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의 고통 개미도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언뜻 생각하기에는 고통을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개미들에겐 고통을 느끼게 할 만한 신경 조직이 없다. 신경이 있다 해도 통증을 전달하는 물질이 없다. 개미 몸의 일부를 잘라버렸을 때, 그 토막이 몸뚱이의 나머지 부분과 떨어져서 도, 아주 오랫동안 계속 '살아 움직이는' 것을 어쩌다 보게 되는 것 도, 그런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개미에게 고통이 없다는 사실이 새로운 공상 과학의 세계로 우리 를 이끌어간다. 고통이 없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고, '자 아'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얘기도 될 수 있다. 개미들은 고통을 느 끼지 못한다. 개미 사회의 응집력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랫 동안 곤충학자들은 그런 이론에 기울어 있었다. 그 이론은 모든 것 을 설명하면서도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 생각은 또 다른 이점을 지니고 있다. 즉, 아무런 꺼리낌없이 개미들을 죽일 수 있게해준다는 점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어떤 동물이 있다면, 나는 그 동물을 무척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개미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 은 잘못이다. 목이 잘린 개미는 특별한 냄새를 발한다. 고통의 냄새 인 것이다. 개미의 몸 안에서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 런 냄새가 생길 리 없다. 개미에게 전기적인 신경 감은은 없지만, 화학적인 신경 감응은 있는 것이다. 개미는 자기 몸의 일부가 떨어 져나가면 고통을 느낀다. 제 나름의 방식으로 고통을 느끼는 것인 데, 그 방식은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방식과 사뭇 다르다. 하지만 고통을 느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전투는 11시 47분에 속개되었다. 난쟁이개미들이 밀집 대형으로 길게 늘어서서 '개양귀비'언덕을 치기 위하여 천천히 올라간다. 꽃 사이에서 전차들이 나타난다. 신호가 떨어지자 전차들이 비탈 을 내리닫는다. 전차 부대의 좌우로 보병 군단과 용병 군단이 산개 하면서, 마스토돈 같은 전차들이 한바탕 휘젓고 가면 그것을 이어 일을 마무리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양쪽 군대가 이제 100머리(300밀리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거리가 사목사목 좁혀진다. 50머리.... 30머리.... 10머리! 가장 먼 저 공격에 나선 낫개미가 난쟁이개미들과 막 접전을 벌이려는 찰나, 아주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빽빽하게 늘어서 있던, 시게푸 개미들 의 전열이 갑자기 간격이 넓은 점선 모양으로 바뀐 것이다. 그들이 방진을 치고 있다. 전차 앞에 있던 시게푸 개미들이 자취를 감추고, 전차 앞에 보이 는 것은 텅 빈 통로뿐이었다. 난쟁이개미들을 붙잡으려면 재빨리 갈 짓자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느 전차는 하나도 없다. 위턱들이 허공을 찌르며 소리를 내고, 36개의 다리는 달리던 힘 때문에 티미하게도 계속 내딛기만 한다. 톡 쏘는 냄새가 훅 끼쳐온다. '놈들의 다리를 잘라라!' 냄새가 날아오기가 무섭게 난쟁이개미들이 전차 밑으로 달려들어 운반 개미들을 죽인다. 그러고는 무너져내리는 낫개미에 깔리지 않 으려고 서둘러 빠져나온다. 어떤 난쟁이개미들은 과감하게, 세 마리씩 두 줄로 늘어선 운반 개미들 사이로 뛰어들어가, 한쪽 위턱으로 낫개미의 드러난 배를 후 빈다. 그러자 액체가 흘러 나온다. 물탱크가 터져 물이 쏟아지듯이 낫개미의 체액이 땅 위로 쏟아진다. 또 어떤 난쟁이개미들은 마스토 돈 같은 낫개미의 몸뚱이로 기어올라 더듬이를 자르고 뛰어내린다. 전차가 하나씩하나씩 무너져내린다. 운반자들을 잃은 낫개미들은 기동을 못하는 환자처럼 엉금엉금 기다가 허무하게 최후를 맞는다. 