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8월 15일 오전 10시께 인도양 니코발아일랜드 해역. 지남호 선상에선 "와∼" 하는 선원들의 함성이 터졌다. 윤정구 선장을 비롯한 남상규 단장(해무청 어로과장), 이제호 지도관(중앙수산시험장 어로과장) 등은 환호성이 일어난 곳으로 급히 뛰어갔다. 그곳에선 이들이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하얀 파도를 부수며 90㎏에 달하는 커다란 참치(당시 새치)가 힘차게 움직이며 낚싯줄에 걸려 올라왔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원양에서 참치를 잡은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1957년 6월 부산항서 출항
8월 15일 인도양서 첫 참치 잡아
이승만 대통령도 "잘했다" 칭찬
어획물 50t 중 5t 미국에 수출
■첫 참치 잡기까지 여정
우리나라가 원양어업으로 첫 참치를 낚기까지의 과정은 절대 쉽지 않았다. 1957년 6월 29일 첫 원양 출어라는 부푼 꿈을 안고 부산항을 나선 지남호는 다음 날 일본 시모노세키에 입항한다. 이곳에서 지남호는 7월 10일까지 먼바다로 나가는 데 필요한 부분을 수리했다. 연료와 선용품, 음식도 보충했다. 같은 달 17일에는 대만의 가오슝에 입항했다.
18일에는 대만 동쪽 바다로 나가 참치를 잡기 위해 낚싯줄을 던졌다. 참치 연승어업이었다. 이 방식은 한 가닥 기다란 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가짓줄을 달고 그 끝에 낚시를 단 어구를 사용해 참치를 낚는다. 결과는 어땠을까? 허탕이었다. 당시 국내 선원들은 참치 연승어업과 관련된 지식도 경험도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지남호에는 참치를 잡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단 한 명 있었다. 모건이라는 미국인이었다. 그는 당시 주한 경제조정관실 수산고문관이었는데 오랫동안 참치 어선의 선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건은 선원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참치를 잡는 기술을 가르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날 조업에선 큰 문제도 발생했다. 모건의 허리 통증이 재발했다.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결국, 모건은 대만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지남호는 참치잡이 기술고문이었던 그를 대만에 남겨 두고 인도양을 향해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지남호는 인도양을 향하던 중 싱가포르 해역에서 참치잡이에 나섰다. 하지만 역시 성과는 없었다. 지남호에선 연료도 떨어져 가고 있었다. 남은 연료로 싱가포르까지 갈 수는 있었지만, 인도양으로 향할 수는 없었다. 연료를 살 돈도 부족했다. 그때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다. 당시 싱가포르에서 유일했던 한국인 무역회사인 한국무역진흥회사가 연료 구매대금을 빌려줬다. 이 돈으로 지남호는 연료와 식량, 선용품을 구매하고 8월 11일 싱가포르를 떠났고 같은 달 15일 인도양에서 처음 참치를 잡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날 어획량은 0.5t이었다. 조업 후 선원들은 자축 파티까지 열며 함께 기쁨을 나눴다.
■국내로 띄운 낭보
"드디어 참치를 잡았습니다." 참치를 처음 잡고 난 뒤 남상규 단장은 국내로 무전을 쳤다. 광복절에 뜻깊은 소식이 국내에 전해졌다. 지남호를 출어시킨 제동산업 관계자들과 휴일 당직 근무를 하던 해무청 직원들은 환호했다.
지남호는 8월 30일까지 조업을 계속했다. 어획량은 하루 평균 0.5∼1t 정도였다. 하지만 물이 부족했다. 양치질과 식수 외에 물을 제한했지만, 더는 버티지 못하고 8월 30일 싱가포르로 가야 했다. 이곳에서 물과 식품을 보충한 지남호는 10월 11일 부산에 귀항했다.
당시 인도양 참치 조업은 국가적인 관심사였다. 이승만 대통령도 참치 조업 성공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이 대통령은 심상준 제동산업 대표를 만나보겠다고 했다. 심 대표는 지남호의 어획물 중 가장 큰 참치를 가지고 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이 대통령은 매우 만족해했다. 이 대통령은 "아주 잘했다"면서도 "이 일이 너무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당시 참치잡이에서 큰돈을 벌던 일본이 우리를 방해할까 봐 우려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국내 참치잡이 성공은 상당 기간 국내에 보도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경무대 뒤뜰에 참치를 놓고 기념 촬영을 하고 직접 만져보기도 했다. 이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참치를 조금씩 잘라 주한 외교관들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제동산업은 지남호 어획물 50t 중 5t을 비행기 편으로 미국으로 보냈다. 참치 수출의 효시였다.
■원양어선 1호 지남호
원양어업 역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선박이 있다. 바로 처음 참치를 잡은 역사적인 순간을 지켰던 지남호다. 지남호는 미국 시애틀 수산시험장 연구를 위한 종합 시험선이었다. 1946년 미국 정부가 건조를 의뢰해 오리건 주 아스토리항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선명은 'SS Washington'이었다. 예산 49만 달러로 건조된 이 선박은 600마력에 달하는 디젤엔진을 부착한 230t급 강선이었다. 당시로선 드물게 냉동·냉장설비, 무선 방향 탐지기, 어군 탐지기 같은 최신 전자장비도 갖췄다.
3년 뒤 한국은 수산업 발전을 위해 이 선박을 인수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지남호'라는 선명을 지어주며 깊은 관심을 표현했다. 지남호는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부를 건져 올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남호는 큰 관심을 받으며 국내로 들어왔지만, 1957년 인도양 출어 때까진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국내에 대형 선박인 지남호를 어선으로 활용하거나 운항할 경험 있는 인력이 드물어서다. 별수 없이 지남호는 당시 외자청 소속으로 해상순시선이나 제주도 출장 용도로 사용됐다. 부산에서 제주나 여수로 의약품 수송을 맡기도 했다. 지남호는 1951년 제동산업에 인수되면서 마침내 원양 출어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꿈을 이루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원양 출어 전에 지남호가 잡은 참치를 구매할 외국 업체들을 찾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외국 원조로 먹고사는 한국이 참치를 어획할 기술과 자금, 장비가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상황이 어려웠지만, 제동산업은 끈질기게 문을 두드렸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드디어 통조림회사인 사모아의 밴 캠프사는 지남호가 참치를 어획한다면 구매하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원양으로 출어할 수 있었다. 지남호는 1957년 첫 출어 이후 1958년에도 남태평양으로 나가 1년 3개월간 150t의 어획고를 올렸다. 김종균 기자 kjg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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