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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밖의 풍경 스크랩 세계 10대 불가사의
강화지기 추천 0 조회 19 10.08.25 00: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세계 10대 불가사의

마츄 파츄의 유적











마츄피츄는 1911년 7월 24일 미국의 대학 교수인 하이렘 빙엄에 의헤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 지게?다. 이 서양 학자에 의해 발견 되기 전까지는 수풀에 묻힌채 그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마츄피츄를 "잃어버린도시"또는 "공중 도시" 라고 불리는데 공중도시라고 불리는 이유는 산과 절벽,밀림에 가려 밑에서는 전혀 볼수없고 오직 공중에서만 존재를 확인할수 있어서이다. 마츄피츄는 총 면적이 5제곱Km 로 도시 절반 가량이 경사면에 세워져 있고 유적 주위는 성벽으로 견고하게 둘러 싸여 완전한 요새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마츄피츄(2,280m)는 옛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3,360m)에서 산악 열차를 타고 안데스 산맥의 협곡을 따라 3시간 거리에 있다. 또한 마츄피츄는 산꼭대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산위에서는 계곡이 다 내려다 보이지만 계곡에서는 어디에서 올려다 보아도 그 존재를 알수없고 접근조차 어렵다. 마츄피츄에는 약 1만여명이 거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산정과 가파른 경사면에 들어서있어 스페인 정복자들의 손길이 닿지않은 유일한 잉카의 위대한 유산이다. 정확한 건설 연대는 알수없으나 대략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 태양신전과 생계유지를 위한 산비탈의 계단식 밭, 훼손됐을 법한 지붕없는 집, 농사를 짓는데 이용한 태양시계, 콘돌 모양의 바위, 그리고 제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거대한 피라미드로 구성되어있다. 마츄피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수준 높은 건축기술이라 할수있다. 커다란 돌을 다듬는 기술이 대단히 정교하며 다듬어진 돌의 각변의 길이가 몇m나 되고 모양도 제 각각인 돌들을 정확하게 잘라 붙여서 성벽과 건물을 세웠다. 종이 한장도 들어갈 틈이없이 단단하고 치밀하게 붙였으며 젖은 모래를 표면 처리에 이용함으로써 표면을 매끄럽게 했으며 가파른 산비탈을 개간하여 계단식 밭을 만들고 여기에 배수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추게 했으며 모든 이용 시설에 필요한 자재로 돌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이중 하나로 불리는 불후의 유적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있다. 1911년 빙엄이 왕궁과 기타 부속건물을 복원한 뒤로 1956년 부터 대규모 발굴과 복원이 이루어졌으며 1974년에 일반적인 복원이 마무리 됨으로써 마츄피츄는 세계에 공개 되었으며 아메리카 최고의 관광 유산으로 손꼽히는 고대 유적지가 되었다. 잉카인들은 통용의 글자와 쇠, 화약,바퀴를 몰랐지만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강한 군대를 유지했다. 제국은 태평양 연안과 안데스 산맥을 따라 남북을 관통하는 두갈래 길(잉카로드)를 2만 km나 만들어 광대한 영토를 통제했다.