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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재는 내친구 원문보기 글쓴이: 장진호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
‘하여가’와 ‘단심가’는 우리가 학창 시절에 가장 흥미 있게 배운 시조 작품 중 하나이다. 이방원과 정몽주 사이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말, 왕조의 운명이 다해가던 격동의 시기에 탄생한 ‘하여가’와 ‘단심가’는 단순한 시조를 넘어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자와 끝까지 신의를 지키려는 자 사이의 치열한 정치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14세기 말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한편,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국력이 쇠퇴한 상태였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 등의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사대부가 중앙 정계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신진사대부는 고려라는 틀 안에서 개혁을 꿈꾸는 온건파(정몽주 등)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급진파(정도전 등)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성계는 1392년 3월 초 해주에서 사냥하던 중에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는데, 정몽주는 이를 계기로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계기를 마련하고 그 정황을 엿볼겸하여 이성계를 문병한다. 이때 이방원은 낙마한 이성계를 문병 온 정몽주에게 시조 한 수를 읊는다. 이른바 정몽주를 회유하는 내용을 담은 ‘하여가’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고려든 조선이든 상관없으니, 대세를 받아들이고 함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동참하자는 회유다.
하지만 정몽주는 뜻을 굽히지 않고 ‘단심가’로 자신의 일편단심을 표현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죽음을 맞이할지언정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다는 단호한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정몽주의 뜻을 알게 된 이방원은 문병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조영규 등을 시켜 격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영규 일파가 선죽교 다리 아래에 숨어 있다가 돌아가는 정뭉주를 철퇴로 때려죽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선죽교 사건이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선지교에서 이후 충절을 뜻하는 핏자국이 선명하고 그 자리에 대나무가 돋아 선지교라는 다리 이름이 선죽교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하여가’와 ‘단심가’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의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하여가’와 ‘단심가’가 정말로 그 당시 그 자리에서 지금 전하는 바와 같은 작품이 만들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만약에 지어졌다 하더라도 그때는 한글이 없었으니까 말로 읊었을 것이다. 그 말을 옆에서 누가 듣고 그대로 후대에까지 전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러한 상황적 전개를 실재라고 추측하기는 심히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 옆에 있던 그의 부인 재클린이 “오 노(Oh no)” 라고 말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그러자 얼마 후에 이것이 신문기자가 지어낸 거짓 기사임이 밝혀졌다. 그 상황을 신문기자가 옆에서 직접 보고 듣지 않고서는 그렇게 쓸 수가 없는데, 그런 상황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방원과 정몽주 사이에 벌어진 사건도 이와 비슷하다. 그 사건을 누가 옆에서 보고 한글도 없던 당시에 그것을 무엇으로 적어냈을까? 이방원은 이미 정몽주를 죽이기로 결심을 한 사람인데, 문병 온 사람을 앞에 앉혀 놓고 그러한 시 잔치를 벌일 수 있었을까?
이때 이방원의 나이는 26살이고 정몽주의 나이는 51살이었다. 이방원의 아버지인 이성계는 1335년생이고 정몽주는 1337년생이니 두 사람의 나이는 비슷하다. 그러니 이방원에게 정몽주는 자기 아버지뻘이다. 그때는 이방원의 아버지인 이성계도 왕이 아니었고 이방원 자신도 벼슬길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런데 이방원이 아버지뻘인 정몽주를 상대로 하여 그런 시 놀음을 할 수 있다고는 단정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시조 자체로 보더라도 너무 짜임새가 완벽하고 비유법도 뛰어나다. 아무리 시적인 재주가 뛰어나다고 해도 문병 온 사람을 맞이한 자리에서 이러한 고도의 문학적 작품이 즉석에서 이루어졌다고는 퍼뜩 이해가 되지 않는다. 특히 고려말에는 이제 시조가 둥지를 틀고 세상에 나올 무렵이라서 일반화되어 있을 때도 아니다. 이성계 일파의 사정을 엿보기 위하여 문병이라는 이름을 빌려 방문한 정몽주로서도 아들 같은 사람 앞에서 그러한 시조를 즉석에서 읊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정몽주나 이방원이 뛰어난 시조 작가도 아니다. 그들이 썼다고 하는 작품은 이들 작품 외엔 없다.
