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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이 경숙아버지] 03 - 아재가 아부지였으믄 좋겠어예
S# 1. 외딴 농가 외양간 (저녁)
지붕 위를 쳐다보며 개 으르렁거리고
외양간 벽에 기대놓은 사다리 끝에 엉거주춤 선 재수
재수 저리 가, 저리! 저놈의 똥개씨끼. 니 내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가 이라노? 당장 몬 꺼지나?
남식 (밑에서 씩씩) 남의 돈이나 훔쳐 먹고 사니까 개도 우습게 보는 거라구요? 도망치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어요? 어림도 없지. 내 돈 어떻게 할 거예요?
재수 지금 돈이 문제가? 쟈 좀 어떻게 치아바라.
남식 누구 좋으라구. (개에게) 야 가서 물어, 물어.
재수 니 진짜 그 따구로 나올 끼가? (하다 사다리로 다가오는 개에게) 야야 오지마! 오지마. (손에 잡히는대로 썩은 나뭇가지 던지며) 저리 가! (하다 왕~달려드는 기세에 지붕 위로 흠칫 물러나며) 저기 미?나? 똥개새끼가 사람 잡겠네. 내가 쟈한테 물리가 니한테 좋을 끼 머꼬?
남식 (그제야) 야 너 저리가. 너보다 내가 더 급하거든. 빨리 안가? (돌멩이 주워 던지면)
개 도망쳐 달아나고
그제야 헐레벌떡 달려오던 윤섭, 메리를 부르며 그 뒤를 쫓아 달려가고
역시 헐레벌떡 달려온 경숙
경숙 (숨 차 헐떡이며) 아부지 괘안나?
재수 니 눈깔에는 내가 지금 괘안아 보이나, 이 가스나야! (남식에게) 야야야 니 지금 머하는 기고?
남식 (사다리 치우며) 내 돈 어떻게 할 건지 얘기하기 전엔, 거기서 못 내려올 줄 알아요.
재수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 이 판국에 무슨 얘길 하자는 기고? 저놈의 가시나, 이래 애비 꼴을 우습게 만드이 속이 시원하나? 와 게우 강새이고, 호랑이를 풀어가 아예 골로 보내뿌지.
경숙 그기 아이라 내는 아부지 도울라꼬...
재수 돕기는 개코를 돕나?! 어디서 총지발총지발 말대꾸고?
남식 왜 엉뚱한 애한테 화풀이예요? 내가 그 시커먼 속을 모를 줄 알아요. 괜히 애 잡지 말고 내 돈 어떻게 할거냐구요?
밭 갈다 보고 호미 들고 황급히 달려온 주인
주인 아니 넘의 외양간에서 머하는교? 퍼뜩 내려오소. 안 그캐도 지붕 손볼라꼬 사다리 바쳐논 긴데.
그 순간 지붕 뿌지직하고
놀라 발을 옮기던 재수, 돌연 푹 꺼지는 지붕과 함께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놀라는 남식과 경숙.
경숙 아부지~ (달려가고)
S# 2. 경숙이네 마당
재수 (방안에서/ E) 아이구 내 허리~ 아이구~ 아이구아이구~ 인자 사나-구실도 몬하고 앉아서 밥 받아묵게 생?네~ 아이구~갈수록 더 쑥쑥 쑤시니 우짜믄 좋노~
툇마루 끝에 걸터앉은 남식, 안절부절 바늘방석이고
S# 3. 동 안방
역시 풀 죽어 구석에 쭈그려 앉은 경숙 보이며
재수 (엎드려서 뜨거운 물수건으로 허리 찜찔하며) 전쟁통에도 머리털 하나 안 다치고 몸 보전할라꼬 내가 을매나 조심했는데, 저노무 삼팔이 하고, (뒷발길질로 경숙 차며) 이노무 가스나 땜에 아이구야~ 허리빙신 되게 생?네~
경숙 (억울해서) 그기 아이라이까! 아부지는 알지도 몬하믄서...
재수 아이기는 머가 아이고?! 꼴도 보기 싫다, 썩 꺼지그라!
경숙 (눈물 글썽해 나가고)
재수 아예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그라!
할머니 니도 그카는 기 아이다. 우째됐든 그래 큰 돈이 손에 들왔으믄 집구석에 쌀가마라도 하나 보냈으야재, 혼자 다 털어묵었으이 이래 동티나는 기 아이가.
재수 (끙) 꼭 쓸 데가 있었다 아인교. 아이구야~ 인자 장군 다 쳤네~
할머니 (못마땅하지만 소리쳐) 돌댕이 퍼뜩 갖고 오그라~!
S# 4. 다시 마당
툇마루 끝에 멀찍이 떨어져 앉아 쩔쩔 매는 남식과 훌쩍이는 경숙 보이며
경숙모 (뜨겁게 데운 돌을 앞치마로 싸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갑니더!
얼른 일어나는 남식, 비켜선다는 게 길을 막은 꼴이 되고
서로 비켜서며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던 남식과 경숙모.
경숙모 돌댕이 다 식어뿌겠네.
남식 (엉거주춤 서면)
경숙모 (비켜서 들어가다) 안절부절하지 말고 내삐리고 왔다는 장작이나 찾아오소.
남식 미안해요,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경숙모 그랄 거 엄심더. 자업자득이재. (경숙에게) 니도 그라고 있지 말고 아부지 신발이나 빨아 오그라. 소똥 냄시가 진동을 하는구마. (방으로 들어가고)
남식 (울상으로) 하필 지붕이 무너질 게 뭐야...
재수 (E) 앗 뜨거라! 니까지 내를 잡을라카나?! 아이구구구구 내 허리~
경숙 (눈물 훔치고, 소똥범벅인 재수의 신발을 들고 나가고)
남식 (미안해서) 의원이라도 불러 올까요?
S# 5. 동 안방
웃통 벗고 엎드려서 수건으로 싼 돌로 허리 찜질하던 재수.
재수 니가 돈 낼끼믄 불러오그라! (소리치고 궁시렁) 이 동네 의원이 어딨다꼬...
경숙모 (못마땅해) 돈타령 좀 그만 하이소. 그라이 와 넘의 돈에 손을 대는교?
재수 (할말 없어 신경질로) 뜨겁다카이! 낼로 굽어 묵을라카나?
경숙모 그랄 수나 있으믄 오죽 좋겠는교.
재수 (휙 째리는데)
남식 (E) 약이라도 사올게요. (이어 나가는 소리 들리고)
재수 쟈 나간 기재? 어무이 한번 내다 보이소.
할머니 와? (방문 열어 보고) 없대이.
재수 아이구야~저리 치아라 마. (일어나 앉으며) 한여름도 아인데 땀띠 솟겠네.
경숙모/할 (어리둥절보고)
할머니 아픈 기 아이가?
재수 내~가 누군교. 풍물판에서 오만 재주로 잔뼈가 굵은 놈인데 지붕 무너진다꼬 쌩으로 떨어지겠는교. 공처럼 몸을 요래 말아가 통통 튀기듯이 가뿐하이 떨어졌다 아이가. 우하하하하~
경숙모 (빈정) 두 번이나 죽다 살았으이 맹줄은 길겠구마.
재수 (옷 걸치며) 두 번이라이?
할머니 펜지를 고 따구로 써가 우덜은 다 니 죽어삔 중 알았다 아이가. 문디자슥...
재수 (애교로) 그래가 어무이, 마이 울었으예?
할머니 울기는 개코가! 묵은 것도 없이 와 기운을 빼노.
상필 (E) 절구야~
명랑 (E) 낙동강 조절구~
재수 (일어나며 무심코) 동네라꼬 맹맹이 콧구녕만하이 도둑질도 몬한대이.
경숙모 또 할라꼬예?
재수 (캥겨 펄쩍) 누가?! 아프다보이 헛소리를 한 기재... (헛기침으로 나가고)
S# 6. 동 마당
평상에 둘러앉아 술 마시다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재수와 상필, 명랑,
주거니 받거니 마시며
명랑 앗따 신장구, 낙동강 또랑광대 우습게 봤다가 시껍했겠대이.
상필 그래 뽕을 빼가 그 양반 장구 칠 기운이나 남았겠나 우데.
재수 장구를 무신 기운으로 치나 신명으로 치는 기제. 이번 굿판 때 내 실력발휘 학실히 할테이까네 잘 보고 배우라 마. 내는 비~싸게 배운 기지만 까짓 선심 쓴다, 공짜대이!
할머니 (부엌에서 풋고추에 된장 들고 오며) 최사장은 때도 아인데 뭔 굿판을 벌인다 카드노?
명랑 말인즉슨 전쟁통에 상하고 다친 마을 사람들 위한다 카는데 속심은 뻔한 거 아입니꺼. 저그들만 살겠다꼬 배 대절해가 피난 가노이 캥기는 기재. 동네 민심이 사납다 아입니꺼.
할머니 우리집에도 그런 인사 하나 있다. (꽁해 술 마시고)
재수 (넉살 좋게 우헤헤 웃고) 우리 어무이 단디 삐짓는갑제? 고마 잊으소. 이번에 놀음채 받으믄 어무이 가락지 하나 해드리꾸마.
할머니 (정색으로) 참말이가?
명랑 믿지 마이소. 놀음채 받으믄 삼팔이 주무이에 고스란히 갖다 받치야 될 판이구만, 가락지는 먼 가락지.
재수 (펄쩍) 미?나!
할머니 하모. 산수갑산을 가디라도 내 입이 먼저지 그노마 입이 먼저가?
상필 그라믄 우얄라꼬? 돈 생기는 거 알믄 가마이 있겠나?
때마침 장작 꾸러미와 약봉투 든 남식 들어오고
재수 (얼른 누우며) 아이구~ 내는 허리 아파가 이 좋아하는 술도 몬 묵고... 친구들 앞에서 이래 체민도 몬 차리고 드러누버가, 꼴이 말이 아이대이.
상필/명랑 (어리둥절한데)
할머니 (장단 맞춰) 그래 아파가 우야노? 잘몬하믄 큰일 치게 생?네.
남식 (안티푸라민 꺼내 주며) 이거 발라봐요, 잘 듣는대요.
명랑 (상황 알아채고, 약 받아들며 놀리듯) 내가 발라주까? 심하게 쑤시믄 내 약도 쪼매 묵어볼래? 명랑이 직방인데.
재수 (오만상 쓰며 눈치 주고)
상필 자네도 여 와서 한 잔 하소. 대충 얘기 들었는데, 돈 몇 푼 갖고 너무 속 태우지 마소. 전쟁통에 목심 부지한 거만도 천운 아이겠나.
남식 그게 몇 푼은 아니죠. 집이 한 채 값인데.
