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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4일 토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제1독서 : 이사 49,1-6
제2독서 : 사도 13,22-26
복 음 : 루카 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형제님께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좋은 아이템이었고,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자기의 전 재산을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확신과 달리 사업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실패를 경험 삼아 방향을 바꿔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성공한 그는 과거의 실패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지우고 싶은 과거라면서 그때의 일에 대해 후회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그 실패에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 실패로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면서 말이지요.
종종 과거의 일 때문에 지금 힘들다는 분을 만납니다.
과거 있었던 부모의 학대가 떠올려서 괴롭다고 말하고,
친구의 배신으로 지금 자신이 이렇다면서 도저히 못 살겠다고 하십니다.
과거의 실패라고 할 수 있는 그 일이 지우고 싶은 시간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지금을 잘 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을 잘 사는 사람은 과거 탓, 남 탓을 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일과 사람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다면서 감사해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각자는 부정적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수도 있고
또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결정을 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수렁에 빠졌어도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과거의 일과 사람에 집착합니까?
지금 부정적 감정 안에 빠져들겠다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고,
부정적 감정 속에 빠져나가지 않겠다는 결정입니다.
자신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불신이 생긴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에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부정적 마음보다 긍정적인 마음을, 미움과 질투보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면서
하느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요한 세례자의 아버지는 천사가 전해준 잉태 소식을 믿지 않았지요.
그 결과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한 세례자의 명명식에서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에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평불만보다 하느님께서 최고의 것을 주신다는 믿음으로 그 뜻을 따랐기에
다시 입으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한 세례자은 광야에서 지내며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특히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면서
겸손의 마음으로 주님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위대한 예언자로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과거 탓, 남 탓하는 모습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고 있는가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사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는 프로였습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사건, 우리가 외면하였던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는 프로였습니다.
1992년에 첫 방송이 시작되었으니 어느덧 31년이 되었습니다.
진행자로는 ‘문성근, 박원홍, 오세훈, 정진영, 박상원’ 씨가 있었고,
2008년부터는 김상중 씨가 15년째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저도 관심이 있는 사건에 대해서는 시청하였습니다.
“경찰과 검찰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그것이 알고 싶다.’에 제보하면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것이 알고 싶다.’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곤 했습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입니다.
저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그것이 알고 싶다.’를 나누고 싶습니다.
가톨릭 전례 중, 탄생일을 기념하는 인물은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세례자 요한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탄생보다도 부활이 더 의미가 있기때문에, 보
통의 성인들은 세상을 떠난 날을 기념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경우 특별히 탄생일을 대축일로 기념하는 이유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우리의 구원의 역사 안에 깊은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 삶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첫 번째 덕목입니다.
자기 삶에 대한 반성 없이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 합당하게 나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당신 계획안에,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을 준비하시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공적으로 활동하시기에 앞서,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것을 요구하며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6월 24일이고, 예수님의 탄생은 12월 25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인 6월 24일은 절기상 ‘하지’입니다.
하지에는 낮이 가장 깁니다. 그리고 낮의 길이는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인 12월 25일은 절기상 ‘동지’입니다.
동지에는 밤이 가장 깁니다. 그리고 낮이 길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면서 낮은 짧아지기 시작하고,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면서 낮은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탄생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청하였을 때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오시다니요?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도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우리 하느님이 크신 자비를 베푸시니,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데서 우리를 찾아 오셨네.”
어르신들께서 ‘이름값’을 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본인도 불행해지고,
함께하는 공동체와 조직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름값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때로 ‘갑’질을 해서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전달하는 임무를 지닌 천사입니다.
성모님께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요셉 성인에게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저의 세례명이 가진 뜻처럼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전하며 저의 이름값을 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매일 복음 묵상도 계속 전하고,
제게 주어진 직무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고,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영광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을 공경하는 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의 이와 같은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영광은, 하느님께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탄생 이야기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받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막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그 경이로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시 139,4)
또한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통 속에 감추셨다."(이사 49,1-2)
" ~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이사 49,5)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 존재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사실 그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아기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리아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는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개입)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그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만약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리해 버린다면 요한의 탄생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 넣으소서.
제 몸에 새겨진 당신 소유의 이름을 드러내 주소서.
당신이 주신 이름을 제 삶의 서판 위에 새기고,
당신이 주신 소명을 살게 하소서.
오늘 제 삶 안에서 당신이 뜻하신 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아기 이름은 요한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이다.
탄생일을 축일로 지내는 성인은 성모님 외에 요한 세례자 한 분이다.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요한이란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또한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잉태된 기적 같은 출생은,
죽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깨우는,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설교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 한다.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언어장애인이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다.
성인은 그 누구에게도 옳은 것을 말할 때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주장한 분이다.
이 때문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으셨다.
오늘 복음과 같이 요한은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탄생했지만,
주님의 모습과 같이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됨을 볼 수 있다.
