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별(『세인트존스의 고전 100권 공부법』 저자)
성찰과 질문을 멈추지 않아야
‘없음’으로 자기 정체성을 밝히는 학교
한 인터넷 언론사에 따르면 한국대학교육연구소가 전국 155개 사립대학의 소모성 경비를 분석한 결과 대학들이 가장 많이 지출한 항목은 홍보비로 총액은 1,088억 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입시수수료에서 지출되는 홍보비가 제외되어 있어 전체 홍보비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하는데 이 조사도 2011년 기준이니 현 시점에서는 지출이 더 늘어났을 것이고 이후로도 더 증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속되는 학령인구의 감소현상은 대학에게는 매우 위협적 요인수준을 이미 넘어섰고 이제는 사활적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눈 뜨는 순간부터 숙명처럼 광고와 함께 호흡을 하며 살아야 하는 데 최근 들어 대학의 공격적 마케팅이 부쩍 심해진 탓에 보고 싶지 않아도 대학광고를 더 자주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광고의 속성상 당연히 매력과 자랑거리를 중심으로 어필하게 되는데 대체로는 넓은 캠퍼스, 유명 동문, 화려한 교수진, 외국 대학과의 교류, 역사와 전통, 현대적 시설물, 교통 편리성, 명성 등등이 얼마나 갖춰져 있는지를 호소하게 된다. 종국에는 높은 취업률로 수렴되는 경향이 뚜렷하지만 이런 대학광고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있음의 존재증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오늘 소개할 세인트존스 칼리지(이하 세인트존스)는 ‘없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교수가 없고, 강의가 없고, 시험이 없고, 성적표가 없고... 전단지로 비교를 하자면 한국대학 광고의 경우 수많은 ‘있음’으로 지면을 꽉 채운다면 세인트존스는 있는 것을 다 비워낸 백지로 전단지를 채우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라는 특성을 이해한다해도 교수와 강의가 없으면 배움은 어떤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일까.
그러나 세인트존스는 전형적인 강의가 없다뿐이지 수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수업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인, 교수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수업(授業)이 아니고 그렇다고 가르침을 필터링 없이 받아쓰기만 하는 수업(受業)도 아닌, 스스로 익히고 닦는 수업(修業), 학생 스스로의 참여와 토론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방식의 배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무엇을 읽었느냐 보다 중요한 지식의 재구성 능력
미국 대학교라고 하면 보통 브랜드 네임이 있는 아이비리그의 소수 학교만 떠올리기 쉽지만 리버럴 아츠 칼리지라고 해서 특정분야의 전문지식이 아니라 인문적 근육,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하는 학교도 있다. 한국의 대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생소할 수 있지만 리버럴 아츠 칼리지는 당당히 미국 대학 생태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세인트존스는 이런 리버럴 아츠 칼리지 중에서도 독특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 데 우리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4년 동안 책 100권을 읽고 토론하고 소화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부터 20세기까지 시대 순으로 정리 된 리딩 리스트를 보면 지식의 폭과 깊이가 협량한 나로서는 호흡이 가빠지고 어지럼 증세가 오기까지 한다.
1학년 때는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플라톤 『국가』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등, 2학년 때는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단테 『신곡』 에픽테토스 『담화록』 초서 『켄터베리 이야기』 등, 3학년 때는 데카르트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홉스 『리바이어던』 루소 『사회계약론』 칸트 『순수이성비판』 애덤 스미스 『국부론』 등, 4학년 때는 헤겔 『정신현상학』 마르크스 『자본론』 니체 『선악의 저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입문』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등.
어떤 책을 읽었느냐보다는 어떻게 읽었는지, 즉 지식의 재구성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더 중요한 일이지만 일단 읽어야 할 리스트가 주는 압박감이 상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리스트를 전문가나 현자의 지도가 아닌 학생 스스로 읽고 토론하는 과정 속에서 깨우쳐 가야 한다. 젊은 청춘들의 지적 고투가 4년 동안 지속되는 것이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후 7시 반에 시작해서 근 10시에 끝나는 세미나 시간을 통해 이뤄지는 토론과 성찰, 이것이 세인트존스의 핵심 수업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4년 내내 세미나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세미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수학, 과학실험, 언어, 음악 등에 쏟고 있는 데 이 과정에서도 읽고 토론하는 배움의 방식은 일관되게 작동한다. “수학시간에는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증명하고 오일러의 이론을 읽으며 숫자와 수학에 대해 생각해 보고 토론한다. 과학실험 시간에는 패러데이와 맥스웰 등이 실제 했던 실험을 따라 해보면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과학자들의 생각을 탐구”(『세인트존스의 고전 100권 공부법』)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세인트존스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고 그 시스템을 경험한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발동한다. 그래서 『세인트존스의 고전 100권 공부법』을 쓴 조한별씨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세인트존스 칼리지의 고전 100권(출처: 세인트존스 칼리지 홈페이지)
근본적인 가르침을 주는 세인트존스
정성원 : 세인트존스가 지금이야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 알려진 상황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사회에서는 굉장히 생소한 학교였죠. 어떤 과정과 계기로 세인트존스를 가게 되었는지요.