차마 눈 뜨고 못 볼 참상이다! 낫개미가 배 터져 죽은 줄도 모르고, 그 시체들을 열심히 메고 가 는 여섯 일개미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낫개미의 더듬이가 잘 린 전차들은 '바퀴들'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다가, 결국 뿔뿔 이 흩어지고 만다.... 그렇게 참패함으로써, 전차의 발명이라는 기술적 개가도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새로운 무기가 나왔다가도, 적들이 대응책을 너 무 빨리 찾아내는 바람에, 위대한 발명품이 역사의 뒤안으로 그렇게 사라지는 일은 개미 역사에 숱하게 있어 왔다. 전차 부대를 측면에서 지원하던 보병 부대와 용병 부대는 전차 부 대가 괴멸됨으로써 완전히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전차 부대가 거둔 승리의 이삭이나 주으라고 배치되었던 이 부대들이 필사적으로 싸워 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 난쟁이개미들은 낫개미들을 신속하게 해치우고, 벌써 다시 방진을 치고 있다. 벨로캉 개미들이 그 방진의 한쪽 가장자리를 건드리기가 무섭게, 수천 마리의 난쟁이개미들이 탐욕스럽게 위턱을 들이대서 벨로캉 개미들의 기를 꺽어버린다. 불개미들과 그들의 용병 개미들은 이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언덕 위에 재집결한 불개미들이 난쟁이개미들을 살피고 있다. 난쟁 이개미들은 여전히 밀집된 방진을 짠 채로, 공격을 하러 서서히 올 라오고 있다. 기세가 당당하고 서슬이 시퍼렇다. 시간을 벌려는 생각으로, 덩치 큰 병정개미들이 돌을 날라와 언덕 위에서 아래로 굴린다. 그러나 그 돌 사태도 난쟁이개미들의 전진을 별로 늦추지 못한다. 약삭빠른 난쟁이개미들은 돌덩이가 지나가는 길에서 비켜섰다가는 얼른 제자리로 돌아온다. 돌덩이에 맞아 으깨 지는 난쟁이개미는 거의 없다. 벨로캉 부대는 그 궁지에서 벗어날 묘책을 찾느라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있다. 몇몇 병정개미들이 고전적인 싸움 방식으로 되돌아가자 고 제안한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그저 개미산 포격을 하자는 것이다. 전투가 시작된 후로 개미산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접전 중에 개미산을 쏘면 적군뿐 아니라 아군까지도 다치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난쟁이개미들이 밀집된 방진을 짜고 있을 때 는 그 효과가 크리라는 얘기였다. 포수 개미들이 부랴부랴 사격 자세를 취한다. 뒤의 네 다리로 단 단힘 몸을 받치고 배를 앞으로 내민다. 그렇게 해야만 배를 상하 좌 우로 움직여 가장 알맞은 조준 각도를 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능선 바로 아래까지 올라온 난쟁이개미들은 수천 개의 배가 능선 위로 끝을 비죽 내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양진영 사이에 아직은 좀 거리가 있다. 난쟁이개미들이, 비탈길의 마지막 몇 센티미터를 건너 가려고 힘을 한껏 내어 속도를 높인다. '돌격! 열과 열 사이를 좁혀라!' 그러자, 반대쪽 진영에서 단 한마디의 명령이 떨어진다. '발사!' 아래쪽으로 방향을 돌린 배들이 난쟁이개미들 위로 뜨거운 독물을 뿜어댄다. 피웅, 피웅, 피웅, 노르스름한 분출물이 바람처럼 허공을 날아, 공격자들의 제1선을 정면으로 내리친다. 먼저 더듬이가 녹아서 머리 위로 굴러떨어진다. 그 다음에 독이 딱지로 퍼져나가면, 마치 플라스틱이 불에 녹는 것처럼 딱지가 녹아버린다. 개미산에 쏘인 몸뚱이가 털썩 내려앉으면서, 거치적리는 장애물이 되어 난쟁이개미들을 비틀거리게 만든다. 성난 난쟁이개미들이 비틀 거리는 몸을 추스리고 더욱 격렬하게 능선을 향해 돌진한다. 위에서는 한 줄의 포수 개미들이 앞서 사격에 나섰던 포수 개미들과 교대를 했다. '발사!' 방진은 흐트러졌지만, 난쟁이개미들은 물컹거리는 시체를 짓밟으 면서 계속 나아가고 있다. 또 한 줄의 포수 개미들이 나섰다. 끈끈 이침 개미 용병들도 그들과 합세했다. '발사!' 이번에는 난쟁이개미들의 방진이 완전히 흐트러졌다. 난쟁이개미 전체가 끈끈이침 개미가 뿜어낸 끈끈이물 웅덩이에서 허우적거린다. 난쟁이개미들도 포수 개미들을 정렬시켜 반격을 시도한다. 그 포수 개미들은 능선을 향해 뒷걸음을 치면서 겨냥도 하지 않고 사격을 한 다. 