결국에는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선구자로서 외롭고 힘든 삶이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삶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이었음과 같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게 해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도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결심하며
그분과 같이 굳센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요한이라는 이름은 “불쌍히 여기신다, 자비를 베푸신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도구 역할을 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이름은 ‘예수’ 곧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라는 이름과 함께 쓰여야 문장이 완성됩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신다!”라는 뜻이 될 때
그분의 뜻을 완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요한3,30)고 하였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루카3,16) 하시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앞세웠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나는 목소리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사막의 목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요한의 신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리고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물론 자기 소신을 표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신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 소리만 키우고 기대하며 강요함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더 크고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요한처럼 철저히 자신의 역할을 알고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낸 요한은
오직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을 앞세우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지만,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말씀이 살아있었습니다.
사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목소리가 되어 용감하게 그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곧 자기 신랑에게서 빛을 받으며 그분이 커지도록 작아져야 하는 신비의 교회 입니다...
요한은 우리를 위해, 교회를 위해 언제나 말씀에 봉사하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 교회의 모델입니다.”
우리도 요한처럼 철저히 주님을 가슴에 담고 그분을 위해 산다면
우리의 주변은 참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이 커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때마다
요한의 삶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친척들은 아기에게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젊은 날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돌계집(石女)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엘리사벳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하느님의 뜻에 의심을 품어
잠시 벙어리가 되는 아픔을 겪고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을 속 깊이 만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름을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아기는 하느님께서 주셨고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은총을 받았으며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에 대해 감사하고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을 더 크게,
그리고 우선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더 커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말
이제부터 쓸데없는 말은 절대 안 할 거야.
말이 많아서 도움 되는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얘,
내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한번 들어 볼래?
(이규경) **
즈카르야 노래의 작곡자는 하느님, 작사자는 성령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끔 수녀님들 연피정을 동반해드리는데,
저희 남자 수도자들보다 훨씬 침묵을 잘 지키십니다.
사오십 명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하는데, 정말이지 쥐 죽은 듯 조용합니다.
잘 적응이 안 되는 저는 소화가 잘 안돼, 끼니를 줄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은 그럭저럭 참을만한데, 일주일, 8박9일, 30일 대 침묵 피정,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큰 괴로움입니다.
특히 차 한 잔 앞에 두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술 한잔씩 들이키며 술술 풀어놓아야 쌓인 것이 풀리는 사람들에게 있어
대 침묵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10개월간의 대 침묵 피정에 참석했습니다.
그 10개월 동안 얼마나 할 말이 많았을까요? 억울한 심정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타의에 의해서 10개월 동안 말을 못 하게 되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 즈카르야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10개월 만에 혀가 풀리고 말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10개월 만에 말을 하게 된 즈카르야가 내뱉은 첫마디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 대한 투덜거림이었을까요?
강한 분노의 표출이었을까요?
자신이 뭐 그리 큰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강한 벌칙을 주셨냐며, 하느님께 따졌을까요?
모두 아니었습니다.
즈카르야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첫 마디는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찬가 즈카르야의 노래였습니다.
저희 수도자들은 매일 아침기도 때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바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구약을 완성하기 마지막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하느님께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동시에 메시아의 탄생을 고대하는 희망의 노래입니다.
이런 희망과 환희와 감사로 가득 찬 즈카르야의 노래와 더불어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라는 의미에서 아침마다 이 노래를 바치는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 탄생 사화의 결론입니다.
즈카르야 노래의 작곡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작사자는 성령이십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즈카르야의 신앙고백입니다.
즈카르야의 깨어남은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미하는 즈카르야의 노래로 연결됩니다.
즈카르야가 찬미가를 부르는 순간은
그간 지니고 있었던 모든 불신과 의혹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입니다.
즈카르야가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자기중심적 삶을 넘어 참된 하느님의 사제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눈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은
또 다른 즈카르야의 노래를 부를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다시금 자비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새 출발의 순간입니다.
세례자 요한 :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
박상대 마르코 신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함께 살아간다.
부모를 잃고 피를 나눈 형제도 없는 혈혈단신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없어 봉양을 받지 못하는 독거노인이라 할지라도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또 살아가야 한다.
이 땅에서 아무도 홀로 살지 않는다.
누구나 아이로 태어나지만 시간이 흐르면 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며, 노인이 된다.
주어진 공간에서 함게 일하고, 모르는 사람이라도 길가를 서로 스쳐가며,
같은 하늘 아래서 숨을 쉬며 살아간다.
매일 같은 사람을 만나고, 낯선 사람과 친분을 쌓으며,
이럴 줄 앓았던 사람의 또 다른 저런 면을 체험하기도 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하기도 하며, 속이고 죽이기도 한다.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 때문에 아파한다.
그러다가 삶의 실존과 진면목을 깨달을 때면 원하든 않든 하나씩 순서없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뜻하지 않는 불의의 사고로 선뜻 가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아픔은 실로 크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며, 다 똑같다.
그런데 살아있는 동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재물이 좀 있고, 권력이 좀 있다하여,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종교와 이념이 다르다 하여 자신의 것을 강요하며,
타인의 생명과 삶을 가볍게 여겨 무참히 짓밟고 앗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사람의 마지막은 모두 다 같다.
