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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이조선)
[눅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지금 세상은 점점 영적으로 무감각해지고 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교회에 필링이 없고 감각이 없고 케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무감각이라는 영을 주의해야 한다. 창세기에 보면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라고 말씀한다. 영어번역으로는 웅크리고 있다. 이 영이 바로 우리를 삼키고 우리 자녀들을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는 악한 영이다. 이 영은 우리의 신앙을 미지근하게 만든다. 우리가 큰 죄를 짓지 않아도 우리의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우리의 마음이 무감각해지면 마귀는 이기는 것이다. 이 무감각을 이기는 것이 누가복음 12:49절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 세 가지의 불이 무엇인지 먼저 알고 또 이 불을 꼭 받아서 우리의 삶에 지속적으로 찾아와 무감각하게 만들고 사랑을 식게 하는 이 악한 영을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는 것이다.
세 가지 불 중에서 첫 번째는 “소멸하는 불”이다. 히브리서 12:29절에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라고 말씀하는데 첫째 종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이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원수들을 소멸하신다. 악인들을 소멸하신다. 마지막 심판 때에는 믿지 않는 자들을 영원한 불에 던지신다. 두 번째 종류는 나쁜 것들을 소멸하시는 좋은 불이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리는 제물을 소멸하셨다. 우리는 절대로 불순종하는 자, 믿지 않는 자가 되면 안 된다. 그래서 절대로 이 무서운 심판의 불을 받으면 안 된다. 교회를 다닌다고, 사역자라고, 직분자라고 안심하지 말아야 한다. 진실없는 종교적인 위선자가 되면 안 된다. 그게 이상한 불이다. 뜨거운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종교적인 불은 이상한 불이다. 자기 혼자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불이 이상한 불이다. 하나님은 그런 교만의 불을 가장 싫어하신다. 하나님이 백성들의 제사를 소멸하셨듯이 즉 그 제사를 완전히 받으셨듯이 우리가 어떤 제물을 드려야 하나님이 소멸하시는 불로 우리의 제물을 받아주실 것인가? 어떤 제물을 드려야 우리의 삶에 우리의 영혼에 불을 부어주실까? 거기에는 속죄 제물이 있어야 한다. 구약 시대의 제사법은 완전치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옮기면 우리의 귀한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보시고 예수님의 귀한 피를 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주신다. 그리고 우리를 받아주셨다는 증거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불을 내려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만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그런 자들은 성령의 소멸하는 불을 체험할 것이다. 이것은 죽이는 불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받아주시는 그런 소멸하는 불이다. 성령의 소멸하는 불은 우리의 악한 것들을 다 용서의 불로 태워주시고 우리의 약한 것들에 능력의 불을 부어주신다.
둘째 불은 “연단하는 불”이다.
금광석을 뜨거운 불에 넣어 찌꺼기를 다 태워버려야 순금이 나온다. 말라기 3:2절에 보면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내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연단하는 불이 그의 삶에 찾아올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했던 것, 우리의 우상들을 다 버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려고 연단하는 불이 찾아온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이 연단하는 또는 성결케 하는 불을 보내신다. 이사야 48:10절에 보면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용광로에서 택하였노라”고 말씀하신다. 이 연단의 불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올 것이다.