명랑 자고로 훔쳐가는 놈도 나쁘지만 훔치게 맹근 놈도 잘한 건 엄재. 따지고보믄 재수 야한테 돈 얘기를 한 기 잘못인기라. 호랑이 아가리에 고기댕일 쳐넌 기재. 글타고 주인도 엄이 여자들만 있는 집에서 그래 죽치믄 안 되는 기라. 동네사람들이 알았으믄 멍석말이할 일이었구마.
재수 웬일로 니가 내편을 다 드노? 안 죽고 살아있으이 이런 날도 생기네.
남식 저도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거 아니거든요. 내 돈만 받으면 있으래도 안 있어요.
재수 (할말 없어 때마침 들어오는 경숙 보고) 정 그카믄 경숙이 쟈 다 컸으이, 델꼬 가가 식모로라도 부려 묵던지.
양손에 재수의 신발을 빨아들고 들어오던 경숙, 서운해 쏘아보고
남식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경숙 (열나 신발을 집어던지고, 팽 도로 나가고)
재수 저저저 저 가스나...
S# 7. 대문 앞
경미 업고, 술 주전자 들고, 은비모 은비 만근과 함께 걸어오던 경숙모.
열나 씩씩 나오는 경숙 보고
경숙모 아부지 왔는데 어데 가노?
경숙 (꽥) 진짜 아부지 찾으러 간다! (횡 가버리고)
은비 (따르며) 언니야~
만근 (역시 따르며) 어데 간다꼬?
경숙모 (같잖아서) 밥은 묵고 가그라~ (다시 가려는데)
역시 열나 나오는 남식.
경숙모 거그는 또 어디 가는교?
남식 도저히 말이 안 통하니 할 수 없죠. 지서에 신고하러 가요! (가고)
경숙모 (할 말 없어) 순사들도 밥 묵으러 갔을 낀데예...
은비모 먼 일인진 몰라도, 느그 서방, 오던 날로 여기저기 불 마이 질렀는갑네.
경숙모 취미 아인교. (들어가고)
S# 8. 마을 길
답답해 한숨으로 걸어오던 남식, 보면
저만치서 경숙이 최사장에게 혼나고 있고, 은비와 만근도 덩달아 주눅 들어 그 옆에 서있다.
최사장 그 개가 을매나 비싼 갠데, 우째 생겨묵은 지집아가 와 번번이 말썽이고?
남식 ? (다가가고)
최사장 (머리 쥐어박으며) 니가 먼 짓을 한 지, 알기나 아나? 으이? 으이?
남식 아니 남의 애를 왜 때리고 그래요, 말로 하지. (경숙에게) 무슨 일이야?
최사장 그짝이야말로 누군데 넘의 일에 참견이고?
남식 (난처, 당황) 아니, 구누건 간에
경숙 (의기양양 오엘로) 우리 아재라예!
최사장 아재고 저재고 (경숙에게) 니가 뭔데 우리 윤섭이하고 노느니 안 노느니 협박이고? 놀기 싫으믄 그만이재 넘의 개는 와 뺏아가뿌냐 말이다!
경숙 뺏은 기 아이라 쪼매 빌린 기라예.
최사장 그캐도 멀 잘했다꼬! 가스나가 우째 이래 무서븐 기 없노? (다시 쥐어박으며) 누가 그래 가르치드노? 느그 아부지가 그카라 카드노?
남식 (경숙 잡아끌어 뒤로 감추며) 왜 애는 자꾸 때려요? 말로 해요, 말로!
최사장 쟈가 말로 해서 알아 묵을 안- 중 아나? 아- 교육 하나 똑바로 몬 시키믄서 먼 잔말이고? (경숙에게) 우리개 우짤 끼고?
남식 도대체 얼마나 비싼 갠지 몰라도 물어주면 될 거 아녜요!
경숙 (놀라 보고)
은비/만근 (보는)
최사장 (부르르) 누구 앞에서 돈 자랑이고?! 그래 족보 있는 갠 여서 구할 수도 없는 기라! 여러말 할 거 엄고, 느그들, 전국 팔도를 뒤져서라도 메리 찾아오그라! 알긋나?! (열나 가고)
남식/경숙 (난감)
남식 남의 개는 뭐하러 빌렸어?
경숙 (내심 미안) 몰라도 됩니더... (할말 없어 피하듯 가며, 소리쳐) 메리야~
은비/만근 (따르며 덩달아) 메리야~
남식 (역시 개를 찾아 주위 둘러보지만 막막하고)
경/은/만 (부르며 멀어지는) 메리야~ 메리야~ (그 소리 별 총총한 하늘로 메아리쳐 울린다. E) 메리야아아아아~
S# 9. 학교 교실 (다음 날 낮)
칠판에 <우리의 맹세>라고 써있고
크고 작은 아이들 속에 은비와 만근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의 맹세를 외우고 있는 경숙.
경숙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주검으로써 ‘메리’를 지키자.
일동 ?
경숙 (모르고 계속) 둘째,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최사장’을 쳐부수자.
교사 최사장?
만근 (제지하듯 낮춰) 야아 니 머하노?
경숙 (모르고 낮춰) 말 시키지 마라. 헷갈린다. (씩씩하게 계속) 셋째,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메리’를 완수하자.
일동 (와~ 웃고)
경숙 (어리둥절)
교사 최사장이 빨개이가? 와 죄 없는 최사장을 쳐부수노? 그라고 멀 지키자꼬? 메리? (매로 머리 톡톡 때리며) 정신을 엇따 두고 있는 기고?
경숙 (그제야 알고, 이래저래 울상으로 맞은데 만지는 위로)
경숙 (E) 메리야~ 메리야~ (연결)
S# 10. 윤섭이네 근처 언덕길 (밤)
경숙 (걸어오며) 니 도대체 어딨노? 지발 좀 나온나, 퍼뜩~
은비 (그만하고 싶은 마음에) 언니야 벌써 딴 동네로 가뿐는갑다. ? 바꾸를 돌아도 없는 거 보이끼네, 호랑이한테 물리갔나?
만근 (역시 힘든) 아이다. 누가 벌써 된장 발라 묵었을 끼다.
경숙 힘들믄 너그들은 고마 집에 가뿌라! 내 혼자 찾을 끼다. (가고)
은비/만근 (서로 울상으로 보고)
만근 (별 수 없이 다시 따르며) 최사장은 와 니를 그래 미워하는 기고?
경숙 (퉁) 내가 아나? (언덕 밑 윤섭이네를 향해) 칵 불이나 나뿌라!
은비 언니야 우리도 함 빌어보까? 영화에서 보이끼네, 못된 후궁이 중전마마 죽으라꼬 빌믄서 풀각시를 바늘로 콕콕 찔렀디만, 고마 팍 아파뿌드라.
만근 니가 어데서 영화를 봤는데?
은비 피난 가가 봤대이.
만근 그래? 그라마 함 해보까? 우예 하는 긴데?
은비 오빠야 언니야 내따라 해바라. (윤섭이네를 향해 양손에 기를 모아 보내며 주문을 외듯) 불나라~ 불나라~ 불나서 홀랑 타뿌라~ (반복해 주문 외고)
만근 (같이 따라하는) 불나라~ 불나라~ 불나서 홀랑 따뿌라~
경숙 (긴가민가 아이들과 윤섭네를 번갈아보고)
만근/은비 (계속) 불나라~ 불나라~ 불나서 홀랑 집이 따뿌라~
그러나 윤섭이네 아무 변화 없고.
경숙 치아라 마! 주문이 통하긴 머시 통하노! (가버리는데)
그 순간 스치는 합선 인서트- 전신주에서 제분공장 안으로 연결된 전선을 타고, 번개라도 치듯 번져 들어가는 스파이크!
그러나 아이들 모르고
은비 이상하다, 영화에선 통했는데.
만근 니 참말로 영화를 본 기가?
경숙 (돌아보며) 주문타령 고마하고 메리나 찾아바라. (다시 가며) 메리야 니 퍼뜩 안나오믄 칵 잡아 묵어뿐대이~
만근 (별 수 없이 따르며) 은제까지 찾을 끼고? 배도 다 꺼져뿟다.
은비 (역시 따르며 힘없이 건성) 메리야~
S# 11. 제분공장 근처
남식 메리야~
생선뼈다귀를 매단 장대로 여기저기 휘저으며 걸어오던 남식, 지친 듯 바위에 주저앉고
남식 하루 종일 헛고생했네... 가서 뭐라 그러지? 아~씨 괜히 큰소리는 쳐갖고... (하다 킁킁 냄새를 따라 돌아보면)
저만치 제법 넓은 터에 담도 울도 없이 세워진 제분공장과 창고 보이고, 창고의 양철지붕 틈새로 피어오르는 연기와 불꽃.
남식 (벌떡 일어나며) 어 불?! 불, 불, 불이야~ (소리치며 공장으로 뛰어간다. 문 두드리며) 안에 누구 없어요? 불이야~ 불이야~ (하다 보면 자물통이 걸려있다. 안절부절 주위 둘러보며) 여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불이야~ (거세지는 창고의 불길 보이고) 에이 씨~ 이 놈의 동네... 일이 왜 이렇게 꼬이는 거야~ (별 수 없이 창고로 달려가고)
S# 12. 동 공장 안
맨몸으로 문을 부수며 안으로 나동그라져 들어오는 남식.
순간 끼치는 열기와 연기를 피해 감쌌던 고개 들면
밀포대와 고장난 기계며 잡동사니 등이 쌓인 창고 안 여기저기 불이 번져 타고 있다.
다급히 빈 포대를 집어들어 불을 꺼보지만 역부족이고...
황급히 한쪽에 놓인 달구지를 끌어다 밀포대를 옮겨 싣는 남식, 불길을 뚫고 달구지 밀고 나가고
S# 13. 고구마 밭
주위 살피며 나뭇가지로 고구마 캐는 경숙.
만근은 급한 마음에 고구마줄기 잡아당기며 힘쓰고
망보던 은비
은비 (돌아보며 낮춰) 아직도 몬 캤나? 이라다 주인 오믄 우야노?
만근 (줄기가 끊기는 통에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경숙 으유 그거 하나 지대로 몬하고.
만근 (일어나다) 어? 저기 뭐꼬? 불이대이~
경숙 (놀라 보고) 저-믄 윤섭이네 공장 아이가?
은비 (신기해서) 봐라 내말 맞제. 우리 주문이 통했는갑다.
경숙 가스나, 누가 진짜로 불내라 카드나? 클났대이~ (아이들과 뛰어가고)
S# 14. 제분공장 앞
이미 사람들 몰려들어 물동이로 불 끄느라 번잡한 가운데
까맣게 재를 뒤집어쓴 남식, 한쪽에 제법 건져내 쌓아놓은 밀포대 위에 주저앉아 바가지로 물마시고
흥분해 소매 걷어붙인 최사장.
