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문학의 여울 원문보기 글쓴이: 산머루
고운 최치원의 한시 감상(孤雲 崔致遠 韓詩感想)
김종식 시인
고운 최치원의 한시 감상(孤雲 崔致遠 韓詩感想)
무더운 여름 그늘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수박 한쪽과 어음 물에 발을 담그고, 나라를 고향을 그리워하던 한 선비의 생을 엿보기로 한다.
1)與 于愼微 長官(여 우신미 장관: 우신미 장관에게)
上國羈捷久(상국기첩구)
多慚萬里人(다참만리인)
那期顔氏巷(나기안씨항)
得接孟家隣(득접맹가린)
守道唯稽古(수도유계고)
交情豈憚貧(교정기탄빈)
他鄕知己少(타향지기소)
莫厭訪君頻(막염방군빈)
* 羈捷:~이끌리다. ~머무르다
*顔氏: 노나라 안회를 말한다. 안회가 살던 곳은 빈민촌으로 청백리의 표상이었다고 한다. 안회(顔回)는 자가 자연( 子淵 )이고 노(魯)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인데 30년 아래이다. 가난하지만 도를 즐겼으며, 누추한 골목에 틀어박혀 살면서 팔을 굽혀 베고 잠을 잤다.
공자가 "회야! 너는 집이 가난하고 지위도 비천한데 왜 벼슬하지 않느냐?"라고 하자, 안회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벼슬하길 원치 않습니다. 저에겐 성 밖에 50묘(畝: 음이 무인데 묘로 잃어야 한다. 사방 6자가 1보이고 백보가 1묘이다)의 밭이 있으니 죽을 끓여 먹기에 충분하고, 성 안에 10 묘의 채마밭이 있으니 옷을 지어 입기에 충분하며, 곡을 연주하니 스스로 즐기기에 충분하고, 선생님께 들은 것을 익히니 스스로 기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니 제가 무엇 때문에 벼슬을 하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정색하고 안색을 고치며 "훌륭하다! 회의 뜻이"라고 하였다.
당나라에 와서 산지 오래되어
나그네 너무 부끄럽습니다.
안씨의 누추한 동네인들 바랐겠습니까만
뜻 밖에도 맹자 같은 이웃을 얻었습니다.
참된 도리를 지킴에는 오직 옛 글을 읽고
정을 나눔에 어찌 가난을 탓하겠습니까!
타향에 친구가 드물어
당신을 자주 찾는다! 싫어하지 마십시오.
2)古意(고의: 깊은 생각)
狐能化美女(호능화미녀)
狸亦作書生(리역작서생)
誰知異種物(수지이종물)
幻惑同人形(환혹동인형)
變體想非艱(변체상비간)
操心良獨難(조심량독난)
欲辨眞與僞(욕변진여위)
願磨心鏡看(원마심경간)
여우는 미인으로 변하고,
삵괭이도 서생으로 둔갑할 수 있다네
사람이 사람 아닌 무엇인지 누가 알리오!
허깨비가 사람의 모양 한 것인가.
형체를 바꾸는 것 생각하기 어렵지 않지만
바른 마음 지니긴 정말 어렵소.
참과 거짓 분별하려면
마음의 거울을 갈고 보소서.
3)江南女(강남녀: 강남 처녀들)
江南湯風俗(강남탕풍속)
養女嬌且憐(양녀교차련)
性冶恥針線(성야치침선)
粧成調管絃(장성조관현)
所學非雅音(소학비아음)
多被春心索(다피춘심색)
自謂芳華色(자위방화색)
長占艶陽年(장점염양년)
却笑隣舍女(각소인사녀)
終朝弄機杼(종조농기저)
機杼縱勞身(기저종노신)
羅衣不到汝(나의불도여)
*강남: 중국의 양주의 중심 도시. 최치원이 유학하던 곳. 육조(六朝)물의 고지(故地). 여기서 강남은 지금의 대학로처럼 젊은이들의 거리였다고 한다. 시대적으로 1000년 전에 남녀 간의 사랑이 분명했다 하니 눈여겨볼 대목이다.
강남의 방탕한 풍속
가련하고 예쁘게 딸자식 키운 다네요.
성품이 바느질하는 것 부끄럽게 여겨
단장하고 악기 연주만 배운 다네요.