마지막 불은 예레미야 20:9절의 말씀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골수에 사무친다는 이 뜻을 영어로 표현하면 내 몸 안에 이 불이 갇혀 있다는 말이다. 이 불이 내 뼈 안에 골수 안에 갇혀서 타고 있기 때문에 너무 뜨거운 것이다. 너무 뜨거워 예레미야가 견딜 수 없었는데 주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나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핍박 때문에 이 말씀을 전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내 골수에 있는 그 불이 너무 뜨거워 안 할 수 없었다. 예레미야는 열정과 사명의 불을 너무나 정확하게 말해준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핍박이 오기 때문에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해야만 하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고서는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하는 이 뜨거운 사명의 불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에게도 이 불이 있었다. 골로새서 1장 29절에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영어성경에는 씨름한다는 투쟁한다는 에너지라고 했다. 이 에너지를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 안에 있는 이 에너지가 너무 강해서 씨름할 수밖에 없다. 나는 씨름을 하고 있다. 투쟁을 하고 있다. 이 불타는 에너지가 바울의 가슴에 늘 폭발하려고 하고 있으니까 바울은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주님의 일을 열정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불은 예수님 안에도 불타고 있었다. 이 불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불이었다. 이 사랑의 불이 예수님 안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악한 자들이 주님의 손과 발을 못으로 박아도 예수님은 참으셨다. 아직도 이 불은 꺼지지 않고 우리를 향해 활활 타고 있다. 이 불은 사람의 목숨보다 더 강한 불이다. 이 불은 죽은 사람도 다시 부활하게 할 수 있는 불이다.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셨고 거기서 성령의 불을 던지셨다. 이 불을 받아야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뼛속에 갇혀 있는 불의 능력을 알 수 있다. 이 불을 받아야 이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이 불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모든 무관심, 무감각을 태울 수 있다. 이 불이 지속적으로 내 안에 타고 있을 때 이 세상의 유혹,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그 무엇도 내 안에 차지할 자리가 없다.
주님의 소멸하는 불을 받아 우리 안에 있는 무감각과 미지근함, 무관심을 태어버리고 또 주님의 연단하는 불을 받아 고난의 과정을 기도로 뚫고 나가야 하며 마지막으로 뼛속에서부터 타오르는 사명의 불을 받아 이 세상 어느 곳에 가던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10. 요셉의 추수감사
[창41:48-49]
48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49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미국으로 건너 간 청교도들이 처음 농사를 지어 추수한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생겨났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이 되면 감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성경에서 이렇게 큰 벅찬 감격을 느꼈던 사람이 요셉이다. 요셉은 열일곱 살 때까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형들에 의해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 종살이의 고생을 하고 또 보디발의 아내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가 그곳에서 죄수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훗날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곳에 서게 되었다. 바로의 꿈을 해몽한즉 7년 풍년이 있은 후 7년의 흉년이 찾아오는데 그 흉년이 너무 흉하여 처음 7년의 풍년을 찾아보기 힘듦으로 감독을 세워 풍년이 들 때 곡식을 잘 관리해야 풍년 뒤에 찾아오는 흉년에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을 수 있다는 조언을 한다. 요셉의 말을 들은 바로는 애굽에서 요셉보다 총명한 자를 찾을 수 없음으로 요셉을 총리로 세운다.
요셉에게 있어서 추수감사절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풍년이 든 첫 해에 드디어 풍년이 시작 되었구나, 이렇게 칠년 동안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칠년 동안 흉년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흉년을 철저히 대비하여 양식을 아껴야 하고 창고를 지어 수확한 곡식을 잘 보관해야 하는데 이것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은 보관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 양식을 낭비하지 않도록 법을 엄하게 세우고 양식을 잘 보관하도록 했을 것이며 또 흉년 시 주변국에 공격에 대비하여 국방에도 힘썼을 것이다. 이 모든 대비를 요셉은 잘 했을 것이다.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그냥 단순한 감사가 아니라 대비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은혜의 풍년의 시기를 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땅에 기근을 보낸다고 말하고 있다. 기근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서 오는 갈함이 아닌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다. 육신의 양식도 잘 준비해야 되지만 영의 양식도 잘 준비해야 된다. 지혜로운 사람은 대비할 것이고 지혜 없는 사람은 흥청망청 살다가 갑자기 망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태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 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데 요셉이 형들과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어린 나이에 동생을 팔아먹고 아버지의 고통을 보면서 또 아버지가 이를 알게 될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이면서 살았을까, 그게 요셉을 만났을 때 형들의 고백을 통해 나타났다. 자기의 죄를 고백하지 못하는 것처럼 가련한 인간들이 없다. 요셉을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아버지를 속였을 것이고 요셉과 화해도 못했을 것인데 가나안에 흉년이 들면서 요셉과 만나 드디어 화목하게 되는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다.
