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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1-6)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장마가 물러가고, 폭염과 무더위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교회에 있다 보면, 바로 앞에서 큰 스피커로, 여름철 폭염과 무더위, 그리고, 물놀이 안전사고 조심하라고 안내방송을 합니다. 어제는 전북 장수에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긴급재난문자로 왔는데, 우리 대한민국도, 지형적으로,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지되었든간에,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해외로, 휴가를 떠나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여기도 가 보고 싶고, 저기도 가 보고 싶은데, 설악산에 가면, 케이블카가 있습니다.
지금껏 케이블카를 타고 두 번 올라가 보았습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 후 도착하는 곳이 권금성이라고 합니다. 고려조 고종 40년(1,253년)에 있었던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워졌는데, 이때 권씨, 김씨 두 장수가 하룻밤에 성을 쌓았다고 하여 권금성이라 불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현재 성벽은 거의 허물어졌으며, 터만 남아 있다고 하는데, 그 터마저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권금성 탑승장 도착 후, 우측 계단을 따라 10분 정도 올라가면, 권금성의 봉우리인 봉화대가 나옵니다. 봉화대 정상에서는 외설악의 경치 뿐만 아니라, 내설악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갖가지 기암괴석들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케이블카를 두 번 타고 올라갔는데, 첫 번째는 권금성까지만 갔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면서, 눈으로 보이는 경치를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두 번째 올라 갔을 때에는 사람들이 계속 올라가는 것을 보고, 올라갈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30분 정도 올라갔다가, 내려올 생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10분도 못가서, 권금성의 봉우리인 봉화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올라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서,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 올라갔을 때에는 안개가 자욱해서, 경치를 볼 수 없다는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올라갔는데, 봉화대에서, 안개 때문에, 아름다운 경치를 맘껏 볼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안개 사이로 잠깐잠깐 보이는 기암괴석들을 조금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을 때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올라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그 케이블카 내리는 곳이 권금성이고, 그 봉우리가 봉화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리 알았더라면, 첫 번째 올라갔을 때도 봉화대까지 올라갔을텐데, 그렇지를 못했고, 두 번째 올라갔을 때도, 힘드니까, 30분 정도만 올라갔다가 내려올 생각을 했습니다.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는데,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생하지 않습니다. 알아야, 더 많은 것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산들은 참 아름답습니다. 제주도 한라산의 백록담, 북한 백두산의 천지, 지리산의 노고단, 태백산, 강화도의 마니산, 서울의 북한산, 속리산의 문장대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마음이 넓어집니다.
잘 아다시피, 설악산에는 흔들바위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처음 설악산을 올라갔는데, 그때 흔들바위와 울산바위를 볼 수 있는 코스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30년이 훨씬 지난 작년에, 다시 흔들바위를 보려고 올라갔습니다. 30년이 지나는 동안, 흔들바위에 대한 기억은 높은 낭떠러지 위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다시 가서 보니, 울산바위 올라가는 길목에, 그리 크지 않는 바위 위에 놓여져 있었고, 낭떠러지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릴 적 보았던 흔들바위와 어른이 된 후 본 흔들바위은 전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어릴 적은 엄청 높은 곳에, 낭떠러지도 심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어른이 되고 다시 보니, 이것이 뭐지, 왜 이렇게 안 높아, 왜 이렇게 낭떠러지가 없어, 그 정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릴 적은 크게 보였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그 흔들바위는 그 자리, 그대로 있었는데, 아주 작게 보였습니다. 3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이리 깎이고 저리 깎여서, 흔들바위가 작아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높은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져 낮은 곳에 있게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30년 전에는 크게 보였는데, 30년이 지난 후에는 아주 작게 보여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대로 있으면, 크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라면, 큰 것도 작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든 것을 제대로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라가야 합니다.