모두가 관능적 음악에 빠져있다네
우는 건 건전한 음악 아니고
스스로 청춘의 멋이라지만
영원토록 젊은 시절 누릴 것인지.
도리어 이웃 소녀 조롱하기를
아침 동안 베틀에서 북을 울려도
베틀에서 내려오면 몸만 피곤하고
비단옷은 네게는 돌아가지 않는 다네.
4)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가야산 독서당. 가야산에 숨어살며)
狂噴疊石 吼重巒(광분첩석 후중만)
人語難分 咫尺間(인어난분 지척간)
常恐是非 聲到耳(상공시비 성도이)
故敎流水 盡籠山(고교유수 진농산)
*疊石: 바위가 포개진 모양
*狂噴 : 물이 돌에 부대기여 안개처럼 퍼지는 모양
층층 바위 돌에 분출하고 겹겹산에 포효하는 물
아주 가까운 곳의 사람의 말소리조차 구별키 어렵네.
시비 가리는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일부러 흐르는 물더러 온 산을 돌게 하네.
*주석: 옳고 그름을 다투는 세상 사람들이 싫어서 참과 거짓이 얽혀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싶지 않아서 그는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렇게도 자부심을 지녔던 자기의 시를 지으며 그는 자기를 세상에서 떼어 놓고 살았다. 당나라에서나 고국에서나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시인이기에 그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땅을 밟고 살기 힘들었던 시인이었기에 가야산에 숨어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한다. *
5)제우강역정(題芋江驛亭: 우강역 정자에서 시를 짓다)
沙汀立馬 待回舟(사정입마 대회주)
一帶煙波 萬古愁(일대연파 만고수)
直得山平 兼水渴(직득산평 겸수갈)
人間離別 始應休(인간이별 시응휴)
물가 모래톱에 말을 세우고, 돌아오는 배를 기다리니
한 줄기 연기 같은 물결은 만고의 수심일세.
산이 평지가 되고 물이 다 말라야
인간 세상 이별이 비로소 그치리라.
6)추야우중(秋夜雨中: 가을 밤 비는 내리고
秋風惟苦吟 (추풍유고음)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쓸쓸한 가을바람에 애써 시를 읊어보나
험한 세상길 내 마음 알아주는 이 드물구나.
이 한밤 창밖은 비 내리고
등불 앞에 마주한 만 리 먼 내 마음이여!
7)촉규화(蜀葵花: 접시꽃
寂寞荒田側(적막황전측)
繁花壓柔枝(번화압유지)
香輕梅雨歇(향경매우헐)
影帶麥風欹(영대맥풍의)
車馬誰見賞(거마수견상)
蜂蝶徒相窺(봉접도상규)
自愧生賤地(자괴생천지)
敢恨人棄遺(감한인기유)
*접시꽃: 촉규화(蜀葵花)란꽃을 말한다. 방언으로 치키화라 부른다. 부인병에 쓰인다. 꽃이 흰색은 백대하. 적색은 적대하에 효험이 좋다.
스산한 황폐한 밭 둘레에
흐트러진 꽃가지 늘어지고
비 그치자 퍼져오는 향기로운 매화의 향기
보리밭에 부는 바람에 꽃 그림자 기울고
말 탄 귀한 분들 누가 보기나 할까
벌 나비만 모여드네
천한 곳에 생겨남이 부끄럽고
사람의 버림을 받아 한스럽다네.
8)우흥(寓興: 내 마음
願言扃利門(원언경이문)
不使捐遺體(불사연유체)
爭柰探珠者(쟁내탐주자)
輕生入海底(경생입해저)
身榮塵易染(신영진이염)
心垢水難洗(심구수난세)
澹泊誰與論(담박수여론)
世路嗜甘醴(세로기감례)
원합니다! 이욕의 문에 빗장 걸고
부모님 물려주신 몸 버리지 말게 하소서
어찌 말리랴, 구슬 찾는 자
무모하게 바다 밑에 드는 것을.
한 몸의 영화도 티끌에 쉽게 물들어
마음의 때 물로도 씻기 어렵네!
마음의 단백함을 누구와 이야기할까
험한 세상살이 좋고 쉬운 일만 즐기네.