환란이 오기 전에 먼저 풍년의 때가 반드시 온다. 지금이 풍년기간이라면 지혜로운 사람은 은혜 받고 기도 많이 하고 성령 충만하고 이 기간에 열심히 성경을 읽고 말씀으로 무장할 것이다. 이렇게 준비될 때 은퇴해도 하나님은 써주신다. 이 땅에 말씀의 기근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준비된 자를 들어 써주시는 날이 반드시 온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주어졌을 때 성경을 읽어야 된다. 그리고 이 말씀을 깨닫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나에게 주신 시간을 다른 일에 뺏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 말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곧 통일이 올 것인데 말씀에 힘을 쓰지 않으면 저 북한에 어떻게 제대로 된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성령을 부어주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니 은혜 가운데서 더욱 더 새로워져야 한다.
11.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마2:1-2]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서 귀한 보배함을 열어 세 가지 보물을 예물로 드리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오늘 말씀에 동방박사들이 동방으로부터 왔는데 그들이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더니 그 일로 인해 예루살렘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놀라야 할 사람들이 유대종교 지도자들인데 이들은 동방박사들의 방문에 굉장히 냉소적이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이 동방박사들을 기억하며 2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일어났던 그 일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새롭게 일어나기를 소원하면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동방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유대 땅에 왕이 나신 것을 알고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아기 예수를 찾아왔다. 이들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을 것이다. 마치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탄생일이라는 것을 다 알지만 왜 아기 예수가 태어났는지는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중에 메시아가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다. 그 다음 40일이 지난 다음 아기 예수님의 성결예식을 행하려고 성전을 찾았을 때 시므온이라는 사람과 안나라고 하는 나이가 많은 선지자들이었다. 그리고 동방 박사들, 또 마리아와 요셉도 알고 있었지만 메시아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엘리사벳을 비롯한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다. 아모스 3: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누구에게 반드시 알게 하시고 행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노아에게 알리셨고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도 아브라함에게 알리셨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하실 때 누구에겐가 반드시 가르쳐 주시는데 이것은 기도하게 하시려고, 그래서 그 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가르쳐주신다. 이 땅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미리 경고하심을 받고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복된 사람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에게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미리 알려주시는가?
예수님을 제일 처음 만난 사람들이 목자들이었다. 목자들은 한밤중에 들에서 양을 치다가 천사가 나타나 말하는 놀라운 신비를 체험한다. [눅2:11-12;14]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말을 듣고 목자들이 깜짝 놀라서 찾아가 봤더니 정말 아기 예수님이 구유에 누워 계셨다.
둘째는 시므온과 안나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이다. 그때 성령께서 시므온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성전을 찾게 하셨다. 시므온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 인도하심을 따라 성전에 들어가서 아기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 아기가 바로 네가 죽기 전에 만날 그 메시아라고 깨닫게 해주셨다. 그래서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 첫 마디가 주여! 이제는 종을 평안히 좋아주시는 도다. 내가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하고 고백한다.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시므온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또 안나라고 하는 여자는 결혼한 지 7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그 이후로 성전에서 주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았다. 그렇게 기도한 지 84년이 되었을 때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셋째로 동방박사들이다. 이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서 보물을 드린 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헤롯에게로 가지 않고 다른 길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요셉과 마리아도 꿈에서 빨리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는 계시를 받고 애굽으로 피신을 갔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에게 특징이 있는데 첫째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을 알려주시지 않으신다. 마태복음 11:25절에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잇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닌 세상에서는 우습게 보이고 미련해 보일지라도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고린도전도 1:26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다음 절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잘난 사람 되려고 하지 말고 어린아이 같이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한다.