최사장 (발 동동 구르며) 다라이 쪼매 큰 거 없나? 그래 쥐새끼 오줌 맨쿠로 퍼와가 우째 저 불을 끌 끼고? (건물 일부 불길에 주저앉고) 아이구야 이제 내는 망했대이. 조상님 제사도 꼬박꼬박 챙?는데 우째 내한테 이런 재앙이 닥치노. 퍼뜩 퍼뜩 쫌 하그라! 돈을 을매를 쳐들여가 밀포대를 들이놨는데 반도 몬 건?다 아이가! 그래 느리 터져 갖꼬 은제 불을 끌 끼고?!
윤섭모 아우~ 아우 속상해, 아우 속상해~ 집도 심난해죽겠는데 공장까지... 그러게 내가 부산에 그냥 눌러앉자 그랬잖아요. 이제 와서 굿하면 뭐 할 거예요?
최사장 불난 데 지름 퍼붓는 기가? 내 복장이 쟈(창고)보다 더 쌔까마이 타고 있구만, 인자 와가 그런 얘길 하믄 우짜라꼬? 도대체 어떤 문디자슥이 넘의 공장에 불을 지른 기고? 잽히기만 하믄 제분기계에 칵 쳐너가 갈아뿔끼다! 누구 불 지른 놈 몬 봤나?!
구경하다 찔끔하는 경숙과 만근 은비, 겁이 나 구경꾼들 틈에서 슬그머니 빠져 나와서
은비 언니야 우짜노? 우덜 잡히믄 밀가루 되기 생?다.
경숙 그라이 어데 가서 절대 말하믄 안된대이.
만근 내는 심장이 벌렁벌렁 한다. 자다 오줌 싸문 우짜꼬? 들킬낀데.
경숙 그라믄 니는 자지 말그라. 우덜끼리 절대 비밀이대이. 아부지 어무이한테도 얘기하믄 안 되는 기라.
만근 알았다.
은비 내도 비밀 지킬 끼다.
경숙 비밀 안 지키는 사람은 인자부터 메린 기라, 메리! 알았재?
때마침 전봇대에서 대롱거리던 다 타들어간 전선이 아이들 위로 툭 떨어진다.
엄마야~ 소리치며 누가 먼저랄 거 없이 걸음아 나살려라 줄행랑치는 아이들, 멀어지며... F.O
S# 15. 윤섭이네 응접실 (다음날 낮)
F,I
값비싼 소품들 대부분 다 없어지고, 피아노와 큰 물건 몇 가지만 남아있는 실내가 썰렁하다.
소파에 앉은 남식, 의아히 주위 둘러보고
최사장 (들어오며) 빨개이들이 난장을 쳐가 집 꼴이 말이 아니대이.
남식 (엉거주춤 일어나고)
최사장 편하게 앉그라 마. (앉으며) 피난 갔다 와보이 빨개이들이 넘의 집에다 본부를 차리놓고, 저(기)다 김일성 초상화까지 걸어놓고 지랄을 안 쳤드나? 값나는 건 싹 다 쓸어가고, 도둑놈도 그런 도둑놈이 없는 기라. 내 이북놈이라 카믄 이가 갈린다.
남식 이북 사람이라고 다 빨갱이는 아닌데...
최사장 (상관없이) 자네는 고향이 어디고?
남식 예? 에... 서,서울요... (얼른 딴청으로) 개는 찾는다고 찾아봤는데 죄송하게 (하는데)
최사장 됐다 마! 지금 그기 문제가. 자네 덕분에 밀포대도 쪼매 건지고, 여차하믄 공장까지 홀랑 태워묵을 뻔한 걸 막았다 아이가. (다과 쟁반 들고 들어오는 윤섭모에게) 당신이 웬일이고? 여는 발 들여놓기도 싫다카드이.
윤섭모 그래도 귀한 손님이 왔는데 어떻게 모른 척 해요. (다과 접시 놔주며) 정말 고마워요. 젊은 사람이 남의 불난 집에 뛰어들어서 그렇게 하기 힘든데.
최사장 당신캉 동향이다. (남식에게) 그라믄 핵교는?
남식 (무심코) 학교는 서울에서 다녔어요.
최사장 고향이 서울이믄 당연히 서울에서 다녔겠재. 어데까지 마?노?
남식 아 예... 중학 삼년 다니다가 사정이 있어서 그만 뒀어요.
최사장 보기보다 마이 배웠구마. 지금 하는 일은 머 있나?
남식 정해놓고 다니는 덴 없지만, 이것저것 안 가리고 밥벌이는 하고 있어요.
윤섭모 보기에도 성실해 보여요.
최사장 그라마 내 밑에서 일 함 해볼 끼가? 이 난리통만 끝나믄 내 공장도 번듯하이 짓고, 사업을 크게 키워볼라 카는데.
남식 글쎄요, 여기는 잠깐 다니러 온 거라...
최사장 서울 간다 캐도 전쟁통에 다 뿌솨지고 묵고 살길도 없을 낀데.
윤섭모 거봐요. 기왕 사업을 키울 거면 서울이든 부산이든 큰 데서 하는 게 낫다니까. 사람 구하기도 훨씬 좋구. 집은 이렇지 창고까지 불나고, 난 정말 여기서 하루도 더 살기 싫단 말예요.
최사장 고마 다 끝난 얘기를 와 또 (하다) 장기판에 졸 옮기듯이 고향 뜨는 기 그래 쉽나? 그래가 겸사겸사 큰 굿판 한번 열라 카는 거 아이가.
윤섭모 굿판은 굿판이고 (하는데)
최사장 시끄럽다 마. (남식에게) 조절구는 굿판 차질엄이 준비하고 있겠재?
남식 굿판...요?
최사장 돈은 을매가 들어도 좋으이까네 우리마누라 입에서 꿈자리가 뒤숭숭하네 우짜네 그런 소리 안 나오게, 학실한 무당 불러다 지대로 한판 벌이라 캐라.
남식 네, 사장님! (내심 쾌재를 부르는 위로)
재수 (E) 이 허리로 굿판은 뭔 굿판!
S# 16. 경숙네 마당
재수 (기둥에 기대 마루 끝에 걸터앉아) 궁댕이 절로 치아라 마.
그 뒤로 마루에 놓인 궤짝에서 무언가 찾는 경숙모 보이며
남식 (등 들이민 채) 그러지 말고 업히라니까요. 가서 침이라도 맞아 보자구요. 이런 좋은 기횔 그냥 놓칠 순 없잖아요.
재수 그라이 누가 사다릴 치우라캤나? 모처럼 큰판 벌어지는데 내는 구경만 하고 남 좋은 일만 시키게 생?다 아이가. 이기 다 누구 때무인데!
경숙모 (궤짝에서 찾은 망치 들고 선 채, 못마땅해 내려다보며) 엥가이 하이소.
남식 (뻘쭘해 일어나며) 어쨌든 아픈 건 낫게 해야죠.
경숙모 (내려서며) 거그한테 한 소리가 아이라예.
재수 (들통날까봐 오만상 쓰며 눈치 주고)
경숙모 (한술 더 떠서) 정지간에 튀나온 못이나 쫌 박으라꼬 ? 번을 그랬구만, (망치 내밀며) 침 맞으러 안 갈 거믄 못이나 좀 박으소.
재수 (눈 찔끔거리며 달래듯) 니 와 이카노? 허리 나믄 해주꾸마.
경숙모 나을 병이긴 한 기라예?
재수 그라마 나아야재. 허리빙신 델꼬 살믄 퍽이나 좋겠다.
경숙모 (부엌으로 가며) 집에나 붙어있으믄서 그라믄.
재수 저저저 여편네!
남식 진짜 침 맞으러 안 갈 거예요?
재수 만다꼬! 내 덕분에 최사장네 공장서 일하게 됐으믄 됐지, 허리 아픈 사람을 뭘 자꾸 부려 묵을라 카노?
남식 그게 왜 거기 덕분예요?
재수 내 아니었으믄 니가 여 뭔 볼 일이 있어 왔을 끼고? 여 왔으이 일도 그래 잘 풀린 기재. (경숙모에게) 안 글나?
경숙모 (대답대신 부엌 기둥에 튀어나온 못에 빵빵 못질하지만 안 들어가고)
경숙 (책보 메고 들어오며) 핵교 댕기왔대이~
할머니 (뒷간에서 나오며) 야야 이기 무슨 냄새고?
경숙모 아이구 빨래!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고)
할머니 젊은 아가 어따 정신을 빼놓고 다니노? 최사장네 불난 거 보고도 그러나. (남식에게) 참 불 낸 놈은 잡았다 카드나?
경숙 (찔끔해 책보 풀어놓고 슬그머니 나가고)
남식 순경 왔다 갔다던데 모르죠. (다시 등 내밀며) 빨리 업혀요. 가보게.
재수 (딴청으로 이미 나간 경숙에게) 니는 오자마자 어델 나가노~?
할머니 (부엌에서 빨래대야 들고 나오는 경숙모에게) 니 내 애끼든 모시적삼 태워 묵은 거 아이가?
경숙모 어무이 꺼 아이라예. (남식에게) 난닝구가 쪼매 탔는데 우짜지예?
남식 어 그거 빨아 널은 건데 왜...?
경숙모 그래 어설피 빨믄 때가 가겠는교. 여 있을 동안은 빨래 내놓으소. (가려는데)
남식 주세요, 제가 할게요. 힘들게... (대야 채듯이 들고 나가고)
재수 니도 하여튼 오지랖이다. 취직 핑계대고 여서 눌러앉으믄 우짤라꼬 빨래까지 해주노?
경숙모 그래라도 빚 갚을라 안 합니꺼. 눈 가리고 아옹도 하루 이틀이재, 도대체 우짤 심산인교? 굿 안 할 끼라예?
할머니 안하기는 와? 한 푼이라도 벌어야재? 니 쟈한테 안즉 얘기 안했나?
재수 어무이는 참... 말발이 먹힐라 카믄 그기 다 순서가 있는 긴데...
할머니 맞대이! 경숙이 경미 오늘 밤 내가 델꼬 자꾸마.
경숙모 (망치 다시 집어 들다, 꽥) 모자지간에 또 먼 꿍짝인교?!
S# 17. 경숙네 안방 외경 (밤)
호롱불에 비친 재수와 경숙모의 그림자.
재수, 두 손으로 싹싹 빌며 뭔가 사정하지만
경숙모, 완강히 돌아앉고
재수, 검지를 세워 보이며 한번만 봐달라고 재차 사정하지만
경숙모, 냉정히 일어서고
재수, 다급해져 치마를 붙잡으면
훌러덩 치마 벗겨지며 벌러덩 나동그라지는 경숙모.