***다음은 지리산 석굴에서 어느 노승이 여러 권의 책을 발견했는데 그중 한 권이 최치원이 쓴 것으로써 책은 분실하고 남은 시라 한다. 이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구례군수 민대륜이 그 시첩을 보여주어 확인해보니 정말 치원의 글씨였고 시 또한 기이하고 옛 스러워 , 치원의 시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였다. 아마 이때까지는 원본이 있었나 싶다. ***
東國花開洞 (동국화개동)
壺中別有天 (호중별유천)
仙人推玉枕 (선인추옥침)
身世欻千年 (신세훌천년)
*壺中: 병의 밖으로 여기서는 속세로 번역함이 옳다.
동쪽 나라 화개동은
속세를 떠난 별천지라네
선인이 옥 베개를 권하니
몸과 세상이 어느새 천년일세.
萬壑雷聲起 (만학뇌성기)
千峯雨色新 (천봉우색신)
山僧忘歲月 (산승망세월)
唯記葉間春 (유기엽간춘)
*壑:골짜기
일만 골짜기 우뇌소리 일어나고
일천 봉우리에는 비 맞은 초목 새로워라
산속의 중은 세월을 잊고
나뭇잎으로만 봄을 기억하네.
雨餘多竹色 (우여다죽색)
移坐白雲開 (이좌백운개)
寂寂因忘我 (적적인망아)
松風枕上來 (송풍침상래)
*寂寂: 고요하다. 또는 적적하다.
비온 뒤라 대나무 빛이 고아
옮겨 앉으니 흰 구름이 열리네.
고요한 가운데 나를 잊고 있노니!
솔바람 베개 위를 스치네.
春來花滿地 (춘래화만지)
秋去葉飛天 (추거엽비천)
至道離文字 (지도이문자)
元來在目前 (원래재목전)
*滿地: 가득하다 많다.
봄이 오자 꽃이 땅에 가득하고
가을이 가자 잎이 하늘에 휘날리네!
지극한 도는 문자를 떠나서
원래 눈앞에 있는 법이라네.
潤月初生處 (윤월초생처)
松風不動時 (송풍불동시)
子規聲入耳 (자규성입이)
幽興自應知 (이흥자응지)
*幽興: 흥치가 일어나다
*子規: 소쩍새. 서쪽새
*潤月: 젖다. 적시다 .달이 물에 젖다. 즉 달이 내에 비추다
시냇가에 달이 처음 비치는 곳
솔바람도 움직이지 않을 때
소쩍새 소리 귀에 들어오니
그윽한 흥취를 저절로 알겠노라.
擬說林泉興 (의설임천흥)
何人識此機 (하인식차기)
無心見月色 (무심견월색)
黙黙坐忘歸 (묵묵좌망귀)
*黙黙 : 넋을 놓다. 멍하다
숲속의 흥취를 말하려 해도
어떤 사람이 이 기미를 알랴
무심코 달빛 보며 말없이 앉아
돌아갈 길을 잊어 버렸다네.
密旨何勞舌 (밀지하노설)
江澄月影通 (강징월영통)
長風生萬壑 (장풍생만학)
赤葉秋山空 (적엽추산공)
*萬壑: 온 골짜기
*赤葉: 단풍이든 나무의 잎
비밀스런 진리를 어찌 말할 거 있나
강이 맑으니 달그림자 통하네!
긴 바람이 온 골짜기에서 나자
붉은 잎이 가을 산에 비었어라.
松上靑羅結 (송상청나결)
澗中有白月 (간중유백월)
石泉吼一聲 (석천고일성)
萬壑多飛雪 (만학다비설)
*萬壑: 온 골짜기
소나무 위엔 담쟁이덩굴 얽히고
시냇물에는 흰 달이 흐르네!
바위틈으로 폭포 소리 울리자
온 골짜기에 눈발이 흩날리네.