제대로 알아야, 멋진 기암괴석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안개가 사라져야 경치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크게 성장해야, 큰 바위도 작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기쁨을 제대로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성장하게 될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큰 문제들도 작게 여기고, 쉽게 그 문제들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다가오셨습니까? 어떤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오늘은 호세아서를 통하여,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호 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긴 하지만, 순종하기에는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할 수 없는 사람 고멜을 만나, 결혼을 하고, 두 딸과 아들 하나를 얻어, 평범한 가정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멜이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 예전처럼 살고 싶다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가정이 파탄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호 3: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쉽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아야 할 말씀입니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멜을 다시 데려왔습니다. 다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사랑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였고, 그를 떠나버린 사람을 버리지 않고, 찾아가, 다시 데려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호세아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버리고, 집 나간 고멜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찾아 하나님을 떠나버린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호 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나버린 이스라엘을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집 나간 고멜을 향한 호세아 선지자의 마음이 얼마나 아파겠습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 떠나버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아프고 또 아프셨을 것입니다. 산산조각 찢어졌을 것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문다”고 여기고 있지만, 돌이켜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보다는 세상의 사랑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엉뚱한 곳에서, 안식과 평안과 기쁨을 찾으려고 발버둥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호 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 1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꾸만 다른 길로 갔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하여, 우상숭배에 빠져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선지자를 보내, 돌아오라고 부르고 또 불렀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집 나간 고멜을 다시 데려오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악과 세상에 빠져 살아가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죽기까지 하시면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어찌 그 놀라운 사랑을 알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진실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6절을 보면, 하나님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변의 여러 가지 것들을 아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것들을 많이 안다고 해도, 하나님을 알지 않고서는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으려고, 요단 강가로 나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감옥에 갇혔을 때,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는 그 사람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믿음이 약해졌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맞는가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간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이 더욱더 굳건해져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더 많이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어떤 형편에 처하게 된다고 해도,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져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평범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로 주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를 떠나려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평범한 말씀이 아니라, 영생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훗날,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는 힘써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 빌라도는 붙잡혀온 예수님에게 직접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는 앞에 계신 진리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진리를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빌라도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아겠습니까? 오늘도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는 매주일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고 고백합니다. 빌라도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았다면, 우리 입에서 그런 고백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기는 했지만, 그 답에 대하여, 들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바울은 아라비아 광야로 들어가, 3년간 홀로 있었습니다.
그 광야 3년 동안, 무엇을 했겠습니까? 바울은 그 당시 가장 유명한 학자인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고, 율법학자였습니다. 배울 것이 더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광야로 나가, 3년 동안, 홀로 있었습니다. 그는 그 3년 동안, 하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다시 알아갔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딤전 4:15-16)고 말했습니다.
전심전력하여, 우리의 믿음의 성숙함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힘써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오늘 아침, 책을 보고 있는데, 아내가 한 마디 했습니다. “도서관에서 상 안 줘요”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입니다. 기도하면서, 묵상하면서, 주일날 전할 하나님의 말씀을 직통 계시로 받을 수 있지만, 저의 경우는 엄청나게 많은 책을 보면서, 그 중에서, 한 마디, 한 문장을 찾아냅니다. 책을 많이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에, 청주에 위치하고 있는 내수, 오창, 옥산, 오송도서관을 비롯하여, 모든 도서관들의 책들을 빌려다 보고 있습니다. 알라딘을 통하여, 새로 사서 보기도 하고, 없는 책들, 새로 나온 책들은 도서관에 사 달라고 요청하고, 가서, 빌려다 보기도 하기 때문에, 청주에 위치한 모든 도서관들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도서관에서 상 안 줘요”라고 한 것인데, 반대로, 도서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책들을 구입해 달라고 신청하면, 이제는 “너무 전문적인 책이다. 너무 개인적인 책이다”라고 하면서, 잘 안 해 줍니다.
이제는 조치원으로, 세종 도서관으로 그 범위를 넓혀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그 많은 책들을 읽고 또 읽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의 진실함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책을 읽고, 그 내용들을 다 안다고 해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 헛된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함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확실하다면, 그 믿음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힘써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 앞에 나와, 귀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성장해야 합니다. 멈추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갈 때,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기쁨과 평안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날마다, 힘써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감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알아감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이 험하고 힘든 세상, 우리에게 나아갈 길을 가르쳐 주셔서, 끝까지 그 생명의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