재수, 그 참에 힘으로 덮치고
경숙모 (E) 와 이카는교, 넘사시럽게...
재수 (E) 넘사시럽기는... (서둘러 불 끄고, 다시 덮치며) 이기 을매 만이고.
어두워졌던 화면 한쪽에서 꼬물꼬물 살아나는 불씨 보이며
S# 18. 동 안방 안
촛불 근처에 던져져 있는, 꼬물꼬물 타들어가는 치마꼬리 뒤로 보이는 재수와 경숙모
경숙모 을매만이나마나 이칸다고 될 일이 아이라예. 비키소 마.
재수 가마이 쫌 있어 보그라.
경숙모 이기 먼 냄시고? 머 타는 냄시 아인교?
재수 내 가슴이 탄다 아이가.
경숙모 (밀치고 일어나며) 그기 아이라 (하다) 에그머니 내 치마!
재수 (돌아보고) 으이? (얼른 자리끼 물을 부어 불 끄고, 다시 덮치고)
경숙모 허리 아프다는 사람이 와 이라노? 아이구 참말로~ (F.O)
S# 19. 숲길 (다른 날 낮)
F.I
작은 보따리 들고, 앞장서서 걸어가는 경숙모의 불탄 치마꼬리 C.U
무거운 함을 지고 뒤따르며 자꾸 눈길이 가는 남식.
남식 조절구, 아니 경숙이아버지 하고는 어떻게 결혼하게 됐어요?
경숙모 우째 하기는예. 어른들이 시키이까네 암 것도 모르고 한 기재. (돌아보며) 와예?
남식 십 년 만에 친정에 가는데, 경숙아버지는 옷이나 한 벌 새로 해주지.
경숙모 ? (제 입성을 살펴보다 그제야 불탄 치마꼬리 보고, 캥기고, 머쓱하고) 아무려믄 어때서예... (외면해 다시 가고)
남식 (덩달아 머쓱, 다시 따르며 분위기 바꾸듯) 함이 아주 튼튼하고 좋은데, 시집올 때 가져온 건가 보죠?
경숙모 어데예. 그거는 벌써 팔아 묵었재 여태 남아있겠는교.
남식 그럼 이 함은 뭐예요? 동생 혼사에 쓰라고 갖다 준다면서.
경숙모 (난감하고)
할머니 (E) 니 이리 몬 오나!
S# 20. 경숙네 마당
할머니 (궁글채 들고 재수를 쫓아 평상을 빙빙 돌며) 어데 물어도 안 보고 애미 함에 손을 대노? 내가 그거를 우째 장만한 긴데! 이 문디자슥! 애미도 팔아 묵을 놈!
재수 삼팔이 그노마 딸려 보낼라 카믄 뭐든 짐 될만한 기 있어야 캤다 아인교. 경숙아 니 쳐묵지만 말고 할무이 좀 말려봐라.
경숙 (경미 옆에 눕히고, 평상에서 우걱우걱 감자 먹으며) 내가 와?! 아부지는 맞아도 싸대이. 아푸지도 않으믄서 내를 그래 구박하고, 아부지는 아부지?에 모른다. 내도 식모로 보낼라 카고.
할머니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오그라이! 내 손에 잡히믄 죽는대이!
재수 막둥이처제 시집간다꼬, 함이 필요한 거로 각본을 짰는데 그라마 우얍니꺼. 집에 있는 기라곤 그거?에 엄는데.
경숙 내한테 외갓집이 어딨노?! 아부지는 순 거짓말재이다! 할무이 그래 빙빙 돌믄 절대 몬 맞춘다. 이리 휘까닥 넘어가라. 이리.
재수 저 문디가스나, 저거 내딸 아이라카이.
할머니 이노무 자슥 그래도 잘했다꼬. 니 몬 서나?
재수 아이구 어무이 그거로 맞으믄 머리통 빵구납니더. 내 나이가 ?인데 매타작입니꺼. 어무이 가락지 가락지.
할머니 그 함이 우떤 함인데 구리 반지에 댈 끼가? 금이라 캐도 택도 없대이.
재수 좋심더. 그라마 내가 은으로다, 쌍가락지로 하입시더.
할머니 어데! 금이다!
재수 그기 돈이 을맨데...
할머니 그카믄 내 함 찾아오그라! 퍼뜩 찾아오라 카이! (하며 궁글채 던지면)
때마침 양장 차림으로 가방 옆구리에 끼고, 양산 접으며 들어오던 화자.
화자 (날아온 궁글채에 맞고) 아야야 사람 잡네~
일동 으이?
화자 아이구 머리통이야~ 눈알 빠질 뻔했다 아인교!
할머니 누꼬?
재수 아 내가 사업상 쪼매 아는 여자라예. 니 일루 좀 와 보그라. (서둘러 끌고 나가고)
화자 (끌리듯 가며) 와 이카노? 이집은 이래 손님을 맞는교?
할머니 분 냄새 폴폴 풍기는 기 사나 꽤나 울렸을 상이다. 그란데 먼 일로 새파란 가스나가 집까지 쳐들어 오노? (문득 혼잣말로) 쟈 먼 사고 쳤나?
경숙 (덜컥 수상해, 휙 돌아보고)
재수 (E) 니가 여기 우짠 일이고?
S# 21. 근처 길모퉁이
재수 (긴가민가) 그 큰 요정에서 내를 쭉~ 쓰겠다꼬?
화자 (자못 도도하게) 그라이 왔재, 이 먼 길을 실없이 와 왔을라꼬. 신장구한테 배운 솜씨가 아깝지도 않은교. 퍼뜩 가입시더.
재수 (떨떠름) 당장?
화자 세월아 내월아 기다릴 자리믄 내가 여까지 미?다꼬 왔겠어예.
재수 말은 억~수로 고맙다만, 낼 여서 큰 판이 있어가 이 몸도 바쁘시거든. (떠보듯 돌아서며) 잘 가그래이.
화자 (화들짝 잡으며 무심코) 아이고 와 이랍니꺼, 내는 우짜라꼬? (하다 낭패스레) 눈치 하나는 귀신이라카이.
재수 니 아부지를 속이라 마. 퍼뜩 이실직고 몬 하나?!
화자 (사정조로) 그라마 낼 좀 꼭 도와줘야합니대이. 실은예...
저만치 길모퉁이에 서서 뭔가 얘기하는 화자와 재수 보이며
대문 앞에서 주위 둘러보던 찾던 경숙, 살금살금 다가가고
재수 똑똑한 척은 독판 다하믄서 우짜자고 신장구 비윗장을 건드릿노. 니 인자 부산서 일은 다했구마. 회춘옥으로 도로 가는 수밖에.
화자 (짝 째리며) 이래 나올 낍니꺼? (팔짱끼며 사정조로) 그라지말고 신장구 쫌 구슬러보이소. 멩색이 제자 아인교?
재수 (거들먹) 내가 무전취식으로 잽히가 그래 애타게 불러쌌는데도 안면 깔 때는 언제고?
화자 그카는 누구는 먼 길 찾아온 딸내미한테도 안면 깠지 싶은데.
재수 좋다 마. 족보 고마 캐고, 내가 니를 도와주믄 니는 내한테 머 해줄 낀데?
화자 (매달리며) 이 판국에 내가 몬 해줄 끼 머 있겠는교. 내 좀 한번 도와주이소.
경숙 (불끈 나서며) 여시같이 생기가 누굴 꼬시고 있는 기라예?!
화자 오매야 문디가시나, 아까는 정신이 엄어가 몬 알아봤는데, 니 마이 예뻐졌대이. 언제 이래 컸노?
경숙 친한 척하지 마이소. 내를 언제 봤다꼬.
화자 가스나. 니 아부지 팔아묵을라꼬 돈 꾸러 회춘옥 안 왔드나?
경숙 (주춤하다, 시침 뚝) 내는 그런 데 몰라예.
화자 하이고 아부지를 닮아가 안면 까는 거는 타고났대이.
경숙 내는 우리아부지 안 닮꼬, 엄마 닮았으예!
재수 시끄럽다! 어른들 얘기하는데 총지발대지 말고 퍼뜩 드가그라.
경숙 (노려보며) 여시한테 홀리 갖꼬... 이칼라꼬 어무이 보냈재?
재수 (으르듯) 퍼뜩 안 드가나?
경숙 어무이 오믄 다 일러뿔끼다! (팽 가고)
화자 (뒤에 대고) 머를? 웃기는 가스나 다 보겠네.
재수 니도 만만치 않거든. 아-놓고 실갱이하지 말고, 낼 니가 할 일이 있으이 드가자. (앞장서고)
화자 뭔데예? 한시가 급한데... (울상으로 따르고)
S# 22. 계곡 옆 산길
계곡 옆 산길을 힘겹게 걸어가던 경숙모, 돌아보면
저만치 뒤쳐져서 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함을 지고 오는 남식.
경숙모 마이 힘듭니꺼? 쪼매 쉬었다 갈까예?
남식 (힘들어 숨을 헐떡이며) 네... 잠깐 좀...
경숙모 (혼잣말로 낮춰) 이 인사가 대체 저다 멀 집어넣은 기고? 사람 고랑태이 멕이는 짓도 가지가지 한대이. (다가가며) 여서 잠깐 기다리소. 밑에 내려가서 물 좀 떠올께예.
남식 아니, 아녜요. (함 내려놓으며) 제가 가서 마실게요. 세수도 좀 하고. 어후~ (힘들어 허리 두드리며 가다) 물 좀 떠다 드릴까요?
경숙모 아이라예. 지는 괘안심더. (가는 남식에게) 천천히 오이소, 시간 많으니까네. (멀어지는 남식 확인하고, 서둘러 함 풀어보면, 크고 작은 돌멩이만 잔뜩 들었다) 이기 다 머꼬? (두 손으로 큰 돌덩이 들어내며) 아이구야 사람 잡겠네. (주위 둘러보고 나무 밑으로 가져가며 소리쳐) 기왕 쉬는 김에, 볼일도 보고 천천히 가입시더~
S# 23. 근처 계곡
남식 (물마시다) 네, 그러세요~ (다시 물 마시는데)
E (사각사각 마른 잎 위를 스치는 발소리, 점점 가깝게 다가오고)
남식 (제풀에 놀라 눈 질끈 감으면)
플래시-사뿐사뿐 마른 잎 위를 걸어가 볼일을 보기 위해 치맛자락을 드는 경숙모의 모습 스치고...
잔뜩 긴장해 숨을 죽인 남식.
주위엔 어느새 졸졸 흐르는 물소리만 가득하다.