< 고운 최치원은 누구인가>
서라벌황룡사 북쪽마을에서 857년 신라 현안왕 원년에 태어났다 어려서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해서 당나라 관직에 올라 토황소견문으로 황소의 난을 진압하여 이름이 났지만 외국인의 한계를 접하고 귀국하여 신라의 요직을 거치면서 신라의 국권을 다지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아버지는 견일(肩逸)로 숭복사(崇福寺)를 창건할 때 그 일에 관계한 바 있다.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고려 중기까지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 하고, 5두품이나 4두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 된다"라고 하여 경시한 점과, 진성여왕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阿飡)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왜 최치원의 설화가 떠도는가! >
이 설화는 원래 ≪수이전 殊異傳≫에 수록되었던 것이 뒤에 성임(成任)의 ≪태평통재 太平通載≫ 권68에 ‘최치원(崔致遠)’이라는 이름 아래 전재되어 있고, 그 뒤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 권15에는 ‘선녀홍대(仙女紅袋)’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전한다. 동일한 내용이기는 하나 〈선녀홍대〉가 〈최치원〉보다 약 5분의 1 정도로 축약되어 있다. 이 설화는 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에 관한 이야기다. 최치원은 신라 하대의 학자· 문장가로서,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출신이다. 특히 최씨 가문 중에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그 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887년 겨울 표수현위를 사직하고 일시 경제적 곤란을 받게 되었으나, 양양(襄陽) 이위(李隸)의 문객(門客)이 되었다. 그 후에 많은 관직을 거쳤으며,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는 동안 고운(顧雲)· 나은(羅隱) 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해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이즈음 신라는 혼란기를 맞이한다. 최치원은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으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해 몇 가지 관직을 거쳤다. 그러나 최치원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 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즐겨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南山), 강주(剛州 : 지금의 경상북도 義城)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합포현(合浦縣 : 지금의 昌原)의 별서(別墅) 등이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해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만년에는 모형(母兄)인 승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지은〈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년(효공왕 12) 말까지 생존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뒤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으나, 물외인(物外人)으로 산수간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며 또는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자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새로운 주장도 있다. 이상과 같은 최치원의 일생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 설화는 그의 일생과 맞물리는 점이 많다. 이 설화는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을 때의 일화에 관련된 문헌설화로서, 한 편의 설화이기는 하나 내용 구성면에서 다분히 소설적 면모를 띠고 있어 소설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 설화는 내용상 중국 남송(南宋) 때의 ≪육조사적편류 六朝事迹編類≫의 분릉문(墳陵門) 제13 쌍녀분기(雙女墳記)와 공통되는 바가 많아 상호 연관성이 있다. 당나라의 전기소설인 장작(張弗)의 〈유선굴 遊仙窟〉과도 공통되는 점이 많아 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중국의 이야기들이 전래되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인물인 최치원에 결부되었던 것이다. 최치원은 오랫동안 중국에 살았던 인물이기에 이들 중국 설화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고, 또 그의 시재(詩才)가 그곳에서 높이 평가되었기에 설화 속에서도 그의 시가 죽은 두 여인의 혼까지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설화의 내용에서 혼교설화(魂交說話)·재생설화(再生說話)·애정설화(愛情說話) 등의 요소를 볼 수 있는데, 이 설화가 중국 육조 시대(六朝時代), 그리고 당나라 시대 신괴류(神怪類)의 전기적 설화소설에서 다분히 영향을 받고 있음을 말하는 예이다. <최치원설화>는 귀신과 사랑을 나눈다는 점에서 시애설화의 성격도 있는데, 시애설화는 산 자가 주검을 사랑하는 내용의 설화로서 이 계열의 설화는 동·서양을 통하여, 또한 고금에 걸쳐 널리 전승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설화의 문헌적 근거로서, 불경을 비롯하여 중국의 ≪수신기 搜神記≫·≪법원주림 法苑珠林≫·≪후한서≫의 적미(赤眉)이야기, 일본의 ≪천심일본직이 千尋日本織二≫ 등의 외국 사료를 들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최치원설화>와 관련이 있는 <선녀홍대> 및 <쌍녀분>, 그리고 다음에 살펴 볼 ≪수이전 殊異傳≫의 〈수삽석남 首揷石枏〉, ≪삼국유사≫의 〈도화녀비형랑 桃花女鼻荊郎〉에서 그 편모를 찾을 수 있다. 