가파른 비탈이라서 위에 있는 불개미처럼 뒷다리로 버티는 자세 를 취할 수가 없는 탓이다. '발사!' 난쟁이개미 쪽에서도 그런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짤막한 그들의 배는 겨우 작은 개미산 방울을 쏘아댈 뿐 인. 그 분출물은 설사 목표물에 맞는다 하더라도, 딱지를 뚫지 못 하고 가벼운 염증만을 일으킬 뿐이다. '발사!' 양진영에서 쏘아대는 개미산 방울들이 서로 엇갈리며 어지러이 날 린다. 이따금 부딪혀 상쇄되기도 한다. 개미산 포격이 이렇다 할 성 과를 거두지 못하자 시게푸 개미들은 포병들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 기로 한다. 그들은 보병들이 밀집된 방진을 치고 돌격하면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열과 열 사이를 좁혀라!' '발사!' 불개미들이 응답한다. 그들의 포병 부대는 여전히 놀라운 전력을 과시하고 있다. 개미산과 끈끈물이 또 한차례 분출한다. 불개미들의 사격이 효과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쟁이개미들 은 '개양귀비'언덕 꼭대기로 기어오르는 데 성공했다. 능선 위에 늘 어선 그들의 윤곽이 검은 띠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복수를 갈망하고 있다. 격돌. 격노. 격멸. 이제는 '묘책'이 따로 없다. 불개미 진영 포수 개미들은 더 이상 배로 사격할 수 없고, 난쟁이개미 진영 방진도 이제는 밀집 대형을 유지할 수 없다. 의산 의해. 질풍노도 모두 한데 뒤섞여서, 어지러이 흩어졌다. 가지런히 정렬하고, 치 달리고, 돌아가고, 달아나고, 덤벼들고, 흩어지고, 모여들고, 쑤석 거려 시비걸고, 밀었다가 당겼다가, 뛰어오르고, 주저앉고, 일어나 서 추스르고, 욕지거리, 맞대거리, 뜨거운 김 내뿜으며 울부짖듯 악 을 쓴다. 도처에 살기가 어려 있다. 서로 맞서서 힘을 겨루고 칼싸 움 하듯 위턱을 휘두른다. 살아 있는 몸뚱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 는 몸뚱이를 가리지 않고 짓밟으며 내달린다. 불개미 한 마리마다 성난 난쟁이개미가 적어도 세 마리씩은 달라붙어 있다. 그러나 불개 미들의 덩치가 세 배는 더 크니까, 거의 대등한 전력으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드잡이 싸움, 냄새의 아우성, 엷은 안개처럼 뿜어지는 씁쓸한 페 로몬. 수백만 개의 위턱이 맞부딪치는데, 그 생김생김도 가지각색이 다. 끝이 뾰족한 것이 있는가 하면 가장자리가 깔쭉깔쭉한 것이 있 고, 톱니처럼 생긴 것이 있는가 하면 검처럼 생긴 것과 얇은 집게 처럼 생긴 것도 있다. 또 외날인 것이 있는가 하면 양날인 것도 있 고, 독물을 바른 것이 있는가 하면, 끈끈물이나 피를 바른 것도 있 다. 그 위턱들이 서로 뒤엉키며 땅바닥이 진동한다. 몸과 몸이 맞부딪친다. 끝에 자그마한 곤봉을 매단 듯한 더듬이들이 상대가 가까이 접근 하지 못하도록 허공을 후려친다. 그러면 갈퀴가 같은 발톱을 가진 상대방의 다리가 더듬이를 때린다. 더듬이가, 성가시게 구는 작은 갈대이기라도 한 것처럼. 낚아채기, 허 찌르기, 허방치기. 상대를 붙잡을 때는 위턱이나, 더듬이나, 머리, 가슴, 배, 다리를 잡기도 하고, 뒷다리 관절, 앞다리 관절, 다리 마디에 솔처럼 난 털 을 잡기도 하며, 등딱지에 난 홈이나, 키틴질에 난 구멍, 눈을 잡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몸뚱이가 균형을 잃고 기울어져 축축한 땅에 나동그 라진다. 나는 이 전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서 있는 개양귀비 위로 난쟁이개미들이 기어오른다. 그러더니 그 위에서 발 톱을 있는대로 세우고 불개미에게 뛰어내린다. 마치 마차에 뛰어들 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더니 불개미 등에 구멍을 뚫어 심장까지 파고든다. 몸과 몸이 맞부딪친다. 위턱들이 반들반들한 딱지에 줄무늬의 흠집을 낸다. 어떤 불개미는, 두 개의 투창을 동시에 쏘아대듯이, 더듬이를 노 련하게 사용한다. 그럼으로써 더듬이에 묻은 맑은 피를 닦아낼 겨를 도 없이, 적의 머리통을 열 개씩이나 관통시키고 있다. 몸과 몸이 맞부딪친다. 죽자 하고 싸운다. 잘라진 더듬이와 다리가 땅에 지천으로 깔려서 가시 양탄자 위를 걷는 느낌이다. 라숄라캉의 생존자들이, 자기들의 싸움은 이제부터라는 듯, 달려 들어서 접전에 합세한다. 불개미 한 마리가 많은 난쟁이개미들에게 사로잡혔다. 절망에 빠 진 그 불개미는 제 배의 끝을 구부려 제 몸 쪽으로 개미산을 쏜다. 