남식, 호기심에 살그머니 눈 뜨고 보면
숲 속에서 토끼가 후다닥 달아난다.
민망한 남식, 계곡물에 머리 처박았다 우르르 털고
S# 24. 경숙네 안방
재수, 평복 위에 풍물패 삼색 띠 매고
할머니 (경미 업은) 헛간총각도 그렇고, 니하고 상판때기만 스치믄 와 다 집으로 쳐들어 오노? 이번에는 또 뭔 사고 친 기고? 저 새파란 가스나하고 만리장성이라도 쌓은 기가?
재수 그런 거 아이다. 어무이는 내를 멀로 보고.
할머니 멀로 보기는? 내 속으로 안 낳다꼬 내가 니를 모르나. 기생년이 사나 집까지 쳐들어 왔을 때는 뭔 사단이 나도 난 기재. 사나가 밖으로 돌때는 항시 바지춤을 조심하라 안캤나.
재수 그기 아이라 내일 놀이판 광 쫌 낼라꼬 초빙한 기라카이.
할머니 이기 애미를 멀로 보고. 경숙애미 오기 전에 니 깨끗이 매듭 짖그래이. (가려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꼬, 조강지처 눈물 빼고 뒤끝 좋은 사나 몬 봤다.
재수 (언중유골로) 어무이가 그런 얘기 할 처지는 아이지예.
할머니 (내심 캥겨 꽥) 그라이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 안캤나! 내도 진작에 그거를 알았으믄 이래 안 살았다!
재수 엄한 소리 말고 이거나 매주소.
할머니 그 꼴로 굿패 맞으러 갈 끼가? 최사장네서 새로 맹글어준 바지저고린 우야고?
재수 지금은 뽀대 낼 때가 아이라예. 이따 굿패하고 돈 놓고 담판지야 되는데 광내고 가서 이로울 기 뭔교.
할머니 (매주며) 잔대가리 굴리는 거 보믄 벌써 고래등같은 기와집을 샀어도 샀을 낀데... 금가락지 잊으마 안된대이.
재수 앗따 귀에 금딱지 앉겠네.
S# 25. 경숙네 부엌
열린 부엌문 너머로 보이는, 한복으로 갈아입고 평상에 앉은 화자. 손거울 보며 분첩 두드리고, 루즈도 새로 바른 후 빵빵 소리나게 입술을 부딪치면
불만스레 쌀 씻던 경숙, 돌아보고
경숙 (혼잣말로) 저 불여시...
화자 (시선 느끼고 돌아보며) 니도 함 발라볼래? 이기 물 건너온 미제대이.
경숙 만다꼬! 쥐새끼 잡아 묵은 거맨쿠로 시뻘거이 머가 이쁘다꼬.
화자 그래? 느그 아부지한테 물어보까, 이쁜가 안 이쁜가? (때마침 방에서 나오는 재수에게 자태 뽐내며) 어때예? 이만하믄 됐는교?
재수 앗따 최사장 눈이 휘둥그레지겠구마.
화자 (놀리듯) 거봐라~
경숙 (씩씩 노려보는데)
재수 (화자 엉덩이 철썩 때리며) 퍼뜩 가자.
S# 26. 동 마당
화자 아야 아푸라! 대낮부터 어델 건드리는교? 손자국 나겠네.
재수 (은근히) 이따 밤에 함 확인해보까?
경숙 (쌀 씻은 물 들고 나오며 부르르 보고)
화자 재주 있으마 함 해보이소. (위아래로 훑어보며) 그런데 그 꼴로는 택도 엄지예. 큰판이라 카드이 물주가 옷도 안해줍디꺼?
재수 난리통에 판 벌이는 거만도 어덴데. 씰데없는 챔견말고 니 낼 꽁으로 뛴다꼬 대충하믄 알재?
화자 내 몸값이 을맨데... 흥도 안 나겠네.
재수 그라마 기냥 가든지... (가고)
화자 (얼른 가서 팔짱 끼며) 어데예~ 아무리 그캐도 유똥 치마저고리 한 벌은 해주는 기지예?
경숙 (확 물 뿌리고)
화자 엄마야! 차거버라~ (앙칼지게) 이기 뭐꼬? 비싼 양단치마 다 베?다! 눈깔이 뒤꼭지에 갖다 붙었나?
경숙 그라이 누가 거기 서있으라 캤어예?
재수 저노무 가스나, 니 일부러 그캤재? 니 아부지 사업 망칠라꼬 작정했나?
경숙 어데예! (팽 들어가다 부엌기둥에 튀어나온 못에 긁히며) 아야!
화자 (고소해 까르륵 웃어대고)
경숙 (노려보고)
화자 꼬방시다! 어른한테 그래 버르장머리 엄이 구이끼네 벌 받는 기대이. (놀리듯) 아프제?
경숙 하나도 안 아파예. (상처에 침 퉤퉤 바르며 들어가고)
할머니 (경미 안고 나오며) 와 이래 시끄럽노?
화자 조절구 양반 딸 하나는 걸물로 나놨다 아인교.
재수 걸물로 치믄 천하의 지화자 따라 갈 사람 엄거든. (앞장서며) 퍼뜩 오기나 하그라.
화자 (짜증스레) 이 꼴로 어델 갑니꺼?!
S# 27. 윤섭네 사랑채 (저녁)
굿패들 둘러앉아 굿판에 쓸 종이꽃 만들고
한쪽에 상필, 무당과 둘러앉은 재수, 돈 대신 재첩껍데기를 헤아려 셈을 해 나눠놓으며
재수 자 어르신이 내노신 돈이 백이라 치믄, 우리가 통영까지 가서 느그들 불러오고, 또 저~기 부산서 내로라하는 기생도 하나 불러왔다 아이가. 그래가 경비가 열, 기생 원채로다 다섯, 그라고 탈 없이 잘 끝내고 훗날을 기약할라 카믄 (재첩껍데기 다섯 개씩 챙겨 나누며) 소방대, 특무부대, 지서... 챙기야 될 데가 한두 군데가 아이대이. (하며 다섯 더 챙기는데)
상필 (제지하듯 쿡쿡 찌르고)
재수 (모른 척 손 쳐내며) 그라고 머니머니 해도 우리 사장님 마나님, 비위 잘 맞춰둬야 안 되겠나. 마나님이 유똥 치마저고리 좋아한다 카재요 형님?
상필 어? 어어...
재수 (다섯을 챙겨 놓으며) 최고급으로다 뽑아야 하이까네 못 돼도 다섯은 돼야재.
무당 다섯은 무신 (하는데)
재수 당장만 보지 말고, 으이? 느그들 그거 아나? 이 마을은 웃당산부터 치는 기 아이라 아랫당산부터 치는 기라. 통영바닥하곤 다르대이. 같은 굿이라도 동네마다 다 같은 기 아이까네, 내 말을 잘~ 들어야 실수가 엄대이.
무당 (끙 더 말 못하고)
재수 그라고 아까 합의한 대로 마당극은 느그들이 반주를 하고 우리가 판을 벌릴끼까네, 우리가 열. (하며 따로 열 개를 챙기고) ...
S# 28. 마을길
경미를 업은 경숙과 화자, 걸어오며
화자 하이고 먼지에 신발 다 베린대이. 안즉도 멀었나?
경숙 (무시하고 걸으며 못에 찔린데 긁고)
화자 입이 붙었나? 가만 있어봐라... 여 아까 왔던 길 아이가? 문디가스나 니 지금 내 골탕 멕이고 있재?
경숙 그래 길 잘 알믄 혼자 가이소. (씩씩 앞서고)
화자 조기 진짜... (때리는 시늉으로) 칵 쌔리뿔라.
경숙 (홱 쏘아보면)
화자 (딴청으로) 하이고 얼라가 누를 닮아 그래 순하노. 뒤꽁무이 매달려가 가니라꼬 니가 고생이다.
경숙 건들지 마이소. 아 울믄 대신 업고 갈랍니꺼?
화자 내가 미?나? (하다 장난기 발동해) 몬 업을 거도 엄재. 야가 누구 딸인데.
경숙 누구 딸은 누구 딸인교. 우리 어무이 아부지 딸이재.
화자 (짐짓 심각하게) 니 그거 아나? 경미 야가 우예 태어났는지?
경숙 (내심 불길) ?
화자 아이다. 아-한테 할 얘기가 아이다.
경숙 와 말을 하다 말아예?
화자 내가 죽을 때까지 감출라 캤는데 백지로 말을 꺼냈네... 말이 나왔으이 니한테만 얘기해 주꾸마.
경숙 (따지듯) 먼 말인데예?!
S# 29. 윤섭네 사랑채
재수와 상필 무당의 인사를 받으며 앉는 최사장.
최사장 이 사람들이가?
재수 (따라 앉으며 설레발로) 요사이 굿판도 줄었지만, 무당은 더 줄어삔기라예. 전쟁통에 죽기도 수태 죽고 빨개이들한테 붙어가삐린 패도 많아가, 무당이 씨가 말랐다 아입니꺼. 그래도 어르신이 벌이는 판이라, 진짜 무당을 찾느라 억수로 힘들었십니더.
최사장 알았다 알았다. 니는 무신 사설이 그래 기노? 그래 어데서 온 기고?
재수 야들이 선창가의 돈이란 돈은 싹쓸이 했던 통영굿패들입니더.
무당 (인사로) 잘 부탁드리겠십니더.
굿패일동 (종이꽃 만들며, 저마다 따라 인사하고)
최사장 오야, 오야. 내도 믿고 맡긴대이. (재수와 상필 가리키며) 야들한테 내가 다 일임했으이끼네 잘 협조해서 치러 보그라.
재수 걱정하지 마이소. 지가 언제 판 그르친 일 있심니꺼.
무당 그란데 어르신, 조상굿은 들어가야 안 되겠십니꺼?
최사장 햇곡맞이에 오구믄 됐재 먼 조상굿?
재수 (무당에게 짐짓) 이 사람이 우리 어르신을 호구로 아나? (굿패에게) 아 이 사람아, 꽃을 와 그래 만드노. 어르신 낯이 있는데 꼼꼼시리 정성을 들이야재. (상필에게) 하기사 굿패 부르기도 힘든데 이참에 조상굿 하는 거도 괘안을 낀데, 행 생각은 어떠노?
상필 어르신 하자는 대로 해야재.
무당 이래 어려븐 때 동네를 위해서 큰일 하시는데 기왕이면 집안도 잘 돼야 안 되겠십니꺼. 그라마 어르신 이름도 더 높아지고, 그 덕이 널리널리 퍼질 낍니더.
최사장 (끙)
재수 아 참 그라고 지가 사장님 낯 세울라꼬 부산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기생도 하나 불렀심더. 인사드리라꼬 오라 캤으이 곧 올낍니더.