지금 우리가 대하는 이 작품들은 1728년 김천택이 지은 청구영언에 처음으로 실려 전한다. 정몽주가 죽고 난 후 300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이것을 보더라도 이들 시조가 그 당시에 지어진 것이라고는 확정할 수가 없다. 또 1433년(세종 15년)에 발간된 포은의 문집인 포은집(圃隱集) 초간본에도 이들 작품은 실려 있지 않다. 세종의 명으로 권근 등이 주도하여 간행된 초간본에는 ‘하여가’와 ‘단심가’가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행장’이나 ‘묘지명’ 등은 실렸으나, 국문 시조인 두 노래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그러니 이때까지도 하여가와 단심가는 세간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다만 ‘하여가’와 ‘단심가’가 “포은집”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중종 12년(1517년)에 간행된 중간본부터다. 그것도 포은의 시나 문이 아닌, 부록 성격인 ‘별록(別錄)’에 수록되어 있다. 그것도 시조 원문(한글체)이 실린 것이 아니라, 한문으로 된 한시의 형태로 실려 있다.
此身死了死了(차신사료사료) 이 몸이 죽고 죽어
一百番更死了(일백번갱사료)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백골위진토) 백골이 진토되어
魂魄有也無(혼백유야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향주일편단심)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寧有改理也歟(영유개리야여) 가실 줄이 있으랴
그런데 정몽주의 초간본 문집에는 두 시조가 전하지 않고 후대의 중간본에만 실려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일까? 이것은 원래 그 존재가 없던 두 시조가, 이후 성리학적 의리론이 강화되던 조선 중기에 이르러 정몽주의 충절을 상징하는 이야기가 중요해지면서, 만들어져 중간본의 부록에 한역된 형태로 비로소 실리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정몽주라는 인물이 ‘만고의 충신’으로 박제화되는 과정이 맞물려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라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이 시조는 정몽주라는 인물의 충절을 드러내기 위하여 뒷날에 꾸며진 것임을 보여주는 증좌가 된다.
‘하여가’도 부록인 ‘별록(別錄)’에 실려 전하는데 이것 또한 한문으로 되어 있다.
如此亦如何 (여차역여하) 이렇게 한들 또 어떠하며
如彼亦如何 (여피역여하) 저렇게 한들 또 어떠하리.
城隍堂後垣 (성황당후원) 성황당 뒷담장이
頹落亦何如 (퇴락역하여) 무너진들 또 어떠하리.
吾輩若此爲 (오배약차위) 우리들도 이와 같이 되어
不死亦何如 (불사역하여) 죽지 않은들 또 어떠하리.
이 한시는 우리가 배운 하여가의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와 비교했을 때, 2행과 3행의 표현이 다르다. 국문 시조의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는 ‘성황당 뒷담장이 무너진들 어떠하리’로 표기되어 있다. 또 오늘날의 ‘하여가’는 ‘백년ᄭᆞ지 누리리라’로 되어 있는데, 한시는 ‘죽지 않은들 또 어떠하리’로 적혀 있다. ‘성황당 뒷담장’이 ‘만수산 드렁칡’과 같이 만수산이 들어간 것은 오래 살기를 바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만수(萬壽)라는 말이 ‘오래 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수산은 개성 서문 밖에 있는 산인데 고려의 7릉(七陵)이 있다. 이 만수산은 시조집 대동풍아(大東風雅)에 실려 있는 작품에도 나오는데, ‘만수산 만수봉에 만수정이 잇더이다 / 그 물로 비진 술을 만수주라 하더이다 / 진실로 이 잔 곧 잡으시면 만수무강 하오리다’라는 것이다. 하여가에 나오는 만수산도 이처럼 오래 같이 살자는 뜻으로 씌었다.
또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城隍堂後垣(성황당후원)이 城隍堂後苑(성황당후원), 또는 城隍堂後壇(성황당후단) 등으로 전해온다. 이는 시대를 내려오면서 옮기는 이에 따라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해동악부”는 조선 광해군 9년(1617)에 심광세(沈光世)가 지은 역사 시집인데. 신라 때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역사적 사실에서, 자녀 교육에 도움이 되는 시 44편을 뽑아 간추려 엮은 책이다.