조한별 :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나서는 ‘미국에 가서 영화를 해야겠다’ 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사실 영어나 성적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도 ‘그곳에 가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편입을 해야겠다. 공부를 좀 더 해서 재정 지원을 해주는 학교에 들어가 장학금을 받아야겠다’ 라고 생각했고, 편입을 준비 할 수 있는 전문대학교에 갔습니다.
영화과가 있는 NYU(New York Univercity)나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가 가고 싶은 학교 1순위였는데 지원준비를 하면서 많은 고민이 들었고 결국 근본적인 것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화과에 가게 되면 영화를 만드는 기술적인 부분은 많이 배우겠지만 이후 영화를 찍게 되었을 때 나만의 색채와 철학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겠다 싶어 세인트존스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정성원 : 사실 한국대학은 학문의 전당이라기보다 사회 진출을 위한, 혹은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한 일종의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는 곳이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세인트존스는 한국사회와는 많이 다를 텐데요. 학교에서 바라는 인재상이랄까요, 가치와 지향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조한별 : 장단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경우, 대학이 취업을 잘하기 위한 것을 목적으로 하니까 시스템도 그렇게 갖춰져 있지만 세인트존스의 경우 학교에서의 취업지원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학생이 스스로 찾아다녀야 하죠. 그래서 나쁘게 보면 약간의 무책임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생각하는 학교가 바라는 것, 추구하는 것은 학생들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것은 학교가 길러준다기 보다 학생이 해나가야 하는 부분이지만 말입니다.
제가 쓴 책은 세인트존스에서 경험한 입장에서 풀어쓴 책이고, ‘학교가 해준 것이 하나도 없어!’처럼 저와는 다른 입장에서 바라보는 친구들도 있겠지요. 그런데 제가 학교에서 느낀 것들은 제가 앞으로 평생 해야 할 공부이기도 하고, 그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감을 익혀 나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그런 공부를 통해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을 더 해볼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런 근본적인 것들을 학교에서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대학과 세인트존스의 장단점
정성원 : 한국 대학을 한 번 더 예로 들면, 한국대학에서는 교수가 있고 세인트존스의 경우에는 교수라기보다는 튜터가 있는데요, 한국 대학의 경우는 교수가 리드를 해서 지식을 전수하고 가르치는 방식이라면 세인트존스에서는 튜터도 멤버의 일원으로 참여해서 함께 토론을 통해 스스로 배우는 방식인데, 이것이 가지고 있는 장단점이 있다면요.
조한별 : 우선 한국은 사회자체가 대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보니 그런 방식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기업이 바라는 인재상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성실한 일꾼이잖아요. 자신들을 위해 밤낮없이 일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하는 것은 그런 측면에서 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하고요.
한국에서 교수의 강의는 지식을 전달하는 효율성에 비춰보면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최적의 방식일 수는 있겠으나,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 그리고 스스로 배움을 만들어 가는 것에 있어서는 비어 있는 부분이 좀 많은 것 같습니다. 지식전수는 당연히 한국에 비해 더디고 부족할지라도 한 인간으로서 단단해지는 것은 스스로 사유하고 성찰하며 내적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고전을 읽으면서 당시 학자들의 고민을 내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 이 속에서 튜터 그리고 동료들과의 토론은 매우 중요한 촉매제인 것 같습니다.