자기를 붙들고 있는 적들을 죽이면서 자기도 죽으려는 것이다. 그들 은 모두 밀랍처럼 녹아버린다. 거기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는 불개미 쪽의 다른 병정개미 하나가, 적이 자신의 머리를 뽑아버리려 할 찰나에, 잽싸게 상대의 머리를 먼저 뽑아버리고 있다. 병정개미 103683호는 아까 난쟁이개미들의 선두 병력이 몰려올 때, 다른 병정개미 수십 마리와 함께 삼각진을 쳤었다. 몰려드는 난 쟁이개미 떼에게 겁을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삼각진이 깨진 마당이라서 혼자서 다섯 마리의 시게푸 개미들을 상대해야 할 판이다. 시게푸 개미들은 벌써 사랑하는 전우들의 피로 칠갑을 하고 있다. 시게푸 개미들이 103683호의 몸뚱이 여기저기를 물어뜯고 있다. 있는 힘을 다해 그들에게 대항하는데, 불현듯 전투 연습실에서 늙은 병정개미가 신참들에게 해주던 충고의 말이 떠오른다. '모든 것은 접전을 벌이기 전에 결정이 나버리는 것이다. 위턱으 로 공격을 하거나 개미산을 쏘는 것은, 이미 두 교전자가 인정하고 있는 승부의 상황을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는 법, 승리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이기 지 못할 것이 없다.' 적이 한 마리라면 그 가르침이 통할 법한데, 다섯 마리일 때는 어 떻게 해야 하나? 103683호가 보기에 그 다섯 마리의 적 중에 적어도 두 마리는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결의에 차 있는 듯하다. 그의 가슴 마디를 끈질기게 물어뜯고 있는 자와, 왼쪽 뒷다리를 잡아당기고 있 는 자가 그렇다. 103683호의 몸에 힘이 충만해 온다. 몸을 버둥거리 면서, 한놈의 목 위에 비수를 꽂듯 더듬이를 박아넣고, 위턱이 평평 한 쪽으로 또 한놈을 쳐서 박살을 냄으로써 적들을 떨쳐버린다. 그러는 사이 비밀무기를 가지러 갔던 난쟁이개미들이 돌아와, 싸 움터 한복판으로 알테르나리아에 오염된 수십 개의 머리를 던져넣는다. 그러나 불개미들도 저마다 달팽이의 끈끈물로 방비를 하고 있는 터라 알테르나리아의 홀씨는 공중에서 나풀거리다가 딱지 위에서 미 끄러져 기름진 땅 위로 살포시 떨어진다. 결국 오늘은 새로운 무기 들이 빛을 보지 못하는 날이다. 양쪽 진영 모두 장군에 멍군을 불렀던 것이다. 오후 세시에 전투의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개미들의 시체가 내뿜는 올레인 산이라는 특이한 발산물이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 다. 4시 30분에도,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남은 다리가 뚜 개밖에 없어도 아직 서 있을 수 있는 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개양귀비 밑 에서 싸움을 벌였다. 전투는 다섯시가 되어서야 중단되었다. 비가 들이닥칠 것을 예고 하는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었다. 3월에 뒤늦게 우박 섞인 소나기가 내린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하늘이 땅에서 벌어지는 오랜 폭력 에 신물이 난 듯하다. 생존자들과 부상자들이 물러간다. 전투의 총결산: 사망자 500만, 그중 난쟁이개미 400만, 라숄라캉 수복. 마디가 잘려나간 몸뚱이, 구멍난 딱지, 이따금 단말마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을씨년스런 토막들이 땅 위에 까마득하게 깔려 있다. 래 커처럼 투명한 피와 노르스름한 개미산의 웅덩이가 지천이다. 끈끈이침개미들이 뱉어냈던 끈끈이물의 진창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몇몇 난쟁이개미들이 자신들의 도시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하면 서 발버둥을 치고 있다. 비가 내리기 전에 새들이 날아와 그 개미들 을 쨉싸게 쪼아먹는다. 먹장 구름을 비추면서 번개가 번쩍거리자, 그 불빛에 아직도 위턱 을 오만하게 세우고 있는 전차의 등딱지가 반짝거린다. 그 위턱의 뾰족한 끝으로 멀리 있는 하늘이라도 구멍을 내고 싶어하는 듯하다. 배우들은 모두 돌아가고, 빗물만이 무대를 씻어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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