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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준 權 俊 (1895 ~ 1959)】 "의열단 활동의 핵심적인 임무 수행"
1895년 5월 2일 경상북도 상주군(尙州郡) 함창면(咸昌面) 척동리(尺洞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백인(百忍)이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권중환(權重煥)·권중석(權重錫)·강병수(姜炳秀)·진민각(陳民覺)·장종화(張從化)·양무(楊武)·장수화(張樹華)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권준 중국혁명군 복무 당시 사진 [판형3] |
1917년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한 다음, 상하이(上海) 퉁지대학(同濟大學) 공과에서 수학하였다. 같은 해 11월 중국 지린성(吉林省)에서 김원봉·윤세주·이성우·곽재기·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였다. 의열단의 활동 자금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 의열 투쟁을 지원하였고, 김원봉·오성륜·김성숙·장지락(김산)·최원·이영준·강세우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의열단 활동의 핵심적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4년 1월 김원봉 등과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소집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여기서 반봉건(反封建)·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라는 당면과제를 수행하려고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라는 이질적인 두 세력이 단결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를 통해 ‘민중직접혁명’이 최우선 과제임을 깨닫고, 스스로 이를 선도할 정치·군사 간부가 되기 위해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입교를 결정하였다.
1926년 김원봉 등 의열단원을 비롯한 24명과 함께 황푸군관학교 4기생(1926.3.8~1926.10)으로 입교하였다. 『황포동학록(黃埔同學錄)』의 4기생 신상 기록에 의하면, 재학 시 “소속은 보병 7련(連)이었고, 별명은 무산(武山), 나이는 27세, 국적은 한국(韓國), 통신처는 장쑤성(江蘇省) 금산수경서시(金山洙涇西市) 508호 팽(彭)씨 댁”이었다.
졸업 후에는 중국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장교로 임관되어 북벌전(北伐戰)에 참전하였고,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武漢分校) 교관으로 배속되었다.
이후 중국군 장교의 신분으로 한인 독립운동의 주요 현장에 참여하였다. 북벌전에 투입할 국민혁명군을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에서는 중국국민당 지부 조직을 이용하여 입교생을 모집하였다. 이때 유악한국혁명청년회(留鄂韓國革命靑年會, 약칭 유악청년회)에 입교생 모집을 위탁하여 이들이 모집한 한인 청년을 입교시켰다.
권준의 일기장 [판형2] |
유악청년회는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승인 이래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지역의 한인 관련 사무 일체를 처리하던 단체다. 여기에는 황푸군관학교 졸업생, 그리고 유자명과 김원봉 등 당시 우한에 머문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이때 유악청년회의 비서(秘書) 직을 맡아 운영을 주관하였다. 아울러 5인 상무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서무부를 관장하였다. 당시 국민혁명군 제6군 포병영 부영장(副營長)으로 재직하면서 우한분교 훈련부 교관으로도 활동하였다.
1927년 상반기 한커우(漢口)에서 개최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에 참석하였다.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는 1927년 2월 중국·한국·인도·베트남 등 동방 민족이 공동 전선을 구축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각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추진하고자 결성된 조직이다. 초대 회장은 김규식, 상무에는 중국인 목광록(睦光錄), 인도인 간타싱, 한국인 유자명 등이었고, 본부는 한커우시에 두었다. 이들은 중국국민당의 지원 아래 기관지 『동방민족』을 발간하여 홍보 활동을 펼쳤다. 이 단체가 조직되는 과정에서 김규식과 함께 간사로 활동하면서 안재환(安載煥) 등을 가입시켰다.
1927년 9월 27일 창립된 한국유일독립당 남경촉성회(南京促成會) 회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중국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 세력뿐 아니라 동아시아 피압박민족운동 세력의 단결과 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1928년 무렵 난징(南京)에 체류 중 베이징(北京)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열단과 중국 국민당정부의 교섭에 진력하였다.
권준의 『전략과 전술』 [판형3] |
한편,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을 계기로 활성화된 재중 한인 독립운동 진영의 재정비 움직임과 한중 연합 전선의 결성이 구체화하였다. 그 일환으로 의열단이 중국 정부의 비밀결사인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와 합작하여 청년군사간부 양성에 착수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설립이 그것이다.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였고 설립 목표는 한국의 절대 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이었다. 간부학교 졸업생들의 활동 방침으로는, ‘1. 일만요인(日滿要人)의 암살, 2. 재만 항일 단체와의 제휴, 3. 국내와 만주 지역 노동, 농민층에 대한 혁명적 준비 공작, 4. 위조지폐 남발을 통한 만주국의 경제 교란, 5. 특무활동에 의한 물자 획득’ 등이 결정되었다.