무엇이 학생들을 성장으로 이끄는가
정성원 : 한국 대학은 교수의 전문적 지식이 중요하고 배움의 근거인데, 세인트존스에서는 수업 참여자들 간의 상호작용이 매우 중요한 덕목이잖아요. 결국 참여자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는지, 지적수준이 어느 정도 되느냐가 배움의 내용을 결정짓게 되는 요소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참여자들의 지적 수준이나 열의, 이런 것이 높지 않을 경우 결국 배움의 요소가 부실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조한별 : 그것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하시는데요.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세인트존스에 오는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지적수준이 매우 높다거나 그런 것은 전혀 아니거든요. 그리고 진짜 좋은 책을 읽었는데 토론 자체가 엉망으로 갈 때도 있고,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도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수준 낮게 시작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질문하신 우려대로 실망스러운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좀 엉성한 토론이더라도 지속적으로 해 나가다 보면 참여자들의 고민, 스스로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 조금씩 그 해답을 얻어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심지어 진짜 별로라고 생각해서 토론을 끝내는 경우도 있는 데 그런 경우조차도 나중에 다시 글로 써서 정리를 하다 보면 당시의 관점과는 달리 스스로 배우고 깨닫게 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칸트를 읽고 진행한 수업이 있었는데요. 중구남방으로 다들 자기 얘기만 하느라 바빴고 의견충돌도 많았던 그 날의 세미나는 정말 별로였어요. 그런데 방에 돌아와 세미나에서 나온 질문들을 글로 쓰며 정리를 하다가 일종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내용 자체에 대해 배우는 것은 적고, 이렇게 토론을 하는 것이 나쁘다.’라는 것이 아니라 ‘아, 다음번엔 이런 식으로 진행하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이었죠. 참여의 경험 속에서 깨닫게 되면 아무래도 다음 세미나를 위한 준비부터 실제 진행까지 조금씩 변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튜터들이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리드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참여자들이 방향을 잘 못 잡거나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흘러 갈 때마다 조절 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보완이 되는 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좋은 결과를 나오게 하기 위해 참여자들의 지적 수준이 꼭 높아야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서로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점은, 내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각자 있어야 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의견을 말했는데 너는 나보다 똑똑하지 않다며 의견을 무시한다면, 서로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은 없을 거고,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하며 각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토론을 하다 보면 더디더라도 조금씩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인트존스칼리지를 졸업한 조한별씨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 없이 텍스트 이해가 가능한가
정성원 : 학생들도 있지만 튜터가 내용을 제대로 짚어주고, 잘 안될 때는 중재자의 역할도 하면서 전체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측면이 있네요. 예전에 세인트존스의 고전 100권 리스트를 봤었는데요, 100권이 주는 압도감이랄까요. 굉장히 수준이 높은 책들이더라고요. 그것과 관련해 두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나라에 온 외국 유학생에게 삼국유사나 경국대전을 읽게 했을 때, 한글을 잘 안다고 해서 그 책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기가 참 어렵잖아요. 조한별씨가 미국에 가서 서양의 고전을 읽을 때 그것의 역사적 배경이나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면 아무리 텍스트를 읽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런 점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궁금합니다.
조한별 : 책에도 썼었는데, 그것에 대한 극복은 안한 것 같아요. ‘외국어로 그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말하는데 그 말에 저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것이 특히 인문학 같은 경우, 언어의 한계도 있지만 언어가 되더라도 그 사회의 역사나 배경지식이 거기서 자라며 자연스레 습득된 현지인들과는 수준이 분명 다릅니다. 그리고 ‘현지인들과 같은 수준으로 똑같이 해야지.’라는 것은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현지 친구들처럼 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는데 나중엔 ‘해서 안 되는 부분도 있다.’ 하고 포기한 것도 있습니다. 대신 그 이후 ‘이 정도는 할 수 있겠다.’라는 현실적인 기준이 생겼습니다.
예를 들어, 앞서 말씀하셨듯이 외국인이 삼국유사나 경국대전을 읽는다고 할 때 분명히 한국인들이 공부하는 것과는 다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겠지만, 그것을 통해 배우는 것은 분명히 있을 것이고요. 저는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워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책을 읽고 나름대로 해석한 것을 가지고 그 수업에 가서 제 의견을 말했습니다. 다른 친구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생각들이고, 또 다른 배움이기 때문이죠. 내가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지 배움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내가 정말로 깊이 있게 현지인들처럼 하고 싶다면 서양 철학이 아니라 동양철학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원 : 두 번째로 ‘100권 리스트’가 아무리 빼어난 가치와 명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무엇을 읽었느냐보다는 어떻게 읽었느냐가 더 중요한 배움의 관점일 것 같습니다. 결국 지식의 재구성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데 조한별씨는 이런 책들을 어떻게 읽었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본인만의 책을 읽는 방법 혹은 어떠한 관점으로 접근을 했는지요.