때마침 벌컥 방문을 여는 경숙.
재수 (반색으로) 부산 손님 모시고 왔나? 이리 들어오라 캐라.
최사장 (내심 희색으로) 그라마 을매나 더 내놓으라는 기고?
경숙 (꽥 소리쳐) 아부지!!!
최사장 으매야 깜짝야~ 니 딸내미 저거 와 저라노?
경숙 경미 야가 누구 딸이고? 저 여시 딸이가?!
최사장 이이이 이기 뭔 소리고?
재수 아입니더. 니 뭐 잘몬 처묵었나? 여가 어데라고 (최사장에게) 죄송합니더. (일어나 가며 낮춰 으르듯) 퍼뜩 몬 가나?
경숙 (뒷걸음질치며) 누구 딸인지 퍼뜩 말해라! 와 말 몬하노?
굿패일동 (저마다 킬킬 웃고)
재수 (안절부절 우거지상으로) 저저 저 문디가스나... 니 미?나?
최사장 (못마땅해 혀차고)
S# 30. 마을 길 (저녁)
재수와 경숙, 쫓고 쫓기며
재수 저노무 가시나, 어데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노? 니 거 안 서나?
경숙 경미가 그 여시 딸이가 아이가? 그거만 말해라.
재수 니 어매 한겨울에 아 낳는다꼬, 내가 군불 때느라 허리가 ?는데, 가시나가 뭐라 카노?
경숙 그라믄 그 여시가 와 지딸이라 카노?
재수 니가 몬되게 구이끼네 놀리묵을라 그런 거 아이가. 거 몬 서나?
경숙 아이믄 됐다! 와 자꾸 쫓아오노? 고마 쫓아와라.
재수 됐기는 뭐가 됐노 이 가스나야. 니 땜에 손해가 얼만 중 아나? 거 몬 서나?! (신발 집어 던지고)
S# 31. 하천
경숙모, 폭격으로 허리가 잘린 나무다리 위에서 노심초사 지켜보고
부서진 다리 사이를 건너기 위해 난간을 잡고 내려가는 남식.
경숙모 그라지 말고 딴 길로 돌아서 가입시더. (무심코) 바쁠 거도 엄꾸마..
남식 안 바쁘긴요. 내일 함 들어가야 된다면서요.
경숙모 (얼버무리듯) 그라긴 하지만... 짐도 무거븐데 위험해 몬 보겠네.
남식 괜찮다니까요. 아까 계곡에서 쉬었더니 훨씬 가벼워졌어요. 괜히 기운이 나나 봐요. 여기 줄도 매놨네. 다들 이거 붙잡고 건너다니나 본데요.
경숙모 조심하이소. (혼잣말로) 돌댕일 지고 이기 뭐하는 짓이고.
남식 짐 내려놓고 데리러 갈테니까 거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요. (하는데 줄 끊어지고) 어어어~ (끊어진 줄 붙잡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경숙모 (놀라) 아이구야 우짜믄 좋노? 아까 확 다 빼삐리는 긴데. 함 벗어던지고 퍼뜩 나오소.
남식 (허우적대며) 그래도... 이거 없으면 안 되....
경숙모 목심이 중하지 그깟 게 대순교! 퍼뜩 내삐리고 나오소. 그카다 죽는다카이!
남식 (꼬르륵 가라앉고)
경숙모 아이구야 사람 살리소~ 누구 엄는교? 사람이 물에 빠짓대이! 사람 살리소~
S# 32. 빈집 헛간 (밤)
모닥불 조그맣게 타고 있고
문 쪽 신경쓰며 구석에 쌓아올린 물건들 뒤에서 덜덜 떨며 젖은 옷을 벗는 남식, 갈아입으라고 준 치마저고리를 펼쳐보고
남식 (난감해 울상으로) 어우 내 신세야... 이걸 어떻게 입으라구... (하다 재채기하고)
S# 33. 헛간 옆 풀숲
경숙모 (땔감 모으며 궁시렁) 이노무 서방이 사단이라카이... 내도 미?재, 그 말을 듣는 기 아인데... 지금이라도 이실직고 하고 집으로 가삐리까?
S# 34. 경숙이네 안방 (회상/ S#17의 방안 상황)
재수 굿하믄 머할 끼고? 삼팔이 그 노마가 다 가져가뿔고 나믄 온 식구가 반년은 족히 굶어야 할 낀데, 그래도 괘안나?
S# 35. 다시 헛간 옆 풀숲
한숨으로 땔감을 들고 가던 경숙모, 바닥에 떨어져있는 밤이 매달린 밤나무 가지 발견하고
경숙모 굽어주믄 좋아하겠구마. (몇 가지 더 줍고, 꺾어서 땔감에 보태들고)
S# 36. 헛간 안
경숙모의 치마에 작은 저고리를 억지로 꿴 남식의 모습이 가관이다.
남식 (울상으로) 아 미치겠네... 꼴이 이게 뭐야...
경숙모 (E) 다 갈아입었는교? 지 들어갑니대이.
남식 (후다닥 구석으로 숨고)
경숙모 (들어오다 얼른 시선 피하며) 안즉도 몬 갈아입었으예? 휙 둘러서 끄냉이만 묵으믄 되는데, 뭐가 이래 오래 걸리는교?
남식 저기요, 이거 말고 딴 옷 없어요?
경숙모 있으믄 모셔놓고 고사지낼 거도 아인데 와 안 주겠는교.
남식 혹시 방에 찾아보면 남자 옷 하나 있지 않을까요?
경숙모 (모닥불에 땔감 더 얹으며) 내가 와 그 생각을 안 했겠는교. 근데 방이고 정지간이고 다 자물통을 채워놨다 아인교.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이끼네 대충 두르고 퍼뜩 와서 불이나 쬐소. 엄동설한은 아이지만 그래도 그 차거븐 물에 빠지가 있는 대로 기운을 뺐으이, 잘몬하믄 고뿔 걸립니대이.
남식 그럼 나갈테니까, 웃지 마세요.
경숙모 웃을 일도 쌨구마. 이 판국에 먼 웃음이 나오겠는교 (하다 남식 보고) 옴마야~ (웃음 터지며) 아니... 시상에... 망칙해라... 우야믄 좋노...
남식 아씨~ 웃지 말라니깐. (털퍼덕 모닥불 옆에 주저앉고)
경숙모 (웃음 참으며) 옷이 마이 작네예. (자꾸 웃음나 보따리로 가며) 주먹밥 남은 기 있을 낀데...
남식 (무안하고 화나 무심코 밤나무가지를 불에 얹고)
S# 37. 빈집 뒷간
볼일 마치고 살그머니 뒷간 문을 열고 밖을 살피는 남식, 간신히 여며진 치마춤 사이로 팬티 바람의 엉덩이를 다 내보이며 잽싸게 헛간으로 뛰어가고
S# 38. 다시 헛간
경숙모, 여전히 혼자 웃으며 주먹밥과 감자 등 요깃거리 챙기고
후다닥 들어오는 남식
경숙모 (얼른 웃음 지우고) 아무도 본 사람 엄지예? 누가 보믄 금달랜 줄 알끼라예.
남식 금달래요?
경숙모 와 전쟁통에 식구 잃고 머리가 돌아 삔 여자들 안 있는교.
남식 아 진짜! 경숙엄마는 조절구하고 좀 다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까 똑같네.
경숙모 (웃으며) 미안심더. 같이 살다보이 배웠다 아인교. 퍼뜩 드이소.
남식 아무튼 알아줘야 되는 일가족이라니깐. (감자 먹으려는데)
돌연 폭죽 터지듯 연거푸 팡팡 터지는 요란한 소리 울리고
놀라 서로 부둥켜안는 경숙모와 남식.
경숙모 (소리 날 때마다 움찔움찔 떨며) 아이구야 또 빨개이 쳐들어 왔는갑다. 우짜꼬? 식구들도 몬 보고 죽게 생?네.
남식 (엉덩이에 튕겨 날아온 터진 밤 맞고) 읔-
경숙모 와예?
남식 (비장하게) 엉덩이에 총알이...
경숙모 (놀라 돌아보면)
치마 사이로 훌러덩 드러난 남식의 엉덩이 주위로 총알대신 터진 밤들이 흩어져 있다.
경숙모 (박장대소 하고)
남식 (돌아보고, 그제야 생각나) 아 맞다 밤나무... (하다 따라 웃음 터지고 )
두 사람 배꼽을 쥐고 웃으며
경숙모 총각이 궁디 총 맞아서 우야꼬? 인자 장가는 다 갔네.
남식 이렇게 웃을 때가 아닌데... 함도 못 건지고...
경숙모 우예 되겠지예. 치마나 좀 여미소.
남식 여자들은 이런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나 몰라. (치마꼬리 찾아 빙빙 돌고)
웃는 두 사람 위로 흥겨운 풍물소리 선행되며
S# 39. 골매기굿
마을 아래 당산나무에서 시작해 마을 위 당산까지, 농악을 치며 나가는 재수와 상필 일동의 풍물패들. (이 장면을 지미짚으로 잡아서 잘 찍을 수 있는 곳이 죽도마을이라고 함. 통영에서 배로 20분.)
은비 만근 윤섭과 함께 덩실덩실 춤추며 그 뒤를 따라 가던 경숙, 다리에 힘이 풀려 점점 뒤쳐진다.
그 시선으로 보이는 멀어지는 풍물패와 구경꾼들의 모습, 아른아른 흐려지고
S# 40. 몽타주
풍물소리 계속되며 교차되는
40-1. 감나무 밑/ 엎드린 남식의 등에 올라서서 감을 따는 경숙모. 가까스로 딴 감이 공교롭게도 남식의 엉덩이에 떨어지고, 엉겁결에 치마 끝으로 엉덩이 닦아주는 경숙모의 손을 쳐내며 민망해 하는 남식. 경숙모도 머쓱해지고..
40-2. 당산나무 밑/ 둥그렇게 둘러선 재수와 상필 일동의 풍물패들. 저마다 장기자랑이라도 하듯 돌아가며 연주 솜씨를 뽐낸다. 재수도 신명나게 선장구치고
40-3. 들길/ 짚단을 실은 소달구지 뒤에 나란히 걸터앉아 가던 남식과 경숙모, 달구지가 덜컹 흔들리는 바람에 뒤로 벌러덩 누워 박장대소하고... 웃음 끝에 손가락으로 하늘에 뜬 새털구름을 가리키는 경숙모를 설레는 기분으로 바라보는 남식...