이로 보아 ‘하여가’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단심가’도 정몽주가 죽을 당시에 지은 시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이 작품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선죽교 이야기도 황당하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맞아 죽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도 선죽교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없고, 조영규 등이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죽였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또 조선의 기록 어디에도 정몽주와 관련된 선죽교 이야기는 전하는 바가 없다.
정몽주와 선죽교 관련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최립(崔岦 1539~1612)이 쓴 ‘선죽교’란 시다.
선죽교를 마음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지 不用傷心善竹橋
망하는 나라 위해 충신이 죽는 건 당연한 일 忠臣自合死前朝
지금도 우리나라에 가득한 멋진 구절 只今秀句天東滿
한 가락 높이 노래하니 세상이 동요하네 高咏河山爲動搖
최립은 조선 중기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문인이다. 임진왜란과 광해군 즉위 무렵 외교 문서를 담당하였던 사람이다. 이에서 보듯 선죽교 관련 이야기는 16세기에 와서의 일이다. 정몽주가 죽은 지 200년 뒤의 일이다.
시에는 ‘포은이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곳이다’라는 주를 달았다. 시인은 충신이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였다. 정몽주는 충신의 도리를 다한 인물이라는 의미이니 이 말은 정몽주에 대한 최고의 칭송이라고 하겠다.
1581년 윤두수도 선죽교의 핏자국 이야기를 슬그머니 흘린다. 포은을 남송 시대의 충신 문천상에 비유하면서 “선죽교에 천년의 푸른 피가 남아 있다”고 ‘성인록(成仁錄)’에 기록한 것이다. 뒤이어 허균 역시 그의 “성소부부고”에 “선죽교 위에 뿌려진 한 줄기 피(善竹橋頭一腔血)”라 했다. 급기야 1740년 선죽교를 찾은 영조는 “포은의 곧은 절개는 태산처럼 높다”는 글씨를 써서 비문에 새긴다. 1882년 고종은 “선죽교 위 혈흔이 마치 새 것인 양 뚜렷하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임금들까지 나서 포은의 ‘선죽교 순절’을 공인했으니 선죽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충절의 성역으로 굳어졌다.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충신 정몽주를 높이 받드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어서 이 핏자국 이야기는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선죽교’란 시에도 등장한다. 그럼 시를 한번 보자.
철퇴에 솟구친 피 물속에 흩어지니 血激轟椎走水中
고기들도 성내어 뼛속까지 붉게 물들어 群魚拂鬱骾皆紅
선죽교 붉은 흔적에 붓 적셔서는 持毫滿潛橋痕紫
슬픈 노래 써서 영웅의 넋을 위해 눈물 흘린다 寫出悲詞泣鬼雄
이 시를 쓰고 나서 이덕무는 직접 선죽교를 찾아가서 ‘붉은 흔적’을 찾았으나, 흔적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는 ‘선죽교를 찾아 돌위를 맴돌았으나 충신이 뿌린 피 흔적이 보이지 않아 혼자서 석표(石標)만을 만지다가 돌아왔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니 선죽교의 핏자국 이야기도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임이 확실하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하여가와 단심가는 이방원과 정몽주가 직접 지은 시조가 아니라, 조선시대에 와서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충신을 기리고 받드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규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단종과 사육신이 당시에는 역적이었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들의 충절이 높이 받들어지면서 복위되고 복권된 경위와도 유사하다. 유교의 본령인 충(忠)과 효(孝)를 높이 받드는 조선 사회가 만들어 낸 역사의 전설화이기 때문이다. 창업(創業 나라나 왕조를 처음으로 세움)보다 수성(守成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이어서 지킴)이 어렵다는 말이 있다. 숙종이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위시키고 사육신을 복권시키는 것은 조상인 세조를 섬기는 일에는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러한 수성의 작업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포은의 절개는 창업에는 걸림돌이지만 수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정권을 잡은 이상 만고충신의 상징으로 포은을 추앙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민중들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치자에게 당한 충신의 충절이 살아 있다. 이러한 기림의 마음들이 시대를 내려오면서 충신을 더욱 위대하게 만드려는 의도로 굳어져 형상화된다. 자신들이 바라는 충신으로 높여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여가와 단심가 그리고 선죽교의 핏자국과 대나무가 솟아나는 이야기로 생성된 것이다.
