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 내가 하리?] 임하룡을 보면 아직도 [추억의 책가방][청춘을 돌려다오]같은 코미디 코너에서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늙은 학생이나 건달 보스를 연기하던 모습을 떠올린다. 그 흔적들이 우리 머리 속에 남긴 인상은 너무나 강렬해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압구정동 골목에 있는 그의 건물 1층 커피숍에 만난 배우 임하룡은 이것이 고민이었다. 그 며칠 전 [웰컴 투 동막골] 시사회의 무대인사에서 임하룡은, [신인 배우 임하룡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사람들은 크게 웃었다. 그러나 임하룡은 진짜, 사람들이 자신을 신인 배우로 바라봐 주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지난해 임하룡은 [범죄의 재구성][아라한 장풍 대작전][그녀를 믿지 마세요][아는 여자] 등 네 편의 영화와 뮤지컬 [풀 몬티]에 출연했다. 그리고 올해 그가 주연을 맡은 박광현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이 개봉한다. 그가 출연한 이 작품들의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매우 선구안이 뛰어나다. 배우로서 성공하는 첫 번째 관문이자 마지막 관문은, 좋은 작품을 보는 눈이다. 그는 이미 배우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다.
[대본을 한 번이나 두 번 읽어서 마음에 들면 하고, 지루하면 안해요. 단역이라도 내가 마음에 드는 작품에만 출연해요. 그게 좋아. TV의 오락 프로그램은 일부러 자제하고 있어요. 연기를 위주로 하는 프로그램이라면 하겠는데, 오락 프로그램은 안 나가요. 아직도 나를 개그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를 보며 웃음에 대해서 기대하니까. 그래서 5년을 기다렸지. 지난 5년 동안 방송을 거의 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나의 예전 이미지가 사라질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2000년부터 그의 모습을 방송에서 보는 것은 힘들어졌다. 그것은 자의반 타의반이다. 그와 비슷한 연배의 개그맨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 [개그 콘서트]나 [웃찾사]에서는 빠른 호흡의 개인기를 위주로 진행되었고 임하룡처럼 연기를 위주로 하는 개그맨들은 방송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는 방송을 쉬면서 연극을 제작할 생각을 했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장진 감독이다. 장진 역시 TV 프로그램의 작가도 했고 출연도 한 경력이 있어서 그의 고민을 잘 알고 있었다.
장진 감독은 임하룡에게, 장진 사단에서 제작하는 단편 옴니버스 영화 [묻지마 패밀리]의 출연을 권했고, 임하룡은 박광현 감독의 [내 나이키]라는 단편에서 택시 운전기사역을 했다. 달동네에 사는 주인공의 아버지 역이다. 임하룡이 영화에 출연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철부지들][미스터 코란도 미스 꼬뿔소][할렐루야] 같은 작품에 까메오 출연도 했었다. 신승수 감독의 [얼굴]에서는 아주 비중있는 역할을 했는데, 내가 배우 임하룡을 눈여겨 본 것은 [얼굴]부터였다.
2002년 LG 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린 장진 각본, 연출의 [웰컴 투 동막골]에서 임하룡은 인민군 하사 역을 맡았다. 그리고 그 작품의 영화화가 기획되면서 일부 배역은 자리바꿈이 있었지만 임하룡은 인민군 하사 역으로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사실은 [웰컴 투 동막골] 제작이 늦어져서 그것을 기다리는 동안, 지난 해 4편의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지난 해 9월부터 촬영에 들어가서 올 2월말에 촬영이 끝난 [웰컴 투 동막골]은 제작비 80억원이 넘게 투입된 대작이다. 겨울동안 강원도 평창과 횡성 등 대관령 일대에서 촬영을 해서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춥고 힘들었지만 그는 하고 싶은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왜 영화를 하고 싶은 걸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니까, 막 할 수 있잖아요. 가령, 임하룡이가 숫기가 없다. 나중에 후천적으로 까불까불하고 춤도 추고, 그것은 영화나 쇼 구경을 많이 해서 그런 거고 원래 본 모습은 숫기가 없어요. 지금도 연극 무대에서 처음 막 올라갈 때는 너무나 떨어요.]
한국 전쟁 도중 국군 2명과 인민군 3명 미군 1명이 강원도 깊은 산 속 동막골에 모여 전쟁의 시름을 잠시 잊고 인간적인 교류를 나누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임하룡은 아주 서민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의 표현으로는 군대 가면 소 한 마리 준다니까 얼른 합류한 시골 출신의 인민군 하사관이다.
박광현 감독은 데뷔작 [내 나이키]에서도 임하룡을 서민적인 아버지의 모습으로 출연시켰다. 그동안 임하룡은 깡패 대장이나 아버지 등 가부장적 역할을 많이 했는데, [내 나이키]에서의 아버지는 특히 소시민적이고, 여리고, 눈물 많은 역이었다.