조한별 : 아무래도 많은 책들을 4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읽어야 하다 보니 정말 빨리 읽어 넘긴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 한 번 읽기도 어려운, 빨리 읽어 넘길 수 있을만한 책들이 아니거든요. 그러다 보니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데카르트나 흄에 관련된 책을 읽었어도, 재미는 있었으나 뭐가 재미있었지? 어느 부분이 재미있었지? 생각해보면 기억이 잘 나질 않더라고요. 제가 기억나는 것이나 이 책은 정말 재미있었다, 다시 읽어보고 싶다 하는 책들은 글로 쓰며 정리를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글로 썼던 것들은 생각에서 그칠 수 있었던 것들을 표현하고, 더 여러 번 생각해봤던 것이기 때문에 기억도 잘나고,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고전은 어떻게 보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깊게 생각해볼 수 있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진행되는 정기 세미나를 위해서는 빠른 속도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연애나 추리 소설도 아닌데 당대의 뛰어난 석학들의 지혜가 농축된 고전을 그렇게 빨리 읽는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래서 조한별씨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고전은 ‘읽는 책’이 아니라 ‘생각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고전은 웬만큼 자신감이 있지 않고서야 읽었다고 말하기 쉽지 않다. 대신 고전을 ‘생각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한 번 속독하고 두 시간 토론하는 걸로는 책을 읽었다고 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형이상학』의 일정 부분을 읽고, 두 시간 동안 토론하는 것은 가능하다. 얼마나 치열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아주 좋은 토론을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1장을 읽고 두 시간 생각해봤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세인트존스의 커리큘럼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아주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이다.”
간단히 정리해 보면 조한별씨의 공부법은 단순히 고전을 읽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자기의 입장과 자기 스스로의 생각을 갖추는 것에 있다. 이런 자기 생각의 근거 위에서 상호 토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좀 더 성숙해지는 것이다.
▲세인트존스 칼리지의 학생들이 모여 토론하는 모습(출처: 세인트존스 칼리지 홈페이지)
정성원 : 100권을 4년 동안 읽고 세미나를 하면서 적지 않은 지적 성장이 있었을 것이고 책을 바라보는 입장도 1학년 때와 4학년 때가 사뭇 다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조한별 : 지적 성장에 대해 생각해보면, 1학년 때는 막연히 책을 읽고 텍스트를 이해하느라 바빴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게 한국에서 받았던 교육의 습관 때문인지 정말 단순 이해하는 식이었고요. 4학년 때 가서는 좀 더 책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닌가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되고 내 기준에 따라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그것을 보며 가치관을 성립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이게 지적 성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웃음)
어떻게 게으름은 배움을 막는가
정성원 : 책 본문 중에 보면 “게으름은 배움을 막는다”라는 글이 있는데요,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조한별 : 친구들이랑 얘기 중에 친구 중 한명이 ‘아, 모르겠다’ 라고 했는데 그 말이 참 싫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게 왜 싫은 걸까’라는 생각을 곰곰이 해보니 ‘모르겠다’라는 것은 내가 한 번 더 생각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탐구하려 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제가 학교에서 바로 그런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다가 모르겠으면 밑줄을 치고 수업시간에 가서 ‘이 부분 모르겠다.’라고 했는데, 도리어 튜터나 다른 학생들은 그런 저에게 질문을 해요. ‘왜? 뭐가 모르겠어?’ ‘구체적으로 모르는 것이 무엇이야?’ 그렇게 반복을 하다 보니 내가 진짜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다른 친구들의 경우를 보면서 배웠던 것 같아요.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부분이 나는 이렇게 해석이 되는 데 여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포기해버리는 거였구나.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겠다.’하는 생각이 들면서 왜 나에게 그 부분이 이해가 안 되는지,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왜 모르겠는지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적인 성찰을 하지 않는 게으름은 우리의 성장을 가로 막는 것 같아요.
수업 시간에 말을 잘 하지 않는다고 학교에서 쫓아낸다?
매우 심각한 사안이 아니라면 퇴학조치까지는 잘 하지 않는 한국 대학의 현실에 비춰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세인트존스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교수의 지식전달과 받아쓰기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토론이 배움의 핵심 기제인 학교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배움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것은 17~18명 정도의 클라스에서 1년 동안 진행되는 세미나를 튜터들이 지속적으로 지켜보기 때문에 그렇다. 세미나 이외에 수학, 과학실험 등의 수업에서는 더 적은 인원이 1년 동안 토론과 증명과 실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도 마찬가지로 튜터의 참여가 이뤄진다. 한 학생에 대해 여러 과목의 튜터들이 모여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을 ‘돈 래그(Don rag) 시스템’이라고 한다. 만일 한국에서 이런 학생평가 시스템을 도입한다면? 모든 대학은 다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당연히.