훈련 장소로는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난징(南京) 교외의 탕산(湯山)에 있는 선사묘(善祠廟)라는 사찰을 이용하였다. 당시 이곳은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통신대 관리하에 있었다. 간부훈련반은 6개 대로 편제되어 제5대까지는 중국인이 수용되었고, 제6대에 한인이 수용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였다. 운영 전반에 관한 사항은 교장 김원봉을 정점으로 의열단 지도부가 관리하였다. ‘군사조(軍事組)’ 교관으로서 학생들에게 축성학(築城學)을 가르쳤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서 한국 독립의 사명을 짊어질 청년 투사 양성에 진력하던 중 김원봉과의 의견 차이로 그만두었다. 일제 자료에 따르면, 1933년 1월경 김원봉과 의견을 달리하여 의열단을 탈퇴하고 한커우로 가서 중국군에 복귀하였다고 한다.
1934년 6월 난징에 있는 중국군 부대의 연장(連長)으로 근무하였다. 또 1937년 12월에는 중국군 상교(上校)로 근무하였다. 삼민주의역행사 서기로 활동한 덩지에(滕傑)의 회고에 따르면, 삼민주의역행사의 우한(武漢) 및 장시성(江西省) 지역의 정보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합류하여 내무부 차장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 우한 지역 교포선무단(僑胞宣撫團) 단장과 광복군 5지대장에 임명되어 혼란기 중국 사회에서 동포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진력하였다.
1946년 12월 귀국하였다. 이후 국군에 참여하여 ‘육사 특8기’를 졸업한 다음, 대령으로 임관하였다. 1949년 7월 초대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이후 육군 제1훈련소 소장, 육군 제3관구 사령관, 육군 제50 사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95년 5월 2일 경상북도 상주군(尙州郡) 함창면(咸昌面) 척동리(尺洞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백인(百忍)이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권중환(權重煥)·권중석(權重錫)·강병수(姜炳秀)·진민각(陳民覺)·장종화(張從化)·양무(楊武)·장수화(張樹華)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권준 중국혁명군 복무 당시 사진 [판형3] |
1917년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한 다음, 상하이(上海) 퉁지대학(同濟大學) 공과에서 수학하였다. 같은 해 11월 중국 지린성(吉林省)에서 김원봉·윤세주·이성우·곽재기·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였다. 의열단의 활동 자금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 의열 투쟁을 지원하였고, 김원봉·오성륜·김성숙·장지락(김산)·최원·이영준·강세우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의열단 활동의 핵심적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4년 1월 김원봉 등과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소집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여기서 반봉건(反封建)·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라는 당면과제를 수행하려고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라는 이질적인 두 세력이 단결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를 통해 ‘민중직접혁명’이 최우선 과제임을 깨닫고, 스스로 이를 선도할 정치·군사 간부가 되기 위해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입교를 결정하였다.
1926년 김원봉 등 의열단원을 비롯한 24명과 함께 황푸군관학교 4기생(1926.3.8~1926.10)으로 입교하였다. 『황포동학록(黃埔同學錄)』의 4기생 신상 기록에 의하면, 재학 시 “소속은 보병 7련(連)이었고, 별명은 무산(武山), 나이는 27세, 국적은 한국(韓國), 통신처는 장쑤성(江蘇省) 금산수경서시(金山洙涇西市) 508호 팽(彭)씨 댁”이었다.
졸업 후에는 중국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장교로 임관되어 북벌전(北伐戰)에 참전하였고,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武漢分校) 교관으로 배속되었다.
이후 중국군 장교의 신분으로 한인 독립운동의 주요 현장에 참여하였다. 북벌전에 투입할 국민혁명군을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에서는 중국국민당 지부 조직을 이용하여 입교생을 모집하였다. 이때 유악한국혁명청년회(留鄂韓國革命靑年會, 약칭 유악청년회)에 입교생 모집을 위탁하여 이들이 모집한 한인 청년을 입교시켰다.
권준의 일기장 [판형2] |
유악청년회는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승인 이래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지역의 한인 관련 사무 일체를 처리하던 단체다. 여기에는 황푸군관학교 졸업생, 그리고 유자명과 김원봉 등 당시 우한에 머문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이때 유악청년회의 비서(秘書) 직을 맡아 운영을 주관하였다. 아울러 5인 상무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서무부를 관장하였다. 당시 국민혁명군 제6군 포병영 부영장(副營長)으로 재직하면서 우한분교 훈련부 교관으로도 활동하였다.
