잽싸게 몸을 비틀어 그 남자를 향해 짖었다. 놀란 남자는 내게 몽둥이를 휘두르려고 했다. ‘안 돼요!’ 은우라는 아이가 나를 끌어안으며 자기의 몸으로 나를 감쌌다. ‘선생님, 얘는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개예요.’ ‘은우야, 거짓말하면 못쓴다.’ ‘얘는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개 ‘스누피’예요.‘ ‘뭐, 뭐라고? 내 이름은 레미야…….’ 나는 속으로 외쳤다.” 작가 서지원이 소시지를 훔쳐 먹으려 했던 떠돌이 개를 보호하는 한 소녀와 떠돌이 개의 이야기 <내 이름을 불러줘>의 한 토막입니다. 떠돌이 개는 죽음 앞에서도 자기 이름을 불러달라고 외칩니다. 청포도 시인 이육사는 본디 필명이 이활李活이었답니다. 윤동주, 한용운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유명한 그는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때의 수인번호가 264호였습니다. 이육사, 감옥에 갇힌 자에게는 인격이 없습니다. 번호로만 불립니다. 그런 수인번호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짓고 그리 불리길 원한 데에는 깊은 뜻이 있을 겁니다. 인격을 박탈당한 상태를 나타내는 수인번호, 곧 우리 민족의 처참한 삶을 대변했겠지요. 그리고 그는 자신을 그리 불러달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