요약하면 ‘하여가’와 ‘단심가’는 역사의 설화화다. 충신을 높이 기리기 위하여 시대를 내려오면서 사람들의 가슴과 입을 통하여 하나의 전설로 만들어지면서 생겨난 작품이 ‘하여가’와 ‘단심가’다.
◆그런데 여기서 사족으로 붙일 두 개의 낱말이 있다. ‘드렁칡’과 ‘단심’이란 말이다.
먼저 드렁칡을 보자. 지금 모든 참고서를 비롯한 사전과 풀이책에는 드렁칡을 ‘칡덩굴이 굽이진 길을 따라 얽혀 자라는 칡’을 뜻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 풀이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드렁’이라는 말을 모르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렁’은 경상도에서 아직까지 쓰고 있는 말인데, ‘산비탈에 커다란 바윗돌들이 넓게 늘어져 있는 지형’을 가리킨다. 밀양의 얼음골 같은 지형이 바로 드렁이다. ‘들겅’이란 말도 함께 쓰인다. ‘들겅’의 ‘ㄱ’이 탈락하여 ‘들엉’이 되고 이 말이 ‘드렁’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니 ‘드렁칡’이란 이 드렁에 줄기를 뻗어 얽혀 있는 칡을 가리킨다.
이 ‘드렁’이라는 말은 이와 같이 방언에만 남아 있다. 다만 ‘드렁’과 유사한 뜻을 가진 한자어 ‘애추(崖錐)’란 말이 사전에 올라 있다. ‘급경사 진 낭떠러지 밑이나 산기슭에 풍화 작용으로 암석 조각이 굴러떨어져서 생긴 반원뿔 모양의 퇴적물’이라 풀이되어 있다.
다음으로 일편단심(一片丹心)이란 말을 보자. 일편단심은 ‘한 조각의 붉은 마음’이라는 말로, ‘속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스러운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단심’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스러운 마음’이다. ‘붉은 마음’이 왜 ‘변하지 않은 마음’이란 뜻을 가질까? 어떤 글에 ‘일편단심’은 한국어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주로 한 사람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나 충성을 의미한다’고 풀이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옳지 않다. 일찍이 소동파의 시 ‘고개를 넘으며 자유에게 부친다(過嶺寄子由)’에도 이 말이 나온다.
한 조각 붉은 마음, 하늘의 해 아래로 一片丹心天日下
두어 줄 맑은 눈물, 고개 넘어 운남으로 數行清淚嶺雲南
그런데 단심(丹心) 즉 붉은 마음이 왜 변함없는 마음을 나타낼까?
단심은 단사(丹砂)에서 유래했다. 단사는 주사(朱沙)라고도 하는 광물의 일종으로, 수은으로 이루어진 붉은색을 가진다. 영어로는 Cinnabar라고 하며, 단주(丹朱), 경면주사(鏡面朱砂), 단사(丹砂), 진사(辰砂)라고도 지칭한다. 부적은 경면주사로 그리는 것이 원칙이다. 경면이라는 말은 거울면이란 뜻인데 땅속에서 캐낸 붉은색 단사 광석에 얼굴을 비추면 거울처럼 얼굴이 비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경면주사 즉 단사는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 고급 한약재, 정신 질환자 및 갓난아기의 경기 치료제, 단청(丹靑)의 재료, 심장 신경계 질환 치료보조제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 이런 여러 효험을 지닌 경면주사는 부적을 쓰지 않고 그저 몸에 지니고만 있어도 좋다고 한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붉은색 광물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단사로 약을 조제해 먹으면 오래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게 바로 신선술에서 말하는 단약(丹藥) 혹은 영단(靈丹)이라는 신비의 약이다. 이러한 단약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마음이 일편단심이다. 그래서 붉은 단사가 변하지 않는 마음을 상징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