1927년 상반기 한커우(漢口)에서 개최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에 참석하였다.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는 1927년 2월 중국·한국·인도·베트남 등 동방 민족이 공동 전선을 구축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각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추진하고자 결성된 조직이다. 초대 회장은 김규식, 상무에는 중국인 목광록(睦光錄), 인도인 간타싱, 한국인 유자명 등이었고, 본부는 한커우시에 두었다. 이들은 중국국민당의 지원 아래 기관지 『동방민족』을 발간하여 홍보 활동을 펼쳤다. 이 단체가 조직되는 과정에서 김규식과 함께 간사로 활동하면서 안재환(安載煥) 등을 가입시켰다.
1927년 9월 27일 창립된 한국유일독립당 남경촉성회(南京促成會) 회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중국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 세력뿐 아니라 동아시아 피압박민족운동 세력의 단결과 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1928년 무렵 난징(南京)에 체류 중 베이징(北京)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열단과 중국 국민당정부의 교섭에 진력하였다.
권준의 『전략과 전술』 [판형3] |
한편,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을 계기로 활성화된 재중 한인 독립운동 진영의 재정비 움직임과 한중 연합 전선의 결성이 구체화하였다. 그 일환으로 의열단이 중국 정부의 비밀결사인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와 합작하여 청년군사간부 양성에 착수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설립이 그것이다.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였고 설립 목표는 한국의 절대 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이었다. 간부학교 졸업생들의 활동 방침으로는, ‘1. 일만요인(日滿要人)의 암살, 2. 재만 항일 단체와의 제휴, 3. 국내와 만주 지역 노동, 농민층에 대한 혁명적 준비 공작, 4. 위조지폐 남발을 통한 만주국의 경제 교란, 5. 특무활동에 의한 물자 획득’ 등이 결정되었다.
훈련 장소로는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난징(南京) 교외의 탕산(湯山)에 있는 선사묘(善祠廟)라는 사찰을 이용하였다. 당시 이곳은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통신대 관리하에 있었다. 간부훈련반은 6개 대로 편제되어 제5대까지는 중국인이 수용되었고, 제6대에 한인이 수용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였다. 운영 전반에 관한 사항은 교장 김원봉을 정점으로 의열단 지도부가 관리하였다. ‘군사조(軍事組)’ 교관으로서 학생들에게 축성학(築城學)을 가르쳤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서 한국 독립의 사명을 짊어질 청년 투사 양성에 진력하던 중 김원봉과의 의견 차이로 그만두었다. 일제 자료에 따르면, 1933년 1월경 김원봉과 의견을 달리하여 의열단을 탈퇴하고 한커우로 가서 중국군에 복귀하였다고 한다.
1934년 6월 난징에 있는 중국군 부대의 연장(連長)으로 근무하였다. 또 1937년 12월에는 중국군 상교(上校)로 근무하였다. 삼민주의역행사 서기로 활동한 덩지에(滕傑)의 회고에 따르면, 삼민주의역행사의 우한(武漢) 및 장시성(江西省) 지역의 정보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합류하여 내무부 차장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 우한 지역 교포선무단(僑胞宣撫團) 단장과 광복군 5지대장에 임명되어 혼란기 중국 사회에서 동포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진력하였다.
1946년 12월 귀국하였다. 이후 국군에 참여하여 ‘육사 특8기’를 졸업한 다음, 대령으로 임관하였다. 1949년 7월 초대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이후 육군 제1훈련소 소장, 육군 제3관구 사령관, 육군 제50 사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95년 5월 2일 경상북도 상주군(尙州郡) 함창면(咸昌面) 척동리(尺洞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백인(百忍)이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권중환(權重煥)·권중석(權重錫)·강병수(姜炳秀)·진민각(陳民覺)·장종화(張從化)·양무(楊武)·장수화(張樹華)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권준 중국혁명군 복무 당시 사진 [판형3] |
1917년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한 다음, 상하이(上海) 퉁지대학(同濟大學) 공과에서 수학하였다. 같은 해 11월 중국 지린성(吉林省)에서 김원봉·윤세주·이성우·곽재기·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였다. 의열단의 활동 자금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 의열 투쟁을 지원하였고, 김원봉·오성륜·김성숙·장지락(김산)·최원·이영준·강세우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의열단 활동의 핵심적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4년 1월 김원봉 등과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소집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여기서 반봉건(反封建)·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라는 당면과제를 수행하려고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라는 이질적인 두 세력이 단결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를 통해 ‘민중직접혁명’이 최우선 과제임을 깨닫고, 스스로 이를 선도할 정치·군사 간부가 되기 위해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입교를 결정하였다.
1926년 김원봉 등 의열단원을 비롯한 24명과 함께 황푸군관학교 4기생(1926.3.8~1926.10)으로 입교하였다. 『황포동학록(黃埔同學錄)』의 4기생 신상 기록에 의하면, 재학 시 “소속은 보병 7련(連)이었고, 별명은 무산(武山), 나이는 27세, 국적은 한국(韓國), 통신처는 장쑤성(江蘇省) 금산수경서시(金山洙涇西市) 508호 팽(彭)씨 댁”이었다.