황제의 명령은 국민 한사람 한사람에게 까지 고루미처 새 한마리도 황제의 명령없이는 날지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잉카인들의 돌다루는 기술은 신기(神技)에 가까웠으며 그들이 만들고 세운 돌은 20t이나 나가는 엄청난 크기와 무게의 돌을 바위산에서 잘라내어 수십km 떨어진 산위로 날라다 신전과 집을 지었으며 면도날도 들어갈 틈이 없이 석조건축물 구성에 필요한 재주는 남다른데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사용한 가장큰 돌은 크기가 무려 8.53m 높이에361톤이 나가는 엄청난 큰돌을 마치 가벼운 물건 다루듯 한데서 현대 건축가들도 혀를 내두른다. 평야가 적었지만 산비탈을 계단처럼 깍아 옥수수를 경작함 으로써 그들은 넉넉히 먹고 살았으며 철의 대용품으로 구리를 단단하게 제련하여 사용하였는데 그 방법은 지금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푸왕의 피라미드(Pyramid) 고대 이집트의 국왕?왕비?왕족 무덤의 한 형식.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 불렀다. 현재 80기(基)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은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 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남북 약 90 km인 나일강 서안 사막 연변에 점재해 있다. 그러나 와력(瓦礫) 의 산으로 변한 것과 흔적만 남아 있는 것도 있어, 옛날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의외로 적다. 피라미드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BC 5세기)의 <역사> 권 2에 있다. 그는 기자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쿠푸는 카이로 남서쪽 15km에 위치한 기자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대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6.5m(현재 137m), 저변 230m, 사면각도는 51°52'이다.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오차는 최대의 것이라도 5°30'에 지나지 않은 만큼 극히 정교한 것으로, 피트리에 의하면 평균 2.5t의 돌을 230만개나 쌓아올렸다. 진정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로서 그 장대한 규모와 간결한 미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내부구조는 복잡해서 독일의 보르하르트에 의하면 계획이 2번 변경되었다고 한다. 북측의 지면에서 약간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그대로 하강하면 암반 밑에 설치된 방에 도달한다. 이곳이 제 1차 계획의 매장실이고, 그 위에 있는 통칭 ‘왕비의 방’이 제2차 계획의 매장실이다. 그리고 제 3차 계획에 의해 피라미드는 완성되었다. 제1피라미드 남서쪽에 카프라왕의 제2피라미드가 있다. 높이 136m, 밑변 216m, 동쪽에 있는 장제신전에 450m의 참배로가 뻗어 하곡신전에 이른다. 유명한 스핑크스는 하곡신전에 가까운 참배로 북쪽에 엎드려 있다. 기자에는 그 밖에 멘카우레왕의 제 3피라미드와 왕족들의 소(小)피라미드 6기가 있다. 피라미드를 건조함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하였다. 일정한 높이마다 핵재(核材)?내장재?전재(塡材)?외장재의 순으로 쌓아놓고, 피라미드가 높아짐에 따라 경사로도 높아졌다. 이 경우 경사로의 기울기는 일정해야 하므로 길이는 점차 길어진다. 정상까지 다 쌓고나면 위에서부터 외장을 완공시켜가면서 서서히 경사로를 낮게 하여 완성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외장은 정성들여 시공되고, 석재는 종이 한 장 끼워지지 않은 정도로 정밀하게 쌓아졌다. 완성에 걸린 연대에 대하여 헤로도투스는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20년이라 적었으나, 실제로는 더 짧은 기간으로 생각된다.