그래서 나는 동안 늘 易地思之의 덕을 발휘해야 한다.
세상의 사람이 다 같다고 했지만 유독 다른 한 사람이 있다.
그를 두고 하느님이신 예수께서는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마태 11.11)고 말씀하셨다.
세례자 요한이 이 세상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큰 인물이라는말이다.
왜 세례자 요한만이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홀로 가장 위대한 사람인가?
오늘 그의 축일을 맞아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12월 25일 예수님의 성탄대축일을 정확히 6개월 앞두고
교회는 오늘 성 요한 세례자의 탄생을 대축일로 기념한다.
교회의 공식 전례에서 성모 마리아(9월 8일)을 제외하고
지상 탄생을 경축하는 성인은 세레자 요한뿐이다.
세레자 요한에 대한 이러한 대우는
방금 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른 합당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례자 요한의 놀라운 탄생 예고 또한
하느님의 구원역사 안에 자리 잡은 요한의 무게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아울러 요한은 탄생 이전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예수를 잉태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인사를 통하여 거룩함을 영접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구원사적 역할은 우리가 그의 탄생을 경축할 만큼 중요하다.
첫째로 요한은 옛 계약과 새 계약의 연결역할을 담당한다.
요한의 출현으로 舊約은 중지되고 新約이 시작된다.
둘째는 요한이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使者로 파견되어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으며,
예수님 스스로도 그에게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하였으나, 요한은 자신을 이미 도래한 메시아에 비하여
그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비천한 존재로 소개하였으며,
말씀이신 성자에 비하여 자신은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는 광야에 살면서 단식과 참회, 금욕과 기도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의 사람들과는 달리 살았던 것이다.
많은 보통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와 죄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았으며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사람들을 예수께 넘겨준다.
이 사람을 두고 예수께서는 모든 예언자를 능가하는 훌륭한 사람이며,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엘리야가 바로 요한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 왜 세례자 요한이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홀로 가장 위대한 사람인지가 밝혀졌다.
그러나 아직 다 밝혀진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도 그 한 부분을 말해준다.
루카복음사가는 다른 사가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탄생 범주 안에서
요한의 탄생 예고, 탄생, 할례식(루카 1장),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전도(루카 3장)를 독자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두고 기뻐하는 부모와 그 이웃과 친척들의 모습과
율법에 따른(창세 17,9-27) 아기의 할례식을 들려준다.
아기의 탄생과 割禮는 이름을 짓는 命名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 순간 10달 동안 벙어리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즈카리야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양하게 된다.(루카 1,67-79)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을 가진 ‘요한’의 이름에서 보듯이
모든 사람들은 요한의 탄생을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 아이를 통하여 무슨 일을 계획하고 계신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단지 그들은 무엇인가 대단한 것의 序曲이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그것은 무언가 가까이 계신 하느님의 숨결이
오늘 이 작은 아이의 탄생 안에서 경이로운 기쁨으로 채워지고 있음이다.
오늘 태어난 이 작은 아이가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것,
사람이 하느님의 오실 길을 고르고 닦으며 준비하고 있는 바로 이것이
세상의 모든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만이 홀로 위대한 이유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들의 삶을 살아가지만,
유독 요한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김 성심 수녀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60)
이웃과 친척들이 모두 그런 적이 없다며 안 된다고 할 때,
남편조차 말할 수 없어 함께 하지 못할 때 엘리사벳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예전처럼 하자’고 할 때 ‘안 된다’고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쓴 순간을 기억하지만,
그에 앞서 엘리사벳의 분명한 의견 표명이 있었고
그 덕에 사람들이 즈카르야 쪽으로 시선을 돌렸음을 루카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엘리사벳의 용감한 ‘안 됩니다’.
묵상의 시작은 엘리사벳이 아니었습니다.
이웃과 친척들이 부모 대신 이름을 지으려 하고,
아기의 어머니가 지으려는 이름을 막아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내키지 않는 마음을 조용히 따라가 봤더니 이윽고 엘리사벳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성모님의 피앗 같은, 엘리사벳의 '안 됩니다'.
이 용감한 여성의 단호한 ‘안 됩니다’는 요한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안 된다고 외치며 세속을 등지고 광야에서 살았고,
예수님께는 세례를 드릴 수 없다 생각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접고 결국 세례를 드렸고,
자신을 메시아로 여기는 이들에게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며 스스로를 낮추었고,
헤로데에게 안 된다고 간언했고, 결국 세상 모두가 가야 하는 길을 떠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가는 그 길이 하느님의 길이 아니라면,
쉽고 편한 길이거나 많은 이들이 만족하는 길이거나
내가 다치지 않는 길이라 해도 그 길이 바른길이 아니라면,
우리는 용감한 ‘안 됩니다’를 말할 수 있을까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는 더욱 용감한 ‘안 됩니다’를 마음에 품기로 합시다.
[출처] 루카 1,57-66.80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