동방박사들처럼 먼 길을 걸어 예수님을 만나러 갈 때 경비가 얼마나 많이 들겠으며 길에 강도의 위험과 또 보물을 예수님께 드리면 나는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졌기에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시므온과 안나도 나이는 많았지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기에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이 있었다. 우리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이분들은 신비를 체험했다. 동방박사들도 신비를 체험했다. 별을 보고 알고 그 별을 따라 왔다가 헤롯 왕을 만나서 베들레헴으로 찾아가는데 힘든 여정이었음에도 지체하지 않고 그 밤에 길을 떠난다. 그 밤에 막연하게 어떻게 아기 예수님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도 없이 길을 나섰는데 이들을 인도했던 그 별이 아기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데리고 갔다. 동방박사들은 천군천사의 찬양의 신비를 체험했던 사람들이다. 시므온과 안나도 성령의 신비를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사람들은 심지가 견고한 사람들이었다. 헤롯이 아기 예수를 찾을 때 함부로 발설하면 어떻게 됐을까. 시므온과 안나도 아기 예수님을 만났지만 이들이 성전에서 이야기했다면 아기 예수님이 얼마나 위태로웠을까.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영광 가운데 계시는 그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 마음의 아름다운 자세가 되고 또 소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12. 임마누엘의 생활
[마1:18-23]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이다. 오늘 본문에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구약에서는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라고 하는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오늘날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고 묻는 일들이 많은데 구원은 이론이 아닌 체험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가를 체험하는 것이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는 확신이 있는가? 그 확신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다. 내 마음대로 살았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에녹은 3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갔다. 노아도 하나님과 함께 했기에 홍수심판이 임할 것을 알고 방주를 지어 준비하였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났다.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에도 믿음으로 바쳤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냐, 하시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모세나 다윗, 엘리야를 비롯한 성경의 위인들은 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다. 우리가 100년 넘게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헛것이나 짧게 살다가 죽어도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그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무엇일까?
사도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1,2,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다섯 권의 책을 기록하였는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요한복음 1:1절을 시작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말씀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거나 어디로 갈 때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기 위해 말씀이 생각나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생활이 구원이다. 이 마지막 때에 이 땅에 말씀의 기근이 온다고 하셨다. 성경도 가득 넘쳐나고 교회도 많고 믿는 사람도 많지만 생명수가 없다. 마지막 때는 말씀의 기근이 온다. 더 늦기 전에 말씀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곧 말씀의 기근을 보낸다고 말씀하셨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고 물이 없어서 오는 갈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온 세상을 가득 덮는다고 말씀한다. 그런 날이 멀지 않은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듣고 지켜 행해야 한다.
요한복음 4:23-24절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영은 성령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지 보고 계신다. 예수님이 성전에 가셨을 때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 앞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을 내쫓으셨다. 지금도 우리 교회에 예수님이 찾아오신다면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래서 성령으로 예배해야 한다. 가인과 아벨이 똑같이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 그러자 가인이 화가 나서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다. 우리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면 가인처럼 거짓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겠다고 달려들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예배를 많이 드렸다고 하는데 거짓된 예배를 얼마나 많이 드렸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난 40년 동안 너희의 제사를 받은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있었고 대제사장인 아론이 제사를 드렸는데,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거짓된 예배,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너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라.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찾으신다. 성령의 불이 있는 예배를 찾으신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하나님 앞에서 불이 나와서 두 제사장을 그 자리에서 태워 죽였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게 더 이상 소원이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불이 안 붙는다. 사람들은 성령 받을 생각을 안 한다. 성령이 뭔지도 모른다. 전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린다.
요한복음 1:5절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빛에 반대는 어둠이다. 하나님이 없는 곳은 어둠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에 거하라고 말씀하신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지 않았다고 하신다. 즉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둠을 쫓아내고 빛으로 충만하게 만들어야 한다. 교회가 등대를 세우고 만방에 빛을 비추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요한일서 4: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그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기 바란다. 기쁨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해 보시기를 바란다. 사람의 사랑을 받아도 행복한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질 때 우리에게 행복이 넘쳐난다. 반대로 내가 남을 사랑하게 되면 하늘나라에 가서 별같이 빛나는 사람이 된다.
오늘 말씀을 네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하나님은 말씀이다. 둘째, 하나님은 영이시다. 셋째, 하나님은 빛이시다. 넷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새해에는 말씀이신 하나님과 영이신 하나님과 빛이신 하나님과 사랑이신 하나님과 함께 살겠다고 결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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