만리장성



만리장성 (萬里長城) 동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감쑥성의 자위관[嘉關]에 이르며,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5,000km에 이를 것이다. 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의 제(齊)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연(燕) ?조(趙) ?위(魏) ?초(楚) 등 여러 나라가 장성을 구축하였다. BC 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자, BC 214년에 그때까지 연 ?조 등이 북변에 구축했던 성을 증축 ?개축하여, 서쪽의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서 황허강[黃河] 서쪽을 북상하여 인산[陰山]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뻗어 랴오둥[遼東]의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함으로써 흉노(匈奴)에 대한 방어선을 이룩하였다. 다시 한대(漢代)에 이르러 무제(武帝)는 BC 2세기 말에 영토의 서쪽 끝인 둔황[敦煌] 바깥쪽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장성을 연장하였다. 진 ?한 시대의 장성은 현재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뻗어 있었는데, 그것이 현재의 위치로 남하한 것은 거란(契丹) ?돌궐(突厥) 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즉, 북위(北魏)는 5세기 초에 장성을 보강하고, 중엽에는 수도 평성(平城) 부근에 또다른 성벽을 구축하였다. 또, 북제(北齊)는 6세기 중엽에 오늘날의 다퉁[大同] 북서쪽에서 쥐융관[居庸關] ?산하이관에 이르는 장성을 축조하고 다시 뒤이어 현재의 네이창청[內長城]에 해당하는 곳에 중성(重城)을 구축하였다. 한편,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산시성[山西省] 경계 북부를 타이항 산맥[太行山脈]을 따라 남하하는 장성도 북주(北周) 방어대책으로 그 무렵에 축조된 것인 듯하다. 그 후 수(隋)나라는 오르도스[鄂爾多斯] 남변에 장성을 구축했고, 당대(唐代)에 들어와서는 장성의 훨씬 북쪽까지 그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방어선으로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또 오대(五代) 이후에는 장성지대가 북방민족의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방치되었다. 장성이 산하이관에서 자위관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은 명대(明代)에 들어와서였다. 영락연간(永樂年間:1403∼1424)부터 보강이 시작되어, 정통연간(正統年間:1436∼1449)에 내장성이, 성화연간(成化年間:1465∼1487)에 오르도스 남변의 장성이 수축(修築)되고, 다시 가정연간(嘉靖年間:1522∼1566)에는 동쪽 일대의 장성이, 15세기 중엽∼16세기 초엽에는 오르도스 서쪽 끝에서 란저우[蘭州]를 거쳐 자위관에 이르는 장성이 완성되었다. 명(明)나라는 이 장성지대를 9개의 군관구(軍管區)로 나누어 구변진(九邊鎭)을 두고, 장성을 통과하는 교통요지, 즉 옌먼관[雁門關] ?쥐융관 ?구베이커우[古北口] ?장자커우[張家口] 등지에는 견고한 관성(關城)을 설치하였다. 청대(淸代) 이후에는 군사적 의의를 상실하고, 단지 중국 본토와 둥베이[東北:만주] ?몽골 지역을 나누는 정치 ?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 한편, 축성의 재료는 햇볕에 말린 벽돌과 전(塼) ?돌 등 있다. 즉,산하이관부터 황허 강에 이르는 부분은 매우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외면은 구워서 만든 연한 회색의 기와로 덮여 있다. 이것을 전(塼)이라고 하는데 내부는 점토를 붙여 딱딱하게 만들었다. 바다링 부근은 높이 약 9m, 너비는 윗부분이 약 4.5m, 아랫부분이 9m가량이며, 총안(銃眼)이 뚫려 있는 톱날 모양의 낮은 성벽이 위쪽에 설치되어 있고 약 100m 간격으로 돈대(墩臺)가 설치 되어 있다. 이에 비해 황허 강 서쪽 부분은 전을 사용하지 않고 햇빛에 말린 벽돌을 많이 사용해 매우 조잡하다. 청대에 들어와 보수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 곳도 있다. 그리고 문화혁명때 농부들은 집을 수리하고 돼지우리를 만들기 위해 장성의 돌을 훔치 곤 하였다. 장벽의 군데군데가 사라졌다. 마침내 1977년 정부는 어떤 돌이라도 가지고 가는 것을 불법으로 공포하였다 성벽은 높이 6∼9m, 폭은 상부 4.5m, 기부(基部) 9m이다. 또한 1987년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 관광객들을 위해 개방되어 있는 곳은 여러 군데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은 북경시 에서 북서쪽으로 약 70km 떨어진 팔달령(八達嶺)장성이다.

성 소피아 사원



성 소피아 사원은 비잔틴 제국의 가장 주목할 만한 황제인 유스티니안 황제의 명에 의하여 t수학자이며 건축가, 구조학자인 안테미우스(Anthemieus of Tralles)와 이스도루스(Isidorus of Mulet) 가 532년부터 536년에 걸쳐 건축되었다. 성 소피아란 하나님의 지혜란 뜻으로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성소피아 성당은 세계 건축사상 가장 뛰어난 건축물의 하나로 평가된다. 다중 돔형의 이 사원은 건축하는데 비교적 짧은 시일이 걸렸으나, 그 규모는 엄청난 것으로 전체적 직사각형의 크기는 71 X 77 미터에 달하며 돔의 직경이 약 30m로 바닥에서부 터 56m나 치솟아 있으며, 중앙부분의 거대한 돔 둘레에는 40개의 창문이 있다. 사원의 내부는 세계적인 수준의 최고급 대리석 유물 및 장식 모자이크로 채웠다. 성소피아 성당은 통로와 중심, 혹은 통로와 목표가 완벽하게 통합되어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지상의 순례자로서 영원한 하느님을 향하는 길목에 서 있다는 근본적인 그리스도교 정신의 표출이라 하겠다. 1453년 오토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모스크로 개조되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영국의 스톤 헨지