40-4. 당산나무 밑/ 간드러지게 <경상도 아가씨>를 부르는 화자, 재수의 눈짓에 따라, 헤벌쭉 지켜보고 있는 최사장에게 다가가 팔짱도 끼고, 엉덩이로 톡 치며 은근짜를 부리면, 구경꾼도 최사장도 희희낙락인데, 한쪽에서 은비 만근과 함께 굿청에서 얻어온 음식을 나눠먹던 경숙, 돌연 토하고
40-5. 진창길/ 진창에 고무신이 빠져 한쪽 발을 든 채 어쩔 줄 몰라하는 경숙모를 번쩍 안아드는 남식. 가슴이 철렁해 숨죽인 채 안겨가던 경숙모, 되돌아가 진창에서 신발을 꺼내는 남식을 새삼 다시 보고...
S# 41. 굿판
무당, 신명을 올리며 굿거리 하고
팔짱을 끼고 서서 구경하는 화자 뒤로 살금살금 다가간 경숙, 뱀처럼 슬금슬금 나뭇가지를 치마 속으로 밀어 넣으면
화자 (사발 깨지는 소리로) 오마야 이기 뭐꼬?!
무당 (벼락같이) 어허이~어느 잡귀년이 부정타게 잡소릴 넣노! 어허 신이 올라다 화나서 달아나겠네~ 저년 저거 썩 좀 치우라~ 신이 노하셨네~ 잡귀야 물럿거라~ 잡귀야 물럿거라~
붉으락푸르락 구경꾼들 틈에서 빠져나온 화자, 둘러보면
메롱 하며 달아나던 경숙, 제풀에 고꾸라지고
고소해 까르르 웃는 화자.
경숙, 일어나려 하지만 힘이 없어 다시 엎어지고
S# 42. 장터
점포마다 걸린 물건들을 둘러보며 걸어오던 남식, 한 점포로 들어가려는데
내심 캥기고 미안한 마음으로 뒤따라오던 경숙모, 만류하듯 잡으면
남식 나 돈 있어요. 함도 잃어버렸는데 뭐라도 사가야지, 십 년 만에 가는 친정이라면서요? 빈손으로 가면 얼마나 없이 산다고 생각하겠어요. 얼른 와 봐요. (점포로 들어가고)
경숙모 (찡해 보고)
S# 43. 장터 밥집
의자 한쪽에 물건꾸러미 몇 개 포개 놓여있고
테이블에 마주앉아 밥 먹는 남식과 경숙모.
경숙모 (이래저래 미안해 밥이 안 넘어가는데)
남식 (작은 꾸러미 내밀며) 이따 밥 먹고 이거 한번 입어 봐요. 윗도린 못 사고 치마만 하나 샀어요.
경숙모 돈도 마이 썼는데 치마는 와...?
남식 여벌로 가져온 건 내가 어제 입고 뭉개서 못 입을 거고, 그 불탄 치만 좀 그렇잖아요. 부모님 뵈러 가는데...
경숙모 (고맙고, 미안하고, 연정까지 섞여 복잡하게 보고)
남식 (먹다 이상한 느낌에) 왜, 왜요?
경숙모 아이구 더는 거짓부렁 몬하겠네예. (숟가락 놓고) 이 말을 해야 좋을지 기냥 삼키야 좋을지 내는 안즉도 모리겠지만, 감추고 있자이 내 맴이 펜치가 않네예. 실은 길 떠나 올 때부터 고민이 많았다 아인교. 톡 까놓고 털어놀께예. 실은 (하는데)
남식 (당황해) 아 아니, 이렇게 막, 갑자기 고백하면 어떡해요? 나도 그쪽이 좋긴 하지만, 남편은 어쩌구...?
경숙모 야?
남식 사실은 나도 경숙엄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이상하게 편하고, 푸근한 게 자꾸 마음이 끌리더라구요. 거기도 알겠지만 내가 부모형제 다 이북에 두고, 혼자 오래 객지 생활을 했잖아요. 처음엔 그래서 외로워서 그런가 했는데... 아~ 남편 있는 여자한테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암튼 나도 자꾸 거기한테 마음이 가네요.
경숙모 (반 혼잣말로) 아이구 참 일이 와 이래 요상시러버졌노. 내가 지금 할라는 말은 그기 아이라...
남식 예? 그럼 뭘... 털어놓는다는 거예요?
경숙모 아유 참말로... 이래 순진하이 경숙애비한테 그래 당하지예. 우짜믄 그래 눈치가 뭉친교? 경숙애비한테 한번 속기도 속았다믄서...
남식 (비로소 불길한 느낌에 꿀꺽 침 삼키고) 그럼 친정 가는 것도 다...?
경숙모 (고개 떨구며 우물우물) 미안심더. 입이 열 개라도 할말 엄구마....
남식 (창피하고 열나 말문 막히고)
S# 44. 탈놀이
굿패들 반주하고
제각각 시레이션 포장지로 조잡하게 만든 영감탈 각시탈 머슴탈을 쓴 재수와 화자, 상필.
재수 (영감 역)우리 놀러 나온 김에 노래하고 노세 (작은 어미와 함께 무릎을 덩실덩실 치며) 노세 좋다 젊어서 노세... 늙어지며는 못 노나니... 화무십일홍이요 달도 차면은 기우나니 인생은 일장춘몽에... 아니 노지는 못하리다.
상필 (마당쇠 역/ 술상을 차려 영감 옆에 놓고 주춤주춤 돌아가며 왼발 오른발을 양손으로 감자를 먹이며 영감을 향하여 욕하는 시늉을 하고 돌아서 나간다)
재수 술 한 잔 따라서 권주가 하나 띄워 보세.
화자 (작은어미 역/술을 정중히 따라 술잔을 들고) 잡으시요 잡으시요 이 술 한잔 잡수시면 만수무강 하오리다 잡수시오.
(이상 ‘고성오광대 제밀주과장’ 중 일부)
연기를 펼쳐 보이던 화자, 돌연 구경꾼들 틈에서 비틀비틀 걸어 들어오는 경숙과 부딪쳐 벌러덩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진다.
구경꾼들 (돌발 상황에 와 웃고)
재수 (당황, 얼렁뚱땅 즉흥극으로) 니가 아무리 첩년이라꼬 이 많은 남정네들 앞에서 그래 궁둥이를 벌렁벌렁 까도 되나. 퍼뜩 일나그라. (경숙에게) 그라고 니는 아부지 청춘사업 하는데 방해하지 말고 퍼뜩 드가그라.
경숙 아부지 어질어질 눈앞이 노란 기, 기운이 하나도 엄따. 내 아픈 갑다.
재수 (내심 진심으로) 그래 빨빨거리고 돌아댕기싸이 아프재. 가서 칵 디비져 처자라 마!
경숙 아부지 내 진짜 아푸다.
화자 (엉덩이 털며 즉흥극으로) 하이고 딸년이 여는 또 우째 알고 왔노?
할머니 (경미 업고/ 구경꾼들 틈에서) 저기 지 애미도 가마이 있는데 우데서 아부지 사업을 망칠라 카노? 퍼뜩 이리 나오라 카이!
구경꾼들 (웃고)
재수 (구경하던 윤섭에게 돈 던져주는 시늉으로) 마당쇠야, 옛다. 쟈 좀 끌고 가거라.
윤섭 예이 마님~ (경숙 데리고 나가며) 아씨 내가 가서 맛난 곶감 줄께예.
구경꾼들 (웃고)
재수 (분위기 몰아 즉흥극으로) 기왕 엉덩이 깐 김에 궁합이나 함 맞촤보까.
화자 아무리 지체 높고 금은보화 쌓아놓고 산다케도, 조강지처보다 더한 저래 무서븐 딸년이 있는 남정네는 싫심더. 딴 데서 알아보소 마. 내만 바라볼 남정네는 어딨노?
재수 진즉에 만리장성 쌓은 사이에 와 이래 앙탈이고? 금으로 기둥 세우고 옥으로 기와 얹은, 대궐 같은 집에다 딴살림 채리준다카이~
놀이판의 왁자한 웃음을 뒤로 한 채
윤섭의 부축을 받으며 구경꾼들 밖으로 나온 경숙, 서운해 눈물 글썽이며 재수를 째려보고
경숙 놔라! (뿌리치고 휘청휘청 가는)
윤섭 너 진짜 아프구나? 몸이 뜨끈뜨끈해.
경숙 (쪼그리고 앉으며) 기운이 하나또 엄어서 걷지도 몬하겠다.
윤섭 내가 집에 데려다 줄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달려가고)
S# 45. 마을 길
힘없이 등에 기댄 경숙을 태우고,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윤섭.
윤섭 그렇게 기운이 없어? 꽉 잡어. 떨어져.
경숙 (두 팔로 윤섭의 허리를 안으며) 고맙대이....
윤섭 이제 화 푸는 거야~ (달려가고)
S# 46. 개울가 언덕 길(저녁)
제각각 복잡한 감정에 멀찍이 떨어져서 걸어오는 남식과 경숙모.
남식 (문득 걸음 멈추면)
경숙모 (따라 멈추고)
남식 (돌아보며 불뚝) 이번에 놀음챈지 뭔지로 받는 돈이 얼마나 돼요?
경숙모 학실한 거는 모리지만, 한번 판 벌이믄 반년은 근근이 묵고 삽니더.
남식 (돌아서며) 그거 받으면 난 떠날 거예요.
경숙모 (내심 철렁) 아주 갈라꼬예?
남식 싹 다 챙겨가겠다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나머진, 지가 양심이 있으면 나중에라도 갚겠지.
경숙모 하모요. 차차 돈 생기믄 갚을 끼라예. 뭣에 한번 홀리믄 식구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엄어가 그렇지, 근본이 나쁜 사람은 아이라예.
남식 (답답해) 나 참, 그게 바로 나쁜 거라구요. 어떻게 저 급하다고 남의 돈 내 돈도 구분을 못해요? 뻑하믄 식구들한테 거짓말이나 시키고 말야. 보기 딱해서 하는 말인데요, 누님도 그렇게 살지 말아요.
경숙모 누님예?
남식 (머쓱) 그럼 뭐라고 불러요?
경숙모 아이라예. 듣기 좋구마. 아주 간다이까 하는 말인데, 잠까이지만 동생이 ?에 있어가 든든했어예. 누가 들어올 적마다 내한테 때꺼리 챙기다 주고, 물동이를 대신 들어주겠는교. 덕분에 실컷 웃어도 보고... 내 주제에 포시라?다 아인교.
남식 (보면)
경숙모 동생은 우델 가디라도 잘 살 끼라예. 동생 만나는 여자는 행복한 여잡니더.
남식 (짠해 보고)
경숙모 우리 인연은 여까진 모양입니더. (외면해 지나쳐 걸어가려는데)
남식 (와락 껴안고) 내가 누님 때문에 가는 거예요. 알죠?