이 설화의 유형을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더라도 죽은 사람의 혼령과 우연히 만나 함께 노니는 설화, ② 사랑하던 사람의 혼령이 살아 있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설화, ③ 정상적이 아닌 인간들이 무덤 속의 시신을 꺼내어 농락하는 설화. ①은 우리의 ≪수이전≫ 속의 〈선녀홍대〉 설화가, ②는 ≪삼국유사≫의 〈도화녀비형랑〉 이야기, ③은 대체로 외설 이야기로써 전승되고 있다. 이 밖에 일본에서는 생전에 지극히 사랑하였으나, 이미 유명을 달리한 사람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시신을 애무하는 예화도 전한다. 시애설화는 대체로 엽기적인 소재로 다루어지면서 청자(聽者)들의 흥미를 돋우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②와 같은 경우는 도굴(盜堀)과도 맥락을 함께 하면서 부연된 설화가 아닌가도 여겨진다. 그런데 이 설화는 동서고금에 걸쳐 넓은 분포를 보이고 있음은 물론, 이 전기성(傳奇性)의 영향으로 작품화되어 왔다. 시애설화와 소설의 관계를 매우 깊게 파헤쳐, 시애설화가 근대에 와서도 소설화되어 있음을 논증한 연구 성과도 이루어졌다. 결국 시애설화는 시신(屍身)의 정령을 인식한다는 관념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할 때, 이 설화의 작품화는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질 것이란 점은 명백하다고 본다. 한편 자신들이 원하는 신랑감을 얻지 못하고 아버지와 갈등을 빚다가 죽은 팔낭자와 구낭자는 ‘손각시’에 가깝다. 손각시는 처녀가 죽어서 되었다는 귀신으로, 일명 ‘손말명’·‘왕신’·‘처녀귀신’이라고도 한다. 혼기에 찬 처녀가 시집을 가지 못하고 죽어 한이 되어 악귀로 화하여 주로 자기 또래의 혼기에 차 있는 처녀에게 붙어 괴롭히고 해를 입힌다. 특히 왕신은 집안을 망치기까지 하여 특별히 가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마루 한 귀퉁이 벽에 작은 선반을 매고 그 위에 작은 오지단지나 나무상자를 신체로 모시거나 또는 문갑 같은 데에 왕신을 모시는데, 새로 집안에 들어오는 물건이 있으면 그 앞에 먼저 바친다. 가족 중에 출가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먼저 왕신에게 고하지 않으면 큰 화를 입는다고 한다. 남해에 있는 사량도(蛇梁島) 옥녀봉(玉女峰)의 옥녀 원령(怨靈) 이야기는 유명하다. 전설에 의하면, 과년해진 옥녀가 홀로 된 아버지의 성적 요구에 괴로워한 나머지 옥녀봉에 올라가서 떨어져 자살하였다. 그 뒤부터 동네에서 처녀가 시집갈 때 신부가 탄 가마가 옥녀봉 밑을 지날 때에는 가마에서 내려 걸어간다고 한다. 이는 옥녀가 시집도 못 가보고 죽었기 때문에 그 원령이 옥녀봉에 남아서 시집가는 처녀에게 샘을 내어 화를 미친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혼기가 된 처녀가 죽게 되면 그 혼령이 손각시가 되는 걸 두려워하여 매장할 때 남자의 옷을 입혀 거꾸로 묻거나, 사람의 내왕이 빈번한 십자로의 교차되는 곳에 은근히 묻어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은 간접적으로나마 남성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남성과 접촉을 할 수 있고, 못다 푼 한을 달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강원도 지역에서는 미혼으로 죽은 처녀나 총각을 죽은 후에 결혼시키는 허재비굿을 하기도 한다. 처녀에게 손각시가 붙으면 병이 들거나 괴로움을 당하여 시집을 못 간다. 이와 같이 손각시가 괴롭힐 때에는 부모는 다음과 같이 주문을 외우게 된다. “○○생 아무 성받이 모년 모일 이렇게도 몸이 불편하여 무녀한테 물어 하니 총각 죽은 몽달귀야, 처녀 죽은 손각시야, 못다 먹고 못다 입은 청춘의 원혼귀야, 그저 이 ○씨 ○○생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으면 무쇠구멍에다 넣어서 소금 염떡으로 아가리를 쫙 찢어서 풍두지옥에다 하옥시킬 터이니 오늘 이 만반진수(滿盤珍羞:소반에 가득한 맛있는 음식) 차렸으니 많이 처먹고 물러가지 않으면 환두칼로 배지를 삼 갈래로 찢어서 거리에다 걸어놓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열두 가닥 찢을 테니 그런 줄 알아라.” 라고 위협적으로 쫓는다. 이때 제물은 간단한 메밥과 냉수뿐이다. 팔낭자와 구낭자는 다른 처녀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소원대로 존경할 만한 배우자를 만나 운우지정을 나누어 이생의 원한을 풀고 있다. 즉 처녀의 몸으로 원한을 품고 죽어, 그 원한을 남성을 통해 풀고 있다는 점에서 손각시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한편 설화의 내용 중 주인공들의 의사표시가 대부분 한시로 나타나 있어 전체적으로 20여 수의 시가 등장하는데, 이러한 설화소설 속의 삽입 시는 후대 한문소설류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는 데에서 이 설화의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조선 시대 소설로 〈최치원전〉 또는 〈최고운전〉·〈최문헌전〉 등의 최치원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있지만, 이 〈최치원설화〉와 공통되는 점은 별로 없다. 〈최치원전〉은 지하국대적제치설화(地下國大賊除治說話) 등 다양한 조선 시대 구전설화의 집대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병 양란 이후의 민족적 민중 의식이 표출되어 있어 그 성립 연대가 조선 중기 이후로 보이며, 그 설화적 내용에 있어서도 공통적인 요소가 없어 〈최치원설화〉와의 직접적인 상호 영향 관계는 인정되지 않는다.
