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월1일은 우리민족의 큰 명절인 설날이었습니다.
한 해를 잘 살아내는데 길잡이가 될 가르침 내지 아포리즘(aphorism)을 문헌에서 찾아보았습니다.
●테살로니카 1서 말씀을 중심으로 한 아포리즘: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서로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무질서하게 지내는 이들을 타이르고 소심한 이들을 격려하고 약한 이들을 도와주며, 참을성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하십시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서로에게 좋고 또 모든 사람이에게 좋은 것을 늘 추구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에너지 버스의 저자 존 고든(Jon Gordon)은 오늘의 삶을 보다 좋은 것으로 만드는 일곱가지 방법을 아래와 같이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 선을 추구하라(Look for the good)
○ 범사에 감사하라(Appreciate the little things)
○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라(Be a helper)
○ 취하는 것보다 더 많이 베풀라(Give more than you take)
○ 격려의 말을 나누고 (당신과 다른 사람에게)희망을 전파하라(Speak words of encouragement and hope(to yourself and others)
○ (생애)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어라(Believe the best is yet to come)
존 고든의 더 좋은 하루 만들기 일곱가지 방법 중 “서로 격려하고 (성장 하도록) 도우라“ 는 말은 테살로니카 1서 말씀과 괘를 같이하며 우리가 소속한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굉장히 유익한 충고 이기 때문에 생활인들이 일상가운데서 공유하며 충분히 실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격려의 반대는 비난이고 도움의 반대는 훼방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병리 현상은 서로를 향한 비난과 훼방은 차고 넘치는 반면 격려와 도움은 가뭄에 콩 나듯 매우 드물고 아주 부족합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소설 “깊이에의 강요”는 “깊이가 없다”는 한 평론가의 말에 “깊이”를 구현하려다 좌절하여 자살한 젊은 여류화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쥐스퀸트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한 신인 화가가 초대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평론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젊은 여인은 그의 논평을 곧바로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틀 후 바로 그 평론가의 비평이 아래와 같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 젊은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려 일어 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화가는 평론가의 지적에 완전히 의기소침하여 그림도 못 그리고 외톨이가 됩니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에게도 자조 섞인 말로 “저는 깊이가 없어요”하며 만남을 거절하며 자포자기상태에 빠집니다. 그녀는 알코올과 약물복용 때문에 빠르게 늙어 갔습니다. 결국 그녀는 아무런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고 상속금으로 3년을 겨우 버티며 연명하다가 돈이 떨어지자 텔레비전 방송탑으로 올라가 139미터 이래로 뛰어내려 즉사했습니다.
무심코 던진 평론가의 말 한마디가 재능이 많은 젊은 화가 한사람을 죽인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쥐스킨트의 소설을 픽션으로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현대인은 너나 할 것 없이 허약한 내공 때문에 타인의 평가에 목말라 하며 누군가의 깊이 없는 비평에 너무나 쉽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타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익명의 인터넷 공간에서 일어나는 무책임하고 악의에 찬 비평의 홍수는 정말 잔인하고 위협적입니다.
오늘날 SNS상에서 타인의 인정을 애태우며 구걸하다 많은 선량한 사람이 실망을 안고 깊이에의 강요에 나오는 여류화가처럼 무기력증에 걸려 시들어지고 있습니다. 허약한 내공을 합당한 노력 없이 타인의 인정으로 채우려는 인스턴트 성공지향 태도자체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여기서 순간적으로 타인의 인정을 편취하는 수완을 성공으로 여기는 현대인의 얄팍한 풍조와 성공에 접근 방법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점을 거듭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70여편에 달하는 저서를 펴낸 미국 최고의 석학의 한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아이삭 아시모프(Assac Asimov, 1930-1992)는 사후에 출판된 회상록에서 그가 고등학생때 선생님으로부터 입은 상처에 대해서 자세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아시모프는 열다섯살 난 고등학생으로서 맥스 N이라는 선생이 가르치던 작문반에 들었습니다. 아시모프가 쓴 글을 작문반에서 불과 1/4밖에 읽지 않았을 때 선생님은 그를 중단시켰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모욕적인 말로서 그의 글을 평했습니다. 아시모프는 그때까지 한번도 어느 선생으로부터 “쌍욕”을 들어보지 않아 그때 그 선생님의 지나치게 모욕적인 언사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마음이 아프고 모욕감에 몸 둘 바를 몰랐지만, 아시모프는 그의 회상록에서 그의 작문에 대한 N선생의 부정적인 평가가 옳았다고 시인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부정적인 평가는 그가 남의 문체를 모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생의 부정적인 반응을 가슴에 새겨 두었다가 몇 달 후에 새로운 작문을 지어내었고 N선생은 그걸 교내 문학지에 출판시켰습니다. 그건 아시모프의 생애 첫 작품이었습니다.