[내 감추어진 부분을 잘 끄집어내서 난 고맙고, 어떻게 저렇게 나를 잘 아나, 연기하기는 너무 좋죠. 오버하지 않고, 내가 눈물이 많거든요. 예전서부터 방송 할 때도 웃기기만 하는 코미디 연기보다는 약간 애틋한 뭔가 있는, 또 기승전결이 있는, 그런 코미디를 좋아했어요. 짧은 브릿지 코너보다는 십분 분량의 콩트 코미디가 잘 맞아요.]
[웰컴 투 동막골]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멧돼지를 먹는 장면이다. 웃음 하나 하나에도 감정을 줘야 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임하룡이 인민군 소년병에게 [내래 인간 죽여 봤어?]라고 묻는 부분이 있다. 스텝들도 연기를 잘했다고 칭찬했는데 다른 씬과의 연결 때문에 삭제된 것을 그는 무척 아쉬워했다. 신승수 감독의 [얼굴] 때부터 그를 눈여겨 봤다고 말하자, 그는 [[얼굴] 때는 내가 준비가 조금 덜 됐어요. 더 마음을 비우고 헤어스타일도 바꾸고, 좀 더 시골 깡패다워야 했는데, 도시의 멋있는 깡패를 흉내 낸 게 조금 아쉽고 후회스러워요. 어떤 작품이든 후회되지만 [얼굴]은 특히 그게 아쉬웠지]라고 말했다.
그는 배역을 맡으면, 일단 캐릭터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립한다. 대본 읽으면 캐릭터에 대한 기본은 나온다. 거기에다 감독과 이야기를 하고 주위 배우들과 상의를 해서 조금 더 구체화시킨다. 기존의 영화나 이런 쪽의 작품에서 그 모델을 찾으면 너무 비슷하니까 일반인들에게서 배역과 비슷한 인물을 찾아 연구하기도 한다.
임하룡의 연기는 50이 넘은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때 묻지 않았고 순수한 힘이 있다. 강혜정은 [월컴 투 동막골]의 시사회에서 임하룡의 내면연기에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의 연기가 너무 조심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배우들이 액션을 하면 괜찮은데 내가 하면 감독님을 비롯해서 주위에서 말려요. 나 스스로 조심스러운 것도 있지만, 영화라는 것이 이것저것 다 해보고 거기에서 엑기스를 뽑아내는 것인데, 오버 액션보다는 내면의 감정을 표출하는데 더 신경을 쓰지요.]
그는 아직도 자신의 연기를 볼 때는 어색하다. 어떤 때는 닭살이 돋는다. 극장 의자에 앉아서 커다란 스크린에 펼쳐지는 자신의 연기를 보며 다른 사람들은 무심하게 넘어갈 디테일 한 부분들,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을 부분들을 체크한다. 의상이나 분장 등 외모적인 부분부터, 내면적인 연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바둑 기사들이 대국을 끝낸 후 복기를 하듯 자신의 연기를 검토한다.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임하룡은 웬만하면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한다. 정 답답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묻기야 하지만, 그 이전 이미 스스로 결정을 내린 상태다. 오랫동안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도 이렇게 모든 것을 혼자 판단하고 혼자 결정해왔다. 그것은 그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립심을 키워주는 힘으로도 작용을 했을 것이다.
[나중에 더 공부하고 노력해서 김승호, 최불암, 신구 선생님들처럼 우리 시대의 아버지 상을 그려보고 싶어요. 그 다음에 해 보고 싶은 캐릭터는 허장강 선생님, 또 잭 니콜슨이나 [넘버3]의 송강호 같이 광기 있는 그런 역도 해 보고 싶고 도전해 보고 싶지]
영화 제작에 대한 꿈은 없는가 의향을 떠봤더니, 아이디어는 한 두 개 있지만 그것을 영화적으로 완성시키는 과정은 너무 힘들 것 같다면서 [지금은 내가 연기를 선택받아서 하는 걸로 만족하고 이것만으로도 공부할 게 많으니까, 제작은, 잘 하시는 다른 분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난 능력 부족이라 힘들고, 다만 연기에 전념해 볼 생각입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전 지금도 그렇지만, 착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배우로서, 연예인으로서, 저를 바라볼 때 어느 분야에 가서든지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인식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신인 배우 임하룡. [웰컴 투 동막골]의 좋은 연기로 앞으로 그를 찾는 영화들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서 [이 나이에 내가 하리?]를 떠올리는 관객은 많지 않게 될 것이며, 좋은 작품 속에서의 그의 연기를 오래도록 기억하는 관객들이 늘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