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만니의 개인간증’을 읽고
최근에 우리 교단(기하성)의 이단대책위원회와 임원들은 워치만니와 위트니스리의 가르침에 대하여 일체 수용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소속교회에 권고의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이것은 지난 5월 16일에 열린 제71차 정기총회 의사자료집으로 보고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주요 교단들이 그 두 사람의 가르침을 이단적으로 규정했다고 알려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교단의 이단대책위원장으로서 이 문제를 맡아 논의한 강인선 목사는 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그 최종적인 평가를 내렸다:
‘본 교단 이단대책위원회에서 한국교회총연합에 공문을 보내 질의하고 내용을 받은 결과, 한국교회의 주요 교단들은 워치만니와 위트니스리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다는 답을 받았는데, 본 교단도 이에 대해 충분히 논쟁의 여지를 공감하고 있으나, 교단차원에서 워치만니와 위트니스리에 대해 명확히 이단으로 단정지을 만한 내용에 대해 연구하지 못한 상황이므로 이들을 지속적으로 예의주시하며 연구하고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 (기하성 제71차 정기총회 보고서와 의사자료, 60쪽).
워치만니와 위트니스리의 가르침에 대하여 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교단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좀더 연구하여 분명하고 공정하게 평가를 내려 그 공과를 바르게 밝혀 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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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나는 청년 시절에 워치만니의 책, ‘영에 속한 사람’을 즐겨 읽었다. 그런 책은 신앙에 대하여 입문하고 열심을 내려는 사람에게 더 큰 감동과 자극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후 삼십년이 지난 지금 워치만니의 개인간증을 읽어보니 젊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아마 삶의 경험이 더 넓은 안목을 가지게 해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선, 워치만니의 개인간증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했다:
1. 그의 간증은 워치만니가 신앙에 입문하기 시작할 때의 상황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을 갖는 것은 곧 영적인 지도자의 길, 곧 전도자의 길을 간다는 의미였다. 요샛말로 하자면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워치만니가 전에 그토록 비천하게 여기던 일이었다. 사도 바울이나 어거스틴의 회심에 견줄 만하다.
2. 회심 이후에 워치만니는 영적인 경험을 추구하였고 그것은 때때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가장 실제적이고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예를 들면, 시편 73편 25절 말씀에 큰 도전을 받았는데, 그 말씀은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워치만니는 자신의 마음에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주인이 되셨다는 확신이 들기까지 기도하면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그의 마음을 점유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신앙의 내적 씨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과 감동을 주었다.
3. 그가 전도자로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쓴 일과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결단을 한 일,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신의 질병을 고침 받은 일과 믿음으로 행동할 때 하나님이 금전적으로도 도움을 예비하시는 분임을 체험한 일, 그리고 그렇게 살 것을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경제적 독립을 선포한 일은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이지 말 그대로 신앙의 모델이 될만한 일들이라 하겠다. 1980년대에 선배 신앙인들의 서재에서 워치만니의 책이 쉽게 발견되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대학생 시절에 시골에 계신 아버지께 편지하여, 다음 학기 등록금을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실 것이니 그런 일이 일어나거든 꼭 예수님을 믿으시라고 편지를 보낸 일이 있는데, 바로 그때 나는 워치만니의 책, 영에 속한 사람을 읽고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4.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강박감은 때때로 성경을 오해하게 한다. 예를 들면, 약식세례보다는 침례를 행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주장과 성찬의 떡을 떼는 일을 목회자들의 주관으로 일년에 네차례 갖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도리어 목회자 없이도 매주 누구나 성찬의 떡을 떼는 것이 초대교회의 본을 따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갈등을 사도 바울이 지적한 글을 읽으면서 교파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는 것으로서 각 지방에는 하나의 교회가 세워져 연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후일에 지방교회의 탄생은 워치만니의 바로 이 주장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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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워치만니에 대한 나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① 신앙적으로 워치만니는 구도자의 길을 걷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경험한 죄사함의 은혜와 자신의 세속적인 욕심을 포기하고 주님을 오로지 따른 결단과 그에 따른 영적인 체험과 그 체험을 나눔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한 일, 그리고 병고침의 체험은 모든 신자들에게 모델이 되고 도전이 될만하다. 이런 모습은 특별히 오순절 신앙을 추구하는 우리 교단의 신앙인들에게 따라야 할 영적인 롤모델로 여겨질 수 있다.
② 하지만 그가 신학적으로 덜 성숙했을 때 성경을 해석하고 내린 결정들을 교정할 기회를 갖지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침례가 더 성경적이라는 주장과 성찬의 떡을 떼는 횟수와 성찬예식 인도자의 자격에 대한 주장은 성경을 순수하게 따르려는 그의 열정의 반영이라고 평가해 줄 수 있지만, 지금 각 교단이나 교파가 고린도 교회의 분란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위배한 제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순수한 영역을 넘어 급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급진적(radical)이라는 말은 라틴어 뿌리(radix)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무의 뿌리가 그 나무의 전체를 보여줄 수는 없다. 나무를 판단하려면 뿌리는 물론 줄기와 가지, 그리고 잎사귀와 열매를 두루 보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③ 보수적인 사람들은 안정과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므로 워치만니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해서 위험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다면 약식세례를 베푸는 교단이나 신자들은 정죄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교회에서 시행하는 예식인 성찬식이 어지럽게 될 수도 있다. 특히, 교단을 부정하고 오로지 한 지방에는 한 교회만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람의 양심과 선택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워치만니가 경험한 병고침이나 영적인 체험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분별력을 갖춘 바른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경우에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 부작용을 신앙의 체험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그런 행동은 지혜가 부족한 일이며 매우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워치만니의 가르침을 수용할 경우에는 충분한 분별력을 가진 지도자들의 가이드를 필요로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④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변화와 혁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현재 우리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더 나은 모습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워치만니의 가르침과 행적은 성경말씀을 존중하는 신앙인의 자세와 마음가짐에 도전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 한분만을 섬긴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특히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하여 모범적인 사례로 삼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이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실제적인 체험이라는 점을 잘 일깨워주는 모델 중의 하나로 제시할 때 신앙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준 급진적인 가르침을 오해한 후대들의 행적을 볼 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⑤ 한 사람의 글과 행적을 그의 생전에 이렇게 낱낱이 분석하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몹시 무례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누군가 이렇게 분석하고 평가한다면 우리에게도 공과가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 부족한 점이 있는 가운데 주님을 따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서로에게 배울 수도 있다. 그리고 과거의 인물들로부터도 배울 수도 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누구든지 진리에 대해서 배우려 하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이 유익이 될 수 있을 것이지만, 누구든지 안정만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배울 수 있는 사람이 한두 사람으로 줄어들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 외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구도의 길을 걷는다는 말이다. 구도는 진리를 찾는다는 말이며, 이는 우리가 찾아야 할 진리가 있다는 말이다. 두려워하고 지키려고만 하지 말고 가슴을 열고 대화를 시도해 보자. 과거의 사람도 좋고 현재의 사람도 좋다. 그때 우리는 구도자로서 더 발전하고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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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워치만니의 개인간증
(나는 이 간증자료를 인터넷에서 입수했다.)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624
워치만 니가 서방세계에 미친 영향
- 행크 해네그래프(Hank Hanegraaff)의 강연과 녹취록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93
나는 2021년에 ‘하나님의 경륜’을 출판하면서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정리한 적이 있다. 그 글은 아래서 읽을 수 있다:
https://cafe.daum.net/Wellspring/V1q1/26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