<작가의 말>
어느 날 문득 최치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감은 왜일까! 그는 출생과 몰이 전해 지지 않는다. 어려서 당나라에 유학을 하고 거기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외국인인 관계로 많은 어려움을 겪 고 시기를 받아 고국으로 돌아와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侍讀 兼 翰林學士 守 兵部侍郞 知瑞書監)의 높은 벼슬을 하면서 나라의 발전과 안보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한편, 당에서 보고 들은 것을 역어 ( 계원팔경 )이라 이름하고 책을 펴내 국민의 의식을 일깨워 주기도 했으나 불세출의 권력의 총애를 받게 되자 조정의 안과 밖에선 그를 시기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와중에 헌강왕과 정강왕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진성여왕이 들어서자 나라의 정세가 극도로 불안해 지면서 조정의 중상모략에 휘말려 지방관으로 밀려나 태산군(지금의 전북 태안군 과 전령군 그리고 경남 함양군과 충남 서산군)의 태수가 되어 백성들의 안위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36세 되는 해에 견훤이 난을 일으켜 후백제를 세우자 진성여왕 8년 37세 되던 해에 정치의 급선무 10조를 써서 상소하여 신라의 작위 중 6위에 가는 아찬(阿飡)에 오르게 되는데 이는 진골 이외의 평민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작위이다. 44세 되는 해에 궁예가 난을 일으켜 고려라 하며 나라를 만들자 선생은 학문은 이런 혼란기에는 쓸모가 없다. 생각하시고 나무지팡이 하나 벗 삼아 방랑의 길을 걷게 되는데 아마도 기록상으로 최초의 방랑시인이자 걸객일 것이다.
일찍이 태수를 지낸 영남과 호남의 여러 고을은 물론이고 경주의 금오산과 함천의 청량대와 강주 경북의성의 빙산과 지리산의 쌍계사와 동래해운대와 함포, 마산의 월명대와 양산의 임경대 함양의 학사루등 모두다 발자국을 남긴 유적이요. 특히 경북 안동의 치원봉(致遠峯)이란 곳의 바위굴 속에서 기도하면서 새겨 놓은 노파의 모습은 선생에게 밥을 지어주던 할머니라 전한다.
전국을 구름처럼 떠돌며 어느 때는 숲 속의 나무를 찍어 정자를 매고 어느 때는 흐르는 강 기슭에 집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기도 하며 세상을 영위하다, 어느 날 호련이 보이지 않으니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고 산신이 되었다고도 하며, 선생이 이룩해 놓은 경학이 발판이 되어 조선으로 이어져 유학이 발전하는 근간을 이루어 전국의 서원과 향교에 배향되어 지금도 제향이 봉해지니 사람으로 태어나 최고의 영애가 아닌가 싶다. 난랑비서(鸞郞碑序)문은 화랑의 내용을 알려준 기록이요. 진감국사 . 백월화상 . 지중대사의 비문과 화엄경결사문(華嚴經結社文)등의 명문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의 끝을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생몰( 生沒 )의 연대가 확연치 않음은 당시의 상황을 기록할 여건이 없었지 않나 싶다. 10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생몰이 궁금한 것이 아니고 그가 남긴 글과 사상을 엿보자는 것이다.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글의 흐름과 높은 산과 같은 고음과 강물처럼 흘러가는 낮은 음의 조화를 이룬 높낮이는 감이 범부들이 범접을 금하는 까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