아시모프가 N선생에게 그 글을 출판해 준데 대해 감사를 표했을 때 그 선생은 아래와 같이 냉정하게 반응하며 아시모프에게 또한 번 큰 상처를 안겼습니다:
“그걸 출판하게 된 동기는 단지 그 잡지를 완성하는 데에 짤막한 글이 하나 필요했던 터였고 다른 글들은 모두가 심각했기에 하는 수 없었다.”
아시모프가 회상록을 섰을 당시 그의 나이 70세로 죽음을 기다린 채 몸 져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2년후인 1992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글을 읽는 분은 누구나 55년이 지난 그날까지 N선생이 준 상처가 얼마나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시모프는 N선생에 대해 “내 겐 그다지 미움이 가는 사람들이 없지만 그를 증오한다.”라고 했습니다.
조셉 텔레슈킨 이 지은 “용기를 주는 말 상처를 주는 말”에서 비평가는 비평대상에 대한 비평을 실행하기 전에 반드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해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 비펑을 하는 것에 대해 내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렇게 함으로서 어떤 즐거움이나 또는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가?
달리 말하면 첫번째 질문은 비평자의 생각에 어투나 내용이 듣는 이로 하여금 패배감을 느끼지 않고 대신 특정한 단점을 이겨 내도록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지 않은 한 비평가는 침묵을 지키도록 하라는 취지입니다.
둘째, 나의 비판이 상대로 하여금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될 특정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가? 오직 상대방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건전한 비판일 때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셋째, 내 말이 위압감이 들지 않고 신뢰감 있게 들리는가?
19세기 유태식 윤리학자인 이스라엘 살란터 랍비의 예를 들면, 그는 강의 도중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비판을 가하게 될 때 “제가 지금 열거하는 모든 죄악으로부터 제 자신이 결백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 또한 그중 몇 가지 죄악을 범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건 단지 제자신에게 큰소리로 애기 해 주는 일이며 듣고 계시던 중 여러분 자신에게도 적용이 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지요” 고 했습니다.
살란터의 방법은 상대방에게 위압감이 들지 않고 용기를 북돋아 주며 비판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건설적이고 효과적이라는 점에 여러분도 동의 하시리라 믿습니다.
비판은 단순한 입밖으로 내뱉는 개인적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자신이나 상대방의 발전을 위해 활용하면 도움이 되는 건전한 말의 수단입니다. 비판의 최종 목적은 상대방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을 보완하고 고치려고 노력하게 만드는 과정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한 정당하고 순수한 비판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 까요. 그때에는 우리의 고쳐야 할 단점을 지적해주는 이를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을 고쳐 주는 의사를 대하듯이 감사 한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비판에 대한 저항이 한결 수그러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정글 같은 세상에서 나를 지켜내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삶의 지혜가 담긴 저자미상의 글 “지켜야 할 신조(A Creed to Live by)”라는 덕담을 요약 번역하여 여기에 추가로 올립니다. 도움이 되 시 길 바랍니다.
○타인과 비교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손상하지 마라. 우리는 서로가 다른 각기 특수한 존재이다.
○다른 사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무턱대고) 당신의 목표로 추종 하지마라. 자신이 마음속으로 신봉하는 목표를 추구하라.
○(자신이) 가장 애착을 느끼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고 거기에 매달리라. 그것이 없으면 당신의삶은 공허하다.
○과거나 미래에 살지 말고 그날 그 시간 일상에 충실 하라.
○시도할 수 있는 여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쉽게 포기하지 마라.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시인하는데 인색하지 마라. 취약점 보강을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서 발전의 길이 열린다.
○위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위기에 적극 대처 함으로서 용감 해 질 수 있다.
○먼저 사랑을 베풀고 난 연후에 사랑을 받을 생각을 하라. 지나치게 사랑을 (독점하기 위해) 속박하는 것이 사랑을 잃는 가장 속성 코스이다. 사랑을 지속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랑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것이다.
○꿈을 잃지 마라. 꿈이 없는 존재는 희망이 없는 존재이고, 희망이 없는 존재는 목표가 없는 존재이다.
○ 지나온 과거도 망각하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삶을 건성으로 분주하게 서둘지 마라.
○인생은 (빠른 자가 승리하는 속도) 경기가 아니다. 인생은 여로에서 한 발자국을 옮길 때 마다 음미하며 (차근차근) 거쳐가야 할 과정으로 이어지는 (잘 짜여 진 하나의)여정이다.
●채근담(菜根譚)의 서바이블지향 인생살이 충고
이름을 좋게 알리고 착한 일을 할 때에는 完名美節
혼자서 다하려고 하지 말라. 不宜獨任
조금은 남에게 나누어 주어야 分些與人
해를 멀리하고 몸을 보전할 수 있다. 可以遠害全身
욕된 행실과 이름을 더럽히는 일은 辱行汚名
모두 남의 탓으로만 돌리지 말라. 不宜全推
조금은 끌어 다 나의 책임으로 돌려야 引些歸己
지혜를 안으로 간직하고 덕을 기를 수 있다. 可以韜光養德
계묘년 설날 연휴를 마치고 새롭게 출발하는 여러분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후회 없는 계묘년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의 건승을 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