영국의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신석기시대의 거석 유적 ‘스톤 헨지’가 사자(死者)의 마을이었다는 연구결과가 보도됐다. 스톤 헨지로부터 2.8km 떨어진 더링턴 월스라는 곳에서 기원전 2500~2600년에 나무로 만들어진 ‘우드 헨지’가 발견됨으로써 스톤 헨지와 우드 헨지가 서로 대칭적인 관계에 있었던 유적임이 밝혀진 것이다. 스톤 헨지가 죽은 자를 위한 사자의 공간이었다면 우드 헨지는 산 자를 위한 삶의 공간 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스톤 헨지의 용도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이번에 밝혀진 셈이다. 주역의 관점에서 스톤 헨지와 우드 헨지를 해석하면 음과 양의 관계이다. 스톤이 음의 세계라면 우드는 양의 세계이다. 음과 양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밑으로는 서로 연결돼 있다.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된다. 사(死)에서 생(生)이 오고, 생에서 사로 가는 관계가 그것이다. 음과 양 사이를 연결하는 매체는 물이다. 연구자들은 우드 헨지에서 사람이 살다가 죽으면 그 시체를 배에다 싣고 에이번강을 따라 스톤 헨지로 옮겼을 거라고 추정한다. 솔즈베리 평원을 육로로 가로질러 가지 않고 일부러 강을 따라서 옮겼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고대문명에서는 이승과 저승,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사이에는 강물이 흐른다고 보았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나일강 이쪽이 산 자의 공간이었다면 나일강 건너의 스핑크스와 피라미드가 있는 공간은 죽은 자의 공간이자 피안의 영역으로 생각하였다. 이집트의 역대 파라오들은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피라미드에 도착하는 과정을 매우 신성한 의식으로 여겼다. 기독교 찬송가에 나오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요단강 건너는 저승이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중간에 요단강이라는 강물이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차안에서 피안의 세계로 건너갈 때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타고 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반야용선이라는 배를 타고 건너간다는 의미는 강물을 건너간다는 뜻 아니겠는가. 한자문화권에서는 그 강물을 삼도천(三途川)이라고 부른다. 죽은 지 7일째 되는 날에 건너게 된다는 강물이다. 고대문명의 사생관은 동?서양이 비슷하다.