행복해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만 둔다는 것
정성원 : 3학년 때 ‘행복해보이지 않는다’라며 튜터들이 ‘그만 두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고 그래서 총장 면담까지 가게 되었는데요. 그런 상황까지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이 학교를 졸업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낸 힘이 무엇인지요.
조한별 : 저는 ‘행복해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나왔을 때 지난 한 학기를 다시 되돌아봤습니다. 되돌아보고 나선 약속도 잡지 않고 부총장실에 막무가내 들어가선 이야기를 했지요. 제가 부총장님께 ‘주변에서 내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고 하던데 내가 생각해봐도 이 학교에서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목표를 위해 이 공부를 선택했고, 공부하는 과정이 좀 더 쉬운 길도 있겠지만 이 과정을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도전이다 보니 순간순간 행복할 수가 없음에도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는 도전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행복해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나는 행복하지 않은 건가요?’ 라고 여쭤보았어요. 그랬더니 ‘답은 너 자신이 내릴 수 있겠다’고 하셨어요.
이 과정에서 제가 고민한 것은 ‘내가 행복한 것에 대한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였습니다. 나는 이 과정 자체가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나는 정말 행복하지 않은 것일까? 라는 생각이었지요. 생각해보니 도전하는 과정이 힘들기 때문에 행복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 이 과정 전체가 나에게 소중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힘들지만 해내고 싶었고, 그렇게 해내야 더 행복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총장님과 만났을 때 말씀을 드렸더니 역시나 답은 제가 내릴 수 있겠다며, ‘열심히 해보라’고 말씀을 해주셨어요.
저는 한국에서 공부 했을 때 강의식 수업을 들으면서 느낀 것은, 불만은 아니었지만 소통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아야 했기 때문이죠. 시험을 목적으로 하는 강의식 수업은 공식을 외워야 하고 답을 내야하기 때문에 질문을 해서 시간을 지체하면 손해고, 나의 생각은 무시한 채 책에 나와 있는 대로 따라야 하다 보니 그런 것이 싫었습니다. 점수에 상관없이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힘들기도 하지만 어떡하든 세인트존스에서 과정을 끝마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정성원 : 4년 동안 세인트존스의 경험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 같나요.
조한별 : 저는 아주 단순하게도 정말 공부가 끝이 있을 것이라 생각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면 수학 공부 끝!’ 이렇게 생각했고, ‘대학까지 공부하고 나면 진짜 끝!이겠지’ 라고요. 하지만 세인트존스에서 공부를 하고 나니 ‘공부는 평생 해야 하는 거구나. 평생하지 않는다면, 좁은 시야에 고여 있는 물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학교를 벗어나 졸업을 해서 공부하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나름의 도전이라고 생각하는데, ‘습관을 들여야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서양 고전 책들을 다시 읽어보고 있어요.
가장 큰 영향은 세상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결론, 정답, 혹은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 회의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는 점이에요. 그것이 비록 남들과 동일한 결론에 이르더라도 말이죠. 기존의 질서, 절대적 권위에 그대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생각이 중요하고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제 가치관을 세워나가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야 제가 선택한 일에 더 확실하고 자신감 있게 대할 것 같습니다.
세인트존스의 교육철학과 방식이 독특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유일무이한 전범이 될 수는 없다. 여러 허점이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사람의 지적 성장에는 여러 가지 경로와 다양한 계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서와 토론을 통한 주체적 사고의 배양은 기본적이면서도 매우 유력한 방식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의 지적 풍토에는 이 기본기가 갖춰져 있지 않다. 기초 토대가 매우 허약한 것이 사실이다. 대학이 기업에 경도되면서 이 흐름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지만 이것을 현실적으로 제어할 마땅한 방도가 보이지 않는 안타까운 형국이다.
『세인트존스의 고전 100권 공부법』 은 멀리서 본다면 청춘의 분투기, 가까이서 본다면 지적 성장기로 읽혔다. 귀국 후 영화제작 현장을 경험하고 지금은 시나리오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조한별씨. 그녀의 영화가 어떤 내러티브와 스토리를 담을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녀의 영화에 어느 정도 신뢰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그 모든 권위, 심지어 자기 스스로에 대한 회의와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글_정성원(수원시평생학습관 관장)
정리_한소정(수원시평생학습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