졸업 후에는 중국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장교로 임관되어 북벌전(北伐戰)에 참전하였고,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武漢分校) 교관으로 배속되었다.
이후 중국군 장교의 신분으로 한인 독립운동의 주요 현장에 참여하였다. 북벌전에 투입할 국민혁명군을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에서는 중국국민당 지부 조직을 이용하여 입교생을 모집하였다. 이때 유악한국혁명청년회(留鄂韓國革命靑年會, 약칭 유악청년회)에 입교생 모집을 위탁하여 이들이 모집한 한인 청년을 입교시켰다.
권준의 일기장 [판형2] |
유악청년회는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승인 이래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지역의 한인 관련 사무 일체를 처리하던 단체다. 여기에는 황푸군관학교 졸업생, 그리고 유자명과 김원봉 등 당시 우한에 머문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이때 유악청년회의 비서(秘書) 직을 맡아 운영을 주관하였다. 아울러 5인 상무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서무부를 관장하였다. 당시 국민혁명군 제6군 포병영 부영장(副營長)으로 재직하면서 우한분교 훈련부 교관으로도 활동하였다.
1927년 상반기 한커우(漢口)에서 개최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에 참석하였다.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는 1927년 2월 중국·한국·인도·베트남 등 동방 민족이 공동 전선을 구축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각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추진하고자 결성된 조직이다. 초대 회장은 김규식, 상무에는 중국인 목광록(睦光錄), 인도인 간타싱, 한국인 유자명 등이었고, 본부는 한커우시에 두었다. 이들은 중국국민당의 지원 아래 기관지 『동방민족』을 발간하여 홍보 활동을 펼쳤다. 이 단체가 조직되는 과정에서 김규식과 함께 간사로 활동하면서 안재환(安載煥) 등을 가입시켰다.
1927년 9월 27일 창립된 한국유일독립당 남경촉성회(南京促成會) 회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중국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 세력뿐 아니라 동아시아 피압박민족운동 세력의 단결과 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1928년 무렵 난징(南京)에 체류 중 베이징(北京)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열단과 중국 국민당정부의 교섭에 진력하였다.
권준의 『전략과 전술』 [판형3] |
한편,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을 계기로 활성화된 재중 한인 독립운동 진영의 재정비 움직임과 한중 연합 전선의 결성이 구체화하였다. 그 일환으로 의열단이 중국 정부의 비밀결사인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와 합작하여 청년군사간부 양성에 착수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설립이 그것이다.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였고 설립 목표는 한국의 절대 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이었다. 간부학교 졸업생들의 활동 방침으로는, ‘1. 일만요인(日滿要人)의 암살, 2. 재만 항일 단체와의 제휴, 3. 국내와 만주 지역 노동, 농민층에 대한 혁명적 준비 공작, 4. 위조지폐 남발을 통한 만주국의 경제 교란, 5. 특무활동에 의한 물자 획득’ 등이 결정되었다.
훈련 장소로는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난징(南京) 교외의 탕산(湯山)에 있는 선사묘(善祠廟)라는 사찰을 이용하였다. 당시 이곳은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통신대 관리하에 있었다. 간부훈련반은 6개 대로 편제되어 제5대까지는 중국인이 수용되었고, 제6대에 한인이 수용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였다. 운영 전반에 관한 사항은 교장 김원봉을 정점으로 의열단 지도부가 관리하였다. ‘군사조(軍事組)’ 교관으로서 학생들에게 축성학(築城學)을 가르쳤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서 한국 독립의 사명을 짊어질 청년 투사 양성에 진력하던 중 김원봉과의 의견 차이로 그만두었다. 일제 자료에 따르면, 1933년 1월경 김원봉과 의견을 달리하여 의열단을 탈퇴하고 한커우로 가서 중국군에 복귀하였다고 한다.
1934년 6월 난징에 있는 중국군 부대의 연장(連長)으로 근무하였다. 또 1937년 12월에는 중국군 상교(上校)로 근무하였다. 삼민주의역행사 서기로 활동한 덩지에(滕傑)의 회고에 따르면, 삼민주의역행사의 우한(武漢) 및 장시성(江西省) 지역의 정보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합류하여 내무부 차장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 우한 지역 교포선무단(僑胞宣撫團) 단장과 광복군 5지대장에 임명되어 혼란기 중국 사회에서 동포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진력하였다.
1946년 12월 귀국하였다. 이후 국군에 참여하여 ‘육사 특8기’를 졸업한 다음, 대령으로 임관하였다. 1949년 7월 초대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이후 육군 제1훈련소 소장, 육군 제3관구 사령관, 육군 제50 사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