앙코르 와트









앙코르와트는 수르야바르만 2세가 힌두교의 비쉬누 신에게 봉헌한 사원으로 즉위한 해부터 공사를 시작 사망한 해까지 공사를 계속했던, 무려 37년간이나 다듬은 사원이다. 그는 왜 평생의 업적으로 이런 사원을 건립한 것일까? 종교/정치 일체의 통치 이념 하에 왕들이 숱한 사원을 지어바치는 것과는 다른 스케일의 이 사원에 대해 학자들은 무척이나 궁금하게 생각했고 그 결과를 내놓았다. 앙코르와트는 수르야바르만 2세가 사후 자신이 묻힐 영생의 집으로 건축했다는 것이다. 마치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즉위때부터 사후를 대비하여 장례전들을 짓듯이. 그 증거로 내놓은 이론은 이러하다. 힌두사원에서 인간의 출입은 생명을 의미하는 동쪽으로 하고 서쪽은 영혼들의 출입구라고 생각했다. 앙코르의 사원 중 장례전 용도의 사원 이외에는 모두가 동문 출입이다(물론 프레아 칸처럼 왕과 동등한 출입을 금하기 위해 서문을 사용한 경우는 제외하고) 그러나 앙코르와트는 유일한 출입구가 서쪽으로 나 있다. 또 힌두교의 장례법상 무덤에 새기는 부조는 모두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배열을 하는데 앙코르와트의 부조 역시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향하는 구조를 취한다. 그리고.... 비쉬누 성소로 오르는 계단들. 경사도 70도의 인간의 보폭보다 절반에 해당되는 이 계단은 신이나 영혼들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앙코르와트 어딘가에 그가 묻혔을 것으로 추측하며 앙코르와트는 바로 그가 영생을 누릴 마졸리움(무덤집)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본다. 앙코르와트의 유명세는 단순히 "엄청나게 크다"가 아니다. 사원은 단일설계도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믿기엔 공사기간이 너무 길었고 30년간 수없이 변경되고 증축되었을 텐데도 초기의 설계에 어긋남이 없이 하나의 건축물로서 완벽함을 자랑한다. 배치도 대칭도 구조도 조화도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앙코르와트는 사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다양한 건물들의 결합체이다. 갤러리, 방, 별실, 사당, 탑, 정원, 중정, 연못, 성벽, 탑문 등등..... 어느 하나도 구색갖추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 있어야할 곳에 놓여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건축 완성도가 퍼펙트하다고 칭송 받는다. 사원은 3층 구조에 총 높이가 65m, 단순히 계산하면 한층당 높이가 26m나 되지만 이런 계산은 적용되지 않는다. 1층과 2층의 기단이 동일 평면에 위치하고 이층에서 3층 기단까지 약 40m의 높이로 올려져 있으며 그 사이에는 중간단이란 독특한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 아무튼 특이하고 신기하다. 배치 구조도 독특하지만 빈공간이나 빈틈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갖은 부속물로 메우고 연결시킨 공간배치기법이나 수학 계산, 미술적 감각이 총망라되어 있다. 자칫 빈공간으로 남기 쉬운 외벽에는 무려 1,500명 이상의 압사라(천녀)들을 새겨 마치 빈신전이 아닌 번성하는 신전임을 느끼게 한다. 압사라는 단 하나도 동일 인물을 찾아 볼 수 없는 섬세함과 다양성의 표현체이다. 넓이와 높이의 배율을 맞춰 경사도 가파른 계단으로 높은 층의 공간을 메운 기법도 그러하고 중간층이란 기묘한 기법으로 공간을 메꾸어 상하층을 연결하는 기법 또한 그 옛날의 기술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참신한 아이디어이다. 무엇보다 성소탑들. 사각형의 기단에서 시작, 자연스럽게 원추형으로 변형을 시도하여 결국 전체적으로 한송이 연꽃 모양으로 피어나는 탑의 빼어난 미는 앙코르와트 건축 양식의 절정을 보여준다. 앙코르와트를 가장 아름답게 보는 방법 앙코르와트는 햇살, 구름의 정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때로는 백색의 베르사이유 궁전 같은 느낌을, 때로른 검은 악마가 덮치는 형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앙코르와트는 넓기도 하고 높기도 하여 일출, 일몰 보는 장소로 공히 활용된다. 일출은, 북쪽 연못 앞에서 볼 때가 가장 환상적이다. 날개를 펼친 거대한 검은 독수리의 형상 뒤편으로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이 퍼지면서 붉은 아침 기운이 비쳐지는 파노라마를 볼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색채는, 해가 지평선에서 막 떠오르면서 앙코르와트의 백그라운드를 비칠때이다. 일몰은, 서쪽편이 열린 높은 곳, 즉 3층 성소에서 해자 쪽(서쪽)을 내려다 보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잿빛 띤 진입로, 푸른 해자, 무수한 꽃이 맺힌(? 큰 나무에 꽃들이 주렁주렁....) 나무들 그리고 숲 사이로 붉은 황혼이 깔리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유감스럽게도 황혼 무렵에 3층에서 모두 내보내기 때문에 결국 바깥에서 어둠에 지는 앙코르와트를 바라본다. 낮동안의 방문 최적 시간은 오후 2시 이후부터이다(개인적인 생각). 강렬한 햇살이 한 기운 수그러뜨릴 때 건물의 석재에 깔리는 색깔의 변화가 일 때부터이다. 저녁(밤)에는 사원 외부에 씨엠립의 연인들이 죄다 몰려들어 데이트를 즐기거나 드라이브를 하거나 해자 주변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피크닉을 즐긴다.