경숙모 (안긴 채) 알지예... 펭생 몬 잊을 끼라예...
경숙모/남 (포옹한 채) ......
잠시 후 다시 걸어가는 두 사람 멀리서 보인다.
S# 47. 경숙네 안방
경숙, 땀을 뻘뻘 흘리며 자고
등에 봇짐 메고, 장구까지 둘러멘 재수.
재수 (여기저기 들춰보며) 이기 또 어디 갔노? (발로 툭 경숙 차며) 야 이 가스나야, 내 장구채 어따 뒀노?
경숙 (힘겹게 몸 일으키며) 아부지 또 어디 가나?
재수 됐다 마, 고마 쭉 자그라. (나가려다) 애미 오믄 삼팔이 그 노마 갈 때까지 집에 얼씬도 안 할 테이까네 기다리지 말라 캐라. 그라고 저 안에 돈 쪼매 뒀으이까네 니 좋아하는 삼계탕 해달라가 묵고, 퍼뜩 일나그라. 와 벌써 고뿔이고? (다시 나가다 장구채 발견하고 챙기며) 어 여 있네. 그라마 냉중에 보재이. (나가고)
경숙 (도로 눕고) 냉중은 무신... 내는 엄을 끼라... (다시 잠드는데)
경숙모 (E) 어무이~ 경숙아~ 다녀 왔심더.
S# 48. 동 마당
이미 황급히 뒷간 쪽에 숨은 재수, 안절부절 보는 가운데
경숙모 안즉 아무도 안 들어온 기, 놀이판 끝나고 어데서 더들 노나보구마. 힘들 낀데 쪼매 쉬고 있으소. 퍼뜩 저녁 할께예. (부엌으로 가고)
남식 이건 어차피 산거니까 알아서 해요.
물건 꾸러미 평상에 놓고 헛간으로 가는 남식, 문 열고 들어가면
뒷간 쪽에서 나오는 재수, 살그머니 내빼려는데
방에서 집문서 들고 나오는 경숙
경숙 (신 신으며 힘겹게 소리쳐) 아제요~
재수 (얼른 도로 숨고)
남식 (헛간에서 나오며) 집에 있었네. (휘청휘청 다가오는 모양새에) 왜 그래? 어디 아퍼?
경숙 (집문서 내밀며 힘겹게) 이거 받으이소. 집문서라예. 이라믄 울아부지하고 셈 끝난 기지예.
재수 (숨어서 질겁으로) 저 가스나가 미?나?
남식 (받으며) 아버지가 주래?
경숙 인자 아재 갈 때 내도 델꼬 가주이소. 내는 지?에 모리는 아부지 필요 엄어예. 내는 차라리 아재가 아부지였으믄 좋겠어예.
남식 (할 말 잃고 뻥한데)
재수 (튀어나오며) 저 문디가스나 뭐라고 헛소릴 찌꺼리 쌌노?! (얼른 집문서 낚아채며) 이거는 아이다! 이 가스나가 죽고 싶어 용쓴다카이! (하며 때릴 듯 손 쳐드는데)
경숙 (픽 쓰러지고)
경숙모 (달려와 안으며) 경숙아, 와 이라노? 경숙아~
S# 49. 안방
경숙모, 경숙의 이마에 찬수건 올려주고
남식 (E) 집문서 내놔요.
재수 (E) 택도 없대이. 전쟁통에 집 다 뽀사져가 집값이 다락같이 올랐는데, 니 그 돈으로 이런 집 살 수 있는 중 아나? 뻥도 참말로...
경숙모 (한심해 돌아보고)
S# 50. 마당
평상에 마주앉아 티격태격하는 남식과 재수
재수 그라고 이거 니 주믄, 할무이부터 얼라까지 이 식구들 다 어데 가 살라말이고? 쪼매 있으마 겨울도 닥치는데 길바닥에 나앉으라 말이가?
남식 언제부터 식구들 생각을 그렇게 끔찍하게 했다구...
재수 (달래듯) 그라지 말고 니 어차피 최사장이 제분공장에 취직하라 캤다믄서? 이참에 여 눌러앉아서 그냥 살그라. 방세고 뭐고 낼 필요 엄따.
돌연 방에서 나오는 경숙모, 성큼성큼 마당을 가로질러 장독대에 기대 세워둔 빗자루를 집어 드는 모습 보이며
남식 방세로 까겠다구요? 말이 되는 소릴 좀 해요. 그리고 난 여기 떠날려고 이미 작정한 사람이니까 지금 당장 해결해요.
재수 (능청) 그 큰돈이 당장 어딨다꼬?
남식 오늘 굿판해서 번 돈 있잖아요!
재수 그기 을매나 된다꼬? (외면해 물마시고)
남식 놀음채 받으면 반년은 먹고 산다면서요? 나머지는 차차 받을테니까 일단 그거라도 내놔요.
재수 (펄쩍) 어느 시러배 놈이 그 따구 소리를 하드노?
경숙모 (느닷없이 싸리비로 재수의 등짝을 후려치고)
재수 (피하고 막으며) 니 와 이카노? 이기 미?나? 딸년 하나로 모자라서 애미까지 미쳤구마. 저리 몬 치우나?
경숙 (점점 더 화나 닥치는 대로 때리고)
남식 (엉거주춤 말리며) 왜 이래요? 진정해요.
재수 (허둥지둥 신 들고 짐 챙겨들고 문간으로 도망가며) 허이구야 보다보다 서방 패는 년이 다 있네. 니 쟈를 우예 구워 삶았길래 저기 저카노?
경숙모 놀음채 퍼뜩 내놓고 가소! 챙피스럽지도 않은교?
재수 그라이 누가 박자 딱딱 몬 맞추고 일찍 오라 캤나?! (양손에 들고 있던 신발 마주치며) 팍- 손발이 맞아야 멀 해무도 해묵지.
경숙모 (다시 달려들어 빗자루 휘두르는데)
화자 퍼뜩 가입시더. 한시가 급하구만. (하며 들어오다 빗자루에 맞고) 아이구야 또 사람 잡네~
경숙모 이 여시는 또 뭐꼬? (재수에게 다시 빗자루 휘두르며) 작작 좀 하소!
화자 (꽥 성깔로) 보소! 낼 언제 봤따꼬 (하는데)
재수 야야 그 대거리하다 니캉내캉 맞아죽는다, 퍼뜩 가자. (화자 데리고 줄행랑치고)
경숙모 (속상해 빗자루 던지고, 평상에 놓인 물 대접 들어 벌컥벌컥 마시고)
남식 너무 속상해 하지 말아요. 경숙인 어때요?
S# 51. 마을길 (밤)
실신한 경숙을 업고 죽어라고 달려가는 남식.
경숙모도 혼비백산 쫓아가고
S# 52. 근처 미군부대 앞
경숙을 업고 달려온 남식과 경숙모, 미군들에게 경숙을 내보이며 사정하자
철조망 문을 열어주는 미군들, 서둘러 병동으로 안내해 가고
S# 53. 천막 병동 근처
한쪽에 쪼그리고 앉은 경숙모, 눈물 훔치고
담요 얻어들고 오는 남식.
남식 (담요 둘러주며) 걱정말아요. 이제 괜찮을 거예요.
경숙모 (자책으로) 고뿔인 중 알았지, 파상풍인지 먼지 겪어봤어야 알지예...
남식 우리야 집에 없었으니까 그렇다치고, 그 인간은 뭐냐구요? 애가 저지경이 되자면 하루종일 얼마나 아팠을텐데 말야.
경숙모 본시 그래 생기묵은 사람인데 멀 바라겠는교... 그나저나 자꾸 신세만 지네예... 미안심더. 돈도 몬 받고...
남식 (한숨 푹)
경숙모 ... 내일... 기냥 갈 끼라예?
남식 돈은 둘째 치고, 이런 누님을 두고 내가 발길이 떨어지겠어요?
경숙모 (착잡) ...
남식 내 돈 다 받을 때까진 여기서 죽치고 안 갈거니까, 누님도 나더러 가라고 하지 말아요.
경숙모 (놀라 보면)
남식 (외면한 채)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산다구... 누님도 이제부턴, 그 인간 죽은 사람으로 치고 살아요.
경숙모 내도 더는 미련 엄십니더... (눈물 훔치고)
남식 (측은해 보는)
떨어진 담요를 집어 다시 둘러주는 남식, 그대로 팔 둘러 안으면
경숙모, 남식의 어깨에 머리 기대고...
S# 54. 제분공장 (삼 개월 후 쯤, 낮)
요란한 제분 기계 소리 들리며
남식, 일하고
다가온 운짱, 뭐라 말하면
공원에게 뭔가 일 지시하고, 운짱을 따라 나가는 남식
S# 55. 동 공장 앞
최사장, 불탄 창고자리 지켜보며 골똘하고
남식 (다가오며) 부르셨어요?
최사장 여만 보믄 내가 속이 쓰리다.
남식 창고가 있어야 재료를 제대로 정리할 텐데...
최사장 여 돈 들여가 새로 짓느니 이참에 부산으로 싹 다 옮기뿔란다. 마누라도 성화고... 니 내 따라 갈 마음 있나?
남식 부산요?
최사장 내가 아무한테나 이런 소리 하는 거 아이다. 몇 개월 니 일하는 거 지키보이까네 그만하믄 성실하고 믿음이 간대이. 니만 좋다카믄 부산 가서 공장장으로 앉힐까 싶은데. 우떠노?
S# 56. 언덕 길 (저녁)
신나서 달려오는 남식, 멀리 언덕 위에 선 경숙모 발견하고
남식 누님~ (반갑게 소리치며 달려가는데)
모르고 언덕 밑으로 휙 몸을 굴리는 경숙모.
남식 누님! (놀라 달려가 보면)
경숙모 (언덕 밑에서 꾸물꾸물 일어나다 팔뚝 잡고 찡그리며) 아-
남식 (후다닥 뛰어 내려가 안고) 미쳤어요? 누구 총각귀신 만들라 그래요?
경숙모 지금 우스개 소리 할 때가 아이다. 미친년처럼 뛰도 소용도 엄고, 구불러도 소용엄고... 우야믄 좋노?
남식 무슨 소리예요?
경숙모 (남식을 손을 가져다 배에 대주면)
남식 (알아채고 헉 놀라고) 애-?!
경숙모 (한숨결로) 맞대이...
남식 (밑도 끝도 없이 돌연 내달리고)
경숙모 (뻥) 어데 가노?
남식 내래 고기 끊어 오갔시요~ 기다리시라요~
걱정스레 한숨짓는 경숙모를 뒤로 한 채 손 흔들며 달려가는 남식에서...
<3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