진시황의 무덤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그 엄청난 역사적 유물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시안의 한 농부가 우물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아니 뭣이여, 이게 다? 나오라는 물은 안터져 나오고, 무신 이런 쓸모 짝에도 없는 것들이 땅속에서 자꾸 나온다냐. 허메~ 근디 저, 저거는....” 땅을 파던 농부는 기겁을 하며 곡괭이를 내팽개쳤다. 땅 속에서 사람 머리통이 불쑥 나왔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그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한 흙인형이었다. 1974년, 이렇게 우연히 발견된 진시황 병마용갱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어마어마한 유물들을 쏟아내며 현재까지도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미 발견된 3개의 갱 외에도 진시황릉 근처에 더 많은 병마용이 묻혀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다. 병마용(兵馬俑)이란 말 그대로 흙을 구워 만든 병사와 말을 말하는데, 진시황이 죽은 후 대군의 일부를 순장시키는 대신 이렇게 인형을 무덤에 묻은 것이다. 갱 속에서 발굴된 내용물을 보면 실물 크기의 토용(土俑) 7,000여개와 100개가 넘는 전차, 40여필의 말, 10만여개의 병기 등이다. 엄청난 그 내용물도 내용물이지만, 토용들의 모습을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하나하나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머리모양은 섬뜩하리만큼 섬세하고 정교하다. 그 것도 실물 크기로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면 금방이라도 함성을 지르며 갱 밖으로 달려나올 것만 같다. 총 3개의 전시관으로 이뤄진 병마용갱 중 1호갱은 당시 농민이 처음 발견한 것이고, 뒤에 2, 3호갱이 발견됐다. 1호갱은 세 곳 중 가장 규모가 크며 동서 길이가 230m, 넓이 612m로 총 면적이 12㎢다. 갱 내에 있는 토병과 말은 가운데를 중심으로 동쪽을 바라보며 정렬해 있다. 특이한 건 모두 한 곳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남쪽의 병사는 남쪽을, 북쪽의 병사는 북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점이다. 또 동쪽에 있는 가로 3열의 토병들은 무사토용(武土傭)으로 손에는 궁수병기를 쥐고 있고, 그 뒤로 6,000여명의 갑옷 입은 병사들이 역시 창과 같은 긴 병기를 들고 서 있다.

콜로세움



콜로세움 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지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 (Colossale)에서, 또 하나는 경기장 옆에 네로 황제가 세운 높이 30m의 거대한 금도금 상 콜로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인데 전자의 설이 유력하다. 콜로세움은 기원후 72년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 질서를 회복한 후, 네로의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호수을 만들었던 자리에 착공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80년) 때 완공하였다. 완성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며, 그 때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장대한 타원형 플랜이 있는 투기장은 아치와 볼트를 구사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조물로서 거대한 바위 축대위에 축조되었으며,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위에 설치되어 지진이나 기타 천재로 인한 흔들림을 흡수하 도록 설계되었다. 약 5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제국 최대의 투기장이었다. 콜로세움은 최대 지름188 m, 최소 지름 156 m, 둘레 527 m, 높이 57 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인데, 1층은 토스카나 식, 2층은 이오니아 식, 3층은 코린트 식의 둥근기둥으로 각각의 아치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4층을 제외하고 원기둥과 원기둥 사이에는 아치가 있고, 2층과 3층에는 조상(彫像)이 놓여 있다. 내부는 긴지름 86m, 짧은지름 54m의 아레나(투기장)를 중심으로 카베아(관객석) 가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칸칸마다 나누어진 맹수들의 우리 위에 나무로 바닥을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시켰는데 지하의 방에는 맹수뿐만 아니라 검투사,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다. 이 경기장은 지하의 대기실 및 천막 지붕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곳에서는 검투사의 경기, 맹수와의 싸움이 즐겨 행해졌으며, 심지어는 장내에 물을 채워 전투를 하는 모의 해전 등도 벌였다. 제정 초기 크리스트교 박해 시대에는 많은 신도가 이 콜롯세움에서 야수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다. 콜로세움은 완공된 이래 300여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계속 벌어지다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마침내 처참한 역사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 후 콜로세움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 교회를 짓는데 재료로 쓰이기도 해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다가 18세기 경 교황의 명에 따라 기독교 수난의 현장으로 복구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타지마할



아그라 신시가지 동쪽으로 넓은 야무나 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타지 마할은 너무나도 유명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이 거대하고 신비로운 무덤이 건설된 것은 1631년의 일로, 무굴제국 의 왕 샤 자한(Shah Jahan) 이 부인을 위해 짓기 시작하여 22년만인 1653년에 완공시켰다. 가로 300m, 세로 530m의 당당한 정문은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 졌고, 정문의 아치를 빠져나가면 넓은 마당에 수로 (水路)를 둔 전형적인 무굴 양식의 정원과 분수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앞에는 정원과 분수를 바라보며 완벽한 좌우대칭의 미를 보여주는 타지 마할이 우뚝 서 있다. 다른 건물이 없이 넓게 트인 공간에 홀로 서 있는 타지 마할의 거대한 풍채는 밑에서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맑은 날이면 흰 대리석의 몸체는 눈부신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발산한다. 샤 자한은 17년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고, 15번째 아이를 낳다가 1629년 사망한 부인 뭄타즈 마할 (Mumtaz Mahal)을 추모하여 이 아름다운 묘를 만들었다. 마할(궁전) 로 부르고 있어 왕비를 위한 궁전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타지 마할이란 이름은 왕비의 이름에서 기원한 것이다. 무척 사랑하던 왕비가 죽자 샤 자한은 건축광답게 제국의 온 총력을 기울여 무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란 출신의 우스타드 이샤(Ustad Isa) 에 의해 설계가 완성되었고 터키,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훌륭한 장인들 2만여 명이 차출되어 왔으며, 건축자재의 운반을 위해 천여 마리의 코끼리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건축자재들은 라자스탄의 마크라나(Makrana)에서 채취된 대리석을 비롯하여 러시아와 중국 등지에서 수입했다고 전해진다. 하얀 대리석은 붉은색과 푸른 색의 천연 색돌로 상감되어 있는데, 몇백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샤 자한은 나중에 자신의 무덤을 타지 마할의 야무나 강 반대편에 검은 대리석으로 지어 양쪽 무덤을 구름다리로 이을 작정이었다고 한다.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면 지금의 사람들은 더욱더 멋진 장관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샤 자한은 수도를 델리로 옮긴 후 얼마 못가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왕위를 유폐당하는 시련을 겪게 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아그라 성(Agra Fort)에 있는 무삼만 버즈 (Musamman Burj)에 갇혀 타지 마할을 바라보며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서 왕위를 빼앗기는 했지만 아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 샤 자한이 죽자 타지 마할의 어머니 옆에 아버지를 잠들게 해 주었다. 타지 마할은 햇빛이 대리석을 비추는 각도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관광객을 유혹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보일 때는 밝은 달빛 아래에서인데, 아쉽게도 지금은 자정 이후의 입장이 금지되어 타지 마할이 멀리 보이는 높은 건물 위에서나 그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피사 사탑



피사의 사탑 이탈리아 중서부에 위치한 피사 대성당(Duomo di Pisa)의 부속건물(대성당, 세례당, 종탑)중 3번째이며 마지막 구조물로써, 중세 도시국가 피사가 팔레르모 해전에서 사라센 함대에 대승한 것을 기념하기위해 세워진 종탑이다. 흰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꼭대기 종루를 포함해 8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높이는 55.8m, 무게는 14,500t 이나 된다. 탑내부는 나선형으로 된 294개의 계단을 통해 종루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종루에는 각각 다른 음계를 가진 7개의 종이 걸려있다. 1174년에 착공된 피사의 사탑은 이탈리아 천재건축가 보라노 피사논의 설계도에따라 탑을 만들어 가던 중, 3층까지 쌓아올렸을 때 공사관계자들은 지반 한쪽이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책임 기술자였던 보나노 피사노는 기울어진 모양을 보정하기 위해 새로 층을 올릴 때 기울어져 짧아진 쪽을 더 높게 만들었으나, 추가된 석재의 무게로 건물은 더욱 가라앉게 되었다. 기술자들이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몇 번씩 공사를 중단했으나 결국 1350년에 맨 꼭대기층이 기울어진 채 완성되었다. 물론 건축당시부터 의도적으로 기울어진 탑을 세운것은 아니다. 1년에 1mm정도 기울어지는 미세한 자연 현상이 누적되다보니 오늘날과 같이 탑의 꼭대기가 수직선에서 무려 5m나 기울어졌다. 현재는 탑의 기울기가 멈춘 상태다. 최근 영국 런던대학의 토질 기계학과 존 부를랜드 교수는 "피사의 사탑은 이제 기우는 것은 멈췄다. 이는 지난 7세기만에 이룩한 개가"라고 말했다. 사탑이 이처럼 위태로운 상태에서도 수천년 동안 용케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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